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가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沼)가 있어, 이 소를 ‘용소(龍沼)’라 부른다. 소 옆에는 ‘장수 양악탑’이라고 부르는 5층 석탑이 서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세운 시기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탑이 서 있는 주변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을 ‘심방사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심방사라는 절이 언제 적에 이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양악리 일대에는 향고 터, 동헌 터 등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말기에 이 부근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탑

이 양악리 탑은 높이가 2m 정도로 크지 않은 탑이다. 주변에 많은 암반이나 석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석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 탑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탑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탑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있다.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있으며, 누군가 탑 위에 둥근 강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은 그 생김새가 딴 지역의 석탑과는 다르다. 1층의 몸돌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졌으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측의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을 붙여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 밑에는 아래 단의 지붕돌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탑의 모양은 소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심방사 탑을 찾아 양악리를 맴돌다

5월 20일 오후에 잠시 들린 장수군. 몇 번인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이지만, 20일 낮에 들린 양악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양악리는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건재 기념관과 재실, 동상 등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심방사 탑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지만,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돌다가 만난 주민에게서 탑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탑을 찾을 수 있었다. 탑은 마을 반대쪽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이기에 마을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전설로 남아있는 심방사

양악리 오층석탑은 양악마을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옛날에 한 도사가 살고 있어,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이름을 양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백제의 심방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화로 심방사가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탑을 옮기거나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에서 보존을 하고 있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양악탑. 심방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암벽을 흘러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 온 석탑. 지금은 그 위로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 중장비의 굉음만 시끄럽다. 그렇게 또 다른 소리를 들어가며 탑은 묵묵히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이는 수많은 석탑. 그 많은 탑들의 형태는 다 제각각이다. 시대와 지역, 혹은 장인에 따라서도 그 모습이 달라진다. 이렇게 다양한 석탑을 답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석탑 중에는 조각이 화려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밋밋하면서도 장엄한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 크기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어느 것은 작지만 정말로 화려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북 정읍시 은선리에 가면 백제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은, 고려 탑이 한 기 서 있다. 도로에서도 보이는 이 탑은,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탑곡마을이라는 곳에 자리한다. 뒤편으로는 예전에 석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된 듯하다.


‘그 참 묘하게 생긴 탑일세.’

은선리 삼층석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으로 그 형태가 묘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인 석탑처럼 몸돌이나 지붕돌 들이 정형화가 되어있지 않다. 그저 얼핏 보면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듯 조성을 한 듯하다. 이 은선리 삼층석탑의 높이는 6m 정도가 된다. 단층의 기단 위에 삼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층의 몸돌은 2m가 넘게 높이 서 있고, 이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이 삼층석탑은 이층 탑신(몸돌)의 남쪽 면에 두 개의 감실을 새겨 넣었다. 일반적으로 하나씩만 새기는 것이 보편적인데, 감실을 나타내는 문짝을 두 개씩이나 새겼다는 것도, 이 탑이 색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이 은선리 삼층석탑은 지붕돌을 평면으로 처리를 해서, 그것이 지붕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없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하겠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

이 탑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석탑과 흡사하다. 전체적으로는 모습이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당시 백제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 제16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은선리 삼층석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탑의 형태로, 그 변화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탑이다.

지난 주 찾아간 은선리 삼층석탑. 주변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발길을 미끄럽게 만든다. 탑 주변에는 아무도 들린 사람들이 없는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발목까지 빠진다. 눈이 빠진다고 해서 답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고 보면, 이런 날일수록 더 열심을 내야한다는 생각이다.



지대석은 눈 속에 묻혀 정확한 모습을 알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위에 선 기단부는 판석을 세워 양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탑이 약간 변형이 되었는지, 한편은 양우주의 표현이 정확하지가 않다. 아마도 무게 때문에 약간 변형이 된 듯하다. 기단부 위에 놓인 지붕돌은 평평하다. 그냥 넓은 판석을 올려놓은 것만 같다.

두 장씩의 돌로 쌓아 올린 탑

일층 몸돌은 길게 세워져 있다. 중앙에는 두 개의 판석을 붙였음을 알 수 있게 가운데에 금이 선명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지붕돌은 아래를 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평평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석탑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층서 부터는 급격히 몸돌이 좁아진다.



지붕돌은 사면에 일자로 금이 가 있는 것으로 보아, 네 장의 판석을 시용한 듯하다. 보기에는 밋밋한 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견고한 석탑의 장중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제 지역의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당시 이 지역 석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수많은 석탑들. 그 다양한 형태를 접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답사가 힘들어진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힘이 부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면서 각각 그 나름의 특징들을 알아가는 것이 민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공부는 답사를 마치는 날까지, 다 배워지지 않을 듯하다.


함안군은 군청이 소재한 읍명이 ‘가야읍’이다. 그리고 함안면이란 곳이 따로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군명을, 행정의 중심인 곳을 읍명으로 사용하지 않는 곳은 함안군뿐인 듯하다. 함안군 함안면 대산리에는 ‘큰절마을[大寺谷]’이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곳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고목 곁에 석불이 서 있다.

보물 제71호인 함안 대산리 석불. 양편에는 온전하게 보존이 된 협시불 입상 2기가 서 있고, 조금 뒤편으로 물러 선 중앙에는 목도 잘리고 깨어져, 훼손이 심한 석조 좌불이 한기가 있다. 이 양편에 선 입상이 협시불이고, 좌불이 본존불인 듯하다. 이 3구의 석불을 합해 보물로 지정을 하였다.


생김새가 같은 협시불

양편에 서 있는 협시불은 손 모양만 다르다. 두 기의 석불입상은 모두 머리에 관을 쓰고 있다. 일반적인 불상에서 보이는 관이 아닌, 마치 두건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있다. 조금 길쭉한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이 평면으로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눈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법의는 일반적으로 석불에서 나타나는 법의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마치 우리 고유의 한복을 보는 듯하다. 왼쪽 어깨에는 매듭으로 묶은 것처럼 자세히 표현을 하였으며, 가슴 밑으로는 매듭을 지었다. 치마는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타원형의 주름이 양편으로 드리워져 있다. 법의의 표현이 조금은 무겁게 보인다.




두기의 협시보살은 손의 형태가 다르다. 석불입상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보살은 오른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리고, 왼손은 배에 대고 있다. 우측의 보살의 좌측 손은 아래로 내렸는데, 손에 병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약사여래불인 듯하다. 이 협시보살은 어깨의 매듭과 무릎 아래로 늘어진 타원형의 옷 주름이 특징적이다.

발은 대좌에 새겨져 있어

이 두기의 협시불은 연꽃 대좌 위에 서 있다. 그런데 발이 석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밑에 있는 대좌에 조각을 해 연결을 하였다. 대좌는 연꽃을 두텁게 새긴 상대와, 8각의 면에 앙련을 새기고 안상을 새겨 넣은 하대로 구분이 된다. 그리고 윗면에는 석불입상의 발을 새겨 넣어, 석불을 올려놓은 것이다.




이런 형태는 통일신라 초기 석불의 형태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석불입상으로 추정하는 이 두 기의 협시불은, 지방의 특성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경남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석불입상의 형태는 거의가 이렇게 흡사한 모습으로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아보기 힘든 본존불

뒤편에 앉아있는 석조불상은 목이 없다. 광배가 남아있는 이 좌불은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있다. 남은 부분은 훼손이 심해 알아보기가 힘들다. 광배의 형태나 석질로 보아, 고려 때의 석불로 추정이 된다. 그리고 한 옆에도 목이 없는 석불과 석조물들이 몇 점 보인다. 이 대산리 석불은 마을에서 섬기고 있다고 한다.




2월 20일 찾아간 대산리. 마을 안쪽 동구나무 곁에 서 있는 이 석불들은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 형태로 보아 이곳 어딘가에 절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을 이름도 ‘큰절마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일대에 상당히 큰 절이 있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절 경내에 있었을 석불들. 그저 지금의 형태로나마 남아있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나마 양편의 협시불이라도 온전한 모습이기에.


우리나라에는 성기석 문화가 발달이 되어있다. 성기석은 일종의 주술적인 기원을 띠고 있다. 대개는 성기석을 마을에 조성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마을의 지기를 누르기 위한 방법으로 조성을 한다. 마을에 화가 미치거나, 재앙이 잦으면 성기석을 조성한다. 그러면 ‘음(陰)’한 기운을 눌러 마을이 평안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마을에 남자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여자아이가 많으면 성기석을 조성한다. 이런 경우에는 대개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럴 경우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성기석을 갉아서 물에 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등이다.

마을에 조성하는 성기석은 대개는 길고 위가 뾰죽하게 조성을 하기 때문에, 쇠침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마을에 음한 기운이 감도는 지맥을 차단하여, 마을에 음양의 조화를 맞추기 위한 방법이라고 예전 어르신들은 이야기를 했다.


김제 귀신사에는 석수가 있다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81번지에 소재한 귀신사(歸信寺). 귀신사에 대한 창건연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최치원이 지은 『법장화상전』에 각주에서 언급한 화엄십찰의 하나인 국신사(귀신사의 옛 이름) 때문에, 귀신사의 창건연대를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으로 짐작할 뿐이다.

귀신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연대적으로 의상이 창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귀신사는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이다. 이 귀신사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석수가 경내에 자리한다. 2월 17일 오후, 눈이 내린 길을 따라 김제에 자리한 귀신사를 향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찾아간 귀신사였지만, 설경이 보고 싶어서다. 고찰은 눈이 내렸을 때, 그 모습 또한 색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경치를 감상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라, 절 안에 있는 문화재 답사만 겨우 마칠 수가 있었다. 귀신사에 있는 문화재 중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대적광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석수’이다.

석수 위에 세운 돌기둥은 무엇일까?

‘석수(石獸)’란 돌로 만든 짐승이란 뜻이다. 귀신사에 전하는 석수는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은 남서쪽 솔개봉을 바라보고 있다. 머리를 들어 앞을 바라다보고 있는 사자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였다.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자상은, 평평한 타원형 받침돌 위에 앉아있는 모습이다.



성기석을 닮은 석수 위의 석주. 한편이 닳아있다(아래)

눈이 내려 사자상의 얼굴이며 등에 눈이 쌓였다. 그런 모습도 운치가 있으나, 좀 더 정확한 모습을 보기위해 얼굴 위에 덮인 눈을 치운다. 앞다리를 내밀고 엎드려 있는 사자상. 그 등 위에는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마디진 돌기둥을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위에는 또 하나의 돌을 얹어놓았다. 등 위에 올린 돌기둥은 그렇다 치고, 돌기둥 위에 올린 또 하나의 돌은 영락없는 남자의 성기모습이다.

득남을 기원하기 위한 주술적인 방법이었을까?

도대체 왜 이런 성기석 모양의 돌을 절에 세운 것일까? 전하는 말로는 이곳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우리 풍속에는 화재 등을 막기 위해 해태를 조각하여, 화기를 막는 등 금수를 이용한 재액의 방액을 한 경우가 많다. 이곳의 지기가 좋지 않아 그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석수를 조각해 세웠다는 것은 납득이 가는 해석이다.



문제는 그 석수 위에 올린 성기석이다. 주름진 원통의 돌기둥 위에 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성기석을 조각한 듯하다. 그 한쪽 면이 닳아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 필요에 의해 그 면을 갉아갔다는 생각이다. 무슨 이유였을까? 꽤 오래 전인가 보다. 귀신사를 처음으로 방문할 때 마을에 전하는 말로는, 귀신사 석수의 위에 올린 성기석을 갉아다가 물에 타 마시면 남자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처럼 들린 귀산사에서 만난 석수. 흰 눈을 맞은 석수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훼손된 부분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요즈음은 돌을 갈아 마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석수 위에 성기석을 바라보다가 괜한 웃음만 웃어본다. 글쎄다, 저렇게 사자 등에 남자의 성기석을 올렸다는 것은, 그렇게 용맹스런 남자아이를 얻기 위한 기자속은 아니었을까?


내가 석수를 보고 웃은 까닭은, 저 석수위의 돌을 갉아다가 물에 타 마시고, 정말 장대 같은 아들을 낳기는 했을까? 그것이 못내 궁금해서이다


아산시 신창면 읍내리 84번지, 학성산에 위치한 ‘인취사’. 2월 13일, 일요일에 찾아간 인취사는 그리 넓지 않은 길을 구불거리며 들어간다. 인취사 주변은 온통 연꽃이 즐비한 곳이다. 연꽃축제로 더 알려지기도 한 이 절은, 백제 무녕왕 18년인 518년에 창건했다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법흥왕 때 창건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주지 ‘창암스님’은 극락전에 모셔진 삼존불 등에 넣어둔 절의 내력을 적은 복장물들이 다 도난을 당해, 절의 중창 년대 등은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신다. 인취사는 공주 마곡사의 말사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인취사(咽嘴寺)’라고 나와 있고,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는 지금과 같은 ‘인취사(仁翠寺)’로 적고 있다.


축대 밑에 자리한 연꽃단지

인취사를 둘러본다. 현재 주지인 창암스님이 이곳에 부임해 축대를 새로 쌓고, 안쪽에 있던 종각을 축대 앞으로 끌어내 정리를 하였다고 한다. 반듯하게 쌓은 축대 밑에는 고무 통을 나란히 땅을 파고 묻어, 그곳에 연꽃을 심어 놓았다. 봄이 되면 각종 연꽃이 피어나는 것이 볼만 하다는 곳이다.

넓은 마당의 뒤편으로는 삼존불을 모신 극락전이 자리하고, 그 앞으로는 공양간이 있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을 딴 용도로 사용했을 것 같다. 공양간 좌우편 끝에는 요사가 자리하고, 그 중간에 석탑 2기가 서 있다. 그저 넓은 공간에 듬섬듬성 서 있는 탑이며 전각들이, 조금은 휑한 듯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산비탈에 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시원한 정경이 펼쳐진다.



마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석탑 2기

인취사에는 옛 석탑이 2기가 서 있다. 극락전을 바라보고 좌측 보호철책 안에 서 있는 이 석탑은 모두 제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다. 앞에서 산 쪽을 바라보면서 좌측의 것은 오래된 것이나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른쪽에 서 있는 탑은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23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 석재로 구성한 이 석탑은 기단 갑석위에 삼층 석탑이 올려 진 상태로 있다. 기단갑석은 한 편이 떨어져 나가 상태이고, 탑신과 옥개석인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탑신인 몸돌에는 양우주를 새기고, 옥개석의 받침은 아래서부터 4-3-3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2단의 굄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삼층석탑은 비례가 맞지를 않는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깊게 떨어지고 있으며, 옥개석 끝의 반전도 그리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보이고 있어, 전체적인 탑의 모습을 가늠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5층으로 추정되는 인취사 석탑

탑의 맨 위에는 부정형의 돌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 탑도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절을 정리하면서 이곳으로 모아 놓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탑은 처음에는 오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단갑석의 크기가 탑의 크기에 의해 맞지가 않는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이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탑은, 아래 이층부분이 유실된 듯하다. 기단부가 없어지고 갑석만 남아있는데, 그 갑석의 크기로 보아도 그렇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취사 삼층석탑. 비록 문화재자료이기는 하나, 그 또한 소중한 고려시대의 유산이다. 이런 탑 하나에도 공을 들여 조성을 했을 당시 장인의 마음과 손길을 기억해 내는 것은, 지금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다.

2월의 찬바람에 올라간 인취사. 넓은 절터에 부는 한줄기 바람이 탑을 돌아 저 밑 연꽃마을로 사라진다. 곧 꽃피는 춘3월이 돌아오면 인취사는 각종 아름다운 연꽃으로 단장을 하게 될 테고, 그 바람 한 점이 꽃을 재촉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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