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산, 이 낮은 산이 문화재 덩어리라고
여기산(麗岐山)은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04.8m의 산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세가 크지 않고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다워서 '여기산(麗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토축산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발 104.8m로부터 10여m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전형적인 머리띠 모양의 테뫼식으로 성 길이는 약 453m이다.
전철 화서역에서 구운동 방향에 있는 여기산 공원은 축구장, 게이트볼장, 익스트림 스포츠 연습장 등 체육시설과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경기도는 팔달구 화서동 436 일대 서호저수지 33만2천997㎡와, 여기산 선사유적지 22만5천828㎡를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와 201호로 지정하였다. 여기산 서호방면에는 우장춘 박사의 묘와 그의 석상이 위치해 있다.
땀을 흘리며 돌아 본 여기산
8일 오후 2시. e수원뉴스의 김우영 주간과 함께 여기산에 올랐다. 여기산에는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뜨던 부석소와 토축산성이 있어,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여기산 입구에서 확인을 받은 후 천천히 산으로 난 소로로 접어들었다.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에게서 숲이 주는 향이 짙다. 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잎들이 유난히 푸르다.
천천히 걸어 오른 길 우편에는 우장춘 박사의 석상이 자리하고, 좌측에는 묘가 있다. 그곳을 지나 높지 않은 산 정상으로 오르다가 숲길로 접어들었다. 산성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곳 여기산은 수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목이다. 산성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예부터 이곳이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자연녹지인 여기산은 1979~1984년에 숭실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철기시대와 삼국시대 전기에 사용했던 토기종류들이 상당수가 발굴이 되었으며, 생활용구인 철기류 등도 꽤 조사되었다. 또한 주거지 내부에서 검게 탄 볍씨들이 발견이 되어, 서호일대에서 벼농사를 지었음도 확인되었다.
화성 축성 때 돌을 뜬 곳 발견
숲을 지그재그로 돌면서 옛 토축산성의 흔적을 찾아보고 있는 중에 거대한 암벽을 만났다. 여기산은 화성 축성 당시에 돌을 뜬 곳으로 알려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소개된 돌은 길가에 보이는 작은 바위였다. 이렇게 큰 암벽은 아직 소개되지가 않았는데, 주변에는 큰 바위덩어리들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돌을 뜬 곳임을 알 수 있다.
절개된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나란히 난 쐐기구멍이 보인다. 이렇게 바위에 쐐기구멍을 내고 그 안에 나무를 집어넣은 후 물을 부어놓으면 나무가 부풀어지면서 바위를 쪼개는 것이다. 커다란 암벽이 마치 칼로 자른 듯하다. 어떻게 이 큰 바위덩어리를 이렇게 반듯하게 쪼갤 수가 있을까? 선인들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천년 세월을 지키고 있는 토축산성
산을 한 바퀴 돌아 정상부근으로 오르다 보니, 한 눈에도 토축산성임을 일 수 있는 흙더미가 나란히 뻗어있다. 이 토축산성은 아마도 삼한시대나 삼국시대 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이곳은 주변에 광활한 농경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군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곳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토축산성을 따라 걷다보니 산 정상이 나타난다. 그 위가 평평하게 조성되어 있는 곳이 군사지휘소가 있었을 듯하다. 두 시간 남짓 돌아본 여기산. 여기산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농촌진흥청이 이곳에 자리한 것도 우연히 아니란 생각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농사를 지었던 곳이었기 때문에.
답성(踏城)놀이로 유명한 아름다운 고창읍성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에 소재한 사적 제145호 고창읍성.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동·서·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인 고창읍성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 답성놀이란 일명 성밟기, 성돌기라고도 하며 부녀자들이 한다.
이 놀이의 목적은 대개 마을의 평안과 개인의 액막이를 겸하는 것이나, 외적을 방비하는 성을 1년에 1번씩 점검하고 발로 성을 밟아 견고하게 다지는 목적도 있다. 유명한 곳은 개성, 고창, 영광이다. 고창의 답성놀이는 주로 부녀자들이 머리에 작은 돌을 이고 모양산성을 돌아오는데 3번 도는 것이 특색이다. 이렇게 하면 소원성취를 하며 다리에 병이 없고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믿는다. 머리에 이고 가는 돌을 떨어뜨리면 불길하고, 성을 2번만 돌고 와도 좋지 않다고 믿는다.
동헌 등 22개 전각이 있던 고창읍성
성 안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병화 등으로 소실이 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읍성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은 바로 정문이자 북문인 공북루를 만나게 된다. 공북루 앞에는 옹성을 쌓아 적의 침략에 대비를 하였는데, 이러한 축성방법은 고구려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옹성위에는 여장을 쌓아 성안에서 성밖을 관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 안으로 적이 성문을 부수기 위하여 들어온다고 해도, 옹성에서 쏟아 붓는 화살과 기름, 돌 등으로 버티기가 힘들다. 더욱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성문을 부술 수 있는 공성무기를 사용하기도 힘들다. 옹성에는 밖으로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현안과, 총안을 내어 놓았다.
공북루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옥사가 있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관옥 또는 원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옥사는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가 짓고, 남, 여를 구분하여 가둘 수 있도록 하였다. 옥사의 주변에는 높은 담을 둥그렇게 둘러치기 때문에 원옥이란 이름을 붙였다.
관리사무소 뒤에는 향청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향청은 지방의 방백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 지방의 향리를 구찰하고, 향풍을 바로잡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향청에서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약수터가 있다. 성안에서는 식수가 가장 중요하다. 오랜 시간을 적과 대치를 할 때는 식수가 없으면, 그만큼 버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약수터를 빗겨서 풍화루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옆에는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풍화루는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기록에는 고창읍성 안에는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다고 했다. 풍화루란 글 그래도 고을의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지어진 정자다.
백성을 생각하는 수령이 있던 고창읍성
풍화루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고창 동헌과 내아가 있다. 동헌이란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군, 현 등 각종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는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동헌이라 하였다. 동헌의 정면에는 평근당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백성과 가깝게 있으면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동헌의 옆에는 내아가 있다. 내아는 고을 수령의 살림집을 말한다. 흔히 동헌을 내동헌과 외동헌으로 구별을 하는데, 외동헌은 집무를 보는 곳으로 이를 동헌이라고 하고, 살림을 하던 내동헌을 내아라고 부른다. 동헌의 앞쪽에도 숨겨 놓은 듯한 우물이 있다.
동헌에서 남서쪽으로 높은 곳에는 고창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을마다 있던 객사는 중앙에는 몸채라는 정당(正堂)이 있다. 정당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궁궐을 에를 올렸다. 양편에 있는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고창객사의 현판에는 모양지관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고창을 모양이라고 했고, 성을 모양성이라고 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객사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연못 조금 위편에 작청이라고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다. 작청에서 북문 쪽으로 내려가다가 우측을 보면 관청이 있다. 관청은 관주라고도 부르며, 이곳은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일을 맡아하는 곳이다.
관청에서는 수령과 그 권속들, 그리고 빈객에 대한 예우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조달과 관리를 맡아하던 곳이다. 현재까지 성안에 자리한 복원된 건축물 돌아보았다. 관청에서 옆으로 난 소로길을 이용하면 성곽길을 오르게 된다. 올라가다가 보면 소나무 숲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는 한다.
치성을 쌓아 적을 공격
성 위로 오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치다. 고창읍성에는 6개소의 치가 있는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치란 꿩을 말하는 것으로 성곽의 일부분이 밖으로 돌출이 되어있는 것을 일컫는다. 이 치의 용도는 상당하다. 적이 성벽을 기어오를 때 치에 있던 병사들이 공격을 하면, 적은 뒤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 고창읍성의 경우에도 지형지세를 이용해 성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치와 옹성에서 바라다 보이지 않는 곳은 성의 한 부분을 굴곡지게 쌓아 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천천히 걸어 성의 남쪽으로 향하니 읍성의 동문인 등양루가 나타난다. 동문 역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를 하였다. 수원 화성이 국가적으로 온 나라가 나서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했다면, 고창읍성은 전라우도인 고창, 고부, 김제, 무장, 영광, 옥구, 용안, 장성, 정읍, 제주, 진원, 태인, 함평, 흥덕과 전라좌도인 능성, 담양, 순창, 용담, 임실 등 19개의 군과 현 등에서 모인 사람들이 3년 동안을 쌓은 성이다.
성 밖에는 각 고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맡아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고 갔는데, 일부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자 재현을 시켜 성 밖에 구간별로 세워 놓았다. 이렇게 민초들의 힘을 쌓은 고창읍성은 크지는 않지만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쌓은 성으로 매우 견고한 성곽이다.
등양루는 동편 오르막에 세워져 있다. 등양루를 지나 동치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얼마나 잘 축성된 성곽인지 그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문인 등양루를 지나 성을 타고 한 바퀴 돌다가 보면 동남치와 남치를 거친다. 그런데 고창읍성에는 남문이 없다. 일반적인 성들은 문이 동서남북에 있는데 비해, 남문이 없다는 점이다.
남치의 안쪽을 보면 상황사가 있다. 요즈음은 성황당이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이 있는 곳으로 마을의 수호신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성황사가 고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황사에서는 성황신을 내려 모시고 고을의 방백이 직접 제를 올렸다.
성황사를 거쳐 성곽을 타고 내려오면 서남치를 거쳐 서문인 진서루가 나타난다. 진서루의 형태는 북문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옹성을 쌓아 놓았다. 진서루를 둘러보고 내려오면 공북루로 돌아오게 된다. 채 20여리가 미치지 못하는 고창읍성. 그러나 성을 돌아보면 그 성을 쌓은 민초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축성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민초들이라고 달라질 수가 없다. 고창읍성을 돌아보면 호국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작지만 아름다운 성곽. 오늘 고창읍성은 오랜 역사를 그렇게 지켜보면서 말없이 서 있다.
남한산성 제1암문을 돌아보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때의 성으로도 알려진 남한산성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서,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축성은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하였다.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작금에 들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남한산성. 연차적인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은 많은 구조물과 성벽 등이 옛 모습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남한산성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의 총 길이는 11.76km에 달한다. 본성은 9.05km이며 옹성이 2.71km이다.
남한산성 제1암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축성 때 승병들이 묵었던 9개소의 사찰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경사. 그 주차장 한편에 성 밑으로 내려가는 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은 본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그리고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하는 비밀통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적의 배후를 교란하거나, 식량을 은밀히 운반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장경사 암문이라고도 부르는 제1암문은 형태가 특이하다. 딴 암문들은 성곽을 돌출시키고 그 안에 암문을 숨겼지만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이 돌출되어 있지 않다. 성벽에 아취모양을 구성하고 그 안에 문을 달았다. 문의 기둥을 고정시키는 돌출부는 아래와 위 양편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 이 암문은 작지만 두 짝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1암문은 성벽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진다. 이곳은 경사가 급하고 성벽이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주변의 성벽에는 몇 개의 수로가 나 있다. 바닥에는 돌을 깔았으며 천정도 커다란 장대석을 이용해 덮었다. 암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경사로 통하게 되어있어, 비상시에는 많은 승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 아침 안산 별망성지에 오르다
4일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오랜만에 답사를 하리라 마음을 먹었기에, 모든 일을 젖혀두고 길을 나섰다. 오늘의 일정은 안산시 상록구 초지동에 위치한 조선 초기에 쌓은 평산성인 별망성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수원 화성을 늘 돌아보면서 전국에 있는 성곽을 다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그래도 4~5년 전에는 한 해에 5곳 이상의 성을 돌아보았으나, 이제는 고작 1년에 한 두 곳 밖에는 돌아보지 못한다. 그만큼 하는 일이 바빠진 것인지, 아니면 게으름을 떠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매일 바쁘게 사는 것을 보면 게으름을 떠는 것은 아닌 듯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74호인 별망성지는 새로 복원을 한 곳이다.
바다에 근접해 있는 평산성
예전 별망성이 있던 곳을 ‘여곶’ 또는 ‘초지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별망성은 바다에 근접해 있는 야산의 능선을 연결하고, 남쪽으로는 해안에 닿아 평지를 감싸 안으며 축성이 되었다. 별망성은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축성한 해안 평산성이다. 별망성은 15세기 이전에 이미 축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별망성은 조선 초기 남양만을 거쳐 해안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그렇기에 높지 않은 산에서 바닷가까지 성을 잇대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초기의 기록에 이곳에 수군만호영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초자양영은 효종 7년인 1656년에 강화도로 옮겨 가면서 폐지되었다.
1988년 225m를 복원 해
별망성지라는 안내판에 보인다. 별망성을 오르는 입구 주차장에는 차 한 대 댈 공간이 없다. 근처에 공사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의 차인 듯하다. 차를 피하여 계단을 오른다. 그저 얼마 오르지 않아 성벽의 안에 쌓은 토축이 시야에 들어온다. 둘레가 1,040m에 성벽의 높이는 1.2~2.1m이었다고 기록에 보인다.
이렇게 남아있던 성벽도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을, 1988년에 일부 복원을 하였다. 현재의 성벽은 복원한 것으로 길이가 225m에 높이 1.45m 정도이며, 지형에 따라 높낮이가 약간씩 차이가 난다. 성벽은 바깥벽은 수직에 가깝게 쌓았으며 안쪽은 완만하게 흙을 다듬어 토축으로 쌓았다.
계단을 오르니 이곳에 별망성이 있었음을 알리는 비가 한 기 보인다. 앞으로 나아가니 치성이 돌출되어 있다. 성 위를 걸어 한편 끝으로 나가 성 밖으로 걸어보았다. 높지 않은 성벽은 그저 편안히 걸을만한 그러한 길이다. 복원한 성벽에는 두 곳의 치성이 보인다. 한편은 성이 해안으로 내려가는 곳에 있어 시야를 확보하기에 편하게 조성하였다.
250년 정도 존속했던 별망성
이 성 안에는 군대가 머물렀던 60㎡ 정도의 편평한 터가 있었으며, 그 언저리에서 자기와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문헌 자료나 기록으로 볼 때 조선조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별망성. 17세기 중엽에 폐기되기까지 약 250년 정도 서해안의 방어를 담당하던 중요한 성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원의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이기도 하다. 수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 화성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비해, 수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러할까? 그 점은 늘 의문으로 남는다. 성벽을 돌아보면 주변에 산재한 쓰레기들과 반려견의 분비물들이 널려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아직 시민의식이 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쓰레기는 외지에서 찾아 온 사람들이 버리고 갔다고 쳐도, 반려견의 분비물은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심지어는 사적 안에 버젓이 반려견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저 정도면 시민의식이 아예 실종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침 일찍 찾아간 별망성지. 수원 화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무너져 내린 읍성, 역사의 흔적 그대로
우리가 흔히 성을 구분할 때는 산성과 평산성, 그리고 읍성 등으로 구분을 한다. 산성이란 산의 정상부를 에워싸고 있는 형태의 성을 말하며 대개의 경우 이런 형태의 성곽이 많다. 평산성이란 평지와 산을 연결하는 성으로 수원 화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읍성은 평지에 쌓은 성을 말하며 흔히 평성이라고 한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충남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1에 소재한 충청남도 기념물 제10호인 남포읍성은 예전 남포읍에 설치된 성으로 길이 900m에 넓이는 105,283㎡ 정도이다. 남포읍성은 차령산맥 서쪽 끝자락의 구릉에 돌로 쌓은 성으로, 남포는 백제 때 사포현이라고도 불리었다. 이 읍성은 원래 고려 우왕 때 서해안을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성이었는데, 공양왕 2년인 1390년 군대가 머물 수 있는 진영을 추가하여 완성하였다.
군데군데 복원을 한 남포읍성
남포읍성은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바깥쪽 벽은 돌을 이용하여 직각으로 쌓고 성벽의 안쪽은 흙으로 쌓아올렸다. 동·서·남 세 곳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4m의 높이로 성 바깥에 설치하는 또 하나의 성벽인 옹성을 둘렀는데, 1m이상의 큰 돌로 축성하였다. 성을 한 바퀴 따라 돌아보면 남포읍성이 꽤 단단히 지어진 성임을 알 수가 있다.
성벽이 꺾이는 부분에는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튀어나오게 쌓았으며, 그 양쪽 성벽에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시설을 해놓았다. 현재 성 안에는 3채의 관아건물인 진남루와 옥산아문, 현청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에 80㎝ 높이로 배수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우물이 세 군데 있었다고 한다.
이 읍성은 서해안의 요충지로 왜구를 경계하는 한편, 해상 교통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남포는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 현 보령시내를 통과해서 한양으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또한 서해가 가깝다 보니 늘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눈 쌓인 남포읍성을 돌아보다.
남포읍성을 몇 번이고 돌아본 곳이다. 보령시에는 생각 밖으로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하루에 그 많은 문화재를 다 돌아본다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 몇 번에 나누어 답사를 했는데, 그때마다 남포읍성을 들렸던 것 같다. 성은 후에 별도로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싶어, 성이 있는 곳은 그냥 지나치지를 않기 때문이다.
먼저 관아를 둘러보고 난 후 성으로 향했다. 초등학교 한 편에는 성 밖으로 축성의 흔적이 보인다. 이 곳이 바로 남포읍성에 있었던 3곳의 문 중 한 곳이며, 농로를 낸 밖으로 쌓인 돌은 문을 보호하던 옹성의 흔적이다. 옹성은 큰 돌로 쌓아 견고하게 축성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성밖으로 성을 한 바퀴 돌아본다.
무너져 읍성, 복원 서둘러야
고려 우왕 때 석성으로 축성을 하고, 공양왕 2년인 1390년에 축성을 완성하고 군영을 둔 남포읍성. 조선 태조 6년인 1398년에는 병마첨절제사를 두어 현사를 겸하게 하였다. 성벽 위에는 미석과 여장을 두었으며, 곳곳에 치를 조성해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은 큰 돌로 쌓아 외부에서 성문을 찾기가 어렵도록 조성을 하였다.
쌓인 눈이 녹기 시작하자 곳곳에 잡풀이 드러난다. 성벽 인근에도 수많은 잡풀더미에 성벽이 가려져 있다. 군데군데 무너져 내린 성돌이 구르고 있다. 어느 집은 성벽에 붙여 집을 지어, 읍성의 성벽이 집 뒤 축대처럼도 보인다. 곳곳에 복원을 한 곳도 있지만, 900m 전체를 복원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성은 복원이 될 때 그 진가를 알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성은 대개 지형을 이용해 축성을 하기 때문에, 일부 복원만 갖고는 그 성의 진가를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포읍성의 경우 현재 보존이 된 성벽만 갖고도 그 진가를 능히 가늠할 수가 있다. 하지만 완전한 복원이 되면 얼마나 중요한 시설이었는가를 한 눈에 느낄 수가 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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