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철 놀이에 빠진 사람들 부러워

 

가을은 여행의 계절이다. 지난 28일 잠시 틈을 내어 가까운 여주로 달려갔다. 매주 한번은 이웃 도시에 있는 문화재와 명소 등을 찾아보는 것이 요즈음 유일한 낙이다. 마침 날씨도 좋고 단풍철이라 길이 많이 막힐 줄 알았지만 평일이라 그런지 영동고속도로애도 그렇게 많은 차들이 몰리지 않는다. 수원을 출발해 한 시간 남짓 걸려 명성황후 생가에 도착했다.

 

여주시 여주읍 명성로 71(능현리)에 소재한 명성황후 생가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조선 고종(재위 18631907)의 비 명성황후(18511895)가 태어나서 8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의 장인인 민유중(閔維重)의 묘막으로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명성황후는 민치록의 딸로 철종 2년인 1851년에 태어나 16살에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여 개화정책을 주도해 나갔으나 고종 32년인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벌써 몇 차례나 이곳을 들렸지만 들릴 때마다 가슴 한 편이 아린 것은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살림집의 특징 잘 보여줘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 중기 살림집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복원이 되었다고 하지만 집안을 돌아보면 여염집치고는 잘 정돈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양편으로 행랑채가 늘어서 있다. 여흥민씨는 우리나라 역사 상 8명의 왕비를 낸 유서깊은 문중이다. 그런 여흥민씨의 집터는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행랑체보다 높게 터를 잡고 있는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사랑채가 자리하고 안으로 안채가 자리한다. 행랑채와 안채는 자 형으로 전형적인 중부지방 가옥 형태를 구성하고 있다. 안채는 중문과 이어져 부엌과 안방이 자리하고 대청과 건넌방이 이어져 있다. 건넌방의 툇마루는 높게 놓고 아래편에 아궁이를 놓았다.

 

 

사랑채는 남자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높게 앉은 사랑채 밖으로는 집 앞에 널려진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지는 부분에 작은 협문을 내어 별당채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별당채는 일자형 초가로 방과 대청이 있는데 이 별당채가 바로 명성황후가 8살까지 자랐던 집이다.

 

명성황후는 파란만장한 한국근대의 격동기 속에서 갑오동학혁명 이후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다가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사주를 받은 일본 낭인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되었다. 현재는 명성황후 생가 앞에 기념관을 짓고 일본에서 생가를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노는 고택이 부럽다

 

명상황후 생가 옆에는 민가마을을 조성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생가를 찾아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명성황후 생가 정비를 하면서 서울에 있던 감고당을 옮겨오고 민가마을을 마련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주변에는 연못과 공터를 마련하고 앞으로는 넓은 주차공간을 마련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연못에는 어린 아이들이 단체로 찾아와 연못에서 자라고 있는 커다란 물고기들을 보고 대화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참 천진난만하다는 생각이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연과 벗 삼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마련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부럽다. 우리 수원의 행궁동에도 한옥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렇게 자연과 더불어 즐길만한 곳이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어린이들이나 가족단위로 함께 즐길 곳을 찾아다닌다. 그런 곳을 마련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수원을 찾아올 것이란 생각이다. 한옥을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늘 아쉬웠던 점은 바로 민속촌에 소재하고 있는 남창동 양반가옥이다.

 

99칸의 대저택이 수원에 그대로 있었다고 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인지를 생각해본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여주 명성황후 생가를 돌아보면서 우리에게도 저런 공간 하나 쯤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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