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간이란 절에서 커다란 행사를 할 때 내거는 깃발을 말한다. 대개는 절 앞에 당간을 내 걸게 되며, 이 당간을 거는 지주 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을 세우는데 필요한 버팀기둥인 당간지주는 돌을 양편에 세우고,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워 당간을 고정시킨다.

전국의 절을 찾아가면 이 당간을 볼 수가 있다. 당간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 세우는데, 어느 곳에는 철로 만든 당간이 있는 곳도 있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지주를 세우고, 깃대를 세우는 당간을 철로 만들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자리한 용두사지는 고려 광종 13년인 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 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절이다.


당간지주 하나에도 불심이 깃들어

남원 만복사지 한편에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이 당간지주는 지주 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랫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땅속에 묻힌 것을 감안한다면 이 당간지주의 전체 높이는 5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은 커다란 장대석을 거칠게 다듬었으며 별 다른 장식이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는 고려 전기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살펴보면 거칠게 맞은 돌을 깨낸 흔적이 보인다. 지금처럼 돌을 다루는 공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망치와 정 만으로 이 당간지주를 다듬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커다란 석물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단순한 이 당간지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가늠이 간다.



정유재란이 앗아버린 만복사

남원시 왕정동에 자리하고 있는 만복사지. 만복사지는 기린산 아래에 자리한 절로 일설에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더욱 보물 제32호로 지정이 된 이 당간지주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을 보아도 만복사가 고려 문종 때 창건이 되었음을 뒷받침 하고 있다.

당시 이 만복사의 사세는 대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뜰, 썩은 밥배미, 중상골 등의 지명이 있어 당시의 사찰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이 빨래를 널어 이곳이 온통 하얗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고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승려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복사지에서 세월을 탓하다.

이렇듯 장엄한 사세를 자랑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시 남원성 싸움 때 소실이 되어버렸다.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를 남겨, 한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도 당시 만복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잘 정리가 되어있는 만복사지. 여기저기 전각이 서 있던 터가 도드라지게 자리하고 있고, 주춧돌은 아직도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숙종 4년인 1679년에 남원부사 정동설이 복원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만복사. 그 한편에 서 잇는 당간지주를 보면, 아마 이 곳 앞으로 절의 일주문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 남원8경 중에 <만복사 귀승>이 있다. 시주를 마치고 저녁나절에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이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아름다운 경치로 꼽았다고 한다. 교룡낙조, 축천모설, 금암어화, 만복사 귀승, 선원모종, 광한추월, 원천폭포, 순강귀범을 팔경 중에 네 번째로 만복사 귀승을 꼽을 정도였다.


세월은 그리도 무심한 것인지. 저녁 무렵 찾아간 만복사지 한편에 자리한 당간지주. 옛날 커다란 돌을 쪼아 이 당간지주를 만든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이 당간지주를 만들었을까? 눈을 감고 당간의 투박한 표면에 손을 대본다. 행여 당시 석공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려니 하지만, 무심한 초가을 바람만 손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이나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낙안읍성을 보면 그 형태를 잘 알 수가 있다. 남원읍성은 신라 신문왕(재위 681∼692) 때 지방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원지역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691년에 쌓은 네모난 형태의 평지 읍성이다. 처음으로 남원읍성을 축성한 것이 1,320년 전이었으니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남원읍성은 조선조인 1597년에는 왜군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중국식 읍성을 본 따서 네모반듯한 성으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길이는 2,5km 였으며, 높이 4m 정도로 높게 쌓아올렸다. 사방에는 문을 두었고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성곽 중간 중간에 치를 내었으며, 성안에는 71개소의 우물과 샘이 있었다.


사적 제298호인 남원성의 성곽

옛 영화는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현재 사적 제29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남원성은 남원시 동충동에 자리한다. 교룡산성을 돌아 내려오면 광한루원으로 가는 큰길가에 성곽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있는 남원성은 보기에도 매우 견고한 성이었을 것 같다. 1597년 성을 다시 축성 한 후, 그 해 8월에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왜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에 연합군은 남원성에서 왜군에게 크게 패했으며, 이때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와 주민들의 무덤이 바로 만인의총이다. 그 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때 많이 허물어져, 현재는 약간의 성터 모습만 남아있다. 남원성은 그렇게 역사의 아픔을 안은 채 이제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직선으로 축성을 한 남원성. 당시에는 네모난 읍성이었다.

특별한 남원읍성의 구조

남원읍성의 성 모습을 만인의총에 있는 전시관 안에서 대충 둘러보고 와서인가, 성위에 올라 남아있는 성곽을 보니 그 안에 자리했던 성 내의 모습이 그려진다. 읍성 안에는 남북과 동서로 직선대로가 교차하고, 그 사이로 좁은 직선도로가 교차하여 바둑판 모양의 도로로 구성된 시가지가 있었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 도시가 들어서면서 성곽은 대부분 헐려나갔으나, 시내 중심부의 도로는 지금도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만인의총 전시관에 있는 남원읍성 모형. 네모난 성에 길이 바둑판처럼 반듯하다.

이러한 구성을 하고 있는 현재의 남원 시가지를 보아도, 과거 성내의 길의 구성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일부만 남아있는 성위로 오른다. 평지에 성을 쌓다보니 밖으로는 돌로 축성을 하고, 안으로는 흙으로 그 뒤를 단단히 쌓아 올렸다. 성 위로는 군사들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내었는데, 성은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있어 당시 남원읍성이 네모반듯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간에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구성한 치가 돌출이 되어있다.




성곽에서 돌출이 된 치(맨위) 치가 돌출이 된 모습(두번째) 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성벽(3, 4) 치는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이러한 치의 구조 등으로 보아 당시 남원성이 그리 쉽게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성에서 적에게 패해 만여 명의 전사자가 났다면, 그 당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이 간다. 지금은 그저 성을 끼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만 한가한데, 당시 이 성 위에서는 성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내의 병사들과 백성들의, 애끓는 고함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슬퍼 보인다.


남원시 도통동 392-1 선원사 약사전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보물 제422호로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이 촘촘히 돋아 나있고, 이마 위쪽에는 고려시대 불상에서 유행하던 반달 모양을 표현하였다.

선원사(禪院寺)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절이다.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로 1,135년이나 지난 고찰이다. 원래 객산인 교룡산의 지기를 누르고, 주산인 백공산의 기운을 돋우어야 남원이 발전한다고 하여 지어진 절이다. 선원사는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되었다. 그 뒤 영조 30년인 1754년에 남원부사 김세평이 복원을 하였다.

보물 제422호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뛰어난 주조기법이 돋보이는 철불

선원사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남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람이 펼쳐 있으며, 앞으로는 주공 1, 2단지가 자리하고 있다. 도로변에 접하고 있는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것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약사전과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때문인가 보다.

약사전 안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전통적인 고려 철불의 형태로 주조 되었다. 삼각형의 얼굴은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인자함이나 유연함은 보이지 않는다. 날카로운 코와 꽉 다문 입, 조금은 앞으로 내민 턱 등에서 보이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 걸쳐 얇게 표현이 되었는데, 넓은 옷깃을 오른쪽으로 여민 것은 마치 한복을 입은 것처럼 표현되어 매우 독특하다.



철조여래좌상을 모신 선원사 약사전(좌측)과 대웅전(우측) 맨 위사진 

팔과 다리에 나타난 옷 주름은 V자 모양으로 간략하게 처리를 하였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반듯해 당당한 느낌을 주며, 잘록한 허리에는 두 팔이 붙어 있다. 현재 철조여래좌상의 손은 최근에 다시 만들어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팔의 형태로 보아 원래는 오른손을 무릎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 가지만 서원을 빌어야 해요”

남원을 답사한 이유도 바로 이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을 보기 위함이었다. 주변의 절을 다니시는 많은 불자들이 선원사의 철조여래좌상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딱히 무슨 효험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과다하게 소문을 내고는 하지만, 이상하게 선원사 철조여래좌상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말을 피하고는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것이 더 궁금해서 찾아간 선원사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지 않는 절집이다. 그러나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철조여래좌상의 표정에서 위엄이 느껴진다. 고려시대의 불상이라면 이미 천년 세월을 훌쩍 넘었다. 그 많은 세월동안 철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했을까? 아마 그 기운만으로도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을 듯하다.




“세 번만 찾아와 엎드리면 알음이 있다”
“한 가지 서원을 빌어보세요. 딱 세 번만 와서요. 그러면 정말로 그 서원이 이루어져요”

멀리서 일부러 신원사 약사전을 찾았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다. 정말일까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약사전에 좌정하고 계시니,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데 영험함이 있는 것일까? 그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지성으로 빌어본다면, 그도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근엄한 부처님의 얼굴에서 무엇인가 기운이 뻗쳐 나오는 것만 같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정성 속에서 지켜 낸 신원사 철조여래좌상. 고려 시대에 주조가 된 철조여래좌상, 그 소중함이야 어디다가 비길 것인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마음속으로 빌어보는 것은, 이 땅에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인가 보다. 세 번만 찾아가면 정말로 마음 아픈 사람들의 그 아픔이 가셔질 수가 있을까?

아리랑에는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십리는 커녕 오리도 못가서 마음이 아픈 정자가 있다.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에 소재한 전북 문화재자료 재56호인 ‘오리정(五里亭)’이 바로 그런 곳이다.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는 국도변에 자리하고 있다.

오리정은 목조 2층 건물로 1953년에 지어진 정자이다. 이 오리정은 광한루에서 처음 만난 이도령과 춘향이가 사랑을 나누다가, 이곳에서 이별을 하던 장소라고 한다. 춘향전 속에는 서로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이 이도령이 부친을 따라 한양으로 가게 되자, 이곳까지 쫒아 온 춘향이가 애끓는 이별을 서러워하면서 이도령을 떠나보냈다는 것이다.


도로변에 선 오리정은 늘 한산해

오리정은 전주에서 남원으로 가는 17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보면 우측 길가에 서 있다. 좌측으로는 오리정 휴게소가 있고, 도로변에 2층으로 된 정자가 보인다. 정자 옆에는 수련이 피어잇는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쉴만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가끔은 지나는 사람들이 찾아 들어오지만, 늘 한산한 모습이다.

춘향가 중에서 오리정 이별대목을 보면 이곳에서 춘향이와 이도령이 얼마나 마음아픈 이별을 했는지가 잘 나타나고 있다. 생전에 명창 김소희 선생님께서 즐겨 부르시던 대목이다.




(아니리/ 말로 하는 대목) 방자 충충 들어오더니 "아 도련님 어쩌자고 이러시오 내 행차는 벌써 오리정(五里亭)을 지나시고 사또께서 도련님 찾느라고 동헌이 발칵 뒤집혔소. 어서 갑시다." 도련님이 하릴없이 방자 따라 가신 후 춘향이 허망하야 "향단아 술상 하나 차리어라. 도련님 가시는디 오리정에 나가 술이나 한 잔 드려보자."
(진양조/ 제일 늦은 소리) 술상 차려 향단 들려 앞세우고 오리정 농림 숲을 울며불며 나가는디, 치맛자락 끌어다 눈물 흔적을 시치면서 농림 숲을 당도허여 술상 내려 옆에다 놓고, 잔디 땅 너른 곳에 두 다리를 쭈욱~ 뻗치고 정강이를 문지르며 "아이고 어쩔거나. 이팔청춘 젊은 년이 서방 이별이 웬일이며, 독수공방 어이 살꼬. 내가 이리 사지를 말고 도련님 말 굽이에 목을 매여서 죽고지고!"
(자진모리 / 빠른소리) 내행차 나오난디 쌍교를 거루거니 독교를 어루거니, 쌍교 독교 나온다. 마두병방 좌우나졸 쌍교를 옹위하야 부운같이 나오난디, 그 뒤를 바라보니 그 때여 이 도령 비룡같은 노새등 뚜렷이 올라 앉어 제상 만난 사람 모냥으로 훌쩍훌쩍 울고 나오난디, 농림 숲을 당도허니 춘향의 울음소리가 귀에 언뜻 들리거날 "이 얘, 방자야. 이울음이 분명 춘향의 울음이로구나. 잠깐 가보고 오너라." 방자 충충 다녀오더니, "어따,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울음을 우는디..." "아 이놈아. 누가 그렇게 운단 말이냐?" "누가 그렇게 울겄소? 춘향이가 나와 우는디 사람의 자식은 못 보겠습디다."
(중모리/ 조금 늦은 소리) 도련님이 이 말을 듣더니 말 아래 급히 나려 우루루루루루.... 뛰어가더니 춘향의 목을 부여안고 "아이고 춘향아. 네가 처연히 집에 앉아 잘 가라고 말허여도 나의 간장이 녹을 텐디 삼도 네 거리 떡 버러진데서 네가 이울음이 웬일이냐!" 춘향이 기가 막혀 "도련님 참으로 가시오 그려. 나를 아조 죽여 이 자리에 묻고 가면, 영영 이별이 되지마는 살려두고 못 가리다. 향단아! 술상 이리 가져오너라."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몇 년째 없어

이런 슬픈 이별의 장소인 오리정이다. 춘향전에서 나오는 오리정 대목을 생각하면서 지은 정자 오리정. 이곳은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가는 이몽룡을 따라 쫒아오다가 신발이 벗어진 곳이라고 한다, 얼마나 마음이 아프면 이곳에서 두 다리를 뻗치고 울음을 울었을까? 도로변에 나 있는 오리정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늘 볼 수가 있는 정자이다.

정자는 목조 2층이다. 정자에 오르면 찻길 반대편으로는 펼쳐진 논이 있다. 이층으로 오르려는데 계단이 없다. 그냥 이층만 꾸며 놓은 것일까? 이층을 오르던 계단을 놓았던 자리는 있는데, 정작 계단이 없다. 이층 바닥에 난 계단을 놓았던 곳에는 칠이 되어있지 않아, 이곳에 계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계단이 사라진 것일까?




춘향이와 이도령이 이별을 서러워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이곳. 오리정은 그렇게 길가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아픈 이별을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정작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없어져, 진한 그리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듯하다.

남원시 왕정동에 소재한 만복사지는 사적 제349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만복사는 김시습의 단편소설인 『금오신화』에 실린 「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이기도 하다. 만복사는 고려 문종(1046~1083) 때 처음으로 세워졌다. 경내에는 동으로 만든 거대한 불상을 모신 이층법당과, 오층목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만복사를 찾은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갈 때마다 사지가 잘 정리가 되어있어, 기분 좋게 돌아보고는 했다.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소실이 될 때까지, 만복사는 가운데 목탑을 세우고, 동, 서, 북쪽에 법당을 둔 일탑삼금당 식 배치를 보이고 있었다. 경내에는 네 점의 보물(당간지주, 석불입상, 오층석탑, 불상대좌)과 많은 석재들이 있다.

사적 만복사지. 우측에 석인상이 서 있다.

새로 선보인 석인상 일기

이번 답사 때 찾아간 만복사지(2010, 9, 18). 그런데 입구 쪽을 보니 지난번에 보지 못했던 석조물 1기가 서 있다. 만복사지 석인상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석인상은 만복사지 당간지주의 남쪽 4m 정도 떨어진 도로변에, 2기가 나란히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 도로를 운행하는 차량들로 인해, 훼손의 우려가 있는 1기를 옮겼다는 것이다.

이 석인상은 처음 본 것이다. 두 번이나 이곳을 답사를 했으면서도 보지를 못했다. 아마 4점의 보물을 중점적으로 찾아보는 바람에 놓친 것 같다. 그런데 이 석인상을 보는 순간, 참으로 자신이 참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가 이런 형태의 석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흡사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조각한 목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보지 못한 형태의 석인상

이 석인상은 그 모습이 괴이하기까지 하다. 부정형의 사각형 장초석의 3면에 조각을 하였는데, 사람 모양을 조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얼굴은 노여움에 가득 찬 표정을 하고 있으며, 팔은 몸에 붙인 채로 구부려 무엇인가를 꽉 잡고 있는 형태다. 팔에는 두터운 팔과 근육을 표현 한 듯한 선이 나 있다. 주변을 돌면서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아니다. 자연석인 돌을 이용을 하느라 그랬는지, 팔과 기타 신체의 부분이 제대로 갖추지를 못하고 있다.

얼굴은 눈을 돌출시킨 것이 민속 석조물에서 보이는 석장승의 형태를 닮았다. 눈썹은 두텁게 처리하고 눈은 불거졌으며, 볼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코는 뭉툭하다. 석장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석인상은 상반신이 반나로 서 있다. 허리부분에 옷을 묶어 매듭을 내었으며, 옷 주름은 굵은 물결무늬로 선명하다.


팔의 조각한 형태는 괴이하다. 한 팔은 뒤로 돌아갔다.

하반신은 특별한 조각이 없으며, 늘어트린 옷 주름으로 가렸다. 전체 길이는 550cm이며, 머리부터 다리까지의 길이는 370cm 정도이다, 나머지 부분은 뾰족하게 깎았으며 땅 속에 묻혀있다. 도대체 이 석인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석인상을 찬찬히 훑어보지만 금방 그 용도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뒷면에 있는 구멍이 용도를 알리는 열쇠?

이렇게 괴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복사지 석인상의 용도는 과연 무엇일까? 뒤로 돌아가 보니 뒷면에 둥근 구멍이 아래위로 나 있다. 위쪽의 구멍은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122cm, 그리고 그 밑에 구멍은 318m 정도 내려온 곳에 있다. 땅 위로 솟아있는 석인상의 높이가 370cm 정도이니, 아래 구멍은 땅에서 52cm 정도 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위에 있는 구멍은 248cm 정도 위에 있다.

이 구멍의 용도는 무엇일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지만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혹 이 뒤편에 있는 구멍이 당간지주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당간이나 석인상의 높이가 있어 그 정확한 구멍의 차이는 알 수가 없지만, 어림잡아 구멍의 높이가 비슷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석인상은 당간의 용도로 쓰였을까? 아니면 당간의 바깥에 세워 더 많은 당을 걸게 했던 것은 아닐까?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그 이상의 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두 주먹을 꽉 쥔 것으로 보아, 절의 입구에 서서 액을 막아내는 사천왕은 혹 아니었을까? 아니면 절의 신성한 장소의 양편에 세워, 뒤에 난 구멍을 서로 연결하여 그곳의 출입을 제한하던 문지기는 아니었을까? 긴 시간을 생각해보지만, 그 정확한 용도를 알지 못한 체 만복사지를 뒤로한다. 저 석인상의 용도를 알 수 있는 날까지, 꽤나 속을 썩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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