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창파 맑은 호수 그 가운데 자리하고,

봄바람에 잔물결 출렁이네.

살구꽃 물가를 뒤덮었고 버들은 휘늘어졌다네.

비구름 걷히고 하늘이 맑아지니, 붉은 석양 출렁이며 햇살을 쏟아내네.

 

위 시를 지은 채팽윤(1669(현종 10)1731(영조 7))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강이며 자는 중기, 호는 희암, 은와이다. 현감 시상(時祥)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시문과 글씨에 뛰어나 해남의 두륜산 대화사중창비와 대흥사사적비의 비문을 찬하고 썼다. 저서로는 <희암집> 29권이 있으며, <소대풍요 昭代風謠>를 편집하였다.

 

 

 

시인묵객들이 찬한 화진포

 

채팽윤이 3월 어느 봄날에 화진포를 찾아 읊은 시이다. 화진포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큰 석호로 많은 이름을 갖고 있다. 고려 말의 문집에서는 열산호(列山湖)’라고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열산호(烈山湖)부터 화진포(花津浦), 화진호(花津湖),화진포(和眞浦), 화진포(華津浦), 포진호(泡津湖)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고성은 호수와 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고장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전까지만 해도 현 속초시에 있는 영랑호가 간성군에 속해있는 호수였다. 조선시대 남인학자 이만부의지행부록(地行附錄)동계조에 보면 간성(수성)의 대표적인 3대 호수는 화진포(花津浦), 광호(廣湖=여은포라고도 불렀으며 현 봉포리와 용촌리 사이에 있는 석호이다), 영랑호(永郞湖)라고 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최유해의 영동산수기(嶺東山水記)에서도 간성에는 영랑(永郞)이라고 하는 호수와, 화진(花津)이라고 부르는 두 호수가 있다고 한다. 모두 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인데 영랑은 기이한 바위들이 있고, 화진은 기이한 나무들이 많아 두 곳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한 경개들이 있었다고기록하고 있다.

 

이 화진포 앞쪽 동해바다를 보면 500m 정도 앞 해상에 1,000여평 면적을 가진 금구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은 금구능파라고 하여서 금구도의 파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고성팔경에 해당한다.

 

금구도는 광개토왕의 무덤일까?

 

고구려의 19대 태왕인 광개토왕은, 이름은 담덕이며 374년에 탄생했다. 386년에 고구려의 태자로 책봉된 후, 391년 고구려 제19대 태왕에 등극했다. 고구려 최초로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였으며, 즉위년에 관미성을 비롯한 백제의 10개의 성을 빼앗았다. 392년에는 황해도지역에 있는 백제 북쪽 10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고구려 북쪽 거란을 정복하였다.

 

 

396년에는 수륙 양쪽으로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의 성 58개를 함락시키고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400년에는 백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라를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였으며, 404년에는 남쪽국경에 침입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퇴했다. 407년에 후연이 망하고 북연이 등장하자, 북연을 고구려에 굴복시켰다. 그 해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6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410년에는 동부여와 연해주를 공격하여 64개의 성을 획득하였다. 412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화진포 앞 동해에 있는 금구도는 섬 위에 대나무가 가을이 되면 금빛을 띤다고 하여 금구도라고 한다. 금구도는 여러 문헌 기록상으로 볼 때,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초도(草島)‘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초도라는 지명이 일제강점기 중 후반 무렵에 이르러 지금의 '금구도(金龜島)'라는 지명으로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일려졌다.

 

이 곳은 신라시대 수군 기지로 해안을 지키던 흔적인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리고 대나무 숲이 형성되어 있는 섬의 중심부에서, 19974월 와편과 주춧돌이 문화재연구소 학술조사반에 의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 후 200810월에는 현장조사와 함께 2달간의 조사에서는, 건물지 및 우물지 고려시대 청자 유물 등이 발견이 되었다.

 

 

고구려 연대기에 따르면 광개토왕 3년인 3048월 경 거북섬에 왕릉 축조를 시작했으며, 188월에는 화진포의 수릉 축조현장을 왕이 직접 방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 서거 후 2년 뒤인 414(장수왕 2) 929, 광개토왕의 시신을 화진포 앞 거북섬에 안장했다고 한다.

 

문자명왕(고구려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91~519) 2년에는 이곳에서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는 와편과 주초석 등이 남아있어, 이곳이 광개토왕의 망제를 지낸 사당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다만 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들은, 왜 광개토왕이 사망을 한지 2년이 지난 후에 이곳에 안장을 했을까? 초도(草島)라는 명칭이 갖는 의미가 혹 초분(草墳)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금구도라는 명칭도 왕(=今上)의 시신을 안장했다고 하는 금구(金丘), 금구(金柩)는 아니었을까? 등 많은 의아심을 불러일으킨다.

 

화진포에 세운 안내판을 보니, 고성군에서는 이곳이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확인될 경우 원형복원을 하겠다고 적고 있다.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민족의 웅지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 이글은 고성문화원 김광섭 향토사학자님의 도움을 받아 정리하였습니다. 김광섭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고성군 현내면은 예전에 열산현의 소재지가 있던 곳이다. 현재 현의 터는 화진포에 잠겨있지만 거진읍 화포리와 현내면 죽정리 등에는 10여 개의 선사시대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어, 이곳은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현내면 송현리와 죽정리 등에서는 돌토끼와 민무늬토기 같은 청동기 유물이 발견이 되기도 했다.

 

이 현내면은 지역적으로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산을 들어가는 길목이라는 현내면은 명파리와 죽정리 등에서 신라고분 6기가 발견이 되기도 했다. 현내면에는 고성산이라는 산이 산학리에 솟아있어,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군사적 요충지인 산학리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는 원래 두 마을로 나뉘어져 있었다. 옛 운근리를 나누어 산학리(山鶴里)와 열산리(烈山里)로 구분했다. 고려 때는 열산현(烈山縣)의 소재지가 열산리에 있었으나 조선시대 관제개혁으로 폐현되는 동시에 간성군에 속했으며, 현내면으로 개칭된 후 1915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두 부락의 '()'자와 '()'자를 따서 산학리로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까지는 현내면 소재지이기도 하였던 산학리는, 마을 뒤편에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전하는 약 12m정도의 성지(城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쑥고개의 봉화봉에서 횃불로 신호하면, 이곳에서 간성 고성산으로 연락하였다고 한다. 이 성터를 산학리성터 혹은 고성산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산학리의 지명을 보면 죽정리, 산학리 경계지점인 길모퉁이에 조선시대에 현령을 지낸 권모의 공덕비라고 전하는 비가 고송과 함께 남아 있어, 외솔배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산학리에서 고성산을 끼고 화진포로 넘어가는 낮은 구릉에는 고려 초에 축성한 것으로 보이는 토성의 흔적이 보이는데, 주둔군부대의 방호시설로 인해 훼손이 되었다.

 

옛 토성에 오르다.

 

23, 고성군 현내면의 2차 답사를 나섰다. 일행이 많아 두 대의 차량을 이용해 답사 길에 나섰다. 산학리에서 빠른 길로 화진포로 낮은 등성이를 넘다가 보니, 우측에 노송 몇 그루가 모여 있는 곳이 있다. 소나무의 굵기로 보아 수령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 같은 소나무들이 모여 있어 그곳을 올라보았다.

 

 

석비 1기가 서 있는데, 그곳에 고성 산학리산성이라고 음각을 해 놓았다. 앞면에는 산성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다.

 

이곳은 옛날 이곳을 지키려는 선인들의 호국이 얼이 깃든 산성의 옛 터다. 처음 이곳에 성을 쌓은 시대와 성에 대한 내력은 전하는바 없어 자세하지 않으니, 고려시대 빈번하던 동여진족과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야 쌓은 산성이라 한다.

 

1033(고려 덕종 2) 이 고장에 침입한 왜구의 무리와 1217(고려 고종4)에 침입한 거란 무리를 이 산성에서 막아 싸운 곳이라 전한다. 세월이 가고 옛 성은 허물어졌으나, 향토를 수호하려는 이 고장 선민들의 얼이 깃든 호국유적으로 이를 보호하고자 표석을 세운다.

1984, 9 고성군수라고 적고 있다.

 

 

토성으로 쌓은 성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은 10m에 불과하다. 토성은 4~5m 높이로 경사를 보이고 있다. 그 위에는 10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서 있는데 둘레가 족히 2m는 넘을 듯하다. 아마 이런 굵기를 본다면 이미 수령에 300년은 족히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는 군부대의 방호시설이 있으며, 서쪽 끝부분은 문지나 장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축산성을 고성산성이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보아, 고성산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지나다가 들린 옛 성터. 2월의 바람이 불어온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표석이 없었다고 하면, 이곳이 성터인줄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옛 이야기라도 한 자락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인적 없는 옛 성터가 더욱 쓸쓸하다.

 

사적 제471호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변란을 대비하여 주민들을 대피 시켜 보호할 목적으로축성된 산성이다. 이 산성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조선조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숙종 8년인 1682에 걸쳐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위봉산성을 쌓을 때는 이웃 7개군민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산성 내 시설물로는 성문 4개소, 암문지 6개소, 장대 2개소, 포루지 13개소와 그 외에 추정 건물지 15개소, 수구지 1개소가 확인되었다. 위봉산성은 다른 산성과는 달리 군사적 목적뿐만이 아니라, 유사시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기 위한 행궁을 성 내부에 두는 등 조선 후기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위봉산성은 완주군 소양면 천녀 고찰 송광사 곁을 지나 고개를 넘어 위봉사로 가는 길에 만난다. 산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을 숨가쁘게 올라가면 그 고개마루에 위봉산성이 자리한다. 산성의 좌측으로는 성문자리가 있고, 우측으로는 30m 정도의 성벽을 정리했다. 성문지는 잘 보존되어 있으나, 성문지 위에 있을 누각이 사라져 네모진 구멍으로 위가 올려다 보인다. 성문은 외성을 쌓아 적이 성문에 접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산성 성문지 부분이 보존되어 있다. 위봉산성의 성벽 높이는 1.8 ~ 2.6m 이고 길이는 16km에 달한다

위봉산성 의 성문지. 비교적 잘 보존이 되어있다

성문지 위에 누각이 소실되 구멍이 뜷려있다

 

도로가 성벽을 끊고 있는데 건너편에 보면 성벽위로 여장, 총안을 둔 것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 안으로 찬찬히 훑어보면 다른 성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성벽을 쌓은 돌이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를 쌓아놓았다. 자연미가 풍기는 성벽은 오히려 다듬은 성벽보다 아름답다. 울퉁불퉁한 성 돌을 그대로 맞추어 쌓아놓은 성벽이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성이다.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옹성은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는 중요한 시설이다

성문을 부수기 위해 옹성 안으로 적이 들어오면 사면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위봉산성은 전투에서 적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과 패 등을 옮겨 보호하기 위한 성이기도 하다. 또한 변란이 일어나면 백성들을 피신시키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된 위봉산성은, 1894년 갑오농민혁명 때,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함락이 되자 태조의 어진을 옮겨 모셔 제 역할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성 안에는 위봉폭포와 위봉사가 있어 늦가을 바람 따라 찾아가 볼만한 곳이다. 역사를 따라 길을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에 자리한 사적 제422호인 이성산성. 일부에서는 백제 혹은 고구려에서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성곽의 발굴에서 조사된 바로는 신라시대의 성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유는 고고학적인 유물과 축성방법으로 보아, 신라의 성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성산성은 본래 백제 한성시대(서기전 18~서기 475)의 도읍지로 주장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86년부터 2003년까지 10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결과로 볼 때, 신라가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신주를 설치할 때, 이 신주의 주성으로 쌓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눈길에 찾아간 이성산성

 

이성산성을 오른 것은 산성 안에 남아있는 저수지를 돌아보기 이해서이다. 눈 내린 다음에 찾아간 이성산성을 오르는 길은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등산객들이 밟은 발자국인지 눈길에 발자국들이 흐트러져 있다. 조심스럽게 눈길을 걸어 산으로 오른다. 해발 210m의 높지 않은 이성산에 쌓은 포곡식 산성인 이성산성.

 

20여분을 오르다가 보니, 저만큼 성돌이 보인다. 이성산성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석축을 하였다. 성벽을 돌아가면서 10여개소의 치를 두었다고 하는 이성산성. 그러나 이번 답사는 성 안에 남아있는 저수지를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성 안에는 두 곳의 저수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한곳을 돌아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온전한 배수로가 남아 있는 저수지

 

이성산성 안에 있는 저수지는 2차에 걸쳐 조성이 되었다. 1월 3일 찾아간 저수지 주변에는 흰 눈이 쌓여있고, 저수지 안에는 마른 풀들이 보인다. 이 저수지는 산성 내의 자연계곡 아래쪽을 막아 물을 가두어 사용하였다. 네모난 직사각형의 저수지는 1차 저수지를 준설한 후, 4면에 석축을 하여 2차 저수지를 조형하는 방법을 택했다.

 

석축은 단을 만들어 쌓았으며, 50×20×40cm 의 돌로 5cm 정도로 들여쌓기를 하였다. 이렇게 들여쌓기를 하는 것은 저수지의 벽이 붕괴되는 것을 방비하기 위함이다. 저수지는 보기에도 매우 단단하게 축조를 하였다. 한편에는 배수로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저수지 물이 넘치면 경사진 배수로를 따라 성벽 밑에 물을 모으는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모인 물은 다시 더 밑으로 난 2차 배수로를 따라 흐르게 하였다.

 

 

수차례 석축을 한 이성산성

 

이성산성은 외벽의 성벽을 쌓은 돌들이 네모나다. 그러나 각이 진 것이 아니라 옥수수알처럼 밖을 둥그렇게 다듬은 형태이다. 그래서 일반 성곽과는 달리 성벽이 모나지가 않았다. 저수지가 있는 곳 주변의 성곽은 일부가 남아있는데, 안으로 보면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축조된 성곽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백제가 처음으로 축조를 하고 그 후에 신라가 보축을 하여 사용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눈길을 밟으며 찾아간 이성산성의 저수지. 당시에 이 산 꼭대기에 이렇게 저수지를 마련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렇게 산성에서 적과 교전을 하기 이해서는 무엇보다도 식수가 중요했을 것이다. 그런 용도로 볼 때 이 저수지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저수지 위편에 ‘이성산성 약수’라고 목판을 단 나무로 만든 작은 전각이 보인다.

 

그러나 돌로 쌓은 약수는 입구가 봉해져 있어 아쉽다. 모처럼 찾은 이성산성의 물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잃다니. 봄이 되면 이성산에 꽃들이 만개할 때 산성을 한 바퀴 돌아보아야겠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에 자리하고 있는 남한산성. 이 산성에는 모두 4개소의 문이 있다. 물론 성마다 동서남북의 문을 마련하고, 각기 그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동문이나 북문과 같은 이름들로 부르지만. 남한산성의 북문은 조선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그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였다.

 

남한산성에는 원래 4개소의 문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남한산성 내에는 동문과 남문, 그리고 수구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북문은 인조 2년인 1624년에 성을 개보수할 때, 새로 신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북문을 전승문이라 이름을 붙인 것일까?

 

 

패전의 아픔을 잊지 말라는 ‘전승문’

 

남한산성의 북문을 ‘전승문(全勝門)’이라고 부른 이유는,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이 담겨져 있다. 병자호란 당시 적과 대치를 하고 있던 남한산성 내의 군사들은, 영의정이던 김류의 주장에 의해, 300명의 군사들이 북문을 나서 적에게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성문을 나선 병사 300명이 수많은 적을 기습공격을 한다고 해서 이기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성문을 나선 병사들은 적의 계략을 말려들어 변변한 전투 한번을 못해보고 몰살을 하고 말았다. 이는 ‘법화골 전투’라고 한다. 이 북문을 나선 병사들이 법화골에서 패전한 전투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로 기록하고 있다.

 

 

남한산성 내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대치를 하고 있던 병사들. 그들은 45일간이나 남한산성 내에 머물면서 청군과 대치를 하고 있었다. 아마 이 북문의 기습공격이 실패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오랜 시간을 버티거나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지는 않았을까? 군사 300명이 적에게 몰살을 당한 것이 최대의 전투로 기록이 되었으니 말이다.

 

당시의 기록은 아픔 그대로인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항복을 하러 나가는 인조의 모습은, 왕세자의 스승인 정지호가 쓴 『남한일기』에 잘 묘사 되어있다. 아마도 당시 인조와 세자의 측근에 있었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묘사를 한 듯하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와 마골대 두 사람이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을 독촉하였다. 임금은 남색 옷에 백마를 탔다. 모든 의장을 다 버리고 수행원 50여 명만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그 뒤를 따랐다. 뒤따르던 문무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였다.」

 

인조는 일만 삼천여 명의 병사와 40일분의 양식을 갖고 남한산성에서 청의 20만 대군과 대치하면서 항전을 펼쳤으나, 1637년 1월30일, 남한산성 항전 45일 만에 삼전도에 나아가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아마도 이렇게 항복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북문의 기습공격의 실패와, 1637년 1월 26일, 평안도 감사 홍명구와 평안도 병마사 유림이 지휘하는 조선군 5천명이 남한산성으로 진격하다가, 강원도 김화에서 청의 용골대와 마골대가 이끄는 수만 명의 병사들에게 패전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승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북문인 전승문. 누각에 오르니 아래로 가파른 언덕이 펼쳐진다. 저 곳을 지나 청의 군사를 공격하겠다고 병사들이 빠져 나갔을 것이다. 그 가파른 언덕 밑에 청군의 군영이 자리하고 있었을 테니. 140년이나 지난 1779년에 성곽을 개보수하면서 이름을 전승문이라고 붙인 것도 당시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라는 것이다.

 

전승문은 성의 북쪽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성벽은 딴 곳과는 달리 경사가 지게 축성을 하였다. 성문 앞으로는 가파른 비탈이 펼쳐진다. 성문 문루 위에서 좌측을 보면 산등성이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에 성을 쌓았고, 우측으로는 평평한 길이 나 있다. 아마 이 북문을 빠져나간 병사들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려고 했을 것이다.

 

 

전승문. 이 문 위에서 지난날을 가억해 본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패전을 했겠지만, 이 전승문의 실패를 거울삼았다면, 이와 같은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성문에 덧붙인 철판을 만져보면서, 역사의 아픔은 어찌 그리도 빨리 잊히는 것인지. 오늘 이 북문에 올라서 그 슬픔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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