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끝난 드라마 '선덕여왕' 중에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 김유신이 연을 날려 비담의 추종세력을 약화시키는 장면이 방영된 적이 있다. 우리 연은 단순히 연을 날리는 것이 아니라, 군사들의 신호나 정월 대보름에 '액연(厄鳶)'이라 하여, 일 년의 액막이 등으로도 사용을 했다.

 

연장(鳶匠)은 연을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고 전통연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교직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우리 것을 알려주고, 즐거움을 주기위해서 시작한 연 만들기. 지금은 그것으로 인해 노후를 즐겁게 사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집안 가득 연으로 도배를 했다는 신건수(남, 69세, 여주군 대신면 천남1리 189)옹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을 만드는 사람'으로 주변에 소문이 나 있다. 왜 그렇게 연에 집착을 하게 된 것일까?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배운 연 만들기

 

신건수옹이 연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1983년도 교사로 재직 시였다고 한다. 벌써 30년 가까이 연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우리 민속 연을 만드는 것을 지도하기 위해, 연 만드는 것을 배웠어요. 그런데 연을 만들다가 보니 이것이 노후 취미생활을 하기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벌써 이렇게 되었네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연신 연 종이를 풀로 붙인다. 그동안 전시회도 몇 회를 했고, 국내 연날리기 대회는 물론이고, 해외에도 여러 번 초청을 받아서 나갔다. 그렇게 연을 만들면서 집안은 온통 연으로 뒤덮이고, 늘 어떤 연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을 한다는 것이다.  

     

"연은 하늘을 나는 것이잖아요. 연이 하늘에 오르면 아름답죠. 그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 대회를 가보세요. 수많은 연들이 하늘을 나는 것이 장관이죠."

 

▲ 신건수 하루에 10여 시간씩 연을 만들고 있다는 신건수옹.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을 만든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에 대한 인식 바뀌어야

 

신건수옹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연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전통 연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을 더 많이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 하면, 높이 날리기나 연실 끊기 정도로만 알아요. 하지만 연은 단순히 놀이문화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제대회에 나가보면 연을 예술로 승화를 시켜, 정말 아름다운 연들이 많이 보입니다. 이제는 연을 과학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다양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기도 하고요."

 

연에 대한 찬사는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30년 세월동안 연을 만들면서, 많은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하루도 연을 접하지 않고는 삶의 의미를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지도하고 노후에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 시작한 연 만들기가, 이제는 삶의 모든 것이 되어 버렸다.

 

"전통문화로의 연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더 많은 연에 대해 연구를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연의 연구는 삼국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야죠. 다양한 연을 만들어 연날리기 대회를 하고는 있지만, 연을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할 때입니다. 공기와의 역학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등 새로운 연구로 한국인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건수옹의 연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연을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할까를 연구한다. 아침이면 명성황후 생가 곁에 자리한 민가마을로 나가, 찾아오는 아이들과 함께 연날리기를 한다.

 

▲ 연 여주의 명품쌀 포대로 만든 연

 
▲ 연종이 접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연종이를 접고 있다. 이렇게 연에 대해 푹 빠져 지낸다고 한다.

 

친환경적인 창작연 연구에 몰두

 

요즈음 신건수옹은 새로운 창작연 연구를 하는 것이 하루의 일과다. 하루에 10여 시간씩을 연과 씨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연종이를 접는 옆에 삼각형으로 꾸민 연이 보인다. 얼핏 보면 연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상하다.

 

"이것이 입체연입니다. 제가 연구를 한 것인데 3면연이라고 하여, 세계 최초로 이런 연을 만들었습니다. 연을 만들면서도 자연과 환경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둥글게 3면으로 된 연에는 호랑나비가 그려져 있고 '자연사랑 나라사랑' '자연보호 연 시리즈1'이란 글자가 보인다. 신건수옹은 연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연을 만들고 나면 어떻게 아름답게 그 연을 하늘로 띄울 것인가? 그리고 어떤 연이 더 하늘을 아름답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우리 연을 대표하는 것은 방패연입니다. 방패연은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연으로, 연 가운데 있는 반구멍이 이 연의 생명입니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면이죠. 세계 연대회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방패연을 보고 의아해 합니다. 연은 바람을 이용해 하늘로 오르는 것인데, 방패연의 가운데 있는 반구멍을 보고 바람이 빠져 어떻게 뜨느냐는 것이죠. 일본사람들은 불가사의라고 이야기를 하고, 중국 사람들은 연이 절대로 뜨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 삼각연 삼면의 창작연. 세계 최초로 신건수옹이 창작해 만들어 낸 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방패연은 그 반구멍이 있어 공기의 흐름을 조절하고, 연체를 휘어지게 해 안정적으로 하늘을 날게 돼 마음대로 조정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우수한 우리민족의 연 문화에 걸맞은, 또 다른 연을 창작해 내는 것이 신건수옹의 사명이라고 한다. 우리 것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이 이 시대 우리의 의무라고 강조하는 신건수옹. 그 마음과 같이, 아름다운 창작연이 하늘을 수놓기를 기대해 본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2, 3)


솟대는 나무나 돌로 만든 새를 긴 장대나 긴 돌 위에 얹은 마을의 수호신이다. 솟대는 대개 마을의 입구에 세워, 마을에 들어오는 액을 미리 예방한다는 뜻으로 세운다. 솟대만을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돌탑, 장승 등과 같이 세우기도 한다. 솟대는 정월 열나흩날 밤에 새로 깎아 세우고, 주민들이 모여 정성스럽게 마을제를 지낸다. 솟대를 부르는 명칭은 다양하여 솟대, 짐대, 돛대, 새대, 설대 등으로도 부르고, 그 기능으로 세분하여 수살, 진목, 추악대, 표줏대 등으로도 부른다.

 

이러한 솟대는 참나무로 만들어 마을입구에 세우고, 그 위에는 오리를 만들어 올려둔다. 대개는 솟대 위에 한 마리를 얹는 수도 있지만, 끝을 갈래지게 해 두 마리를 올리기도 한다. 이 위에 올리는 새는 마을마다 달라, 기러기나 까마귀를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새의 종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위에 새를 올리는 것은 멀리 날고, 높이 날 수 있는 새를 올림으로써 먼 곳에서부터 오는 액을 막는다는 뜻이다.

 

5년 전부터 만들기 시작한 작은 솟대

 

▲ 솟대 잔가지로 만든 솟대는 섬세함이 요구된다.


김계용(남, 40세. 여주군 흥천면 외사리 282-7)이 대나무를 이용해 솟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쯤이다. 원래 국악기 중에서 삼죽(三竹)이라고 하는 대금, 중금, 소금 중 중금연주자로 활동을 하는 김계용은 우연한 기회에 중금을 배우는 제자들이 갖다 준 대나무를 접하게 되었다.

 

"대나무는 강하면서도 약하다고 하죠. 대나무가 속이 비고 곧다고 하지만, 많이 굽어져 있는 것이 대나무 가지의 특성이기도 하고요. 이 대나무를 다듬고 불로 펴고, 자르고 하는 작업은 최대한 공을 들여야만 합니다. 작은 소품 하나를 만들어도 몇 시간씩 걸리거든요"

 

대나무의 잔가지를 갖고 솟대를 만드는 작업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한 개의 작품을 만드는 데도 서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처음 제자들이 갖고 온 잔가지를 갖고 만들기 시작한 솟대. 그렇게 하나하나 만들다보니 이제는 대나무 솟대를 만드는 장인이 되어 버렸다.

 

"제가 대나무를 갖고 솟대를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람과 대나무가 모두 자연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옷깃만 스쳐도 하늘거리는 대나무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죠. 그래서 자연은 사람의 영향을 받고, 사람은 자연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요. 이 솟대 하나가 자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만들어집니다."

 

대나무 솟대작품도 만들고

 

▲ 잔가지 손질 대나무의 잔가지를 갖고 만드는 솟대. 휘어진 가지를 펴고 자르고 하는 솟대만들기는 3~4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 많은 대나무 솟대를 만들었다. 대나무로 만든 솟대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낸다고 하는 김계용. 경기통일미술전에 2008년에는 '통일로 가는 길'이라는 작품을 냈고, 2009년에는 '지금 우리는'이라는 작품을 내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작은 솟대를 만드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다. 손가락 굵기만한 대를 갖고 만들 수도 있지만, 그렇게 큰 가지를 잘라내면 몇 년을 자라야 하는 대나무를 버릴까봐, 한 해 정도만 자라도 되는 잔가지를 이용하는 것이란다.

 

"처음에 대나무를 갖고 솟대를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예쁘다고 하데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만들어보자고 생각을 했어요. 대나무를 이용해 솟대를 만드시는 분들은 대개 기러기를 대나무로 만들고, 대는 쪽동백나무 등을 이용하는데 저는 전체를 대나무로 만들죠. 그러다보니 작업도 오래 걸리고 작은 소품이라 섬세함이 필요한 것이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솟대이고 싶어

 

"이렇게 작은 솟대를 만들어서 무엇을 하느냐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작은 솟대에 모든 염원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차 안에도 놓고 다닐 수가 있고, 아이들의 책상머리에도 놓아둘 수가 있거든요. 우리 솟대는 액을 막고 복을 불러들인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입시철이 되면 입시생들에게 하나씩 만들어 주고는 하죠."

 

그동안 사람들에게 솟대만들기 체험을 하기도 했다. 어린아이들도 쉽게 만들 수가 있어서 부모님들과 함께 만들기 체험을 하러 온다는 것이다. 지금은 여주 명성황후 생가 앞 민가마을에서 솟대만들기 체험을 지도한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이 이런 솟대를 만들었다는 것을 즐거워하죠. 그리고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께서는 솟대를 만들면서,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체험을 하시는 분들이 30~40대 장년층입니다. 그 분들은 솟대를 만들면서 자신의 소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죠."

 

▲ 솟대 때로는 대나무를 휘어서 대를 만들기도 한다. 다양한 모습의 솟대가 김계용의 손에서 탄생한다.

 

사람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솟대를 만들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솟대를 만들 때 친구를 생각하면서 만들라고 한단다. 그러면 그 솟대가 친구의 의미로 다가온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 솟대 안에 부여하면, 솟대의 의미가 남다르게 표현이 된다는 것이 김계용의 주장이다.

 

"앞으로 이 솟대와 한지공예, 그리고 천연염색을 함께 곁들여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이 솟대로 작품전시회도 가지려고 하고요."

 

바람결에도 흔들리는 작은 대나무 솟대. 그 안에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는다는 김계룡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다. 전설속의 대금인 '만파식적'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밝게 웃는 김계용의 표정이 좋다. 그 웃음이 그저 자연이란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22)


늦깎이 공부를 시작한 만학도들. 충북 음성에 자리한 극동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인 만학도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댔다. 자신들은 늦게라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 졌고, 또한 학과가 사회복지학과인데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밀알봉사회'(회장 사영화)다. 지역에 있는 불우한 이웃들에게, 무엇인가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시작한 모임이다. 그렇게 2년 남짓한 시간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봉사활동이었다.

 

눈 오는 날 손을 '호호' 불며 연탄배달을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눈까지 날린다. 그래도 얼굴과 손, 옷에 검은 칠을 해가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연탄배달을 한다. 매년 겨울마다 음성지역의 독거노인 및, 기초생활 수급자들을 위한 연탄배달이다. 2008년에는 2000장을, 그리고 지난해 연말에는 3000장을 준비했다. 회원들은 날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모른다. 남을 위해 자신이 봉사를 한다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다. 이 일을 시작한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해왔다.          

 

2008년 11월 22일 부천 삼정 정신 장애 시설 주말 프로그램 참여

2008년 12월 13일 음성군 독거노인 연탄 2000장 전달

2009년 2월 20일 ~ 23일 필리핀 바세코 지역 학용품 전달

2009년 3월 5일 샘물 노인 복지 센터 온천 나들이

2009년 6월 17일 ~22일 몽골 에든솜 지역 학용품 및 의류 전달

2009년 9월 19일 음성군 독거노인 및 한 부모 가정에 쌀 60포 전달

2009년 12월 29일 음성군 연탄 3000장 전달

 

회원이라고 해보아야 고작 25명 정도다. 그 중에서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회원은 불과 10여 명 안팎이다. 하지만 그 인원만으로도 족하다고 한다. 봉사야 사람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먼저 행동이 앞서야 할 수 있다.

 

2010년에는 더 많은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3월에는 네팔로 날아가 그곳의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해 봉사를 하고, 명절에는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 싶어 쌀을 사들고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이미용 봉사도 하고 방문요망 대상 노인들과 함께 온천을 다녀 올 계획이라고 한다.

 

▲ 몽골 봉사 몽골 에든솜 지역을 찾아 학용품 및 의류를 전달하는 회원들과 몽골 주민

▲ 필리핀 봉사 2009년 2월 20일 ~ 23일 필리핀 바세코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나누어주는 봉사회원

 

이 모임을 사영화 회장과 함께 처음으로 주도했던 오승하(43) 사무처장은 음성군 금왕읍에 70평 규모의 노인복지센터를 열었다. 교육원을 겸하고 있는 이 노인복지센터는 오승하 개인이 자비를 들여서 세운 것이기에 더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요양원까지 세울 계획입니다'라는 오승하를 만나보았다. 

  

밀알봉사회 오승하 사무처장 대담

 

- 처음으로 이런 봉사회를 조직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아버님께서 치매에 걸리셨어요.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하다가, 음성에 있는 극동대학교 사회복자학과를 뒤 늦은 나이에 들어갔죠. 거기서 같은 만학도이신 사영화 회장님을 뵙고, 무엇인가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아보자고 시작을 했어요."

 

- 현재 회원은 어떻게 되시나요?

"지금 회원은 25명 정도가 되고요. 처음에는 만학도인 회장님과 제가 함께 하고, 학생들이 4명 정도 참여를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은 지난해부터 취업을 나가고, 지금은 저희와 뜻을 같이하는 회원들이 함께 봉사를 하고 있어요."

 

- 학교를 졸업하시고 나면 봉사회의 유지가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아요. 저희들 욕심에는 후배들이 이 봉사회를 좀 지속적으로 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관심들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희 회원들을 일반회원으로 모집을 했어요. 저희가 졸업을 하고나면 학교와 관계없이 계속하려고요."

 

- 그동안 봉사를 하시면서 보람된 일이 무엇이었나요?

"지난해에 필리핀과 몽골을 가서 아이들에게 학용품과 옷가지 등을 나누어 주었는데, 그 때 아이들의 그 초롱초롱한 눈매를 잊을 수가 없어요. 물론 그것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즐거운 하는 표정을 보고 단단히 다짐을 했죠. 앞으로도 봉사는 계속되어야 한다고요. 심지어는 받아든 학용품을 뺏기기라도 할까봐,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나기도 했고요."

 

- 힘든 점도 있었을 텐데

"많은 분들이 국내에도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하세요. 아직은 저희들이 많은 일을 해보지 않아서 관공서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회원들이 상처를 많이 받아요. 그래도 저희들은 생각을 해서 힘들게 찾아갔는데, '빨리 주고 사진이나 찍고 가라'는 식으로 이야기들을 하는 경우도 있어요. 연탄 봉사를 할 때도 '차라리 돈으로 주면 안되겠느냐'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럴 때는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요. 더구나 명단을 받아서 가보면 연탄이 몇 곳에서 받은 연탄이 천장 가까이 쌓여있는 집들도 있어요. 정해진 사람들에게만 배부가 되어서 그렇다고 하네요. 심지어는 그것을 팔기까지 한데요. 올해부터는 저희가 직접 발로 찾아다니면서 정말 필요한 분들에게 드리려고요."

 

▲ 연탄배달 연탄배달을 하는 오승하 밀알봉사회사무처장(앞). 앞으로도 더 많은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한다.

 

- 노인복지센터를 개설하셨다는데?

"예, 아버지가 치매이시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제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길이 없을까하고요. 그래서 이번에 노인복지센터를 2층, 70평 규모로 세웠고요. 앞으로 요양소를 지으려고 땅을 준비했어요. 그거서 이익금이 나오면 그것으로 또 봉사를 하고 싶어서요."

 

- 앞으로의 계획은?

"봉사를 열심히 해야죠. 그동안 해온 봉사는 저희들이 아무것도 몰라, 봉사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올해부터는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따듯함을 나누어주는, 그런 모임을 만들고 싶어요. 정작 손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를 찾아보고, 그분들과 함께 마음을 따듯한 작은 마음을 나누는 그런 봉사모임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6)

처음에는 일지도 못하고 쓰는 것도 못했습니다.

지금은 음식도 잘하고 문화도 많이 배웠습니다.

필리핀에 계신 엄마도 전화하면 한국에 있는 딸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딸이 씩씩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열심히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 2009년 가을에 지날린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온 결혼이민자 지날린의 글이다. 그저 우리말과 글을 배워 자신의 현 생활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글들이 도자기로 새롭게 태어난다. 도자기의 고장 여주로 시집을 온 외국인 결혼이민자와 취업을 한 이주노동자, 그리고 그 다문화가정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의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글을 적은 것을, 도자기에 담아 4개 종교단체를 돌며 전시회를 가질 것이라고 한다.

 

  
여주 이주민문학제에 선보일 도자기. 초벌구이를 한 접시에 글(전기중)과 그림(서종훈)을 그려 넣었다.

  
고우찌 마찌꼬의 충효예라는 글. 어찌보면 우리들보다 더 한국인다운 모습도 간직하고 있다

 

<여주이주민문학제>는 그렇게 준비가 되고 있다. 이주민문학제를 열 그림과 글을 도자기로 만들고 있다는 소식에, 여주읍에 있는 한 작업실을 찾았다. 여주의 민예총 등에 소속한 문화예술인들이 초벌구이를 한 둥근 접시, 사각 접시 등에 글을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편에는 이미 가마에서 구워진 그릇들이 반짝이는 윤을 내고 있다.

 

여주이주민센터 진재필 사무국장은 '이번 전시가 그동안 우리말과 글을 배운 이주민들이 자신들이 배운 것을 자랑하는 계기를 만들어, 한국을 더 가깝게 느끼게 하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주민 각자가 자필로 쓴 종이에는 맞춤법도 틀리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웃다가도, 이렇게 한자 한자 배워서 쓸 때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그저 마음이 숙연해진다.

 

"말은 배워서 바로도 할 수 있지만 글을 배워 써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번 전시회를 가진 목적의 하나도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이주민들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마음에서죠. 앞으로 지속적으로 이런 이주민문학제를 열어, 더 많은 이주민들이 우리말과 글을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번 전시회가 끝난 후 심사를 하여 상을 줄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협찬을 받아서 일등에게는 자신의 고향을, 부부가 다녀올 수 있는 비행기표를 끊어주려고요"

 

준비에 여념이 없는 진재필 사무국장의 이야기다. 갓 구워 낸 도자기를 보고 있다가 문득 마음이 울컥해진다. 하호분교 김도희 학생이 쓴 '우리와는 다르다고'라는 글 때문이다.

 

  
김도희 학생이 쓴 '우리와는 다르다고'라는글은 우리들을 낯뜨겁게 만들었다

 

우리와는 다르다고 무시하지 마요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기가 살던 나라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더욱 더 많이 알고 있는걸...

 

어린아이가 우리들보다 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이런 간단한 글 하나에 우리들을 질책하는 내용을 보고 낯이 뜨거워진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온전히 우리와 같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을까? 어찌 보면 '다문화'라는 용어 '이주민'이라는 용어자체가 우리가 아니라는 속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럽다.

 

  
이주민문학제에 선보일 도자기들. 처벌구이를 한 접시에 글과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필리핀 출신 결혼이민자 비오레타의 글은 우리 어머니들의 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오레타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우리 남편 수술이 잘되고 빨리 나서 아이들을 봐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제가 회사에 다니고 돈을 벌어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도 사주고

남편에게도 맛있는 음식해주고 필리핀 가족도 도와주고 싶습니다.

앞으로 힘들어도 우리 아이들 생각하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친정어머니 말씀대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우리가족들 매일매일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친정어머니께서 우리가족이 필리핀에 가는 날까지

기다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파이팅!

- 여주 점동면 당진리에서 희망을 갖고 사는 비오레타

 

필리핀출신 결혼이민자 비오레타의 글이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남편이 수술을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가보다. 그저 자신의 마음속에 가진 염원을 글로 적었다. 남편이 수술을 하고 아이들만 돌보아준다고 하면, 자신이 나가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마음. 바로 예전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결혼이민자라고 해서 무엇이 다를까? 언어와 피부색, 외형이 조금 다르고, 음식문화와 생활문화가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남이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이번 여주이주민문학제에서 그러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사카미 아야의 소원. 초벌구이를 한 사각접시에 쓴 글

  
우즈벡 출신 이주노동자 우르벡 보졸로프는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인들과의 교감을 글로 적었다
 


여주장은 5, 10일 장이다. 아침 일찍 김장장을 취재하기 위해 여주장으로 향했다. 500여 년 전통을 자랑하는 여주장은 경기도 지역에서는 성남 모란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장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만 해도 여주에는 11곳의 5일장이 있었으나, 5일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현재는 여주장을 비롯 가남장과 대신장만 그 명맥을 유지하는 실정이다.

 

예전과 같지 않은 5일장에는 한숨만 나돌아

 

김장장이라고 하지만 예전 같지가 않다. 예전 장이 들어섰던 골목에는 장사꾼의 노점 대신 차들이 주차가 되어 있다. 한편에서 깨며 조, 찹쌀, 기름 등을 파는 아주머니 한 분은 흥정을 하다가 말고 한숨을 내쉰다.

 

"이것들 다 집에서 농사 지으신 거예요?"

"아니지. 마을에서 사람들이 팔아달라는 것도 있고, 내가 농사를 지은 것도 있고."

"장사하신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

"한 30년이 넘었네. 벌써 그렇게 지나버렸어."

"예전 같지가 않은가 봐요."

"턱도 없어. 그래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10만원은 쉽게 벌어갖고 들어갔어. 그런데 요즈음은 일당 벌기도 힘들어."

"일당을 얼마나 치세요?"

"3만원."

 

참 간단한 물음과 대답이다. 하지만 그 안에 예전과는 다른 장 분위기가 담겨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눈속임은 하지 않는다는 아주머니는, 연신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사라고 소리를 지르지만 정작 물건을 흥정하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 깨, 팥, 기장, 보리 등 각종 곡물류 하루 종일 팔아도 일당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나는 사람들을 불러보지만 흥정이 되지 않는다

  
▲ 기름 술병에 담은 기름. 들기름은 직접 짠 것이고, 콩기름은 수입 콩을 썼다고 하신다. 양심을 속이지는 않는다고 강조를 하시면서

 

그놈의 대형마트 때문에

 

장을 돌다가 김장거리를 파는 장사꾼에게 물어보았다. 어째 김장장인데도 물건이 많이 나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팔리지 않는데 잔뜩 쌓아놓기만 하면 뭘 하겠느냐는 대답이다.

 

"예전 같지가 않네요. 김장장이라는데."

"말도 말아요. 요즈음 사람들 김장 잘 안하잖아요. 여기저기서 김치를 만들어 판매를 하지를 않나. 이젠 김장도 한 겨울 양식이 아닌가 봐요."

"그래도 김치들은 먹어야 되지 않나요?"

"요새는 대형마트인가 무엇인가에서 배추 몇 포기만 사도 다 배달을 해주는데, 굳이 장에 나오겠어요. 앞으로 이 장사도 집어치워야 할 것 같아요."

 

답답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장 풍속도가 변해감을 알 만하다. 그 오랜 세월 서민들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던 5일장이 그나마 버티다 이제는 대형할인점에 밀려 더 빠르게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 김장장 예년에 비해 물량이 많이 줄었다

  
▲ 마늘 마늘을 팔고 있지만 정작 판매는 부진하다고 한다. 이젠 사람들이 집에서 김치를 담그는 것조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란다

  
▲ 썰렁한 장거리 예전 장이 들어서 발디딜 틈이 없던 장거리는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마늘을 까는 손에서 어머니를 느끼다

 

철물점 앞을 지나는데 시끄럽다. 물건을 샀는데 중국 것이라며 바꾸어 달라고 할아버지 한분이 역정을 내신다. 요즘 중국 것 아닌 게 어딨냐는 말에 씁쓰레하다. 주변을 둘러본다. 정말 중국제 철물, 중국제 그릇, 중국제 옷, 중국제 신이다. 중국 어느 시장을 방불케 한다. 세상이 점점 우리 것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에 두려움마저 느낀다.

 

할머니 한 분이 마늘을 까고 계시다. 남들은 장갑이라도 끼는데, 그나마 맨손으로 마늘을 까신다. 그 손을 보면서 갑자기 코끝이 찡해온다. 투박하기만한 손. 굳은 살이 박인 마디. 까맣게 때가 낀 손톱. 어릴 적 찬물에 손이 시린지 호호 불어가며 김장을 담그시던 어머니가 그 손에 계셨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살만한 물건은 없다.

 

"많이 파셨어요?"

"아직 개시도 못했어."

"언제 다 팔고 가신데."

"그러게 말야. 오후에는 비가 온다고 그러는데. 하나라도 팔아야지."

 

그 하나라도 말에 가슴이 답답하다. 연세가 꽤 드신 것 같은데, 새벽 일찍 장에 나오셔서 아직도 하나도 팔지 못하셨다니.

 

 

"좀 일찍 나오셔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셨으면 많이 파셨을 텐데."

"아무 자리나 차지할 수가 없어. 이 자리도 다 임자가 있는 것이니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집에서 만든 두부라고 하기에, 두부 두 모를 사들고 돌아선다. 속으로는 그저 '오늘 다 팔고 가세요'라고 생각하지만 밖으로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다. 괜히 눈물이라도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정이 넘치던 5일장은 그렇게 어머니 모습만 느끼게 만들고 말았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09,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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