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사적 제382호 고달사지. 혜목산 기슭에 자리한 고달사지는 그동안 몇 번의 발굴과 정비작업으로 인해, 주변 정리가 되어 있다. 이 고달사는 처음에는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는 절로, 광종 1년인 950년에는 원감국사가 중건을 했다.


고종 20년인 1233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확장을 했다. 실제로 고달사지의 발굴조사에서도 남아있는 절터자리를 보면, 3차에 걸쳐 절을 중창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고달사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눈이 덜 녹은 고달사지. 그 안쪽 한편에는 보물 제6호인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가 남아있다. 탑비는 없이 귀부 위에 이수만 얹힌 모습이다.





부릅뜬 눈과 바람이 날 것 같은 콧구멍


보물 제6호인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59년에 태어났다. 90세인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인근 원주의 거돈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광종은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고 할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하였다. 몸돌은 깨어져 딴 곳으로 옮겼으며, 비 몸돌에는 가문과 출생, 행적 등이 적혀있다.


몇 번이나 들린 고달사지다. 그러나 갈 때마다 이 귀부를 보면 딴 곳으로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이렇게 이 귀부에 마음이 가는 것은 귀부의 모습 때문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난 이 귀부를 볼 때마다 알 수없는 힘을 느낀다. 마치 금방이라도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내딛을 것만 같은 발. 격동적인 발은 발톱까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이 귀부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바로 귀부의 머리이다.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귀부의 왕방울 눈을 보면, 무섭다기보다 친근감이 먼저 앞선다. 아마도 그 눈이 세상의 모든 악한 기운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닌지. 커다랗게 뚫린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바람이 쏟아져 나올 듯하다.


길지 않은 목이 몸체에 달라붙은 듯 표현을 해, 이 귀부의 힘을 더 느끼게 만든다. 마치 강인한 역사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등에는 이중의 귀갑문이 정연하게 조각이 되어있다. 그 육각형의 귀갑문이 중앙으로 가면 한 단계 높게 조각을 하였다. 소용돌이치는 구름위에 비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비좌를 돌출시켜 조각하였다.      




이수의 용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귀부의 머릿돌인 이수의 형태는 직사각형에 가깝다. 앞면의 한쪽이 떨어져 나가 한 옆에 따로 보관을 해 놓았다. 이 이수는 입체감을 강조한 구름과 용무늬가 생동감이 넘친다. 금방이라도 이수를 벗어나 승천을 할 것만 같다. 앞면의 용은 좌우로 밖을 향하고 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뒤편쪽의 용은 안을 향하고 있어, 앞뒤의 용이 다르다. 옆면을 보면 비늘이 선명한 용의 몸체가 뒤틀려 감아 올라간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이 이수의 밑면에는 연꽃을 두르고 1단의 층급을 두었다.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로 넘어가면서 조성이 된 고달사지 원종대사 탑비의 귀부 및 이수. 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하면 975년에 조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종대사가 입적한 후 8년이 지나서 세워진 것이다. 이 귀부와 이수의 형태는 인근 원주의 거돈사지 등에서 발견되는 원종대사의 승묘탑비 귀부와는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같은 시기의 탑에서 보이는 또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는 문화재답사. 그래서 고달사지의 귀부는 늘 발길을 붙잡는가 보다.

전국에는 수많은 석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중에는 여래불, 아미타불, 미륵불 등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석조관음상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많은 석불 중 통영 용화사 관음암의 석조관음보살좌상은 경남유형문화재 제43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증평군에는 충북 유형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된 미암리 사지 석조관음보살입상이 있고, 경북 김천시 봉산면 덕천리에는 경북 유형문화재 제250호인 금릉 덕천리 석조관음보살 입상이 있다.

그 외에도 몇 기의 문화재로 지정된 석조관음상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석조관음상이 귀한 것은 아마 그 조각을 하는 공정이, 딴 석불에 비해 까다롭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석조관음입상이 한 기 서 있다. 이곳은 예전에 건흥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관음입상은 건흥사에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관음입상

낯선 관음입상에 매료당하다.

12월 11일 찾아간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은, 처음 볼 때부터 사람을 들뜨게 만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석불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형태는 낯이 설기 때문이다. 보물 제378호 거창 상림리 석조관음입상의 전체 높이는 3.5m 정도에 석불의 높이는 3,05m 정도이다. 이 석불이 관음입상이라는 것은 그 몸에 두른 법의나 손에 들고 있는 정병 등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석조관음입상의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보개가 솟아 있으며, 관음상에서 보이는 보관은 없어진 상태이다. 일반적으로 관음상은 석가모니불을 새긴 보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가늘고 긴 눈을 반쯤 뜨고 있다. 얼굴의 가운데 길게 새겨진 코는 약간 손상이 되었다. 손상된 코로 인해서 얼굴의 윤곽이 조금은 불투명하게 보인다.


보개는 높이 솟아있고, 보관은 사라졌다. 목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가 있다.

특이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석조관음상

이 석조관음입상은 일반적으로 신라 때의 석조물에 비해, 미소가 줄어든 형태로 표현이 되었다. 하기에 그 모습이 인자하기 보다는, 조금은 엄숙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깨는 약간 각이 져 있으며, 평범한 가슴에는 10개의 고리로 된 목걸이 장식이 느리어져 있다. 이런 꾸밈으로 인해 장방형의 모습과 더해져 보살상 특유의 유연함이 부족한 듯하다.

양 어깨에는 단조로운 모양의 천의를 걸치고 있는데. 그 단조로움을 허리를 감아 도드라지게 표현한 띠로 인해 단조로움을 벗어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양 다리에 걸쳐 U자형 옷주름이 엇갈리게 배치한 것도, 상림리 관음입상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천의의 형태가 매우 복잡한 듯 표현을 하였다. 얼핏 무사들이 입는 옛 갑옷을 연상케 하는 천의의 형태이다.


오른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대좌는 팔각으로 조성을 하여 연꽃무늬를 둘렀다.

이 관음입상은 오른손은 몸에 붙여 팔을 아래로 내려 정병을 들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대어 연꽃송이를 쥐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입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아래는 팔각으로 조성을 했으며, 그 위를 원으로 조성해 연꽃을 새겨 넣었다. 답사를 다니면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석조관음입상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천의의 꾸밈이나 정병, 목걸이 등이 당시에 유행하던 지방의 불교미술의 특징으로 보인다. 정병을 든 오른팔의 팔뚝에는 띠를 두르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코가 훼손이 되 측면으로 보면 조금은 이상한 모습이다. 오른손 팔뚝에는 겹으로 된 띠를 둘렀다
 
답사를 다니면서 가장 즐거운 것은 역시 하나하나 우리 문화재를 알아간다는 점일 것이다. 수많은 문화재를 돌아보면서 나도 모르게 지식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에, 그저 피곤한 줄을 모르고 돌아다닌다. 이 다음에 더 많은 자료가 쌓이는 날,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남겨주고 싶은 욕심에 힘든 답사의 여정을 재촉하는지도 모르겠다.


목걸이와 정병


함양군 함양읍 교산리에 소재한 함양중학교 교정에는 딴 곳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 있다. 바로 본관 현관 문 옆에 커다란 석불좌상이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대좌를 합한 높이가 4m가 넘으면, 앉아있는 석불좌상의 높이만 해도 2.45m가 넘는 거대한 고려시대의 석불이다.

이 석불좌상이 어떻게 해서 이 학교 교정에 와 있는지. 원래 이 석조여래좌상은 청룡사 터나 용산사 터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2월 11일, 하루 만에 전북 남원과 경남의 거창, 함양을 돌아보았다. 정발 바쁘게 돌아다녔지만, 함양중학교 교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을 시간이다.


조각난 석불좌상. 어떻게 이런 모습이 되었을까?

보물 제376호인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없어지고, 오른팔과 얼굴, 무릎과 대좌 등 일부가 잘려나간 상태이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거기다가 머리 부분도 깨어져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강건한 형태의 석불좌상임을 알 수가 있다.

오른손도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나가 원래의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좌의 경우도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사각형으로 조성된 대좌는 측면에 연꽃무늬를 새긴 싱대, 한 번에 두 개씩 눈모양인 안상을 새긴 중대, 두텁게 새긴 겹 연화문을 돌린 하대로 구성되어 진다.




고려시대 석불의 장중함이 그대로

많이 훼손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 크기나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불좌상의 장중함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크기도 대단하지만, 석조불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크고 강건한 형상의 이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은 코와 입의 모습들을 볼 때, 함양 덕전리의 마애여래입상과 그 형상이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입가에는 알듯 모를 듯 엷은 미소를 띠우고 있는데, 표정은 전체적으로 온화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두텁게 새긴 법의는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다. 석불좌상을 몇 번을 돌면서 나름 상상을 해본다. 만일 온전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그 장중함이 대단하였을 것이란 생각이다.




대좌만으로도 사람을 반하게 하다

양 교산리 석조여래좌상을 돌아보면서 옛 선인들의 뛰어난 작품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장비도 변변치 않았을 당시에 어떻게 이렇게 큰 돌을 하나하나 조각을 하여, 작품을 만든 것일까? 대좌 하나만 보아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맨 밑에 놓인 하대는 두텁게 조각한 연화문을 사방에 둘렀다. 일부가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안상을 두 개 씩 조각한 중대는 온전한 모습이다. 상대는 밑에는 이단의 층을 만들고 위는 평평하게 다듬어 석조여래좌상을 올려놓게 하였다.

한편이 뭉텅 잘려나갔지만, 연꽃 문양이 조각되어 있는 상대는, 고려 석조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있다. 해가 지는 학교 교정에서 만난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좌상. 그 웅장한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발길을 붙들기에 충분한 듯하다.



옛 고분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인 것 같다.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소재한 사적 제239호 거창 둔마리 벽화고분은 고려시대의 무덤이다. 금귀봉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산등성이에 무덤 한 기가 자리를 하고 있는데, 이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무덤을 원래의 모습대로 폐쇄를 해놓아 안을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앞에 그려져 있는 자료를 통해 무덤 속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 고려시대의 고분은 산등성이에 자리를 하고 있는데, 무덤 한 기만이 자리를 할 수 있는 좁은 터에 자리하고 있다. 양 옆으로는 급한 경사로 계곡으로 이어진다, 풍수지리적으로 이런 지형에 자리를 잡고 있는 묘가 명당이라는 것이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판석으로 벽을 두르고, 그 안에 돌방을 마련한 횡혈식석실묘이다.



고려시대의 고분 둔마리 묘

둔마리묘는 마을을 지나 산등성이로 올라가야 한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곳에서 10여분 정도를 계곡을 끼고 걸어가면 비탈진 등성이에 묘가 몇 기 보인다. 주변에 있는 묘들은 모두 민묘라고 한다. 네모나게 판석으로 석실을 두른 묘는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해 놓았다. 인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문화재의 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석실 묘 한 기를 사적으로 지정할 정도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둔마리 고분을 찾았을 때는 답사를 온 사람들이 묘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석실은 네모난 판석으로 주변을 두르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형태이다. 흙 속으로 손가락을 조금 밀어 넣어보니, 흙으로 덮은 봉분 안에도 판석으로 덮여 있다. 주변과 덮개를 모두 판석으로 처리를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덤 안에는 채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무덤 안에 그려진 채색의 벽화는 묘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을 참조할 수 있을 뿐이다. 전체적안 그림을 묘 앞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이 내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묘는 이중의 무덤으로 된 돌방무덤으로 서쪽 돌방에는 한 개의 나무관이 있었지만, 동쪽 돌방은 비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서쪽 돌방에는 이미 사용을 했고, 동쪽의 돌방은 배후자를 모시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양쪽 돌방의 석실 벽은 모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흑,녹, 갈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동쪽 돌방의 동쪽 벽에는 6명의 선녀가 그려져 있고, 서쪽 돌방의 서쪽 벽에는 여자 2명과 남자 1명의 그려져 있다고 한다. 벽화는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으로 불교사상을 중심으로 도교적 요소가 가미 된 그림이라는 것이다.





안내판에 보이는 그림으로 생각을 해보다.

무덤 앞에 세운 안내판에 그려진 벽화그림.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는 그림을 찬찬히 훑어본다. 이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종교관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림은 긴 장죽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다. 왼손은 머리 위로 치켜 올려 그릇 같은 것을 받치고 있는데, 그 안에는 과일 같은 것이 들어있다.

벽화를 사진으로 옮겨 놓은 것이라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이 그림의 형태로 보면 비천인을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 고분이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한다면, 악기를 연주하고 한 손에 공양물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라면 단순히 남녀의 그림이 아니라 비천인을 그린 것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발밑에 그려진 뭉실한 것이 구름과 같은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선녀들의 그림이 있었다는 것도 이 그림이 비천인일 가능성을 더욱 확신하게 한다.


그저 안을 볼 수 없다는 갓이 못내 아쉽다. 그러나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서 폐쇄를 시켜놓았다는 것에는 찬성이다. 고분 뒤로 돌아가 앞을 내다본다. 훤히 보이는 건너편 산자락이 아름답다. 영원히 머무는 유택이라 했던가? 그 안에서 천인들의 음악을 듣고 저 건너 피안의 세계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둔마리 고분 앞에 서 있는 석인이 오늘따라 정겨워 보인다.


전북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에 소재한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운산리 삼층석탑. 이 탑을 찾아들어갔다가 고생을 어지간히 했다.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 산등성이까지 눈길을 걸어야만 했다. 문화재를 알리는 이정표는 길을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안내자이다.

탑이 서 있는 마을 이름을 내후사동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이, 운산리 삼층석탑은 옛 절터에 서 있는 탑이다. 그러나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탑의 모습을 보니 옮긴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다. 탑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탑에는 앞면이라고 먹물로 쓴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 이 탑을 옮긴 것일까?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진안 운산리 삼층석탑

탑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울어 

원래 운산리 삼층석탑은 현재의 자리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이 서있는 땅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이 탑을 진안읍으로 옮겨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마을에서는 이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주민들은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흰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울면서 지금의 자리에 안치를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의 꿈도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자주 이런 꿈을 꾸게 되자, 마을에서는 이 탑을 현재의 자리에 새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탑을 ‘신들린 탑’ 이라고 부른다. 정월 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촛불을 켜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정하는데,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평범한 삼층석탑, 찾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천연기념물인 진안 천황사 전나무를 찾아가다가 보니 ‘운산리 삼층석탑’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전나무를 답사하고 난 뒤 돌아 나오는 길에, 운산리 삼층석탑을 찾아들어갔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다가 보니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가야할까? 안내판 하나가 없다. 이럴 때는 대개 직진을 하면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직진을 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지나 길이 좁아진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물을 집 한 채도 없는 눈길을 아무리 가도 탑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게 계속 간 것이 결국엔 임도를 따라 산등성이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답사 시간은 자꾸만 지나간다. 겨울 해는 짧기만 한데, 마음이 조금해진다. 기던 길을 급히 돌아 나오다가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마을이 아니고, 들어오기 전 마을이라는 것이다.


처마는 약간 위로 올려졌다. 받침돌에는 기둥을 상징하는 우주와 탱주가 양각되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다시 길을 돌아 나와 내후사동으로 들어갔다. 마을입구에 서 있다는 삼층석탑은 마을을 몇 바퀴를 돌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도대체 안내를 하는 표시 하나만 길이 바뀌는 곳에 세워주었어도, 이런 고생은 면할 수 있을 텐데. 다시 마을주민에게 물어볼 수밖에. 바로 앞에 탑을 두고 찾아다닌 것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탑이 보인다. 그러나 길에서는 안쪽에 숨겨진 듯한 탑을 찾기란 수월하지가 않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이층의 가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렸다. 위층 기단의 몸돌에는 탱주와 우주가 양각되어 있고, 일층 몸돌의 한 면에는 문이 새겨져 있다. 나머지는 모두 평면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으로,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다. 탑의 머리부에는 꼭대기에 동그란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왜소해 보이고, 일층의 몸돌에 비해 이층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미는 떨어진다.


1층 몸돌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고, 받침돌 하단에는 안상이 음각되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변형된 모습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탑 하나를 찾기 위해서 두 시간이나 소비를 했다. 하지만 이 탑 하나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 어찌하랴. 그나마 찾았으니 다행이랄 수밖에. 흙이 아직도 묻어있는 운산리 석탑이 주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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