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실홍실 엮어서 이 명당에 놀구나 가시오.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저승에서 이루소서”

구성진 가락이 울려퍼진다. 2012년 3월 13일(화) 오전 11시. 경기도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 381번지에 소재한 쌍룡사 굿당. 그 굿당 안 한 방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이다. 이 날 굿은 살아생전 결혼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청춘남녀를 결혼을 시키는 ‘영혼결혼식’이다.

영혼결혼식이란 죽은 망자들끼리 결혼을 하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청춘남녀들은, 아무래도 부모나 가족들의 마음속에 깊은 한을 남기게 된다. 그런 남녀를 맺어주는 자리이니, 결혼이라고 해서 기쁘기보다는 오히려 더 깊은 슬픔이 배어있다.




주무 고성주가 큰머리를 얹고 굿을 하고 있다. 굿상을 마주하고 좌측에는 신랑이(2) 우측에는 신부가(3) 마주보고 있다. 옷가지와 패물까지 마련한다.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 저승에서 이루소서”

이날 결혼을 하는 망자 신랑은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에 거주하는 평창최씨의 아들이고, 망자 신부는 충주지씨의 딸이다. 이들은 일찍 세상을 떠나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양쪽 집안의 굿을 주관한 당주는 이미선(여) 무녀이고, 굿에 동참한 주무와 무녀는 고성주(남)와 이정숙(여)이다. 그리고 굿청에 들어선 악사는 박노갑(피리, 태평소)이 맡아했다.

아침부터 굿상을 차린 일행은 인형으로 된 신랑과 신부를 모셔드렸다. 그리고 상 위에는 한복이며 패물들이 진열이 되고, 전통결혼식과 같은 준비를 했다.



당주 이미선의 대신거리와 여무 이정숙의 창부, 서낭이 이어졌다. 그리고 굿상 앞에는 초례청이 마련되었다.


“낮이면 물을 건너고 밤이면 용을 타고 정처 없이 가는 길이 저승의 신혼여행 길이라네. 부디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 저승원문 들어가서 원도 없고 한도 없이, 부디부디 잘 사시오”

들으면 왈칵 눈물이라도 날 것만 같다. 남무 고성주의 앉은부정으로 시작한 굿은 상산으로 접어들었다. 큰머리를 머리에 이고, 그 위에 갓을 올린 고성주의 소리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벌써 이 길로 들어선지 40년 가까이 되었다. 어딜 가나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통한다.

“마른나무에 물이 오르고, 산천에 싹이 돋고, 계절이 좋은 시절이라. 좋고 좋은 날 가려내어 선남선녀 신방꾸미고, 저승원문 함께 들어가 만년천년 해후 하시라고..”




전안례가 시작이 되었다. 먼저 신랑측에서 기러기를 신부측에 전달하고, 신랑신부가 초례청으로 입장을 했다(2) 합근례(3)를 마친 신랑과 신부는 미리 마련한 신방으로 들었다


보기 힘든 영혼결혼식, 끝까지 지켜봐

영혼결혼식은 정말 보기가 힘든 굿이다. 자주 있지도 않지만, 제가집(망자의 가족)이나 당주(굿을 맡은 무녀)들도 별로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좋게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가 있었다. 30여년 굿판을 누비면서도 영혼결혼식은 3~4번 정도 밖에는 볼 수가 없었으니, 그 귀함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청춘남녀가 죽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영혼결혼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망자들도 모두 택일을 하고 사주를 다 본다. 수십 쌍을 사주를 보아도 이루어지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이다. 그만큼 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 영혼결혼식이다. 영혼결혼식은 일반 굿과는 다르다. 먼저 안굿을 하고 난 다음, 굿상 앞에 초례청을 차린다. 신랑과 신부는 전통혼례와 같은 방법으로 혼인식을 마치고 나면, 신방을 꾸미게 된다.

이 신방을 꾸미고 나면 바로 지노귀굿을 하게 된다. 망자의 천도굿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날 굿은 고성주의 상산다음에 당주인 이미선의 대신거리와 이정숙의 창부, 서낭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난 다음 초례청을 차리고, 전안례부터 시작이 되었다. 신랑이 신부에게 기러기를 전하고 난 뒤, 초례청으로 신랑과 신부가 입장을 했다.


말미에서 바리공주를 하는 고성주.


초례청에 마주한 신랑신부는 서로 맞절을 하는 교배례를 하고, 술잔을 서로 나누는 합근례를 하게 된다. 서로가 세 번을 술을 나누어 마시는 합근례를 하고 난 다음에는, 신랑신부는 미리 준비해 놓은 옆방에 신방을 차렸다. 작은 이부자리가 깔려있고 두 망자를 상징하는 인형을 누인 후 불을 껐다.

진한슬픔을 목으로 넘겨

가족들이야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갈래갈래 찢어질까? 아마 그 깊은 슬픔은 어느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굿을 주관하는 무녀들은 연신 듣기 좋은 말을 한다. 그것이 바로 굿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얻게되는 것이다.



말미에 이어 망자상을 돌면서 도령을 돈다. 그 뒤를 당주 이미선이 신랑신부를 안고 뒤따른다. 밖으로 나와 저승길을 잘 갈 수있도록 길을 가르고 있다(아래)


지노귀굿은 말미라고도 한다. 바리공주부터 시작해, 망자의 상인 말미상을 놓고 고성주가 춤을 추면서 돌영을 돈다. 그 뒤로 망자의 옷과 신방에서 나온 두 신랑신부를 안고 있는 당주 이미선이 뒤따른다. 그렇게 돌영이 끝나고 나면, 바로 밖으로 나가 길을 가른다. 저승길은 험하고 또 험하다고 한다.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길을 닦는 것이다.

길가르기가 끝나고 나면 가시문 넘기기를 한다. 저승길은 가시밭이 있다고 한다. 그 가시밭에 걸리지 않고 저승원문에 들어갈 수 있기를 축원하는 것이다. 8시간에 걸친 영혼결혼식은 그렇게 끝이 났다. 끝으로 뒷전을 하면서도 두 사람의 영혼이 저승에 들어가 백년해로를 할 수 있도록 축원을 한다.



길을 가르고 난 뒤에는 가시문을 넘긴다. 저승원문을 들어가는 길은 가시가 많다고 한다. 가시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의식이다. 끝으로 상식을 올린다. 상례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망자를 위해 올리는 상식이다


“그저 저승원문에 들어가 백년해로를 하실 적에, 두 사람 모두 인도환생 하시어서 이승에서 다시 만나 못다 한 사랑 이루시고....”

화성 행궁 옆에 있는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 풍화당은 이안청과 담을 사이로 그 뒤편에 자리한다. 협문을 들어서면 팔작집으로 조성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풍화당이 있다. 이 풍화당은 재실이다. 정조의 제를 올리는 날이면 제관들이 와서 묵던 집이다. ‘풍화당(風化堂)’이란 사회의 풍속과 기강과 교화시킨다는 뜻이다.

사적 제115호인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순조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지은 전각이다. 조선조 제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 재실(풍화당), 전사청, 향대청, 제기고, 외삼문, 내삼문, 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재인이 살았던 풍화당

화성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20년 정조의 어진이 일본인에 의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 화령전은 운한각과 이안청, 그리고 풍화당 만이 남아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보유자인 고 이동안옹은 재인청 출신이다. 재인청은 수원을 중심으로 모인 예능인들의 집단이었다. 재인청에 회원이 많을 때는 3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거대한 예능집단이었나 보다. 한 때는 재인청에 속해있지 많은 사람은 기예조차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고 이동안옹이 처음에 수원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바로 운한각 옆에 이안청에 기거를 하면서 운한각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당시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이가 없단 생각이다. 어릴 적부터 이동안 옹에게서 춤을 전수받은 고성주(남, 56세. 팔달구 지동 거주)는 “처음에는 운한각에서 춤과 소리 등을 배웠는데. 겨울에 난로를 피우다가 불이 났어요. 그래서 문화재를 태운다고 쫓겨나 풍화당으로 옮겨, 그곳 마루에서 배우고는 했죠.” 라고 한다.



고 이동안 옹의 딸인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 보유자였던 고 정경파 선생은 이동안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자, 풍화당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고 정경파 선생의 첫 제자인 박경현 무용학원 원장은, “저희들도 운한각 안에서 춤을 배우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문화재를 보존한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풍화당으로 나와 기거를 했죠. 돌아가시는 날까지 풍화당에서 기거를 하셨어요.” 라고 한다.


단아한 5칸 건물 풍화당

풍화당은 단아하게 지어진 - 자형 전각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고, 중앙에 세 칸은 마루방으로 꾸미고, 양편에 한 칸씩은 온돌방이다. 온돌방의 앞에는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복도의 양편은 판벽으로 막았다. 마루방 세 칸의 뒤편으로는 판문을 내었고, 앞으로 낸 문은 열어 올려 위로 걸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의 주추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으며, 앞에 낸 협문을 통해 제를 지내러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은 재실로 지어졌지만, 딴 곳의 재실에 비해 화려하지가 않다. 아마도 전각의 이름인 풍화당이란 뜻 때문인가도 모른다. 한 때 재인들의 풍각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풍화당. 역사는 그렇게 아픔을 놓고 이어가는가 보다

수원은 예부터 무자(巫子)들이 많던 곳이다. 아무래도 화성이 건립된 전후로 팔달문 앞에 장이 형성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상권이 형성되었다는 소리는 그만큼 재물이 풍부했다는 이야기이다. 하기에 도성에서 쫓겨난 많은 무격(巫覡)들이 수원을 생활 근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월 초사흘(음력 1월 3일) 이 되면, 무자의 집에서는 일 년의 액을 막는 ‘홍수맥이’를 시작한다. ‘홍수’란 ‘횡수(橫數)’를 말하는 것이다. 즉 나쁜 일이 닥치는 운세를 ‘횡래지액(橫來之厄)’이라 하였는데, 그것을 홍수라고 표현을 한 것이다. 홍수막이는 전문적인 무격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무격의 힘을 빌려 정월 초사흘부터 보름까지, 일 년 간의 나쁜 수를 막아내는 것이다. ‘홍수를 막는다.’ 라는 뜻을 지닌 홍수막이를 사람들은 ‘홍수맥이’라고 한다.


홍수막이를 정월 초사흘부터 정월 보름까지 하는 것도, 지신밟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날 시작해서 같은 날 끝나는 것을 보면, 이 두 가지가 모드 일 년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정월에 이루어지는 우리네의 모습. 이런 모습을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쉽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우리네 마음까지 달라진다고 해서야. 지킬 것은 지켜가는 것이 도리란 생각이다.

줄을 이어 기다리는 사람들

홍수막이를 하는 현장은 늘 분주하다. 남들보다 먼저 축원을 해야 더 좋을 것 같다는 사람들의 심성 때문이다. 쌀말에 초를 꽂고 축원을 하는 동안,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기원을 한다. 자손들이 한 해 동안 탈 없이 잘 자라고, 집안에 흉사가 없도록 비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한결 같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 고성주(남. 56세)는 벌써 신내림을 받고 이 길로 들어선지 40년 가까이 되었다.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정초만 되면 신자들을 위한 축원을 하느라 목이 쉰다. 그래도 남들처럼 커다란 물질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연히 신을 모시고 있는 무자로써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이다. 정월 초사흘에 시작하는 홍수막이는 보름이 되어야 끝이 난다.

대물림으로 찾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서울에서 왔다는 이모씨(여, 46세)는 “이렇게 정초에 홍수막이를 하고나면, 일 년 동안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딴 곳처럼 큰 돈 안 부르고 일 년 간의 축원을 해주는 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저희는 지금 대물림 단골이에요. 아이들도 앞으로 계속 이렇게 정초가 되면 와서 축원을 받을 테죠”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집의 신자들은 모두 대물림 단골들이다. 할머니가 다니던 집을 며느리가 다닌다. 그리고 벌써 그 다음대가 물려받기 시작한은 집들도 있다. 전안(신을 모신 신당)에 반드시 앉아 징을 치면서 축원을 하고 나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 줄을 모른다고 한다. 축원을 하는 고성주나, 하루 종일 자신의 순서를 가다리는 사람들이 한결같은 마음이다. 이 한 해도 오직 편안하게 지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4대째 전통방법으로 진행하는 홍수막이

고성주의 홍수막이는 벌써 4대 째 내려오는 무가(巫家)의 독특한 방법으로 진행을 한다. 할머니에 이어 고모와 고모의 신딸인 최씨, 그리고 고성주로 이어지는 무가의 전래집안이다. 지금의 단골들도 내개 3~4대를 이어오는 단골들이라, 집안 내력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다고 한다. 처음 이집을 찾는 사람들은 혼란이 오기도 한다.

나이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모두가 ‘아범’이나 ‘어멈’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신도들은 고성주를 나이에 관계없이 ‘아버지’라고 호칭을 한다. 모두가 신과 인간의 고리로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옛날 ‘단골네’들의 유풍을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딴 곳 같았으면 벌써 문화재로 지정을 하고도 남을법한 전통이다.

정월에 이루어지는 홍수막이. 일 년을 편안하게 살아가겠다는 사람들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축원을 마치고 오방신장기를 뽑게 해 일년의 공수(신탁)를 준다. 아마 홍수막이를 하는 사람들이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이 공수대목을 일 것이다. 어느 달에 조심을 하라고 일일이 일러주고 난 후, 홍수막이를 하고 나오는 시림들의 얼굴에는 안도감 때문인지, 엷은 웃음이 보인다. 

11월 2일, 병원에 있는데 전화가 울린다. 수원에 사는 아우가 가을맞이 진적굿을 한다는 것이다. 무료한 시간도 달랠 겸 수원으로 올라갔다. 굿판은 언제나 흥청거린다. 진적굿이란 신을 모시는 ‘기자(祈者)’가 자신이 모시는 신령들을 위해 한판 흥겨운 굿판을 벌이는 것이다. 그래서 굿 중에는 가장 성대하게 상을 차린다.

굿판은 ‘열린 축제’라고 한다. 누구나 들어와 구경을 할 수가 있다. 굿판의 문은 항상 활짝 열려있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음식을 먹기도 하고, 한편에선 굿을 보면서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그 한편에 낯선 이방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문화교류단으로 온 브라질 사람들

외국인들이 어떻게 알고 굿판에 온 것일까? 궁금하지만 굿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을 수가 없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이야기를 하고 웃기도 한다. 한참 굿판이 무르익었을 때 보니, 한편애서 음식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때다 싶어 다가갔다. 마침 통역도 있는지라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물었다.

오늘 이 굿판에 온 것은 3730 로타리크럽 총재 보좌역인 김성배(남, 58세)와 수원 서부로타리크럽 회장인 이재현(남, 52세)의 안내로 참가했다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온 이들은 브라질 사람들로 GSE 회원들이라는 것이다. 문화교류 차 온 이들이 제대로 우리의 문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두 사람의 남자와 세 사람의 여자, 모두 다섯 명이 참가를 했는데 그 단장인 로난에게 질문을 하였다.



단장과의 인터뷰

- 오늘 우리 굿을 본 소감은?
매우 흥미롭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행사가 없다. 이렇게 춤이 있고 음악이 있어 좋은데, 거기다가 음식제공까지 하다니 정말 놀랍다. 이런 행사는 처음 본다. 정말로 다채로운 모습을 보는데 흥미롭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본다는 것이 정말 멋있다. 그야말로 ‘굿’이다.

- 한국에는 어떻게 오게 되었나?
문화교류를 목적으로 왔다. 우선은 한국을 돌아보고, 그 다음에는 단원 각자가 전문적인 분야에서 교류를 한다,

- 각자의 전공분야는 무엇인가?
나는(단장 로난) 건축기술이 전공이다. 건축을 하면서 공간의 활용에 대한 것을 연구한다. 내 옆에는 건축분야 중 물에 대한 것을 전공으로 한다. 물은 어떻게 공급을 하는가 등이다. 그리고 그 옆에 타이스는 광고 마케팅이 전공이다. 쥴리아나는 휘트니스 훈련을 시키는 전문가이다. 그리고 맨 끝에 아나는 식품가공업 전문이다.



음식을 이것저것 맛있게 먹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이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뺐어가며 더 많은 것을 물을 수가 없어 기념사진 한 장만 찍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함께 포즈를 취해주고 나서, 단장은 엄지손가락을 곧추세우며 연신 ‘굿’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역시 우리 굿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 보아도 굿임에 틀림이 없나보다.

2011년 6월 20일 수원시 팔달구 남수동 81번지에 소재한 한옥. 평소에는 한정식을 하는 옛집에서 수원안택굿 한마당이 벌어졌다. 이날 굿을 주관한 남무(男巫) 고성주(남, 55세)는 4대째 강신무의 맥을 잇고 있는 흔치 않은 무가(巫家)의 사람이다. 오전에 준비를 마치고 오후 2시경부터 시작한 안택굿은 밤 12시가 넘어서 끝이 났다.

예전 같으면 밤새 굿을 해야만 하지만, 요즈음은 주변에서 밤늦게까지 굿을 하면 신고가 잦아 12시를 넘기지 않는다. 이날의 안택굿은 경기도 굿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동안 쇠퇴되어 가고 있던 경기도 강신무굿을 재조명 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대청에서 앉은부정을 하고 있다. 집안에 든 모든 부정을 가셔내는 절차이다.(위) 본향상에 꽂힌 숟갈과 실타래(가운데) 이날 안택굿을 주관한 고성주(남, 55세) 


걸판진 수원 안택굿

원래 수원은 강신무들 중에서도 큰 만신이라고 불리는 만신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이다. 이렇게 큰 만신들이 수원으로 모여 든 것은 한양 성중(城中)에서 축출을 당해 성 밖으로 쫓겨난 강신무들이, 노량진에 자리를 잡아 ‘노들만신’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냈다. 그런 만신들이 수원부가 있던 수원에 상권이 크게 번창하자, 이곳에 터를 잡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맥을 이었다고 본다.

수원에는 전설적인 많은 만신들이 자리를 잡아 지역의 독창적인 굿을 만들어 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굿은 일 년간 집안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안택굿’이었다. 이러한 안택굿이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고성주가 수 십 년 만에 ‘수원안택굿’을 재현해 낸 것이다.



도깨비대감이 접신이 되면 쌀말에 뛰어올라 공수를 준다(아래)


방마다 가득 찬 사람들은 연신 웃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면서 굿판으로 빠져든다. 상마다 먹을 것을 가득 차려 놓고, 술 한 잔에 온갖 시름을 털어버리는 자리이다. 우리의 굿은 ‘열린 축제‘라고 한다. 누구나 다 그 자리에 참여를 할 수가 있으며, 굿판은 항상 문이 활짝 열려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입소문을 타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대감이 따라주는 술 한 잔에 웃고, 울고 난리법석이다. 사람들은 점점 굿판의 흥에 젖어들어 가고, 나중에는 춤까지 추어가면서 굿판을 즐긴다. 그야말로 걸판진 굿판이다.

도깨비대감이 납시다.

안택굿은 먼저 바깥굿이라고 하는 대문앞에서 지신밟기로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문 앞에서 모든 부정을 가시는 바깥부정을 치고 집으로 들어와 안당고사라고 하는 성주고사를 드린다. 성주고사가 끝나면 모든 사람들을 문 밖으로 나가게 하고 삼현육각을 울려 굿청을 정화시키는 ‘주당물림’을 한다.

주당물림이 끝나면 본 굿이 시작이 되는데, 굿의 순서는 앉은부정 - 본향(산, 본향, 군웅, 산대감) - 안당제석거리(불사, 제석, 칠성, 중상바라) - 부인호구거리 - 대신거리 - 대감거리(양반, 성주, 몸주, 텃대감, 업대감) - 조상거리 - 안택성주거리 - 창부거리 - 서낭거리 - 터굿 - 뒷전(걸립, 지신, 맹인, 수비영산)의 순으로 진행이 된다. 이 많은 굿의 제차 중에서 본향(김진섭), 부인호구거리(이지선), 대신거리(김은실)을 뺀 모든 절차는 고성주가 맡아했다.

대감굿을 하던 무격이 갑자기 두 자루의 신칼을 들고 뛰더니 덥썩 쌀 말 위로 뛰어오른다. 도깨비 대감이 올랐다. 수원안택굿에서는 도깨비대감이 접신이 되면 쌀 말 위로 오른다. 안택성주거리로 접어들자 대들보에는 소창 한 필이 걸려 마당으로 늘어진다. 징을 앞에 놓은 고성주와 성주대를 잡은 김은실이 마주 앉는다. 대가림을 하기 위해서이다.





성주대를 잡고 축원을 하는 '대가림'(맨위) 성주대를 잡은 김은실이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다. 성주를 모셔오기 위해서이다(두번 째) 성주를 좌정시켰다(세번 째) 대청에 걸린 소창을 잡고 춤을 추며 지신밟기를 하는 사람들(아래)


‘대가림’이라는 생소한 말에 사람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성주굿에서는 먼저 성주대를 잡고 성주축원을 하면 성주대가 성주를 모실 곳을 알려준다.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김은실이 밖으로 뛰쳐나간다. 성주가 집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밖으로 달려나가 성주를 모셔왔다. 성주를 모시고 나면 굿판에 모인 사람들이 소리에 맞추어 소창을 잡고 춤을 춘다. 지신밟기를 하는 것이다.

“아니 이런 굿을 왜 안하는 것이여“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집 안에는 굿체 빠진 사람들이 일어설 줄을 모른다. 장고잽이 변남섭과 고성주가 대문간으로 간다. 뒷전을 하기 위해서이다. 뒷전은 굿판에 모여 든 모든 잡귀들을 잘 풀어먹여 보내는 거리이다. 그래야 집안이 편안해 진다는 것. 뒷전에서 맹인의 차례가 오자 고성주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온다. 맹인굿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대문간에 걸린 청솔가지. 악귀를 쫓는다고 한다(위) 대문간에서 뒷전을 하는 고성주와 변남섭(가운데) 맹인이 지팡이를 잡고 대문으로 들어오고 있다(아래)


예전에는 이 뒷전은 뒷전무당이라고 해서 뒷전거리만 전문으로 하는 무당이 따로 있었다. 굿판의 절정을 볼 수 있는 거리이다. 굿을 잘 마무리 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재담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이봐 이 집 사장. 이런 굿을 왜 안보여 주었나.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굿판에서 연신 막걸리를 마시며 즐거워하던 어르신의 푸념이다. 10시간여를 울리고 웃기던 수원 안택굿 한마당. 굿이 끝난 시간은 밤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돌아갈지를 모른다. 그만큼 아쉬움이 남는 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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