명승 제33호인 남원 광한루원. 이곳에는 광한루가 있고, 오작교와 삼신산인 봉래, 방장, 그리고 영주섬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을 합하여, 바로 신선의 세계관과 천상의 우주관을 표현한 우리나라 제일의 누원으로 손꼽히는 곳이 되었다. 이 광한루 건너편에는 또 하나의 누정이 있다. 바로 완월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정자이다. 완월정은 연못 안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작은 월천교를 놓아 누정에 오를 수 있도록 하였다.

완월정은 광한루가 천상의 정자를 본딴 것에 비해,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달을 보기 위해 만든 정자이다. 하기에 말 그대로라면, 완월정은 달맞이를 하는 정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가 된다. 이 완월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오방집으로 꾸민, 조선식의 대표적 누각으로 명성을 얻은 정자 중 하나이다.   


아름다운 정자 완월정

광한루가 천상의 정자로 남성적인 웅장함이 있다고 하면, 완월정은 지상의 정자로 여성적인 섬세함이 있다. 하기에 마주하고 있는 광한루와 완월정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무엇인가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완월정이 있어 광한루가 더욱 그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마치 내조를 잘하는 여인과 같은 자태로 광한루를 바라보고 있는 완월정이다.

완월정은 양편으로 난 계단을 통해 정자로 오를 수 있다. 완월정의 특징은 바로 정자 중앙부분을 뒤로 물려놓은 부분이다. 마루바닥을 한단 높여, 마치 정자 안에 또 다른 정자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정자는 연못 안에 자리를 하고 있어서, 주변을 바라보면 더욱 아름다운 정경을 바라볼 수가 있다.



  
완월정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가족끼리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정한 연인끼리 이곳이 찾아 오기도 한다. 흡사 그 오래전 춘향이와 이도령이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완월정에서는 춘향제가 열리기도 하는데, 완월정을 찾은 날은 '신관사또행차' 시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구경을 하러 온 처녀 한 명이 춘향이를 대신해 붙잡혀, 의자에 묶여 장을 맞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연신 춘향이를 닥달하는 변사또편을 들어준다. 이 또한 남원 광한루원에서 볼 수 있는 재미있는 모습이다. 완월정 난간에 몸을 기댄체 주변을 둘러본다. 연못에는 커다란 물고기들이 형형색색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영을 하고 있고, 사또부임행차 시연은 점점 고조가 되고 있다.

(아니리)
"여봐라!"
"예이~"
"네가 그렇게 기생점고를 허다가는 장장춘일이라도 못다 불러들일테니 자주자주 불러들여라!"
"예이" 그제는 호장이 넉자화두로 불러 들이것다.

(중중모리)
"조운모우 양대선, 우선옥이 춘홍이, 사군불견 반월이, 독좌유황의 금선이, 어주돈수 홍도가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팔월부용 군자용, 만당추수의 홍연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사창의 비치여, 섬섬연약 초월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오동복판의 거문고 시르렁 둥당 탄금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만경대 구름 속 높이 놀던 학선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만화방창의 봄바람 부귀할 손 모란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바람아 둥땡 부지마라 낙락장송의 취향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단산오동의 그늘 속에 문왕어르든 채봉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장삼 소매를 떨쳐입고 지정거리든 무선이 왔느냐?"
"예 등대허였소"
"이산명옥이 차산명옥이 양명옥이 다 나왔느냐?"
"예 등대나오." (만정 김소희 선생의 창)




참으로 많은 기생들이 점고를 받는다. 물론 그 점고를 받은 곳은 바로 광한루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완월정에서도 아마 밤 시간에 또 다른 기생점고가 있지는 않았을까? 달맞이를 하는데도 오히려 운치가 있는 이 완월정에서도, 달빛에 치마폭을 거머주고 버선코를 살며시 들어 잰 걸음으로 점고를 받은 기생들이 들어왔을 것이다. 마루바닥에 스치는 그 치마자락의 소리는 또 어떠했을까?

정자는 전국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남원 광한루원 안에 있는 완월정은 그 의미로 인해 남다른 멋을 지니고 있다. 하기에 정자는 늘 그 자리에 있어야 빛이나고, 그렇게 아름다움을 자랑할만한 곳에 정자를 짓는다. 언제가 되려는지, 보름날 휘영청 달밝은 밤에 완월정에 올라 달맞이를 해보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사적 제349호인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고려 전기의 문종 때 지어진 절인 만복사. 『동국여지승람』 권지39, 남원도호부「불우조(佛宇條)」에는, 만복사는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5층과 2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35척(약 10m)의 불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창건 당시 만복사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 명의 승려들이 머무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버렸다. 이 만복사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오층석탑과 석불입상 등 보물이 경내에 있다. 잘 정돈된 사지 중앙 쪽에는 보물 제31호 만복사 석좌가 자리한다. 돌로 만든 이 좌대는 불상을 올려놓는 받침인이다.


만복사 사지 내에 있는 보물 제31호 석좌와 만복사지 전경

하나의 돌로 조각한 거대한 작품
 
이 석좌는 하나의 돌로 상·중·하대를 조각하였는데 육각형으로 조각한 것이 특이하다. 하대는 각 측면에 고려시대의 석조물에서 흔히 나타나는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꽃을 장식했다. 윗면에는 연꽃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중대는 낮고 짧은 기둥을 본떠 새겼다. 상대는 중대보다 더욱 넓어졌으며, 좌대의 윗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구망은 불상을 웠던 것으로 보이는 네모진 구멍이 뚫려 있다.

옆면에 연꽃이 새겨졌던 부분은, 주변 전체가 파손이 되어 아름다운 석좌의 미를 반감시키고 있다. 이 석좌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형에서 벗어난 6각형으로 조성을 한 것이 특징이다. 안상의 안에는 꽃을 장식했으며, 이러한 조각의 형태로 보아 이 석좌는 11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투박한 돌에서 느끼는 따스한 온기

이 돌로만든 좌대 위에는 어떤 부처님을 올렸을까? 만복사지에는 두 곳의 전각에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5층과 2층으로 된 전각 안에 부처님을 모셨다면, 그 좌대도 어마어마한 크기였을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현재 보물 제31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좌는, 2층의 전각 안에 모셨던 부처님의 좌대가 아니었을까 추정을 해본다.

더욱 5층으로 지어진 전각 안에 봉안된 불상은 그 높이가 10m 정도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석좌보다도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석좌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아름다움이 눈이 부시다. 고려시대의 석조물들이 조금은 투박하고 간결하게 처리를 하는 것에 비해, 이 석좌는 다양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아마 통일신라의 유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부처를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킨 상면에 낸 구멍

상부는 많이 파손이 되었는데, 그 남은 일부를 살펴보면 꽃을 조각한 듯하다. 그 조각수법이 뛰어나 중앙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일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많이 손상이 되었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조각술이 보인다. 석좌 곁에는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그 상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이 또한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닐런지. 남원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 그 중에서 이 석좌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찬 돌이지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다.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절을 지었다는 만복사지. 이 만복사지 안으로 들어가면 동편에 높다랗게 서 있는 5층 석탑이 보인다. 그 옆으로는 석불을 모신 전각이 있어, 5층 석탑을 찾기가 수월하다. 보물 제3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만복사지 5층 석탑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일반 석탑과는 다른 형태로 꾸며져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기저기 널린 석탑의 부재들을 한 곳에 쌓아 놓은 듯하기도 하다.

원래 만복사에는 절터 중앙에 목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 7차에 걸친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지와 다수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5층 석탑은 현재 4층까지만 남아있고, 5층 이상은 모두 없어진 상태이다.


몸돌을 괴기 위한 네모난 돌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는 하층 기단부는 2단으로 얇게 조성을 했으며, 그 위에 우주를 새긴 커다란 돌을 올린 상층 기단부가 자리하고 있다. 몸돌은 1층이 대단히 높고, 2층 이상은 약 3분의 1로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인 우주를 조각하였고, 지붕돌은 밑면 전체가 위로 들려 있다. 이러한 형태는 마치 목조건축의 지붕을 보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보아도 일반적인 석탑과는 무엇인가 다르다. 석탑을 몇 번을 돌면서 무엇이 이 석탑의 특이한 점인가를 찾아본다. 바로 저것 때문이다. 각 지붕돌 위에 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네모난 돌이 하나씩 끼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네모난 돌로 인해 석탑의 모형이 일반적인 5층 석탑과는 판이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런 형태는 당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하지만,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몸돌 삼층에 특이한 형태의 감실이 있다. 만복사지 5층 석탑은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1968년 이 탑을 보수하다가, 탑신의 1층 몸돌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5층 석탑의 또 다른 특징은 3층 몸돌의 사방에 작은 소물을 모셔놓았던 감실이 있다는 점이다. 감실의 경우 이렇게 탑의 상부에 두는 경우가 잦지 않아, 이러한 감실 하나에서도 만복사지 5층 석탑의 특이함을 엿볼 수가 있다.




이 감실은 그다지 크지가 않다. 3층의 몸돌 자체가 그리 큰 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3층 몸돌의 사방에 겨우 소불 하나가 들어갈 만한 감실을 내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 이곳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사리함을 지키기 위한 소불을 모시느라 조성한 감실로 보인다.

많은 문화재들. 그 나름의 특징과 멋을 자랑하는 문화재야 말로, 우리가 이 시대에 온전히 보존해야 할 문화자산이다. 만덕사지를 찾아 또 하나의 특이한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과, 조금은 그 특징에 대해 알았다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그래서 땀을 흘리며 걷는 답사 길은, 늘 기대에 차 있는가 보다.

11만 명이나 되는 왜군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남원성을 지키고 있던 군관민은 서로가 하나가 되어 전투에 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은 호남을 범하지 못하면 승전하지 못했다는 판단으로, 전주성과 남원성을 공격한 것이다. 우군은 전주성을 공략하고, 좌군 5만 6천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전라병마사 이복남 장군이 이끄는 병사 1천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군사로 남원성을 지키게 히였다. 1597년 8월 12일, 왜군은 남원에 도착하여 남원성을 에워쌓았다. 그리고 13일부터 16일까지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시 남원성에는 성 안에 6천여 명의 백성들이 살았다. 군관민 등 이들 1만여 명은 중과부족으로 혈전을 벌이다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남원성을 지키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은 만여 명의 군관민을 모신 만인의총과(위) 선조 30년인 1597년 8월 12일 1천여명의 아군 병사들이 남원성을 지키기 위해 위용을 떨치면서 행차를 하고 있다.(가운데) 그리고 1597년 8월 16일 처절한 혈투를 벌이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아래)

만인의총, 그 역사의 현장

남원시 향교동에 자리한 만인의총. 사적 제108호로 지정이 되었으나 이전으로 인해 해제가 되었다가, 1981년 사적 제272호로 재지정이 되었다. 정유재란 이후에도 수많은 폐해를 당한 만인의총이다. 정유재란이 끝난 뒤 피난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597년 9월에 용성관 동편에 유택을 조성하였다. 그 후 광해 4년인 1612년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전라병마사 이복남 등 7충신을 모셨다.

효종 4년인 1653년에는 ‘충렬의사 액’이 하사되었고, 숙종 원년인 1675년에는 남원역 뒤 동충동으로 이건하였다. 그 뒤 고종 8년인 1897년 사우를 철폐하고 단을 설치하여 춘추로 배향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단소를 파괴하고 칠백의총 재산을 압수하는가 하면, 제사를 금지시키고 관련자들을 투옥을 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만인의총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와 충의문, 그리도 성인문과 위폐를 모신 전각(위로부터)

만인의총, 역사의 현장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분들이 영면을 하고 있는 곳이다. 초가을이라고는 해도 한낮의 따가운 햇볕은 땀을 솟게 만든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힘들고 지쳤지만, 그래도 마음을 가다듬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위 대문인 충의문을 지나 성인문으로 들어섰다. 전각이 보인다. 충렬사다. 만인의 위폐를 모신 전각 앞에서 묵념을 올린 후 뒤편으로 돌아 계단을 오른다. 만인의총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다.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다.

묘역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그 한편에 만인의총이란 비가 서 있다. 앞으로 다가간다. 갑자기 목에 메인다. 아주 오래전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하나의 봉문만 덩그러니 남겨놓았다. 당시 얼마나 처절한 전투를 벌인 것일까? 변변한 무기도 없는 성내의 백성들은 곡괭이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항전을 했을 것이다.

고작 4천명의 군은 총으로 무장한 왜병을 맞아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을 것이다. 그렇게 4일 밤낮을 성을 지키기 위해 혈투를 벌였다. 만인의총 앞에 무릎을 꿇는다. 참 편하게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선조님들의 이런 죽음으로 지켜낸 이 땅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누구랴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겠는가?




경내에 세워진 순의탑과 만인의총 옆에 세워진 비, 그리고 팔충신 사적비와 기념관 내부(위로부터)

이렇게 9월의 한낮에 고요하기만한 봉분 한기. 저 안에 만 명이나 되는 나라를 위해 장렬히 죽음을 택한 우리 선조님들이 계시다. 지금 우리는 저분들에게 어떤 후손들일까? 과연 저들에게 부끄럽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상념에 잠긴다. 오늘 이 자리에 고개를 숙인 또 하나의 모자라는 후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땅, 단 한 뙤기라도 빼앗기지 말라고.

선원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절이다.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창건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형이 주산인 백공산이 객산인 교룡산에 비해 지세한 허약한 것을 알고, 백공산의 지세를 높이고자 만복사와 대복사, 그리고 선원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70~80명의 승려들이 상주하던 절로, 만복사에 버금가는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만복사와 함께 소실이 되어버렸다. 현재 선원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지방문화재 제119호인 약사전, 지방문화재자료 제45호인 대웅전, 그리고 동종이 전한다.


선원사 일주문과(위) 경내. 좌측 전각이 철불여래상이 모셔진 약사전이고, 우측에 대웅전이다.

남원팔경 중 제5경인 선원모종(禪院暮鐘)

해질녘에 은은히 들려오는 범종소리. 예전 남원성의 동문 밖에 자리한 선원사에서는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 소리에 대한 기록은 『신증판 남원지』에 전하는 남원팔경에 기록되어 있다. 저녁예불 시간에 울리는 범종소리, 전북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이 된 그 범종은 어떻게 소리를 내었기에, 팔경 안에 들었을까? 선원사를 찾아 범종을 둘러보았다.




사진 위로부터 약사전, 약사전 뒤편에 걸린 괘불함, 대웅전과 대웅전의 용조각

문화재 안내판에는 선원사 대웅전 안에 범종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확인을 하니, 대웅전 안에 있는 범종은 최근에 제작이 된 것이다.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께 물으니, 범종은 약사전에 있다고 한다.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한 편에 범종이 보이는데, 그리 크지가 않다. 높이 66cm, 입 지름 47cm의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그러나 종의 모습은 작다고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여느 종이 아니다. 종의 맨 위에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용의 각 부분은 따로 제작을 해 붙여서 완성한 듯하다. 종의 몸체에는 4줄의 가로선을 긋고 맨 위에는 작은 원 11개를 나열하였다. 그 밑으로는 보살상을 4곳에 놓고, 보살상 사이에는 꽃과 덮게, 관을 나열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선원사 범종과 용뉴(아래)

종을 울려보고 싶은 마음

중앙에 배가 부른 부분은 4개의 사각형 모양의 유곽을 만들어 둘레를 파도무늬로 장식하였다. 아래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무늬를 새기고, 위와 아래에는 글자를 남겼다. 종으로서도 작고 거친 모양이지만, 문양이 다채롭고 특이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종을 주조한 사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원 출생인 최연은 선조 36년인 1603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최연은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이첨 등의 모의에 반대하다가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을 당했다. 고향으로 낙향한 최연은 12년 동안이나 은거를 하였는데, 그 때 지은 시 중에 이런 가사가 전한다.

(전략)
千年石色帶方城 천년 묵은 돌 색깔은 대방성이 틀림없다.
主人有酒客忘發 주인이 권한 술에 객은 일어설 줄 모르더니
醉伴沙驅眠蓼汀 말을 몰아가던 취한 벗, 요천가에 잠이 드네.

아마 이 시에서 ‘십리 먼 곳 신라시대 종소리’란 바로 선원사가 아니었을까? 남원팔경에 들어가 있는 선원모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 종소리가 맑고 청아했으면, 선원모종이라 했을까? 불현 듯 종소리가 듣고 싶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범종을 울려본다. 폐부를 흔드는 듯한 은은한 종소리. 살짝 쳤는데도 그 소리의 여운이 상당하다.




그랬다. 이렇게 맑은 종소리가 저녁예불 시간에 울렸을 것이다. 남원성 동문 밖을 나서면서 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감탄을 했을 것이고, 그 소리에 취했을 것이다. 작은 종소리 하나에도 혼을 담아낸 우리의 선조들. 그저 머리가 절로 숙여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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