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북양동(주석로 80번길 139)에 소재한 비봉산 봉림사. 봉림사는 신라 진덕여왕(647~653) 때, 고구려 백제와의 잦은 침략을 부처님의 위력으로 물리치고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한다. 정확한 설은 아니나 만일 전하는 바대로라면, 봉림사는 1,500년이나 지난 고찰이 되는 셈이다.

 

‘비봉사’라는 절 이름도 궁궐에서 기르던 새 한 마리가 이 숲으로 날아들었다고 해서, 산 이름을 ‘비봉산(飛鳳山)’이라 불렀으며 절 이름은 ‘봉림사(鳳林寺)’리고 불렀다는 것이다. 11월 22일 찾아간 봉림사. 일주문을 지나면 양편으로 숲길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조금 오르다가 보면 새로 지은 듯한 천왕문이 나온다. 이 천왕문은 2009년 12월 16일에 현판식을 가졌다.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있는 봉림사

 

아직 천왕문에는 아무런 조형물이 없다. 위로 조금 오르다가 보니 석물로 만든 금강역사가 계단에 양편으로 서 있다. 그 뒤편에는 아래층은 사천왕각이란 현판이 걸리고, 위편에는 범종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사천왕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서 만나는 정면의 극락전은 정면 세 칸의 맞배지붕이다.

 

극락전 안에는 보물 제98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화성 봉림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극락전 안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 목불좌상으로, 1978년 불상 몸에 다시 금칠을 할 때 발견된 기록을 통해, 고려 공민왕 11년인 1362년을 하한으로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얼굴은 단아한 편으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다. 체구 역시 단정하면서 건장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U자형으로 처리된 가슴에 젖가슴을 불룩하게 표현하고, 통견의 불의에는 띠 매듭이 사라지고 3줄의 옷 주름을 묘사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고려 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절 뒷산에 보이는 섬뜩한 표시

 

극락전을 나와 좌측을 보니 소대가 아름답다. 소대를 촬영하려고 가까이 가보니 안내판 같은 것이 보인다. 무엇인가 하여서 자세히 보니 이곳에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지뢰제거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뒤편으로는 지뢰라는 삼각표시를 한 깃발이 달려있다. 제거는 했지만 완전히 했는지를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보니 절 뒤편 산 여러 곳에 이런 표시가 보인다. 삼성각으로 올라갔다. 봉림사 삼성각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맞배지붕으로 1988년 용상스님이 신축하였다고 전한다. 아마도 이렇게 표시를 해 놓아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겠지만, 왜 이곳에 지뢰를 매설해 놓았는지 궁금하다.(사진은 일부러 찍지 않았다)

 

이곳은 한국동란 때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때 인천으로만 상륙한 것이 아니라, 화성 서신 앞바다로 진격한 UN군들과 이곳에서 접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에 지뢰를 매설한 것이 누구인가를 알만하다.

 

 

 

작지만 아름다운 절

 

봉림사는 아름다운 절이다. 사천왕각을 지나서면 너른 극락전 앞마당에, 극락전을 바라보고 좌측은 요사가 있고 우측에는 설법전이 자리한다. 설법전과 범종각 사이에는 1979년에 조성한 사리를 모셔놓은 삼층석탑이 서 있다. 사리는 1978년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개금을 할 때, 복장물로 나온 것이다. 복장물에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조 전기 사이에 각종 경전 8종이 나와 보물 제1095호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이 중에는 1339년에 간행된 목판본인 금강경은 그 크기가 가로 7.3cm, 세로 4.5cm로 담배값보다 적은 크기이다. 이 목판본 금강경은 섬세한 필치로 변상도까지 갖춘 호신용 경전이다. 이 외에도 복장에서는 각종섬유와 곡물병, 사리병, 구슬 등이 함께 발견이 되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절 봉림사.

 

 

 

뒷산의 안내표시는 그렇다고 쳐도 초겨울의 봉림사 경내는 그렇게 또 다른 운치를 느낄 수 있었다. 보물을 안고 있는 천년고찰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다시 한 번 뒷산에 대한 대대적인 지뢰제거를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이다. 그것 하나로 인해 절을 찾는 사람들이 불안해 하지 않도록.   

 

문수사에는 문수보살을 모신다. 문수보살은 부처님의 협시보살로 최고의 지혜를 갖고 잇는 보살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를 인격화한 보살이라고 하여, 문수보살을 대지(大智)보살이라고도 한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에 있는 문수사는 우리나라의 많은 절 중 오대산 상원사, 춘천 청평사, 삼각산과 김포의 문수암, 울산 문주사 등과 함께 문수보살을 모신 절 중 한 곳이다.

 


 


  
익산 문수사의 극락전은 1994년에 새로 지었다

 

문수사는 신라 헌강왕 7년인 881년에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이후의 연혁은 알 수가 없고 조선시대에 들어 중건한 바 있다. 그 후 몇 차례 중건한 문수사는 백운암과 백련암의 부속 암자를 두고 있다. 천호산은 예로부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관세음보살 등 3대 보살의 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문수사는 문수보살, 백운암은 보현보살, 백련암은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셔 왔다고 전해진다.

 


산신각은
  
1994년까지만 해도 문수사의 대웅전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나무의 단풍. 매년 이렇게 아름답게 물이 든다고 한다


  
아름답게 그려진 단청이 눈길을 끈다

 

가을 날 찾은 문수사는 비구니 절들이 그러하듯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대웅전이 극락전 앞에 선 나무는 반홍반황(半紅半黃)의 색을 띠고 있어 아름답다. 극락전 뒤에 선 삼성각은 1994년까지는 문수사의 대웅전이었다. 현재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현재의 대웅전 건물이 1994년도에 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천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한 곳 흐트러짐이 없이 정리가 되어 있는 절. 장독대는 얼마나 닦아댔는지 윤이 반지르르하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가 가을이 깊었음을 알린다. 요사 뒤에 있는 모과나무에는 튼실한 모과들이 달렸다. 그저 밑에만 가 있어도 모과냄새가 코를 간질일 듯하다.


  
문수사 요사 뒤에 모과나무에는 모과들이 참 많이도 달렸다


  
깨끗히 정리된 장독이 윤이 난다. 문수사는 신라 헌강왕 7년인 881년에 혜감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많은 전각들이 있었다고 하는 문수사. 현재는 김제 금산사의 말사로 되어 있는 문수사의 가을은 또 하나의 정취를 지니고 있다. 어디를 가나 아름다움이 한 가지씩은 있다는 절집들. 문수사의 가을은 극락전 앞에 선 아름답게 물든 단풍에서 깊어지고 있었다.

창성사지, 수원 광교산에 있는 옛날 창성사라는 절터 이름이다. 이곳을 찾으러 9월 10일 산행을 시작했다. 창성사지를 찾기 위해 벌써 3번 째 산을 오르는 길이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길을 들었다가, 엉뚱한 곳을 헤매기를 두 번. 이번에는 제대로 설명을 듣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입구 어느 곳 한 군데 하다못해 나무 판에 화살표라도 하나 해놓았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숲속에 들어가 모기와 전쟁을 하면서 찾아들어간 창성사지. 천천히 걸어 30~40분 정도면 찾을 수 있는 곳을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하나를 찾으려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한다. 문화재 안내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잡초더미에 쌓여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여기가 창성사지, 해도 너무한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안내판이 보인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진각국사의 탑비는 현재는 수원 화성 안 방화수류정 길 위편으로 옮겨져 있다.

 

그런데 이 창성사지를 보고 그 자리에 털벅 주저앉고 말았다. 세 번씩이나 찾아서 겨우 올라 온 곳인데, 사지라고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잡초더미에 묻혀있다. 아무리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향토유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꼴을 보면, 정말 부아가 치밀기 이전에 먼저 눈물이 난다.

 

창성사지의 아래편 석축. 60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다 

석축 및 움막, 누가 무엇때문에 지은 것일까? 흉물로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 창성사라는 곳의 가치는 알고 있는 것일까? 축대와 우물, 그리고 기단석과 주춧돌. 그 안에는 과거 창성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잡초더미에 쌓여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풀숲을 헤집고 창성사지를 돌아보다.

 

창성사지 안으로 풀숲을 헤치고 들어섰다. 옛 축대가 보인다. 높이 4 ~ 5m 정도의 축대로 보아, 이곳을 기점으로 아래 위에 전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잡초 속에서 꽃 한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그런 모습이 더욱 눈물겹게 만든다. 축대 밑으로는 누군가 이곳에서 기도라도 한 것일까? 다 찢어져 가는 움막이 있다.

 

 

이렇게 방치된 몰골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예 한 번도 정비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럽혀진 옷가지며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는 움막, 무엇을 하던 곳일까? 조금만 걸으려고 해도 풀이 발에 감겨 걷기조차 힘들다. 풀이 워낙 우거지다 보니,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렵다.

 

현재 석축은 약 50m 정도가 남아있다. 석축으로 쌓은 기단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래층 기단의 위로 또 2m 정도의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이 위층 석축은 다 무너져 내린 형태이다. 그런 것 하나를 알아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온통 풀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창성사지 안에 풀숲에 가려진 기단석과 주추돌

 

석축으로 쌓은 우물, 맑은 물이 고여 있어

 

맨 위로 올라갔다. 200년은 됨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고 서 있다. 사지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 쌓은 우물터가 보인다. 밑에는 흙이 쌓여 앙금이 졌지만,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아마도 이 터에 남아있었던 진각국사의 사리탑과 비 등으로 유추할 때, 창성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각국사의 비에는 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인 1386년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이 비의 내력만으로도 창성사는 625년이 지난 절이었으니, 아마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보면 그 역사가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석축으로 쌓은 우물터. 아직도 물이 고여있다 

 

약 500평 정도의 규모를 가졌을 창성사지. 그 안 서북쪽의 대웅전지에는 장대석으로 조성한 기단석과 여기저기 주초로 사용했던 돌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탑재편과 기단의 갑석 등도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잡초더미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위편 석축 끝으로 가서 산 아래를 바라다본다. 이곳에 절을 지은 이유를 알만하다. 저 멀리 아름다운 산의 능선이며 수원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길을 안내하는 표시판 하나 없이, 잡초에 묻혀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이렇게 내버려둘 것 같으면 왜 향토유적 지정은 한 것일까? 돌아서는 내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가슴이 미어지는 문화재 답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성사지에서 바라다 본 능선. 저 멀리 수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편향을 갖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문화재를 함부로 취급할 경우는 정말 짜증스럽다. 9월 7일 안성에 취재를 하는 길에 고찰 칠장사에 들렸다. 칠장사는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4번지에 있는 칠현산에 소재한다.

 

칠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며, 경기도 문화재 자료 24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찰이다. 현재 칠장사가 위치한 칠현산은 본래 아미산 이었는데, 고려시대 혜소국사가 7명의 도적을 교화해 일곱 현인을 만들었다고 하여 칠현산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칠현산을 칠장산이라고도 한다.

 

 

 

 

문화재의 보고 칠장사

 

칠장사는 7세기 중엽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고려 현종 5년에는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칠장사를 중창했고, 고려 우왕 9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의 역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겨와 보관하기도 했다. 그만큼 칠장사는 불교문화를 지켜내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 고찰이다.

 

칠장사에는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원통전을 비롯한 15동의 전통건축물과 석탑, 동종 등이 있으며, 국보 296호인 오불회 괘불, 보물 1256호 삼불회 괘불, 보물 488호 혜소국사비를 비롯, 보물 983호 봉업사 석불입상, 보물 1627호 인목왕후어필 7언시와 경기 지방문화재 114호인 칠장사 사천왕, 경기도 지방문화재 39호인 칠장사 철당간 등이 있다.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칠장사

 

칠장사는 여느 절과는 다르다. 절 안에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사람들은 꼭 불자가 아니라고 해도 칠장사를 즐겨 찾는다. 칠장사 명부전 벽화는 색다르다. 벽화에 임꺽정이 그려져 있는가 하면, 궁예가 활을 쏘는 모습도 있다. 이는 궁예가 칠장사에서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또한 의적 임꺽정과 7명의 도적이 가바치 스님인 병해대사의 설법에 마음을 바로잡고 의적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칠장사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다. 암행어사 박문수는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주어 장원급제 했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렇게 칠장사는 사람들이 찾아오면 볼거리와 들을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에, 수시로 사람들이 찾아들고는 한다. 접에서 키우고 있는 커다란 개는 사람들이 찾아와도 무신경하다. 딴 곳이 여기저기 출입을 통제시키는데 비해, 칠장사는 모든 곳을 개방하고 사람들이 관람을 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도 이 절의 특징이다.

 

“선생님, 거기서 담배를 피우시며 안됩니다.”

 

이런 칠장사이다가 보니, 지나치는 사람들이 누각에 올라가 앉아 쉬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개방을 한 전각 마루에 걸터앉아 쉬는 것은 좋은데, 버젓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경내에서 담배는 금하고 있다. 더구나 칠장사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있어, 더 더욱 화재 등에 민감한 곳이다.

 

“선생님 거기서 담배 피우시면 안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대개는 ‘몰랐다’거나 ‘미안하다’고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양반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담배를 피우고 있다. 슬슬 부아가 치민다. 얼굴 사진이라도 찌거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저씨 거기 담뱃불 끄세요.”

 

 

 

 

말이 조금 험악해지니 그때서야 슬그머니 담배를 비벼 끄고 절 마당에 휙 집어 던진다.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았다는 생각이다. 버린 꽁초를 주어 다시 가져다주었다. 경내를 나가서 쓰레기통에 버리라고. 물론 오지랖 넓게 별 것을 다 신경 쓴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같이 문화재를 힘들여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용납이 되질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렸지만, 답사 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이 소중한 문화재들이 자칫 화재라도 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동화사 사태 등으로 내내 심기가 불편한 사람인데 말이다. 도대체 언제나 제대로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들이 들을 것인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만 쉰다.

7월 15일. 이틀간 무섭게 쏟아지는 비가 멈춘 듯하더니, 이번에는 날씨 몸을 무겁게 할 정도로 덥다. 구례 사성암.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에 있는 해발 500m의 오산에 있는 암자인 사성암은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이다. 오산 꼭대기에 있는데 도선굴에는 원효와 의상, 도선과 진각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고 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암자 뒤편으로 돌아서면 우뚝우뚝 솟은 절벽이 전개되는데, 풍월대, 망풍대, 배석대, 낙조대, 신선대 등 12대가 있어 뛰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봉성지』에 이르기를 「그 바위의 형상이 빼어나 금강산과 같으며 옛부터 부르기를 소금강」이라 했다고 적고 있다.

 


셔틀버스로 운행하는 사성암 가는 길


현재 사성암은 조그마한 소규모의 목조 기와집인 몇 채 바위 틈에 자리하고 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에 돌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 전각 안에는, 암벽에 높이 4m되는 음각마애여래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음각마애여래입상의 연대가 고려초반기로 올라간다는 점에서 사성암의 창건 내력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마애상이 보호하는 이 적각 앞에서 내려다보는 섬진강의 구비진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네 분의 고승이 도를 깨우쳤다는 도선굴로 오르다가 보면, 800년이 지났다는 고목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괴목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소원바위. 그 앞에는 명패를 적은 나무들을 가득 걸어놓았다.

 

 


지금은 밑 주차장에서 셔틀버스로 사람들을 사성암 입구까지 실어다 준다. 왕복요금은 3,400원이며, 언제라도 사람들이 차면 출발을 한다. 예전에 이곳을 걸어 올랐을 때 3시간이 넘었던 기억을 하면, 이제는 답사도 참 편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굴을 지나면 절경이 펼쳐져


산왕전에 들려 참례를 하고 도선굴로 들어선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축축한 것이 습기가 가득하다. 예전 고승들은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참선을 한 것일까? 아마도 이렇게 살기가 어려운 곳에서 더욱 더 인간의 힘든 것을 이겨내며 스스로 달굼질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굴을 나오면 절벽에 붙들어 매듯 만들어 놓은 나무로 짠 길이 나온다. 그 앞으로 펼쳐지는 섬진강의 모습.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장관이었다. 그러나 붉은 섬진강만 보일 뿐, 흐린 날이라 그 앞 절경이 감춰져있어 아쉽기만 하다.


돌아내려오는 길에 보니 젊은 사람들이 괴목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아마도 저 나무처럼 그리 오랜 세월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늘 다녀보지만 좋은 절은 갈 때마다 그 느낌이 달라진다. 그래서 몇 번이고 찾아가는 것이지만.


사성암 바위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을 한 장 촬영을 하려고 하니 문화재라서 사진을 찍으면 인된다고 한다. 요즈음 답사하기가 가장 힘든 것이 바로 이런 사진촬영금지 때문이다. 그래도 허락을 받고나서 대개는 촬영을 하지만, 어떤 곳은 아예 딱 잘라 거부를 하는 곳도 있다. 그럴 때면 참으로 씁쓰레하다. 사진촬영을 막는다고 문화재보호가 잘 된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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