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101호 ‘법천사지 지광국사탑(法泉寺址 智光國師塔)’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70)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수난의 세월을 지내온 문화재다.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에 서 있던 현묘탑은 1912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이 되었다가, 3년 후인 1915년 반환되어 현재는 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사를 할 때도 오직 이 탑만이 남았다. 그 이유는 6,25 동란 때 폭격을 받아 부수어졌던 것을 그 후 다시 맞추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탑을 자세히 살펴보면 폭격을 맞아 부수어잔 부분을 시멘트로 발라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이전을 한다고 탑을 해체했을 때 심각한 훼손을 가져올 수도 있어,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 보존하였다. 탑의 높이는 610㎝다.

 

고려시대 탑의 걸작, 아름다운 비길 수 없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인 현묘탑은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한 마리씩 놓여 있던 사자상을 모두 도둑을 맞았다. 이렇듯 수난을 당한 지광국사 현묘탑은 우리 문화재 중 가장 수난을 당한 문화유산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부도가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부도는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통일신라시대 이후 계속된 팔각형 평면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는 이형부도이다.

 

현재 법천사지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인 점으로 보아 묘탑의 조성 시기는 지광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리를 운반하던 외국풍의 가마형태

 

부도 전체에는 사방에 여러 가지 꾸밈을 두고 있다.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으며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 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 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탑은 모두 7단으로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더했다.

 

기단부에는 여러 단을 두어 꽃, 상여, 신선, 장막 등을 장식했다. 탑신에는 앞뒤로 페르시아풍의 창문을 내고, 드림새 장식을 하였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추켜올려졌으며, 밑면에는 불보살, 봉황, 연꽃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양화, 복발, 보개, 보주가 층층이 쌓아 올려졌다. 이 현묘탑은 지광국사의 장례 때 사리를 운반하던 화려한 외국풍의 가마를 본떠 만든 것으로 보인다.

 

 

 

지광국사탑에는 특별한 것이 보인다. 바로 보련(寶輦)인 임금이 타던 옥교를 메고 가는 고려시대 가마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흑색 관모를 머리에 쓰고, 무릎까지 오는 둥근 깃의 단령포를 착용하였다. 우리나라의 묘탑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국보 제101호 지광국사현묘탑. 수난의 역사를 지내온 이 탑을 본을 삼아 앞으로 이 같은 불행이 다시는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적 제466호 법천사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는 원래 경기도 여주의 땅이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하여 고려시대에 융성했던 것으로 알려진 법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이 된 후 중창을 이루지 못한 절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는 초겨울의 바람이 불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져서인가, 법천사의 발굴 복원 작업이 중단되고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복원을 위한 중장비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그 차가운 금속물질이 더욱 날씨를 차갑게 느끼게 한다. 법천사는 권람, 한명희, 서거정 등이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만큼 이 법천사가 한 때는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이곳을 황려현이라고 사료에 표기된 것으로 보아 여주에 속했던 지역으로 보인다.


법천사에는 국보 제101호인 지광국사현묘탑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12년 일본 사람들이 밀반출하였다. 그 후 1915년에 되돌려 받아 현재는 경복궁 경내 구 국립중앙박물관 자리 앞에 서 있다. 이 현묘탑이 새로 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은,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옮길 수 없을 정도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59호 지광국사 현묘탑비

현재 법천사지는 발굴, 복원 중에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전각이 있던 자리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전각의 자리로만 추정해도 이 절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알 수가 있다.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스님인 지광국사(984 ~ 1067)의 사리를 모신 현묘탑을 세운 이후,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에 지광국사의 업적과 삶을 기록한 비다. 국보 제101호인 탑은 제자리를 떠나고, 탑비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비 귀부의 머리. 신라말에서 고료 초기로 넘어오는 과정에 나타나는 용머리이다


수많은 석재들이 쌓여있는 법천사지. 그 하나하나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저기 쌓여있는 석재들 틈에는, 보기만 해도 상당히 귀한 석조물들이 보인다. 벌써 몇 년째 이렇게 발굴과 복원을 하고 있다.

현묘탑비의 앞면에는 지광국사가 984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원혜린이라고 기록돼 있다. 16세(999년)에 스님이 되어 승통, 왕사, 국사의 칭호를 얻었으며, 84세인 1067년에 이곳 법천사에서 돌아가신 것을 기록하였다.




고려초기의 특징을 나타내는 받침돌

국보 제59호 현묘탑비를 보면 놀랍다. 받침돌은 고려 초기 탑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삼국통일을 한 신라 말기부터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받침돌의 형태가 달라진다. 즉 거북의 몸에 머리는 용머리로 조성했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받침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새로운 받침돌의 형태는 그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용머리는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다. 얼핏 보면 무섭기도 하지만, 조금은 해학적이기도 하다. 그런데다 목 부분에는 또 다른 버팀석을 만들어 놓아 머리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다. 몸체인 거북의 등에는 '王'자가 육각형의 무늬 안에 새겨져 있다. 왕사나 국사의 비에서 보일 수 있는 글자다.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현묘탑비

지광국사현묘탑비를 찬찬히 살펴보면 뛰어난 작품성을 엿볼 수 있다. 천년이 지난 과거에 이렇게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연꽃의 잎과 구름속의 용이 조각된 왕관 모양의 머릿돌. 그리고 비 몸돌에 새겨진 화려한 문양과, 금방이라도 몸돌에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용. 섬세하고 화려한 구름 등이 현묘탑비의 뛰어난 예술성을 느끼게 만든다.

국보 현묘탑. 제 자리를 떠나 더욱 안타깝다. 제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현묘탑비의 뒷면에는 1370명의 제자들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다. 전체 높이 4.55m의 현묘탑비는 거북이의 몸에 용머리를 붙인 받침돌. 그리고 양편에 비천하는 용을 새긴 탑비와, 왕관모양의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다.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탑비 곁을 쉽사리 떠나지 못한다. 이런 대단한 조각을 후대에 남겨줄 수 있는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