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절이다.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창건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형이 주산인 백공산이 객산인 교룡산에 비해 지세한 허약한 것을 알고, 백공산의 지세를 높이고자 만복사와 대복사, 그리고 선원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70~80명의 승려들이 상주하던 절로, 만복사에 버금가는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만복사와 함께 소실이 되어버렸다. 현재 선원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지방문화재 제119호인 약사전, 지방문화재자료 제45호인 대웅전, 그리고 동종이 전한다.


선원사 일주문과(위) 경내. 좌측 전각이 철불여래상이 모셔진 약사전이고, 우측에 대웅전이다.

남원팔경 중 제5경인 선원모종(禪院暮鐘)

해질녘에 은은히 들려오는 범종소리. 예전 남원성의 동문 밖에 자리한 선원사에서는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 소리에 대한 기록은 『신증판 남원지』에 전하는 남원팔경에 기록되어 있다. 저녁예불 시간에 울리는 범종소리, 전북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이 된 그 범종은 어떻게 소리를 내었기에, 팔경 안에 들었을까? 선원사를 찾아 범종을 둘러보았다.




사진 위로부터 약사전, 약사전 뒤편에 걸린 괘불함, 대웅전과 대웅전의 용조각

문화재 안내판에는 선원사 대웅전 안에 범종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확인을 하니, 대웅전 안에 있는 범종은 최근에 제작이 된 것이다.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께 물으니, 범종은 약사전에 있다고 한다.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한 편에 범종이 보이는데, 그리 크지가 않다. 높이 66cm, 입 지름 47cm의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그러나 종의 모습은 작다고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여느 종이 아니다. 종의 맨 위에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용의 각 부분은 따로 제작을 해 붙여서 완성한 듯하다. 종의 몸체에는 4줄의 가로선을 긋고 맨 위에는 작은 원 11개를 나열하였다. 그 밑으로는 보살상을 4곳에 놓고, 보살상 사이에는 꽃과 덮게, 관을 나열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선원사 범종과 용뉴(아래)

종을 울려보고 싶은 마음

중앙에 배가 부른 부분은 4개의 사각형 모양의 유곽을 만들어 둘레를 파도무늬로 장식하였다. 아래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무늬를 새기고, 위와 아래에는 글자를 남겼다. 종으로서도 작고 거친 모양이지만, 문양이 다채롭고 특이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종을 주조한 사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원 출생인 최연은 선조 36년인 1603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최연은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이첨 등의 모의에 반대하다가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을 당했다. 고향으로 낙향한 최연은 12년 동안이나 은거를 하였는데, 그 때 지은 시 중에 이런 가사가 전한다.

(전략)
千年石色帶方城 천년 묵은 돌 색깔은 대방성이 틀림없다.
主人有酒客忘發 주인이 권한 술에 객은 일어설 줄 모르더니
醉伴沙驅眠蓼汀 말을 몰아가던 취한 벗, 요천가에 잠이 드네.

아마 이 시에서 ‘십리 먼 곳 신라시대 종소리’란 바로 선원사가 아니었을까? 남원팔경에 들어가 있는 선원모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 종소리가 맑고 청아했으면, 선원모종이라 했을까? 불현 듯 종소리가 듣고 싶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범종을 울려본다. 폐부를 흔드는 듯한 은은한 종소리. 살짝 쳤는데도 그 소리의 여운이 상당하다.




그랬다. 이렇게 맑은 종소리가 저녁예불 시간에 울렸을 것이다. 남원성 동문 밖을 나서면서 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감탄을 했을 것이고, 그 소리에 취했을 것이다. 작은 종소리 하나에도 혼을 담아낸 우리의 선조들. 그저 머리가 절로 숙여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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