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9일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오락가락 한다. 먼 길을 떠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비로 인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대신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로 향했다. 2000년도에 15,900,000㎡ 라는 넓은 면적을 지정한 천연기념물 제414호인 ‘화성 고정리 공룡알화석 산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2004년도에 이곳을 들려보았으니, 벌써 10년 가까이 지난 셈이다.

 

2004년도에 이곳을 들렸을 때는 차로 공룡알 화석이 있는 바위 앞까지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곳을 출입을 통제시키고, 관람로를 따라서만 공용알 화석을 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방문자 센터 주차장에 차를 두고, 왕복 3km 정도를 걸어야 공룡알 화석을 볼 수가 있다.

 

풀숲에 조형물로 만들어 놓은 공룡  ‘트리케라톱스’

 

1억 년 전 공룡의 주요서식지

 

화성시 송산면 고정리의 공룡알 화석 산출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퇴적층(약 8300만∼8500만년 전으로 추정)으로 밝혀졌다. 이곳은 1999년 시화호 간석지가 조성되기 이전에는 섬이었던 삼한염, 중한염, 하한념, 한염, 개미섬, 닭섬 등 6∼7개 지점에서 공룡알화석 및 알둥지가 발견되었다.

 

지금은 이상한 돌로 땅위에 솟아오른 이 섬들에서는,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이 되었다. 그동안 세계적으로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부분 중국과 몽고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곳 시화호처럼 많은 공룡알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더욱 이 곳에서는 공룡의 뼈 조각도 여러 곳에서 발견이 되기도 해, 전문가들은 시화호 일대가 약 1억 년 전 공룡의 주요 서식지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뻘에도 공룡알 화석이 있을 것으로 추정

 

시화호 화석지에서 그동안 발견이 된 것은, 가로·세로 50∼60㎝ 크기의 둥지 20여 개에서 둥지마다 5∼6개, 많게는 12개의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었다. 공룡알 화석은 보통 주먹 크기보다 작은 타원형으로 지름 11∼12㎝이고, 큰 것은 14㎝나 되며, 지금까지 모두 180여 개가 발견되었다. 현재 뻘로 덮여있는 부분에서도 뻘을 제거하면 더 많은 공룡알 화석이 발견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곳에서는 줄기에 마디가 있는 늪지 갈대 등의 식물화석과, 생물의 흔적이 있는 화석도 대량 발견되었다. 또한 이곳은 지금도 갯개미취, 꼬마부들, 칠면초, 갯방동사니, 범부채, 산조풀 등의 식물과, 너구리, 고방오리, 고라니, 멧토끼, 중대백로, 황로, 수리부엉이, 쇠백로, 황조롱이 등의 동물들도 상당수 서식하고 있다.

 

 

 

 

이곳 고정리 말고도 삼존리 등에서도 2006년 1월 26일 또 다시 15개의 공룡알 화석이 발견이 되었으며, 2008년 5월 30일에는 전곡항 방조제에서 공룡의 뼈가 발견이 되어 학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화성시에서는 이런 점을 들어 국립자연사박물관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으며, 전문가들도 이곳이 자연사박물관의 최적지라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뿔공룡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는 명칭을 붙인 이 뿔공룡은 중생대 백악기인 약 1억 3천만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이다. 이 공룡은 2008년 5월 30일 화성시 전곡항에서 제 1회 세계요트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성시 공무원 김경하에 의해서 전곡 제방 환 전석에서 발견이 되었다.

 

2008년 5월 30일 화성시 전곡항에서 제 1회 세계요트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화성시 공무원 김경하에 의해서 전곡 제방 환 전석에서 발견이 된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는 명칭을 붙인 이 뿔공룡은 중생대 백악기인 약 1억 3천만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이다(위는 모형 아래는 뼈)

 

이 공룡은 한반도에서 최초로 발견된 뿔공룡으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신종이라는 것이다. 전체 길이는 약 1.7m~2.3m 정도이며, 꼬리뼈에 척추뼈보다 5배나 더 긴 신경돌기와 독특한 복사뼈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높고 납작한 꼬리는 물속에서 헤엄을 치는데 이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족보행에서 출발해 사족보행으로의 진화과정을 거친 걸음걸이의 빔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두 번째로 공룡알을 만나다.

 

방문자센터를 들려 자료사진을 몇 장 찍고 관람통로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비가 오면 뻘이 질척거리기 때문에 목재를 이용한 탐방로를 이용해야 한다. 먼저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하는 말들이 재미있다.

 

 

 공룡알 화석과 (위) 공룡알이 발견 된 옛날의 섬(아래)


 

“겨우 공룡알 화석 8개보자고 3km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좀 황당하네.”

 

하지만 이렇게 공룡알 화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 줄 그들은 모르는가 보다. 중간에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조망대도 설치해 놓고, 중간중간 쉴 수 있는 의자도 조성해 놓았다. 처음으로 본다면 상당히 기대가 되었겠지만, 이미 한 번 자세히 보았기 때문에 그때보다는 설렘이 덜 하는 듯하다.

 

 

걷다가 보니 풀숲에 공룡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트리케라톱스’인 듯한 이 공룡을 찍고 공룡알 화석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공룡알 화석을 돌아보고, 주변에 화석이 있던 옛 작은 섬들을 돌아본다. 하늘은 잔뜩 어두워지는 것이, 금방이라도 굵은 비를 한 줄기 쏟아낼 것만 같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산 73 - 28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106호 예산 용궁리 백송. 백송이라는 명칭은 소나무의 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지는데, 그 벗겨진 껍질이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부른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백송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서울시 종로구 재동에 있는 백송이 수령이 600여 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송은 잔뿌리가 적어 옮겨심기가 힘들다. 씨앗도 번식력이 약하고, 어린 나무는 잘 자라지 않아 그만큼 키우기가 힘든 희귀종이다.

 

백송은 추사 일문의 상징이 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예산의 백송은 수령이 약 2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그 중 두 가지는 죽어서 처리를 해놓았다.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으로 서 있지만 백송이 희귀종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었다.

 

 

 

예산 백송은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다. 이 나무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조선 순조 9년인 1809년 10월에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가 내려 준 백송이 있다. 그래서 백송은 추사 김정희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예산의 백송은 용궁리에 있는 추사고택과 거리가 멀지 않다. 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어, 지나는 길에 들려볼 만하다.

 

수술자국이 마음이 아파

 

사람도 그렇지만 나무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래 묵은 나무들이 여기저기 외과수술을 한 자국이 보이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예산 백송을 찾아가니 생육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 곁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들에 비해 빈약하다. 수술 흔적도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비록 생육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천연기념물로의 가치뿐만 아니라, 추사 선생이 필통에 씨를 넣어 갖다가 심었기에 더욱 소중하다는 예산 백송. 앞으로 보존이 잘 되어, 더 많은 씨를 퍼트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무가 자기 이름으로 된 땅을 갖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자나무’라고 부른다. 자그마치 2천평이나 되는 땅을 갖고 있는 나무이다. 그리고 옆에는 2세까지 키워가면서 산다.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294호 석송령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땅을 지니고 살고 있는 나무 석송령은 그 자태만으로도 부자스럽다.

 

나무의 생육상태도 좋은 편이다. 그만큼 신경을 쓰고 있다는 소리이다. 가슴 높이의 줄기둘레가 자그마치 4.2m나 된다, 수령 600년에 나무의 높이는 10m정도다. 그러나 이 정도로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육면에서는 이 나무가 부러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나무는 자신의 앞으로 등기가 되어있는 땅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땅이 있어 안전하다

 

천연기념물이 자신의 땅이 아니라고 해서, 그 땅에서 나가달라고 할 사람은 없다. 천연기념물은 어디에 있던지 당연히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송령은 다르다. 자신의 앞으로 등기가 난 땅에 살고 있으니, 아무도 이유를 달수가 없다.

 

같은 천연기념물이지만 전주 삼천동의 곰솔은, 수령이 약 25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 14m, 가슴높이의 둘레 3.92m의 크기다. 인동 장씨의 묘역을 표시하기 위해 심어졌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그러나 2001년도 독극물 주입에 의해 ⅔ 가량의 가지가 죽어 외과수술을 받았다. 잘라진 가지가 보기에도 안타깝다.

 

 

 

남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천연기념물들은 이런 피해를 입기도 한다. 그래서 석송령이 더 부러운 것이다. 자신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보존이 된다. 옆으로 뻗은 가지는 쇠기둥과 돌기둥으로 받쳐놓았다. 보기만 해도 그 위용에 압도당할 만하다. 석송령이 이렇게 자신의 땅을 갖게 된 것은 이유가 있다.

 

마을의 신목인 석송령

 

석송령은 마을의 신목(神木)이다. 마을 사람들이 지극하게 위하는 나무이기 때문에 아무도 건드리지를 않는다. 우리의 습속 중에 하나인 신목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전한다. ‘신목을 건드렸다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한다.’거나 ‘마을에서 위하는 나무를 잘라다가 땔감으로 썼는데, 그 집안에 우환이 그치지를 않았다’라는 이야기는 늘 들어 본 이야기다.

 

 

 

이런 설화 때문이 아니라고 해도 석송령은 끔찍이 위함을 받는 나무다. 석송령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도 이유가 있다. 약 600여 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석관천을 따라 떠내려 오던 것을 지나던 과객이 건져 이곳에 심었다는 것이다.

 

그 후 1930년 경 이 마을에 사는 이수목이란 사람이 영험한 나무라고 하여 ‘석송령(石松靈)’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6,600㎡(1,996.5평)를 석송령 앞으로 등기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석송령은 ‘부자나무’로 불리고 있단다.

 

 

 

언제 찾아보던지 푸름을 잊지 않고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석송령. 소나무의 수령이 600년 정도가 한계라고 하지만, 석송령의 모습을 보면 그런 수령의 한계를 넘어설 것 같다. 곁에는 석송령의 2세가 자라나고 있으니, 부자나무는 무엇이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다. 볼 때마다 느끼는 위엄이 있어 기분 좋은 나무, 석송령은 그렇게 당당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이곳을 찾는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행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 가을철에 보면 반계리 은행나무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천연기념물이 되려면 이 정도 위용은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반계리 은행나무의 높이는 34.5m,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는 자그마치 17m에 달한다. 동서로 38m 정도에 남북으로는 31m 정도의 거대한 나무다. 밑동의 둘레만 해도 15m 정도이니 이 나무의 크기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수령은 800년이 지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을엔 주변이 온통 노랑색

 

이 나무가 가을에 물들기 시작하면 그 멋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반계리 은행나무만큼 무성한 나무가 흔치 않다. 또한 균형이 잘 잡혀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중 가장 아름답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이 나무를 즐겨 찾는 이유는 땅위로 솟아나온 나무의 뿌리 때문이다. 밑동을 둘러 쌓고 있는 돌출된 뿌리들을 보면, 마치 용틀임을 하는 듯하다. 정말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용 몇 마리가 서로 은행나무를 차지하려고 자웅을 겨루는 모습이다. 그래서 나뭇잎이 무성할 때가 되면 모든 일을 마다하고 반계리로 달려간다.

 

 

 

어깨를 펴고 하는 자랑. “나 천연기념물이야”

 

멀리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가 보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 위용이야 어디로 갈까? 나무 밑으로 들어가 위를 쳐다보니, 세상에 정말 아름답다. 나무 잎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하나가 된 은행잎들이 몽환적이다. 그 너머 아직도 초록빛을 띤 은행잎들도 함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밑에서 올려다 본 은행나무. '아~' 하고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아직은 노랑 옷으로 갈아입지 않았지만, 지금도 충분히 아름답다. 아니 오히려 햇볕사이로 보이는 초록색의 조화가 만들어진 멋진 색깔이 더욱 아름답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이 마을에 살던 성주이씨 가문의 한 사람이 심었다고도 하고, 이곳을 지나 가던 법력 높은 대사가 물을 마신 후,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설이야 어느 곳에나 있지만, 은행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계리 은행나무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또한 은행잎이 한꺼번에 물이 들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오랜 성상의 흔적, 나무 혹

 

이 반계리 은행나무를 살펴보면 여기저기 혹 같은 것이 돌출이 되어있다. 그만큼 오랜 성상을 살아왔다는 징표인가 보다. 나무의 모습이 예사롭지가 않은데, 전하는 전설마저 신비하다. 그래도 아직 생육상태가 좋아 무성한 잎을 달고 있다. 가을 단풍이 들 때쯤 찾아간다면, 정말 아름다운 은행나무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이 되면 사진깨나 찍는다는 분들이 전국 각처에서 모두 모여 든다. 시간을 내어 달려올 수 있도록 아름다운 나무이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한 그루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그것은 그냥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아무 나무가 천연기념물이 되는 것이 아니여."

여주에 있는 효종대왕릉은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 효종대왕릉을 가끔 찾아가는 것은, 이 능의 재실 안에 자라는 수령 300년이 넘은 회양목 때문이다. 현재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회양목은, 효종대왕릉과 역사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회양목으로는 유일하게 높이 4m 정도의 큰 노거수

 

효종대왕릉의 사적지 안에 있는 회양목은 잎이 두껍고 타원형이다. 꽃은 4∼5월경에 피고, 열매는 6∼7월에 갈색으로 달리는 사철 푸른 나무이다. 회양목이란 나무는 조경수로 많이 심으며 작고 낮게 자라는 나무이다. 그러나 이 재실 내에서 자라고 있는 회양목은 그 크기가 약 4m정도는 되어 보인다. 옆으로 퍼져나간 가지도 3m 정도로 넓게 퍼졌다. 이 나무는 1673년 구리에 있던 효종대왕릉을 옮겨오면서 재실 안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큰 회양목은 딴 곳에서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가치가 더 크다고도 하지만, 아마 효종대왕의 릉 안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듯하다. 또한 그 나무를 심어 300년이 넘는 세월을, 탈 없이 이렇게 자랐다는 것이 더욱 가치가 있다.

 

힘들 때마다 찾아간 나무, 인연이 깊어

 

살면서 힘이 들 때면 나름대로 찾아가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 중 한 곳이 바로 효종대왕과 인선황후를 모신 영릉이다. 그렇다고 능침까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바로 능 입구에 있는 재실을 향한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담장보다 훨씬 큰 회양목이 반겨주기 때문이다. 대문채에서 재실로 들어가는 일각문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는 회양목.

 

내가 이 나무를 처음으로 찾아본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한참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거듭하는 바람에 힘이 들 때, 처음으로 이 회양목을 보았다. 아마 그 처음 볼 때도 눈이 내리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 만난 회양목 한 그루가 나에게는 큰 의미를 남겨주었다. 우선 이 능이 효종대왕릉이라는 것이 그랬다.

 

 

 

조선조 17대 왕인 효종대왕은 북벌을 꾀했던 왕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 쪽으로 남진을 하자, 청은 우리에게 원군을 청했다. 효종대왕은 우리 군대의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원군을 보내, 송화강과 흑룡강에서 러시아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런 계기가 아마 북벌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벌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갑자기 승하한 효종대왕. 북벌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이 회양목에 전해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 나무가 대왕의 마음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거목에는 기운이 있는 것일까?

 

겨울철에 찾아가도 그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있던 회양목이다. 크기도 하지만, 300년이 넘는 시간을 이렇게 당당하니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 당시 의기소침해 있던 나에게는 정말 큰 힘을 주었다. 그래서 그 이후 힘이 들 때면 이곳을 찾아, 한참이나 이 회양목을 바라보고는 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회양목이 예사롭지가 않다는 생각이다. 아마 효종대왕의 그 북벌의 기운이 이 나무에 전해진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언제보아도 당당한 회양목. 비록 한 그루가 이렇게 서 있지만, 그 회양목으로 인해 효종대왕의 능이 더욱 돋보인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얼마를 더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가려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천년이고 그 이상이고 이렇게 푸르게 살아가기를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나무는 많지만 이 나무가 나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 겨울마다 찾아보는 회양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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