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2’로 문화재 답사를 해보니
‘아이패드2’를 이용해 문화재 답사를 나가보았다. 6월 7일 오후 전주에 일이 있어 나가는 길에, 아이패드를 지참했다.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문화재답사를 하던 나로서는, 일보 진전을 했다고 보아야할까? 아니면 현대문명의 이기를 갖고 또 다른 것을 느끼고 싶어서일까? 여러 가지 의미로 아이패드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아직은 낯설기 만한 아이패드2를 이용해 답사를 한다는 것은, 나에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몇 번이고 산을 헤매다가 굴러 떨어져, 몇 대의 카메라가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하기에 휴대하기가 간편한 이 아이패드를 이용해, 편안하게 산을 탈 수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산에서 걸어 내려 온 ‘오수리 석불’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550번지에 소재한,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인 오수리 석불. 오수면 오수리 관월마을 뒷산 밑에 서 있는 이 석불은, 약 삼백년 전부터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을을 굽어보고 우뚝 서 있다. 이 석불이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석불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마을의 한 아낙네가 어느 날 뒤쪽 산을 바라보니, 큰 집 채만한 바위덩어리가 걸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낙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저것 좀 보라고 큰소리를 치니, 이 아낙네가 외치는 소리를 들은 바위가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소리에 놀라 쫓아와 보니, 커다란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하체가 땅에 묻혀있다
그 후 오랜 세월 눈, 비, 바람을 맞고 외로이 서있는 석불을, 이 마을주민인 최경태가 움막 같은 집을 만들어 주었으며, 다시 약 100년 전 쯤 진안 마이산에 거주하던 이갑용처사가 꿈에 이 석불이 나타나 ‘내가 옷을 벗고 있으니 집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하므로, 다시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전각은 없고 보호철책만 주변을 둘러놓았다.
아이패드2로 촬영을 해보았다. 선명도는 떨어진다
현재 오수리 석불의 하체 부분은 땅에 묻혀 있다. 광배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어, 옆에서 보면 한쪽 면은 완만한 타원을 이루고 있으며 불상이 조각된 면은 약간 볼록하다. 광배의 위는 배처럼 끝이 뾰족하며, 불꽃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돋을새김을 한 석불은 민머리 위에 작은 상투 모양의 소발이 솟아 있다. 얼굴은 역삼각형이며 귀는 길게 표현되어, 어깨까지 닿을 듯하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어깨에서 몸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데, 어깨 폭은 1.4m이고 땅에 접한 부분은 1m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가슴 밑에서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아래 소매 자락은 양손을 마주잡고 옷으로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볼록하게 표현되었다. 무릎 아래 부분이 땅 속에 묻혀있어 자세한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지방 장인에 의해 조성된 석불로 보인다.
'아이패드2' 휴대가 간편하고 사진촬영과 동영상이 가능해 답사를 하는데,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기능을 익히지 못해서 그런지, 아무래도 화질은 그리 좋은편이 아닌 듯하다. 좀 더 기능을 익히고나면, 또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으려는지는 몰라도.
총각의 구애에 자결로 정조를 지킨 홀어머니의 성
고려 말 어머니 한 분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현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백산리라는 곳이다. 순창에서 담양 방면으로 나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청소년 센터가 보인다. 그리고 그 조금 못 미쳐 우측으로 경천이라는 내를 건너 ‘대모암’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그 길을 따라 300m 정도를 오르면 이 부인이 쌓았다는 성이 있다.
이 산성은 ‘대모산성’ 또는 ‘백산리산성’ 등으로 불리는데, 두 산봉우리를 배 모양으로 감싼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성은 현재 ‘홀어머니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성을 아홉 명의 아들을 둔 양씨 부인이, 아들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이 성에는 양씨부인에 대한 애틋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설씨 총각의 구애에 죽음으로 답한 양씨부인
홀어머니 산성은 양씨 부인이 아홉 명의 아들과 함께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이다. 양씨부인을 흠모하던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설씨총각은, 은근히 양씨부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설씨총각이 양씨부인에게 구애를 했다는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던 부인은 딱히 거절을 할 명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생각을 해 낸 것이.
“총각이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올 때까지, 내가 성을 다 쌓지 못하면 결혼을 허락하겠다.”
고 하였다. 총각은 서울로 떠나고 부인은 아들들과 함께 열심히 성을 쌓았다. 아홉 명의 아들들과 성을 쌓는 부인은, 지아비의 생각을 해서라도 결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성을 쌓고 있던 부인이, 마지막 성 돌을 채 올리기 전에 설씨총각이 먼저 돌아왔다.
대모암과 산성 오르는 길
성을 쌓기 위해 돌을 나르던 치마를 뒤집어 쓴 양씨부인은, 성벽 위에서 몸을 날려 자결하여 정절을 지켰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외간남자와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결혼을 앞둔 신부는 이 성 잎을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이 산성 이름이 홀어머니 산성이기 때문에, 홀로될 것을 염려해서 인가보다.
군창으로 사용했던 홀어머니 산성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보리라 몇 번을 별렀다. 그 앞을 지나치면서도 벌써 몇 번째 길을 돌리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6월 5일 일요일, 약속이 깨어지는 바람에 잠시 답사 길에 나섰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홀어머니 산성을 찾아갈 생각에서이다.
대모암 대웅전 뒤편으로 난 길을 천천히 오른다. 높지 않은 등성이 위에서는 길이 좌우로 갈라진다. 좌측으로 조금 걷다가 보니 산성이 보인다. 최근에 일부는 복원을 한 듯하다. 원래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산성이라고 한다. 성벽은 그리 높지가 않으며, 동쪽으로 향한 물이 흘러나가는 수구는 직선으로 단을 쌓았다.
홀어머니 전설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
복원을 한 성벽 끝으로는 옛 성벽인 듯한 곳이 아직 남아있다. 성벽 위로 한 바퀴 돌아본다. 아마도 이 성이 과거에는 천혜의 요새였을 것이다. 군창을 두었다고 하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성에 왜 고려 시대의 홀어머니 전설이 전하는 것일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깨지고 갉아 먹은 석불, 그래도 당당함은 남아
고려시대에는 지방마다 많은 장인들에 의해 석불이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불교를 그 어느 때보다 앞장세운 고려이기 때문에, 그만큼 석불이나 석탑 등 불교의 조형물이 많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불교석조물은 지방에서도, 그 지역의 장인들에 의해서 많은 작품들이 조성되었다.
지방에 장인들에 의해 조성이 된 불교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지방색을 띠우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 불상 등은 거대불로 변화를 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이 또한 당시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석불의 경우 섬세함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장중하고 간략화 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고려석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선스님이 창건한 고찰 선원사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만행산에 자리한 선원사는, 도선스님이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사적비에 의하면 도선이 남쪽의 산천을 유력하다가 남원에 이르러, 주변을 두루 살펴본 끝에 남원의 지세가 강해 진압 사찰로 이 절을 창간하고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당우가 30동이 넘었다고 전한다. 그 뒤 수차례의 흥패를 거듭하다가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왜군에 의하여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임한 부사 김세평이 노계소ㆍ신도계 등과 협의하여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고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깨지고 갉아먹은 석불좌상
선원사에는 ‘선원문화관’을 개관하기 위해 분주하다. 선원문화관은 남원을 비롯한 인근 문화의 산실로 자리를 잡기 위해 ‘겔러리 선’과, 어린이와 어머니들이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그 이층으로 올라가면 사무실이 있고, 그 안에 높이 110cm, 무릎넓이 90cm 정도의 석불 한 기가 있다.
고려석불로 알려진 이 석불좌상은 전체적으로 보면 그 풍채가 당당하다. 양편의 귀는 목까지 흘러내렸고, 목은 두터우나 삼도는 지워졌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안면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깨어지고 갉아진 모습이다.
이 석불은 원래 경내 밖에 있던 것을 안으로 들여 놓았다고 한다. 아마 밖에 있을 당시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듯하다. 선원사에 오래도록 다녔다는 어르신 한 분은, 이 석불은 아이를 잘 낳게 하는 효험이 있어서 사람들이 코를 갉아간 것 한다고 하신다. 현재는 여기저기 시멘트로 발라놓아 처음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다. 법의는 희미하게 그 선이 보이고 있으며, 양편의 어깨에서 타원을 그리며 가슴께로 흘러내린 듯하다. 양팔의 소매에는 넓은 소매 끝을 알아볼 수 있다. 그나마 이 소매 끝으로 인해 법의의 형태를 유추할 수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장중함이 배어있는 석불이다.
이 석불은 특이하게 양손을 가슴께에서 마주하고 있다. 이런 지권인은 ‘공양인’에서 나타난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표시이다. 공양인은 두 손을 마주 잡아서 연꽃 봉오리처럼 만든다. 이러한 지권은 보살이나 제자들, 혹은 부처님을 예배하는 자와 협시불이 부처님을 찬탄하고 숭배할 때 나타내는 동작이다.
선원사 석불좌상, 천년 세월을 그렇게 비바람에 씻기고, 사람들에게 훼손이 되면서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석불좌상의 수인이 ‘공양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수인의 표시인지 궁금하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앉아 공양을 드리고 있다면, 아마도 선원사를 찾아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 모든 이들의 아픔을 가시게 해 달라는.
사라진 몸돌을 그려보다, 눈물이 왈칵
김제 금산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금산사 경내에는 국보인 미륵전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재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바로 대적광전 앞에 자리한,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이다. 이 다층석탑은 금산사 소속의 ‘봉천원(奉天院)’에 있던 것을 현재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 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아쉬움이다.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탑일까를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의 석탑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조성을 한데 비해, 이 탑은 기단은 화강암으로 조성하고 몸돌과 지붕돌은 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으로 조성한 다층석탑이다.
육각으로 조성한 탑, 놀라움으로 다가와
화강암이 아닌 점판암을 이용해 탑을 조성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기단부는 또 다른 색을 지닌 돌을 이용해 흑백의 조화를 이끌어 냈다는 것에 대해서도 경이롭기만 하다. 이 탑은 조선조 인조 1년인 1633년 금산사 재건 시에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원래의 층은 알지 못한다. 현재는 11층만이 남아있는데, 그 외형이 육각으로 되어있어 ‘육각다층석탑’이라 부르고 있다.
화강암으로 된 기단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각 단의 1변의 길이는 아래층부터 각각 80㎝, 70㎝, 65㎝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용과 풀, 사자상 등이 새겨져 있다. 이 위에 점판암으로 된 2개의 판석이 있는데 아래의 판석에는 복연이, 위의 판석에는 앙연이 각 면에 5변씩 양각되어 있다.
현재 11층이 남아있는 탑신부는 각 층마다 몸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에만 남아 있다. 현재 10층과 11층이 남아있는 몸돌은, 각 귀퉁이마다 기둥모양인 우주를 새겨 넣었다. 몸돌의 각 면에는 원을 그린 후 그 안에 좌불상을 선각으로 새겨 놓았다. 그 모습이 아직도 완연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 육각다층석탑의 조형이 얼마나 정성을 들인 것인지 알 수가 있다. 각 층의 지붕돌은 낙수면에서 아주 느린 경사를 보이다가, 아래의 각 귀퉁이에서 우아하게 들려있다.
상상만으로도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현재 남아있는 옥개석의 처마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보인다. 각층의 끝마다 달린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 것을 상상하면, 가히 그 아름다움을 어디에도 비길 수가 없었을 것이다. 현재 꼭대기의 머리장식인 싱륜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훗날 화강암으로 만든 연꽃봉우리 모양의 장식이 놓여 있다.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는 돌이다. 이 점판암을 사용하여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남은 옥개석은 각 층의 줄어드는 체감비례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1변의 길이가 1층부터 차례로 46㎝, 46㎝, 41.5㎝, 41㎝, 39㎝, 37㎝, 35㎝, 33㎝, 31㎝, 29㎝, 27㎝로 줄어들고 있으며, 현재 몸돌이 남아있는 10층과 11층은 각각 18cm와 17cm이다.
이렇게 줄어들고 있는 비율로 볼 때, 현재의 9층과 10층 사이에 또 다른 층이 있고, 몇 개 층의 옥개석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9층과 10층의 줄어듦의 차이가 급격하기 때문이다. 이 탑은 몸돌과 지붕돌에 새겨진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짐작된다.
벌써 몇 번이고 돌아본 육각다층석탑이다. 5월 28일 찾아 본 다층석탑 앞에서 눈을 감고 상상을 해본다. 사라진 몸돌의 각 면에도 선각으로 조각을 한 좌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층마다 다르게 새겨진 또 다른 형태의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찾아갈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그 원래의 모습이 어떤 형태였는지, 그리고 그 전체적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알 수가 없어, 늘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한 가지 고마운 것은, 이렇게나마 남아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그 앞에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는 것은, 아직도 그 아름다움의 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장된 추녀도 아름다운 거창 갈계리 석탑
경남 거창군 북상면소재지에서 전북 무주 방향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면 송계사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을 따라 2km 정도가면 도로변에 삼층석탑 한 기가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탑불’이라고 불리는 마을로부터, 약 200m쯤 떨어진 옛 절터에 위치한 탑이다. 아마도 탑불이란 마을의 이름도, 이 탑과 절터로 인해 붙여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절터는 대부분 논밭 등의 경작지로 변해, 탑이 있는 절의 옛 규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또한 그 절에 대한 내력을 전해주는 자료도 없어, 이 탑이 어느 절의 것이었는지, 어느 시대에 조성한 것인지조차 자세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석탑의 형태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충실히 따른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할 뿐이다.
통일신라 석탑을 충실히 따른 모형
5월 20일(금) 잠시 틈을 내어 달려간 답사길. 전북 장수, 무주를 고쳐 경남 거창으로 접어들었다. 길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만나는 문화재는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갈계리 석탑도 그 중 하나이다. 차를 달리며 주변을 돌아보는데, ‘갈계리 삼층석탑’이란 문화재 안내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높은 보호철책 안에 서 있는 갈계리 삼층석탑은, 처음 만나는 순간 ‘참으로 반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석탑은 사각형으로 된 이중의 기단을 두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일반 석탑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탑의 구성으로 볼 때 간략화 된 조성 기법은, 고려시대로 접어들면서 변화하는 석탑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몸돌에 비해 넓은 지붕돌이 불안정 해
받침대 부분인 상하 기단은 모두 모서리기둥인 우주와 함께, 중앙의 받침기둥인 탱주를 새겼다. 몸돌인 탑신과 받침을 이어주는 상대갑석은 경사가 별로 없는 한 장의 돌로 조성하였다. 위 기단은 판석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아래기단은 한 장의 넓은 돌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에는 모서리기둥인 우주를 양편에 조각했을 뿐, 그밖에 별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인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각각 4단이며, 추녀의 낙수면은 낮게 조성하여 경사가 심하지 않다. 그러나 모서리 부분인 처마의 끝자락이 너무 치켜 올려져 있어, 과장이 심한 편이다. 하지만 그 과장이 오히려 이 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몸돌에 비해 넓은 옥개석의 처마가 위로 치켜 올라가, 조금은 불안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상륜부가 남아있지 않아 원래의 모습은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받침부분인 기단이 큰 데 비해, 몸돌과 지붕돌이 왜소해 보여 전체적인 조형미는 조금 뒤떨어진다. 지붕돌인 옥개석 역시 너무나 두터워 조금은 투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대개 고려시대로 넘어간 후 보이는 조형양식이다.
그래도 내 눈에는 아름답게 보여
하지만 그렇게 불안정한 가운데 위로 치켜진 옥개석의 처마가 있어, 오히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나만 느끼는 것인지. 탑의 전문가적인 소견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된 장인의 마음을 읽고 싶은 것이 내 생각이다. 그리 크지 않은 삼층석탑을 조성하면서, 나름대로의 정성을 다한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단부와 몸돌의 밑에는 위를 조금씩 층을 내어 돋아놓았다. 그런 정성을 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이 탑을 조성한 장인의 마음이 보이기 때문이다. 현재 경남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갈계리 삼층석탑. 이 탑을 만나면서 내가 처음으로 한 말은 ‘대박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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