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 147-2에 소재한 수북정. 한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이곳을 찾았다. 시원한 백마강 줄기가 앞을 흐르는 이 수북정은 원래는 백제 때에 있던 누각이라고 한다. 백마강에 내려다보고 있는 수북정은 부소산의 남서쪽 자온대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충남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수북정(水北亭)은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이다. 조선조 광해군 때 김흥국이 세운 것으로 정자 이름을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수북정과 백제 때에 있었다는 수북정과는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일까? 정자 명칭을 보아서는 백마강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절경에 자리 잡은 수북정이 이렇게 소란해

 

수북정은 절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자 한편으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기암괴석이 솟아 나있다. 몇 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는 공사를 하느라 백마강의 물은 흙탕물로 변하고, 부여와 규암을 연결하는 다리가 앞으로 생겨, 연신 찻소리가 귀를 찢는다. 이곳이 이렇게 변할 것을 누가 알았으랴. 다만 고목을 주변에 두고 서 있는 수북정만이 자태를 뽐내고 있지만, 이젠 예전의 그 정취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잘 조경이 된 계단을 따라 수북정 위로 오른다. 주초를 약간 높게 놓고, 그 위에 입구를 뺀 주위를 난간으로 두른 정자이다. 긴 처마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사방에 기둥을 받친 모습이 색다른 느낌을 준다. 앞쪽으로는 수백 년은 묵었을 커다란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수북정은 그렇게 말없이 백마강을 굽어보고

 

수북정을 건립한 김흥국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경인(景仁)이요 호는 수북정(水北亭)이다. 선조 22년인 1589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홍문관 정자·정언·북평사를 거쳐,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영변, 회양, 한산, 양주 등의 방백을 지내기도 했으며, 광해군 말년에는 김유 등에게서 반정을 도모하자는 권유를 받기도 하였으나, 이미 광해군의 녹을 먹었기 때문에 그리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 후 고향에 낙향하여 수북정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유현으로 천거되어 부제학을 지냈으며, 독학을 하고 시문을 좋아하여, 당시의 거장 김장생, 신흠 등과 교분을 쌓았다.

 

 

수북정집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한 김흥국. 그의 생각에는 이 수북정이 남다른 정자였을지도 모른다. 정자 옆으로 길게 늘어선 백제교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무더운 여름 날 귓가에 울려 짜증스럽다. 이곳에서 고향으로 은거를 하여 후학을 지도하고, 마음이 맞는 지인들과 교분을 쌓고 싶어 하던 수북정. 아마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기라도 했다면 이렇게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지는 않았을 것을. 비로 인해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비통에 잠겨서일까? 벌겋게 변한 백마강 물이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와 정자 안을 헤집고 다니면서 소란을 피운다. 그렇지 않아도 짜증스러운 날인데, 지나친 소음으로 버틸 수가 없다. 길을 돌아내려오면서 고개를 돌려 수북정을 올려다본다.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자태를 잃지 않은 정자, 수북정. 그 모습이 바로 정자의 주인의 심성을 닮아 있는 것만 같다.

 

 

공주 금강가에 소재한 공산성은 백제시대의 산성이다. 총 길이 2,200m의 공산성은 포곡형 산성으로 백제 문주왕이 475년에 웅진(공주)으로 천도하여 64년 동안 백제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공산성을 한 바퀴 돌다가 보면 금강 가에 접한 가파른 산성 길을 걷게 된다. 금강 쪽이나 성 안쪽 모두가 급격한 경사로 이루어져, 이곳의 성곽은 1m 남짓하게 쌓아올렸다. 금강을 이용해 적이 침입을 한다고 해도, 이렇게 험한 곳으로는 범접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는 만하루

 

그 가파른 성 길을 따라 내려오면 밑에 정자가 보인다. 만하루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시설과 경승을 관람하는 누각의 구실을 겸하고 있는 정자이다. 만하루를 지나면 다시 경사가 진 곳을 오르게 되기 때문에, 이 정자가 더 돋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만하루는 조선 후기인 영조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1982년에 홍수로 매몰되었던 터를 발견하면서 1984년에 측면 2, 정면 3칸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이나 기단석, 디딤돌 등은 당시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만하루. 성을 한 바퀴 돌아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는데,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온다. 때마침 주변에서 작업이라도 하는 것인지, 인부 10여명이 정자에 올라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만하루에 오르면 금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양편 성벽을 자리 잡아 고목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마 이런 절경에서 금강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이라도 한 자 남겼을 터인데, 정작 정자 안에는 그러한 글 한귀를 찾아볼 수가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금강의 물을 이용한 연지(蓮池)

 

만하루와 성내의 절인 영은사 사이에는 연지라는 못이 있다. 이 연지는 금강 가까이에서 물을 확보할 수 있는 지형상의 조건을 이용한 것이다. 연지를 보면 이 연못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붕괴를 막기 위해 돌로 계단식의 축대를 쌓아 올렸다. 깊은 연못에 연꽃이라도 만개했었을까? 그 이름을 연지(蓮池)라고 부른 것을 보면.

 

연못의 북쪽과 남쪽에 계단을 놓아 수면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한 것도 알고 보면 이 연못에 연꽃이 있었음을 그려 볼 수 있다. 만하루에서 내려다보는 연꽃이 조금은 아쉬워 직접 연못 수면으로 내려가 연꽃을 관람하였을 것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눈으로만 보는 것은 아닐까?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보면 괜히 그런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텅 빈 연못이지만, 옛 모습을 그려보면 절로 흥이 난다.

 

날도 더운데 땀 흘리며 왜 길을 나서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으로 보는 문화재는 그 아름다움을 글로는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지만. 하지만 마음의 눈을 열고 보면 그 문화재의 이름다움을 보고, 그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에 길을 나서게 되는가보다.


경북에서 충북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조령 삼 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20m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수옥폭포. 단원 김홍도가 초대 현감으로 부임하기도 했다는 이곳은 '옥을 씻는다'고 할 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다. 명절 연휴에 꼭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이 폭포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이다.

 

정자에서 바라본 한 겨울의 얼어붙은 수옥폭포
 

사극 다모와 여인천하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수옥폭포는, 지난 해 MBC 대하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그 유명세를 타고 있다. 여름철에야 폭포의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폭포가 꼭 여름에만 아름다울까? 겨울철에 보는 폭포의 모습은 또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그 모습을 보기위해 설 연휴에 찾아들었다. 여름철 주변 암반과 노송들이 어우러진 폭포는 절경이다. 하지만 설이 지난 명절에 찾는 수옥정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 줄까? 

 

연풍현감 조유수가 지은 옛 수옥정

 

폭포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 여름이면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흥을 돋우고, 겨울이면 빙벽으로 변하는 폭포를 보면서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곳. 수옥정은 바로 그런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정자가 처음 지어진 것은 숙종 37년인 1711년이다. 당시 연풍현감 조유수가 청렴했던 삼촌인 동강 조상우를 기려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수옥정(漱玉亭)' 이라 했다. 이는 폭포의 암벽에 적힌 글이 증명을 한단다.

 

물이 언덕에 부딪쳐 흐르는 모습이 옥 같다는 뜻이니, 가히 이곳의 경치와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당시의 수옥정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의 수옥정은 예전 수옥정이 있던 자리에, 1960년에 팔각정으로 새롭게 꾸몄다. 한 겨울 노송의 가지에는 하얀 눈이 쌓여, 그 무게로 가지들이 적당히 밑으로 처져있다. 엊그제 내린 눈을 치우지 않아 눈을 밟고 걷는 기분이 좋다. 발 밑에서 들리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이 눈길을 하염없이 밟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이 쌓인 노송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수옥정의 겨울정취


오늘의 수옥정은 암벽에 얼어붙은 빙벽과 그 틈새로 녹아 흐르는 물줄기 그리고 노송에 쌓인 눈꽃과 함께 서 있다. 이 수옥정을 조선조에 처음으로 연풍현감 조유수가 지었다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이 수옥폭포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말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공민왕은 이 수옥폭포가 바라보이는 곳에 작은 정자를 지어 소일했다고 하니. 나름 수옥정의 역사는 오래다. 공민왕이 이곳에 와서 행궁을 지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자 하나 쯤은 지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바위 틈 사이에 얼어붙은 고드름

 
신비하고 아름다운 빙벽

 

얼어붙은 수옥폭포의 신비함

 

수옥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류의 두 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 확인할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밑에서 바라보는 폭포 하나만 갖고도 이렇게 절경이다. 밑에 소는 얼음이 얼어있고, 중간에 바위의 틈새 사이에도 천정에 고드름이 달려있다. 암벽에 얼어붙은 빙벽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수옥폭포에는 얼음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두라마 여인천하와 다모, 그리고 최근에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날이 풀리면서 조금씩 녹기 시작한 얼음이 물이 되어 소리를 내며 폭포 아래로 흐른다. 그 또한 여름 시원한 물줄기와 다른 정취이다. 폭포주변 나무에도 고드름이 달렸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신비한 겨울철의 장관을 연출한다. 겨울에 보는 폭포의 신비함. 매번 많은 폭포들을 찾을 때마다,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만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겨울에 만난 폭포는, 우리가 알지 못한 또 다른 풍광을 맛보게 한다. 아마 이 풍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또 다른 수옥정의 모습과 함께.

충북 괴산군 괴신읍 검승리에 가면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정자는, 박지겸(1549~1623)이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은 정자 겸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인 박지겸은 본관은 함양으로 자는 익경, 호는 애한정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모시기도 했으나,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애한정이라 하였다. 애한정은 그 뒤 원 정자 뒤에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몇 차례 중수를 한 애한정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옮겨지었고, 숙종 38년인 1712년과 44년인 1716년에 중수를 하였다. 그 후 1979년에 크게 보수를 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애한정은 새롭게 축조한 현재의 애한정 앞에, 예전의 애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애한정을 오르려는데 앞에 작은 전각 하나가 풀숲에 가려져 있다. 계단은 있으나 풀들이 자라 가리고 있다.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고종 28년인 1891년에 건립한 박상진의 효자문이다. 박상진은 애한정을 창건한 박지겸의 9대손이다. 낙향한 선비가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테니, 그 9대손인 박상진 또한 생활이 궁핍했는가 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박상진은 품을 팔아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부친이 술을 즐겨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계속 술을 드실 수 있도록 하였단다.

 

 

피를 내어 부친을 간구한 효자 박상진

 

후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부친의 병 구환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피눈물로써 3년 상을 마쳤으며, 그의 나이 85세에 이르렀어도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심을 충청도 선비들이 예조에 보고하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행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동몽교관조봉대부>란 벼슬을 추증하고, 효자 정문을 세웠다. 애한정을 오르다 보면 계단 우측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녹음을 자랑한다. 위로 오르면 담장에 둘러싸인 원래의 애한정이 있다. 보수를 하여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뒤편에는 현재 애한정의 현판을 단 정자가 있는데, 아마 이곳에 걸렸던 현판을 옮겨간 듯하다. 원 애한정과 옮겨지은 애한정을 잘 보존해 놓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애한정이 역사 속에서 변화한 형태를 알 수가 있다. 바람직한 문화재의 보존이란 생각이 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던가? 오늘 갑자기 애한정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홀연히 마음을 비우고 낙향을 하여,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 등을 쓴 박지겸과, 부친의 병환을 고치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낸 효자 박상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다.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애한정의 주인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요즈음 세태가 하도 어이없게 돌아가서인가 보다. 어린 생명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나라 살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돈 버는 일에 눈이 벌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신의 배만 채우겠다는 생각들로 온통 나라가 검어지는 듯해서다.

 

대선이 2일 남았다. 대선 도전하는 사람들, 우선 이곳부터 가서 마음을 내려 놓고 오기를 바란다. 그 자신들이 과연 이 애한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이 가서도 깨닫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이 나라의 국민을 이끌고 갈 아무런 자질도 없다는 것일게다. 요즈음에는 윗물은 맑아도 아랫물이 똥물일 때가 비일비재한데, 윗물까지 맑지 않다면 그 아랫물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작은 시골 정자 하나가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오늘 이곳 애한정을 가슴속에 담는 것도, 나리들께서 꼭 이 시골의 작은 정자 애한정과 효자문을 찾아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86번지에 소재한, 충청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76호인 팔괘정.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편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이 팔괘정은 송시열 선생이 율곡선생을 추모하며,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로 전해진다.

 

스승과 가까이 하고 싶어 지은 팔괘정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이 강경 황산리 금강가에 임이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운 곳에서 있고 싶어서 정자를 지었다. 임이정과 불과 1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는 팔괘정은 그 모습도 임이정과 닮았다. 팔괘정은 금강을 바라다보는 서향으로 세워졌으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지은 건물이다. 정면은 동일한 간격으로 그중 두 칸은 넓은 대청을 만들고, 한 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둥근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초익공식과 동일한 구성의 공포를 짜 올린 팔괘정. 창방 위에는 기둥사이마다 다섯 개의 소로 받침을 배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자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꼽히는 팔괘정은, 한식 가옥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옛 모습을 그려보다.

 

송시열은 선조 40년인 1607년에 태어나, 숙종 15년인 16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계 김장생이 강경 황산에 임이정을 지은 해는 인조 4년인 1626년이다. 송시열이 팔괘정을 지은 때를 인조시대로 보는 이유도, 김장생이 임이정을 지었을 때와 같은 시기로 보기 때문이다. 임이정과 팔괘정은 크기나 모습이 흡사하다.

 

당시 황산은 김장생과 송시열이라는 두 거목이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리고 두 정자 사이에는 조금 아래서 내려서 죽림서원이 있었으니, 날마다 금강가에 글 읽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았을 것이다.

 

 

금강을 내려다보면서 글을 읽으며 세상을 논하고, 시 한수를 지어 어딘가에 적지 않았을까? 팔괘정의 옛 모습을 그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마 당시 이곳에는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들어 그 자리에 끼는 것을 영광으로 알지 않았을까? 무심한 철새들이 무리지어 팔괘정 앞을 날아간다.

 

바위벽에 남긴 흔적

 

팔괘정 옆으로는 커다란 암벽이 있다. 예전 이 팔괘정을 세운 송시열은 이 바위를 바라다보며 나라를 위한 충정의 굳은 의지를 키웠을 것이다. 바위에는 송시열이 썼다는 '청초암(靑草岩)'과 ‘몽괘벽(夢掛壁)’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곳에서 젊음의 기상을 떨치고, 꿈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마음에 새기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금강을 한가롭게 유영하는 철새들이 날아오른다. 아마 멀리 북녘까지 날아갈 차비라도 하려는가 보다. 저녁 햇볕이 저만큼 강물에 길게 붉은 띠를 두른다. 이런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서, 이곳에서 후학들에게 강학을 했을 선생의 마음이 그려진다. 봄날 이는 황사바람 한 점이 스치고 지나간다. 정자 옆 바위는 미동도 없다. 그것이 팔괘정을 지은 선생의 마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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