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산139번지에는, 주변이 송림으로 쌓인 곳에 옛 고묘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가야시대의 토기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옛날부터 묘역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자리에 있는 고분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조선 태종 때 사온서 직장을 지낸 하현의 무덤이다.

 

수곡면에 있는 효자리 고분군은 수곡초등학교로 향하는 도로 옆에 형성된 요산마을의 서남쪽에 있다. 해발 70m 전후의 낮고 평평한 구릉에 있는 이 고분은, 계단을 조성해 놓아 오르기에 편하다. 610일 오후, 진주에 들릴 때마다 찾아가고 싶었던 곳이다. 진주 수곡은 진양 하씨들의 유적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의 유적을 돌아보다.

 

개인적으로는 조상의 고묘이다. 하기에 기대를 걸고 계단을 올랐다. 오르는 계단 주변에는 잡풀이 무성해, 자손으로서 낯이 뜨겁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풀이라도 베어내 정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다. 저만큼 고분이 보이는데 여기저기 계단 주변에 석재들이 널려있다. 어디에 쓰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곳에는 예전부터 많은 고분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곳에 쓰였던 석재들이 아닐까?

 

이곳에 있는 분묘는 조선조 태종 때 사온서직장을 지낸 하현과 부인 포산 곽씨의 묘이다. 하현(河現)의 묘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높이 15cm, 길이 210cm의 지대석을 쌓고, 둘레돌인 갑석을 갖춘 팔각형의 호석을 마련하였다. 그 위에 흙으로 봉토를 완성한 형태를 하고 있다. 묘의 앞에는 비석과 상석, 좌우에는 높이가 170cm 정도의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사온서란 고려시대에 궁중에서 쓰는 술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고려 문종 때 설치된 양온서를 충렬왕 34년인 1308년에 사온서로 고쳤으며, 직장이란 정7품의 벼슬을 말한다. 공민왕 5년인 1356년에 그 명칭을 다시 양온서로 고치는 등, 여러 번 이름이 바뀌면서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조 초기에 마련한 유례가 드문 분묘

 

이 고묘는 팔각형으로 조성을 하였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특히 갑석의 모서리마다 반전된 귀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태는 마치 석탑의 옥개석과 같은 형태이다. 외형이 이러한 형태의 분묘는 유례가 드물 뿐 아니라, 축조연대가 조선조 초기가 확실하기 때문에 이시기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먼저 머리를 조아려 조상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 난 뒤, 주변을 찬찬히 살펴본다. 고묘 주변의 마을은 진양 하씨들의 세거촌이다. 이곳에는 이 고묘 외에도 몇 기의 고묘가 더 있다고 한다. 주변을 돌담으로 둘러치고 앞으로는 트여있는 고묘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다. 그저 모르는 사람의 눈으로 보아도 명당이란 생각이다.

 

비석 앞에 놓인 두 개의 상석 측면에는 탱주와 같은 중앙 기둥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앞쪽의 상석은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모든 것들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묘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는 많은 차이가 난다. 왜 조상님들은 이렇게 팔각으로 된 고묘를 이곳에 조성했던 것일까? 당시의 묘라고 해도 이런 형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다시 찾아와 조상님께 대한 예를 올려야겠다.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는 많은 문화재가 전하고 있는 곳이다. 500년 세월을 그렇게 자리를 지키고 눈앞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내다보고 있는 선조. 이곳을 찾아오다가 보니 마을에 양조장 하나가 있었는데, 사온서 직장을 지내셨다는 것을 알았다면 막걸리라도 한 병 사들고 올라올 것을 그랬다고 뒤늦은 후회를 한다.

 

오래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답사길. 다음에는 꼭 술 한 병 사들고 찾아와, 조상님에 대한 예의를 갖추겠다고 다짐을 한다. 내려오는 길에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는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후손으로서의 예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벌써 해미읍성을 다녀온 지 20여 일이 지났다. 답사를 하면 그때그때 바로 기사를 올려야하지만 현장 취재에 늘 뒷전으로 밀려버리고는 한다. 해미읍성은 벌써 수십 번은 더 다녀온 곳이다. 대전에 있을 때부터 이곳은 자주 찾았던 곳이라 어느 성보다도 눈에 익은 곳이다. 그런 해미읍성을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가보니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번지에 소재하는 사적 제116호이다. 해미읍성은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평산성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그 중 북문은 암문으로 조성하였다. 읍성의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는 했는데,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인 1417년부터 세종3년인 1421년 사이에 5년간의 세월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 곳으로 옮기려고 쌓은 성이다. 효종3년인 1652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다. 이 성은 적이 침입을 하지 못하도록 성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 시간 반 만에 성을 두 바퀴 돌아

 

해미읍성을 답사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다. 그 시간 안에 꼼꼼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뛰어다녀야 할 판이다. 1.8km의 성을 돌아보는 데야 길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의 이모저모를 일일이 촬영하고 기록하려면 그 정도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남문인 진남문으로 들어가 위 문루로 오른다. 북쪽으로 곧게 난 길 끝에 아문과 동헌, 내아, 객사 등이 보인다.

 

 

아문으로 행하던 중 만난 회화나무와 옥사 등을 둘러보고 난 뒤, 발걸음을 재촉해 동헌과 내아, 그리고 객사 등을 일일이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서문 밖으로 나와 순교지를 돌아본 후 바로 성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장은 복원되지 않았지만 잘 정리가 된 성곽을 따라 걸으며 여기저기 꼼꼼히 살핀다.

 

북암문 쪽으로 난 성벽은 낮은 구릉으로 오르는 길이다. 복원을 한 해자 위에 나무다리가 걸려있다. 북암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으로 성문 주위를 견고하게 쌓았다. 복원을 한 해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른들도 빠져 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해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성을 돌아 동문으로 향한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군관으로 있었다.

 

북암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져있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동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동문 역시 굳게 닫혀있다. 남문과 서문만 개방을 한 것이다. 성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안만 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성 밖을 돌아보는데 이렇게 문이 닫혀 있으면 이럴 때는 조금 난감하다.

 

답사를 하는 날은 기온이 꽤 높았다. 날씨가 쾌청해 성을 촬영하기에도 제격이다. 동문 문루 양편에 꽂아 놓은 깃발들이 가을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동문을 보고 난 뒤 다시 성을 거슬러 돌아본다. 혹시 지나친 곳이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서문을 지나니 두 곳의 치성이 있다. 왜 이곳에만 이렇게 치성을 쌓은 것일까?

 

 

선조 11년인 1578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 간 이 해미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현감이 이 성으로 옮겨와 겸영장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고 한다. 호서좌영인 해미읍성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243년 동안 내포지방 12개 군현을 군권을 지휘하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의 순교지로 더 알려진 해미읍성. 잘 복원된 성을 돌아보면서도 왠지 가슴 한편이 싸하다. 아마도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가 보다.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진남문 앞에 거리도 말끔하게 단장을 하였다.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 가을 풍광에 젖어보아야겠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을 떠났다. 매년 10월 수원화성문화제가 끝난 다음에 실행하던 워크숍이 올해는 8월 말에 실행에 들어갔다. 애초 30명 정도가 워크숍에 참가 할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 인원이 선정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출발 하루 전날에 갈 수가 없다고 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28일 오전 830분에 시청 인근에 모인 시민기자들은, 9시경에 출발을 하여 제일 먼저 해미읍성으로 향했다. 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순방지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것은 해미읍성이 성지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곳이다.

 

 

해미읍성은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조선 태종 17년인 1417년부터 세종 3년인 1421년까지 축성, 충청도의 전군을 지휘하던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천주교의 순교지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해

 

해미읍성 순교의 아픔은 곳곳에서 만날 수가 있다.

첫째는 수령 3백년 경의 회화나무 한 그루이다. 이 나무는 현재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1790년부터 1880년에 이르기까지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끌어내 동쪽으로 뻗어난 가지에 철사 줄로 머리채를 매달아 고문을 한 현장이다.

 

 

오래 전 해미읍성을 찾았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옥사.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옥사는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 작업 뒤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1935년에 간행 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옥사는 내옥과 외옥이 있었으며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 옥사가 구분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리개질을 했던 돌다리

 

자리개란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방법이다. 짚으로 만든 굵은 줄인 자리개로 곡식 단을 묶어서 타작하는 것이다. 즉 곡식 단을 굵게 묵어서 어깨 위로 올렸다가 힘차게 내리쳐 단에 묶인 곡식들을 기구에 내리쳐 낱알을 털어내는 방법을 말한다. 그런데 해미읍성 서문밖에 이런 자리개돌이 있다.

 

 

그런데 이 자리개돌은 자리개질로 사람들을 죽이던 순교의 형장이다. 서문 밖 수구위에 놓여있던 돌다리로 이 돌다리위에서 자리개질로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이 자리개 돌은 서문 밖 순교지에 보관중이던 것을, 생매장 순교 성지인 여숫골로 옮겨 보관하고 있고 현재 볼 수 았는 자리개 돌은 모조품이다.

 

시민기자들이 워크숍 첫발로 내딛은 해미읍성. 교황의 방문지이기도 했던 해미읍성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순교지를 돌아보고 있는 사람들. 옥사 안을 돌아보던 한 관람객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마디 한다.

 

 

이곳이 교황님이 다녀가신 곳이란다. 옛날에 이 성 안에서 많은 분들이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거든. 저 옥사에 칼을 쓰고 있는 사람들처럼 저렇게 고통을 받다가 죽은 것이지. 그런 많은 분들의 순교가 있어 우리가 편하게 종교의 자유를 갖는 것이란다.”

 

e수원뉴스 시민기자들이 23일의 워크숍 일정 중 가장 먼저 만난 해미읍성과 순교지. 그 안엔 '왜 교황이 굳이 이곳을 찾아왔을까'라는 해답이 있다.

 

카타르 도하에서 개최되고 있는 세계유산정부간위원회는 제3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정부간위원회(6.15.-25)에서 현지시간 22일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남한산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키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수원 화성을 비롯해 두 곳의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는 등 모두 11종목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 자연, 복합) 목록 등재 여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21개국으로 구성된 정부간위원회로서, 우리나라는 2013-17년 임기 위원국(2013. 11월 위원국 당선)으로 동 위원회에 참여 중이다.

 

 

정부는 이번 위원회에 나선화 문화재청장을 수석대표로 하여, 외교부, 문화재청, 주 유네스코대표부, 주 카타르대사관, 경기도청, 경기도 광주시청,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관계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했다.

 

신라 문무왕 때는 주장성으로 불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 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웅장하고 거대한 성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가치 인정해

 

이번 등재 결정 과정에서 세계유산위원회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남한산성의 문화유산이 17세기 초 비상시 임시 수도로서, 당시 일본과 중국의 산성 건축 기술을 반영하고 서양식 무기 도입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군사 방어 기술을 종합적으로 집대성하고 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체제의 변화상을 잘 나타내며, 지금까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계곡을 따라 성을 축성한 형태나,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것 등을 등재 조건으로 꼽았다. 또한 산성 안에 행궁의 복원 등 주요시설물이 보존되어 있는 것도 선정의 이유라고 밝혔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 인접 지역의 개발 행위를 적절히 통제하고, 주민들이 유산 관리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추가로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문화재청은 경기도 등 관련 지방자치단체와 긴밀히 협력하여, ‘남한산성의 체계적 보존관리와 활용을 위한 종합계획을 수립·이행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앞으로 남한산성의 종합계획을 보면, 유산의 중장기적 종합 발전 계획 수립과 정기 모니터링 체계 구축, 세계유산 전문 연구·교류 기능 강화, 지역주민 참여 촉진 등을 통해 남한산성의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보호·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추진하겠다는 것. 또한 본성의 미정비구간인 제1남옹성 등에 대한 정비를 조기 완료하고, 훼손된 여장을 전면 보수하겠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로 인해 경기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수원 화성과 남한산성 두 곳의 성곽 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낭보가 전해지자 수원에서도 수원화성의 미연결 구간인 팔달산에서 내려오다 끓긴 팔달문과의 구간과, 팔달문과 남수문 구간의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의 복원을 서둘러야 하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27일 오후 1, ()한국문화유산연구원(원장 박상국)에서는 경기도 화성 향남2지구 동서간선도로(요리)에서 긴급 학술자문회의와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이날 향남2지구 발굴지역의 현장설명회는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의 허가를 받아 시행하고 있는, 경기도 화성 향남2지구 동서간선도로(H지점) 발굴 문화재의 현장설명회이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이 현재까지 조사 결과 미리 흑이나 돌로 봉분과 같은 분구를 조성하고 그 위에 매장시설을 만드는 무덤양식인 분구묘 1기와, 덧널무덤인 목곽묘 1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내부조사가 진행 중인 목곽묘를 중심으로 공개했다.

 

 

덧널무덤인 목곽묘에서는 금으로 만든 모자인 금동관모와 금동으로 만든 신발인 금동식리’, 금으로 만든 귀고리인 금제이식과 둥근 고리가 있는 고리자루 칼인 환두대도등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또한 말을 탈 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만든 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인 등자와 재갈을 비롯한 마구류, 화살을 휴대하기 위해 담는 통인 성시구 등 다양한 유물이 부장되었다.

 

특히, 내부에서 꺾쇠와 관못이 정연하게 확인되어 목곽 내부에 안치했던 목관(木棺)의 결구(結構)와 제작방법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자료들을 확보하게 되었다.

 

 

백제 때 주요 거점지역으로 추정돼

 

이번에 출토된 금동관모의 외면에는 삼엽초화문을 면을 도려내어 일정한 형상을 나타내는 조각법인 투조로 되어 있으며, 일정한 폭을 가진 띠 모양인 대륜부의 내면에는 자작나무 거질인 백화수피제 내관이 들어있어 현재 긴급 보존처리 중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금동관모의 양상은 공주 수촌리 1호 토광묘, 고흥 길두리 안동고분, 합천 옥전 23호분 출토품과 유사하여 금동관모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에 해당한다. 또 꺾쇠와 관못을 사용한 목관의 결구 방법은 공주 수촌리 고분군과 비교할 수 있다. 목곽의 모서리에 덩이쇠인 철정을 매납하는 방법은, 오산 수청동 고분군, 서산 기지리와 부장리 고분군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목곽묘에서 출토된 금동관모, 금동식리, 환두대도 등의 유물은 45세기 경기도 화성 지역이 백제의 지방 주요 거점지역이었음을 알려주는 최고의 위세품(威勢品)에 해당하는 것으로, 경기 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되었다는 점에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분구묘는 김포에 이어 두 번째

 

현재 내부조사 예정인 분구묘의 경우, 경기 지역에서는 김포 지역(김포 운양동과 양곡 양촌 유적)에 이어 두 번째로 확인되었다. 앞으로 내부조사가 완료될 경우 분구묘의 축조과정, 확산과정 등을 규명할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학술적 자료들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은 이번 조사지역이 위치한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요리 주변은 길성리토성을 비롯하여, 소근산성 등의 관방유적(關防遺蹟)과 마하리와 당하리 고분군, 발안리 마을유적, 기안리 제철유적 등 삼국 시대 대규모 유적군이 발굴된 바 있어, 지정학적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었음이 다시 확인된 것이다.

 

특히, 1930년대 일괄출토품으로 신고되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금구(허리띠 장식품), 환두대도, 각종 마구류 등이 출토된 화성 사창리 산 10-1번지 유적은 이번 조사지역과 불과 100m 거리 내에 있어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문화유산연구원은 목곽묘에 대한 마무리조사와 분구묘에 대한 내부조사를 통해, 4~5세기 백제의 중앙과 지방 세력 간 정치적 관계를 구명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사진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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