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법보종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으로 유명한 사찰이다. 해인사는 신라시대에 화엄종의 정신적인 기반으로, ‘화엄십찰’의 한 곳으로 세워진 가람이다.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 이정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인 802년 10월 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고 한다.

이 해인사 한편에는 ‘학사대’라는 곳이 있다. 신라 말기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은거하였던 곳이라고 전한다. 최치원은 이곳에서 시서에 몰입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소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루는 최치원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데, 수많은 학들이 날아와 경청을 했다고 한다.



학사대에 서 있는 기이한 전나무

이 학사대에는 기이하게 자라는 전나무 한 그루가 있다.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기 위해 가지를 아래로 내린 듯하다. 이 전나무는 최치원이 전나무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 전설로 미루어보면 이 나무의 수령은 꽤 오래 되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 문성왕 19년인 857년에 출생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으로 유학을 가, 다시 신라로 돌아온 것이 885년이다. 그 뒤 897년에 효공왕의 ‘사사위표’를 찬술하였고, 효공왕 8년인 904년 무렵에는 해인사 화엄원에서 〈법장화상전〉을 지었다. 908년에는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짓고 난 후,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최치원이 이 곳 학사대에 머물렀던 것은 910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본다고 해도 이 전나무의 수령이 1,100년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가지가 아래로 처진 전나무

전나무는 대개가 굵은 한 줄기가 곧바로 자라난다. 하지만 학사대에 있는 전나무는 어느 정도 원 줄기가 위로 오르다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가지가 아래로 처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지팡이를 거꾸로 꽂은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전나무의 높이도 상당하다. 대충 눈대중으로 따져보아도 25m 이상이 될 것만 같다.



전나무를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럽다. 그만큼 이 전나무는 위로 까맣게 솟아 있듯 보인다. 나무줄기가 갈라진 곳에는 풀씨가 떨어져 새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아끼고 보듬은 최치원의 마음인가 보다.

그 아래로 가지가 부러져 있다. 그런데 그 가지가 부러진 모습이 어느 쪽에서 보면 용머리 같기도 하고, 어느 쪽에서 보면 늑대의 머리 같기도 하다. 아마도 우연히 부러진 가지가 남은 모습이지만, 해괴한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대단한 나무라고 생각을 한다. 학사대에 주변에는 고목이 된 소나무 등이 보인다. 그만큼 이 곳이 원시림이었을 것이다.


그곳 학사대에서 은거를 했던 최치원. 가야금을 벗 삼아 세월을 유유자적하던 최치원에게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높다랗게 위로 솟은 줄기와 아래로 고개를 떨군 가지. 위로는 임금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보살피고 싶었던 최치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7월 26일, 해인사에서 만난 학사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485-1에는 전남 지방기념물 제45호로 지정이 된 ‘담양후산리은행나무(潭陽后山里銀杏)’가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선조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지금의 호남지방을 돌아보던 중, 이곳 후산에 살고 있던 선비 명곡 오희도(1583∼1623)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에도 명곡의 북쪽 정원에는 거대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명옥헌 뒤에는 오동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 나무 밑에 인조가 타고 온 말을 맸다는 것이다.  ’인조대왕 계마행(仁祖大王 繫馬杏)’ 또는 ’인조대왕 계마상(仁祖大王 繫馬橡)‘이라고 이 은행나무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인데, 현재 오동나무는 고사하여 없어졌고 은행나무만 남아있다.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30m 정도이다. 가슴높이의 둘레는 7.7m에 동서로 펼친 가지가 20m정도에 남북으로는 각각 14m와 10m 정도의 거대한 은행나무이다.

지난 6월 18일 담양군의 답사 일정 중에 만난 후산리 은행나무.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서 벌써 나무의 윗부분이 보일 정도로 거대하다. 600년 세월을 그렇게 한 자리에 서서 인간들의 온갖 모습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런 것을 눈을 감고 있던 은행나무의 속내를 닮고 싶다.




경남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772-1번지에는 옛 가산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폐교가 된 이 초등학교 교정 안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경남 기념물 제197호로 1997년 12월 31일자로 지정이 된 이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년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35m 정도에 밑동의 둘레가 8m에 가까운 이 느티나무는, 1480년경에 훈도인 전경륜심었다고 한다. 전경륜이 이 마을에 집터를 잡았는데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이 배(=船)와 같다고 하여, 서편 냇가 남북 400m까지 느티나무 숲으로 조성하여 마음의 풍림 겸 배의 돛대로 삼았다고 전한다.



일제 말에 베어버린 숲

2,000평이나 되는 울창한 느티나무 숲. 아마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그런 넓은 장소에 서 있던 느티나무들을 일제 말에 모두 베어버리고, 현재 남아있는 한 그루만이 서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을은 ‘정천, 혹은 ’샘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가 사후에 대사헌으로 추증이 된 전팔고 선생의 호를 따 ‘원천’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1592년에는 의병들이 이 숲에 모여 회동을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이유로 일제에 의해 모든 나무를 베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00여 평이나 되는 느티나무는 선비들의 풍류장소로 이용이 되다가, 임진왜란 때 수난을 당했으며, 그 뒤 한일합병의 슬픔까지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마을 사람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나무에 모여,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마을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홀로 남은 느티나무 한 그루

지난 6월 24일 거창군을 답사하면서 찾아간 가조면 원천리. 옛 가산초등학교 교정에 느티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갔다. 그러나 문은 굳게 닫혀있고, 주변은 철망으로 울타리를 쳐 놓았다. 폐교가 된지 시간이 흘렀는지, 담장에는 넝쿨이 타올라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이리저리 들어갈 방법을 찾고 있는데, 철문 옆에 조그마한 공간이 보인다. 그 안으로 들어갔더니 바로 학교 교정 안이다. 느티나무는 옛 학교 건물과 마주한 곳에 서 있다. 낮은 철책으로 보호막을 둘러놓은 느티나무. 나무의 밑동에는 혹처럼 달라붙은 것이 흡사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생명의 원천, 느티나무

오래된 고목에는 정령이 산다고 하더니, 저 혹에 생명이라도 깃든 것일까?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고 자랐을 느티나무가, 소리가 사라진 지금은 왠지 측은해보이기까지 한다. 나무 가까이로 가서 나무를 쓰다듬어 본다. 거친 감촉사이로 온기가 느껴진다. 생육이 좋은 이 원천 느티나무는 홀로 이렇게 폐교가 된 교정에 서 있다.

밑동 근처에는 푸른 이끼가 가득 달라붙어 있는데, 위를 보니 중간이 잘려있다. 아마 원줄기의 한편이 잘려나간 듯하다. 이것도 일본에 의한 아픔은 아니었을까? 가는 곳마다 만나게 되는 일제의 만행, 그리고 뒤이어 맹목적인 종교적인 훼손. 거기다가 도적 떼들까지. 도대체 이 나라의 문화재가 정말 마음 편하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무를 들러보고 있는데,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나무의 벌어진 틈 사이에서 기어 나온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렇게 모든 생명을 감싸고 있건만, 이제 인적 끊긴 폐교의 안마당에 서 있는 이 느티나무가 온전할 것인지. 교정을 떠나면서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게 된다. 불안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무 밑동에 검은 자국을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왕버들은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갈잎 큰키나무이다. 이 나무의 원산지는 한국이며 일본, 대만, 중국에도 서식한다. 왕버들은 물속에서도 썩지 않는 나무로 유명하다. 나무의 키는 10~20m로 크게 자라며, 주로 습지나 냇가에서 자란다.

나무의 모양이 좋고 특히 진분홍색의 촛불 같은 새순이 올라올 때는 매우 아름다워, 도심지의 공원수나 가로수로도 아주 훌륭하다. 왕버들 나무의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이거나 긴 타원 모양이며, 잎이 새로 돋을 때는 붉은 빛이 돈다. 암수가 딴 그루이고, 4월에 잎과 함께 꽃이 핀다.



광주호를 끼고 있는 마을 충효동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은 조선 정조 때 충효리에서 유래된 충효동이, 1957년 광주시에 편입되면서 리가 동으로 되었다. 그 후 1998년 9월 21일 행정동인 충효동(법정동 : 충효동, 덕의동, 금곡동) 청옥동(법정동 : 화암동, 청풍동, 망월동) 장운동(법정동 : 장등동, 운정동) 3동을 통ㆍ폐합하여 현 석곡동이 되었다.

이 충효동의 왕버들은 광주호 동쪽 제방과, 충효동 마을 사이의 도로가에서 자라고 있다. 원래는 일송일매오류(一松一梅五柳)라 하여 마을을 상징하던 소나무 한 그루와 버드나무 한 그루, 그리고 왕버들 다섯 그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왕버들 세 그루만 남아있다.




충효동 일대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정자가 많이 있어, 주변 조경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재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왕버들도, 그 때 심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세 그루의 나무 중 가장 큰 나무의 높이가 12m, 둘레가 6.3m이고, 작은 나무의 높이가 9m, 둘레가 6.25m로 세 그루가 고른 크기로 자라고 있다.

왕버들에 빠져버리다.

지난 6월 18일, 전북 순창군과 전남 담양군을 답사하면서 들리게 된 광주호 일원. 길을 가다가보니 큰 나무들이 보인다. 앞을 보니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차에서 내려 나무가 서 있는 곳으로 가다가 그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수령이 400여년이 지난 것으로 추정되는 왕버들 세 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왕버들의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가지가 늘어져 버팀기둥을 세웠으며, 나무의 밑동은 그야말로 혹부리라도 된 듯하다. 이런 나무가 세 그루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무 근처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한낮의 더위를 피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모습이 가히 놀랍기만 하다. 세 그루의 나무 모두가 각각 나름대로의 장관을 연출한다. 안쪽의 나무 한 그루는 가지가 늘어져 땅에까지 닿고 있다. 그 나무 가지 밑으로 잠시 들어가 본다. 한 낮의 더위를 가시기에 충분한 그늘이 생겼다. 그렇게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충효동 왕버들. 모두 다섯 그루가 있었다는 왕버들의 두 나무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남아있는 왕버들 나무의 모습으로 보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고사한 것은 아닌 듯하다.



기기묘묘한 형태를 자랑하는 충효동 왕버들나무. 그동안 많은 나무들을 보아 온 나로서도 이런 나무를 보기란 흔치가 않다. 어찌 이리 제 멋대로 생긴 것일까? 시간이 없어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동행자의 재촉도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그 나무에 손을 대고 있고 싶은 것은, 오랜 세월을 지내 온 왕버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이다.

옛 풍습을 지키는 거창군 무촌마을 사람들

답사를 하다가 보면 이런저런 일을 많이 당한다. 마을에 들어가면 길을 묻거나 문화재의 소재를 파악하다가 보면,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무촌마을에 들렸다. 마을에는 경남 기념물 제198호인 수령 400년이 지난 은행나무가 서 있기 때문이다.

마침 무촌마을 은행나무가 서 있는 옆에는 마을회관이 있고, 그 옆에 정자가 있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고 계시다. 이 은행나무는 원줄기에서 새싹이 나와 흡사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 있는 듯이 보인다. 가지는 8개가 사방으로 뻗어 자라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가을이 되면 많은 은행을 수확한다고 한다.


무촌마을 마을안에 자리잡은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이곳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할머니 당이라고 한다. 정월 보름에 지낸 당제 때 쳤던 금줄이 쳐져 있다.


마을 사방에 당산이 있는 무촌마을

이 은행나무 앞에는 제단이 있다. 돌로 만든 제단의 앞쪽에는 ‘당산제단’이라고 음각이 되어있다. 이 당산을 마을에서는 할머니 당이라고 부른다. 이 할머니 당에는 비린 음식을 제수로 차리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당제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더니, 어르신들이 굳이 이장님을 찾는다. 마을을 찾아오신 손님들에게 이장이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들을 하시는 것을 보니 마을 이장님보다 윗분들이시다. 그리고 당제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아시는 듯하다. 그런데 굳이 이장님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잠시 후 무촌마을 이민언(남, 68세) 이장님이 정자로 오시고 나서, 본격적인 마을 당제에 대해 들을 수가 있었다. 이장님과 어르신들은 앞장서 마을에 있는 네 곳의 당산을 안내를 해주신다.



당제를 가장 먼저 지내는 할아버지 당으로 오르는 길 양편으로는산죽이 하늘을 가란다. 제단은 두개가 놓여있으며 하나는 산신단, 또 하나는 .주산신제단'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아래편 돌 밑에는 정우러 보름에 당산제를 올린 후 제물로 사용한 돼지머리를 묻는 곳이라고 한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있어야 해’

마을 산제당이라고 하는 할아버지 당을 찾아가면서 동행을 하시는 어르신께 슬쩍 물어보았다. 왜 꼭 이장님이 오셔서 말씀을 하셔야 하는 가를. 그랬더니 간단하게 대답을 하신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중요한 것이지. 우리 마을의 가장 어른이 이징님 아니신가? 그래서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당연히 이장님한테 들어야 하지”

산제당인 할아버지 당을 올라가면서 계단에 나 있는 풀을 뽑으신다. 할아버지 당 근처에도 금줄을 둘러놓았다. 참나무인 당산나무는 밑동의 둘레가 2m 가 넘을 듯하다. 몇 년이나 묵은 나무냐고 질문을 드렸더니, 아주 오래 되었다는 것 밖에는 알 수가 없다고 하신다.

산제당에는 산신당이라고 쓴 제단이 있고, 그 옆에는 ‘주산신제단’이라고 쓴 돌이 놓여있다. 이곳이 바로 가장 먼저 제를 올리는 할아버지 당이라는 것이다. 이곳에 제를 지낼 때는 돼지머리를 사용하며, 제사를 마치고 나면 그 돼지머리를 땅에 파묻는 다는 것이다. 제단 옆에는 커다란 돌이 보이는데, 그 밑에 돼지머리를 통째로 묻고 내려온다고 한다.


동구당산이라 부르는 아들당산과 대곡천 옆 논둑에 쌓아 올린 며느리당산


돌탑으로 쌓은 아들당산과 며느리당산

할아버지 당을 돌아보고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마을 입구라고 하는 곳에 자리한 아들당산으로 향했다. 아들당산은 우측으로 연수사를 들어가는 길 건너편 산 아래, 돌을 쌓아 만든 누석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이곳에도 금줄을 쳐 놓았는데, 이 당산을 ‘아들당산’ 혹은 ‘동구당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며느리당산은 마을의 북쪽 대곡천이 흐르는 곁 논둑에 자리하고 있다. 며느리 당산 역시 돌탑을 쌓아놓았다. 네 곳의 무촌마을 당산은 마을을 에워 쌓고 있는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다. 어르신들은 당산제를 정성을 다해 드린다고 말씀을 하신다. 인근에 있는 마을들도 당산제를 지내지 않다가, 마을에 화가 있어 다시 시작을 하였다고 귀띔을 해주신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대곡천. 예전에는 이곳에서 정월이면 집집마다 용왕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에서 사용하는 당산제 축문. 아들당산의 축문으로 네 곳 모두 축문이 있다.


축관을 지내셨다는 어르신께서 축문을 가져다주신다. 컴퓨터에 저장을 해 놓고 매년 그 해에 맞게 출력을 하여 사용을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고로 근본이 있어야한다고 말씀들을 하시는 무촌마을 어르신들. 이장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아도, 이 마을이 얼마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 수가 있다. 이런 마음가짐이 있어, 오늘도 무촌마을은 모두가 탈 없이 지내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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