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처럼 장자와 누각이 많은 곳은 우리나라 전역을 돌아보아도 한 두 곳에 불과하다. 그만큼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누각이다.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보다 바람직한 마을은 없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

이번 답사 길에서는 두 곳의 누각을 돌아보았다. 함양읍 운림리 함양군청 앞에 서 있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학사루와, 안의면 금천리 금호강변에 소재한 제92호인 광풍루이다. 두 곳의 누각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모두가 관아에 속해 있던 건조물로 보인다. 이 중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신라 때부터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광풍루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이 올라 시를 읊었다는 학사루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 지방 태수로 재직시, 학사루에 올라 시를 읊은 곳이므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학사루의 건축 년대를 신라 때로 본다. 학사루의 서쪽에 객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이 이곳 동헌의 부속건물이지 않았을까 추론도 해본다. 학사루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 연산군 때 영남파의 종조였던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어 연산군 4년인 1498에 무오사화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학사루는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정무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현재의 학사루는 320년 정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학사루는 2층 누각기둥에 주련을 달아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학사루. 비가 오는데도 답사를 강행하였다.

정여창이 명칭을 지은 광풍루

광풍루는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 금호강변에 서 있다. 광풍루의 원 이름은 선화루였다. 선화루, 선화당이란 명칭은 동헌의 누각이나 전각에 많이 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 누각은 동헌의 건물이었다고 본다. 광풍루는 조선조 태종 12년인 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 전우가 창건하여 한다.

그 후 조선 세종7년인 1425년에 김홍의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조 성종 25년인 1494년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로 개칭 하였다. 그 뒤에도 소실과 복원 등을 거친 광풍루의 현 건물은, 숙종 9년인 1683년 현감 장세남이 중건한 건물로 340년 정도의 세월을 지낸 누각이다.



광풍루. 금호강가에 서 있는 운치있는 누각이다.

꽁꽁 닫아라, 머리카락 보일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꽁꽁 닫힌 문이다. 전국의 서원이나 향교 등을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많은 문화재들이 문을 잠그고 있다. 특히 이런 문을 닫아놓는 현상은 전각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그렇게 문을 잠그는 것은 바로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학사루 계단 위 닫힌 문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어딜가나 낙서로 몸살을 잃는다. 그래서 문을 잠갔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학사루 이층으로 올라가는 문에는 잠을통이 걸려있다.

하지만 문을 닫아 걸어놓는다고 훼손이 되지 않을까? 요즈음 들어 각 지자체들마다 정자나 누각 등을 개방을 한다. 마루를 깨끗이 손질하고 사람들이 신을 벗고 들어가 쉴 공간으로 활용을 하는 것이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독서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누각이나 정자 등이 바람이 잘 통하게 구조가 되어있어, 시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누각인 촉석루 등도 모두 개방을 하고 있다.


광풍루에도 계단에 문을 달아 막아놓았다. 문 밖에서 본 이층

하지만 함양군의 두 곳 누각은 모두 잠가놓았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잠을 통을 잠가 놓아 위로 오를 수가 없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문화재 보존이 잘 되는 것일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였더니, 더 조심스럽고 보존이 잘 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광풍루 이층 누각은 잠겨 있는데 저 소주병은 신선이 내려와 마시고 갔을까?

가는 곳마다 잠겨있는 누각.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못 들어갈까? 광풍루 이층 누각 마루에 소주병을 보면서, 이런 일이 얼마나 덧없는 관리인가를 묻고 싶다. 만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을 했다면, 저렇게 소주병이 그곳에 있었을까?

세상에는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사에도 이런 제목을 사용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나름 꽤나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소재한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 안에 서 있는 비석 때문이다.

사적 제499호인 남계서원은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이란 조선조 때 초급교육기관이던 서원 중에서, 국가로부터 특별히 공인을 받은 서원을 말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임금이 친히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하사한다. 사액서원은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함께 하사를 받게 되며, 사액서원의 시초는 조선 명종 때 주세붕이 세운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비롯하였다.


낙동강 좌측은 안동, 우측은 함양에서 인재가 나온다.

남계서원은 조선조 오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명종 7년인 1552년 지방의 유생들이 세운 서원이다. 소수서원이 명종 5년인 1550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내렸다. 남계서원이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보다 17년 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역사를 가늠할 수 있듯, 우리나라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사액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앞에 정문인 누각을 세우고 강당 및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워, 일반적인 사원의 구조와 같다. 그러나 그 전각의 형태 등은 남다르다. 경내의 건물들이 위엄을 보이고 있고, 예사 서원과는 그 품격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낙동강 좌측으로는 안동에서, 우측으로는 함양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인가 이곳에서 정여창 선생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배출이 된 것이다.



명종 때 하사받은 편액은 남계와 서원이란 두개의 현판으로 되어있다(위)
입구 양편에 있는 연못과(가운데) 비가 내려 물방을을 머금은 수련(아래)

전각 안에 있는 비석에 채색을

이 곳 남계서원은 정문인 풍영루 안으로 들어서면 강당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이 길 양편에는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놓았다. 그런 것 하나라도 서원을 꾸밀 때 많은 신경을 쓴 모양이다. 강당을 향해 좌측 연못의 끝 길가에는 비석을 보호한 전각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단계서원의 중수기 정도로 보인다.

그런데 이 비석을 보다가 의아한 점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비문을 적은 몸돌, 그리고 지붕돌로 구분이 되어있는데, 이 지붕돌에 채색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전국을 다니면서 수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지붕돌에 채색을 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나무도 아니고 돌에다가 채색을 했다는 것이 색다르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비를 보호하는 전각과(위) 이 서원이 사액서원임을 알리는 비문(두번 째) 그리고 머릿돌에 칠한 채색

찬찬히 전각 주변을 돌면서 훑어본다. 머릿돌에 한 채색은 요즈음의 색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 채색은 도대체 언제 저렇게 한 것일까? 그리고 지붕돌에 무슨 연유로 채색을 한 것일까?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밤늦은 시간이지만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본다. 그러나 그렇게 채색을 한 머릿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계산해도 맞지 않는 사적의 문화재 안내판

혹 그런 내용이라도 있는가 싶어 자료로 찍어 온 안내판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한참 읽다가보니 혼란만 가미된다. 이건 또 무슨 조화람. 사적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연도가 잘못 기재가 되어있다. 명종 7년은 1552년이다. 그런데 명종 21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그 해가 1556년이라고 적혀있다. 14년의 차이는 어떻게 났으며, 그 14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결국 안내판에 년도가 잘못 기재가 되었다. 명종 7년인 1552년에 남계서원을 건립했고, 14년 후인 명종 21년인 1566년에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그것을 1556년으로 적어 놓았으니, 보는 사람의 계산이 맞지 않을 수밖에. 문화재 안내판은 신경을 더 많이 써야한다. 그런데 국가지정 사적의 안내판에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니.


전각 안에 있는 비의 머릿돌 채색과 전각의 단청(위) 그리고 오류가 있는 안내판 

문화재가 너무 많아 그 소중함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채색에 대한 궁금증도 풀지 못했는데, 잘못 표기된 안내판으로 인해 귀한 시간을 내어 발품을 판 답사가 망쳐진 듯하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나름 정해진 바가 있다. 좋은 집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칭찬을 하지만, 잘못된 것은 아낌없이 파헤친다는 생각이다. 이는 고택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재에 동일하게 적용시키는 나만의 답사 방법이기도 하다.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는 고택을 100채 이상을 돌아보았다. 그 중에는 정말 살고 싶은 집이 한두 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역시 이번 답사 길에 만난 함양군의 일두 정여창의 고택이다.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이 고택의 사랑채는 미적 감각을 마음껏 자랑하고 있다.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게 구성을 한 안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집에는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따듯한 마음이 있어 좋다. 이 집의 주인과 같은 분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닐는지.



450년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고택

우선 이집을 돌아보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일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집의 구성은 길에서 들어가면 만나는 솟을대문 위로 홍살문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5개의 효자와 충신의 정려패가 문 위에 걸려있어, 이 집의 범상치 않은 내력을 알게 한다.

집의 구성은 대문과 사랑채, 행랑채, 안사랑채, 중문채, 아래채, 광채, 사당 등으로 꾸며져 있다. 조선 오현 중의 한 분인 문헌공 일두 정여창(1450~1504) 선생의 고택으로, 정작 이 집은 선생의 사후인 선조 무렵인 1570년대에 지어진 집이다. 정여창 고택의 특징은 당시의 집의 구조뿐만 아니라 세간까지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깔아진 돌과 솟을 대문(가운데) 그리고 효자와 충신의 정려(아래)

뛰어난 사랑채의 멋스러움

골목길을 들어서면서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골목길의 바닥을 돌로 깔아 운치를 더했다. 이 돌길은 새롭게 조성한 것이 아니고 집을 처음 지을 때부터 놓여있었다고 하니, 당시에도 이 집이 남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광채와 중문의 담으로 연결이 된 사랑채가 보인다.

장대석을 3단으로 놓고 그 위에 자리한 사랑채. 정말로 눈이 부시다고 해야 할까? 사랑채 하나만 갖고도 하루 종일 글을 써도 부족할 듯하다. ㄱ자로 꺾인 부분에 개방된 마루를 놓아 정자로 만들고, 그 밑은 물건을 넣어둘 수 있는 광으로 구성을 하였다. 대문채와 광채에도 이런 물건을 둘만한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의 밑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은 아랫사람들의 동선구성을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사랑채는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놓았다. 꺾인부분은 판벽으로 마감을 하고 앞을 개방해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갖는다(가운데), 개방마루 밑은 물건을 넣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사랑채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담 너머로 사랑채를 보니 커다란 노송과 어우러지는 광경이 그대로 그림이다. 어찌 이런 사랑채를 꾸밀 수가 있었을까? 모든 것 하나하나가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던 것일까?

안주인의 위엄을 보이는 안채의 구성

사랑채와 중문을 사이로 구별이 되는 안채는, 정여창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100년이 지난 후 후손들이 지은 건물이다. 350년의 세월이 지난 안채는, 앞으로는 중문채를 놓고 우측으로는 아래채, 좌측으로는 사랑채의 뒤가 막고 있어 튼 ㅁ 자로 구성하였다. 사랑채의 대청은 집안의 대소사를 마련할 수 있도록 넓게 구성이 되었으며, 오른편에는 며느리의 방을 따로 마련한 것도 이 안채의 특징이다.

안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적으로 안주인이 맡아서 할 수 있도록 집안의 동선을 꾸며 놓았다. 심지어는 결혼을 한 후 일정기간이 지나면, 남자는 뜰아래채로 내려가 생활을 하게 하였다고 하니 이 집의 엄한 가풍을 알만하다.



안채와 뜰아래채(위), 중문채(가운데)와 안채의 정원

아랫사람을 생각한 집 구조와 동선

정여창 고택의 백미는 역시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집주인의 배려가 곳곳에 묻어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집을 다녀보았지만 이렇게 아랫사람을 생각하고 집을 지은 것은 볼 수가 없었다. 왜 오현 중의 한 분으로 선생을 꼽았는지를 알 수 있다. 안채 앞뜰 우물곁에는 절구를 땅 속에 묻어놓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안채에서 여자들이 절구질을 할 때, 땅에 묻힌 절구가 힘을 덜 들이고도 작업을 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엌으로 들어가니 환기를 시키는 까치구멍 대신 벽에 창문을 내었다. 까치구멍은 사시사철 공간이 열려있어, 한 겨울이 되면 바람이 심하게 들어와 춥다. 하지만 까치구멍이 있어야 할 곳에 창문을 내어 열고 닫음으로써, 추위를 막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배려의 마음이다.


땅속에 파묻어 힘이 덜 들도록 한 절구(위)와 까치구멍 대신 창을 내어 추위를 막았다(아래)

정여창 고택만이 갖고 있는 마루측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중문채 밖으로는 사랑채의 뜰로 나가는 공간이 있다. 곳간을 두고 일각문으로 향하는데, 중문채 뒤편에 마루가 보인다. 그런데 그 마루의 한편이 판벽으로 막혀있다. 무엇인가 하여 다가가 보았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판벽 안으로는 소의 여물통을 이용해 소변을 볼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중문채는 집안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그러다보면 제 시간에 소변조차 마음대로 볼 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준 마루측간. 이것이 바로 윗사람의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닐까? 정여창 고택을 최고의 집으로 꼽는 데는 한 치의 주저함도 필요치가 않았다. 어디 이런 윗분 없을까?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분 같은데.


일각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채의 바깥 툇마루가 있다.(위) 그 우측이 바로 마루측간이 있는 곳이다.
소의 여물통을 이용한 마루측간. 정여창 고택의 정점이다.

‘천령’은 ‘하늘재’라는 소리이다. 지금의 경남 함양군이 바로 신라 때 명칭이 천령이었다. 신라 때는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성이라 칭하였으나, 신라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천령군으로 개칭하였다. 당시는 이곳이 육로를 이용해 다니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했던가? 함양군에는 어느 곳 보다도 많은 정자들이 있다. 그만큼 이 곳의 산천경계가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함양군의 곳곳에는 수많은 정자가 즐비하게 서 있다. 물이 있고 산이 아름다우면, 그곳에는 반드시 정자가 서 있기 마련이다. 함양군에는 정말 아름다운 정자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손으로 꼽자면 난 당연 거연정을 머리에 둔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거연정

거연정은 1872년에 지어졌으니, 130년 정도가 지난 정자이다. 정자의 연륜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화림재 전시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7세손인 전재학, 전민진 등이 건립을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내가 자연 안에 거하고, 자연이 내안에 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팔정팔담(八亭八潭)이라고 했던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거연정 앞을 흐르는 내에는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가 있었다는 곳이다. 그만큼 바위 암벽을 타고 흐르는 내는 절경을 만들고 있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내부에 판방을 두고 있으나, 뒷벽의 판재만 남아있고 삼면의 문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바위에 부딪는 물소리, 선계가 따로 없어

비는 줄기차게 쏟아진다. 전날 밤에 많은 비가 내렸는지, 계곡을 차고 흐르는 물이 잿빛이다. 바위에 부딪는 물은 금방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저만큼 거연정이 보인다. 암벽 위에 홀로 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정자. 겹처마에 합각지붕을 이고, 자연 암반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 건너편에서 구름다리로 연결해 건널 수 있도록 한 거연정. 멀리서 사진을 찍고 나서 다리를 건넌다.




물소리가 더욱 거칠다. 정자 뒤편 낮은 암반을 타고 흐른 물이, 깊은 소에서 춤을 추며 맴돈다. 빗소리가 절로 흥취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발길을 멈춘 것이나 아닌지. 정자 안에는 여기저기 편액이 걸려있다. 저편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각자를 해놓았다. 정자 밑으로 내려가니, 이런 멋을 어디서 또 볼 것인가?

마음에 여유를 본다. 높고 낮은 바위를 그대로 이용해 많은 기둥을 세웠다. 기둥이 서기 힘든 곳은 층이 나게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앞뒤, 사방으로 물길이다. 그 물길 안에 거연정이 바람처럼 홀로 서 있다. 누구랴 이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저만큼 한줄기 거센 물살이 몰려온다. 아마 저 위 바위틈에서 거연정의 경치에 반해, 길을 멈추고 있었나보다. 그 물길이 거연정으로 몰려들어, 소리를 내며 소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지금은 비록 낡고 퇴락한 정자. 그 흔한 단청 하나 하지 않은 맨살을 들어내고 있는 정자. 거연정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비가 오는 날 찾은 거연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물 위에 내보이고 있었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쓰기 싫은 글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었다’ 혹은 ‘복원이 잘못 되었다’라는 글 등이다. 나는 그냥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 사람의 여행자일 뿐이다. 그런데 전국을 발품을 팔며 다니는 것도 힘이 버거운데, 문화재의 잘못된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자연 열이 뻗칠 수밖에 없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문화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택과 정자가 많은 곳이니, 들려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는 한옥마을이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 또한 만만찮다. 잘만 관리를 했다고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을 그러한 마을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솟을대문의 안쪽

하동정씨 고가의 아름다움

지곡마을이라고 하는 개평리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옷 안에 감추고라도 답사를 다닐 수밖에. 이 마을에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로 지정이 된 하동정씨 고가가 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너른 정원이 눈길을 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게 펼쳐진 정원에 나무 몇 그루가 운치 있게 서 있다.

뒤편에 멀찍이 서 있는 - 자형의 고택이 바로 이 집의 안채이다. 1880년에 지은 이집은 사대부가의 저택답게 사랑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이 안채만 남아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한 이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 자형으로, 남도의 특징인 개방형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지만 한편에 부섭지붕을 달아 멋을 더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팔작지붕으로 오해를 살만도 하다.



- 자형의 6칸 안채와 벽에 달아낸 부섭지붕(가운데), 그리고 부섭지붕 아래 툇마루(아래) 


부섭지붕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대개 부섭지붕은 측면에 놓고 그 밑을 좁은 마루를 놓는다. 하지만 이 부섭지붕을 달아 전체적인 집의 모양새를 아름답게 꾸민다. 지곡마을에는 이 부섭지붕을 단 집들이 보인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정갈하게 정리가 된 집이다. 툇돌 아래에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땅이 패지 않도록, 기와로 마감을 한 것이 정겨워 보인다. 시원한 두 칸 대청은 뒷문이 열려 돌담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다. 집은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두 칸 대청을 내었다. 그리고 두 칸 방과 한 칸 부엌이 있다. 간결하게 꾸며진 집이 선비의 단아함을 보는 듯하다.



대청 뒷벽에 시원하게 낸 문과 툇돌아래 낙수가 떨어지는 곳(가운데) 그리고 안방의 외벽(아래)

뒤로 돌아가 본다. 안방의 벽이 남다르다. 기둥을 여러 겹으로 가로 질러, 그것이 그대로 문양이 되었다. 어떻게 집을 지을 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동편 부섭지붕 밑으로는 마루를 놓아 시원하게 바람을 쏘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또한 남부지역의 특징 있는 가옥구조이다.

반대편 서편 벽에도 부섭지붕이 달려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조금은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벽 위로 까치구멍이 있는데, 안을 모두 발라놓았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까치구멍을 막아놓았을까?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을 보일러실로 개조를 하였다. 그리고 안에는 부엌의 벽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부섭지붕은 후에 달아낸 것일까?



세상에 이럴 수가. 부엌문 안을 벽으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부엌 밖 부섭지붕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부엌문을 열어본다. 이게 무슨 일인가? 부엌문 안에 담이 있고, 위는 창으로 막혀있다. 그렇다면 이 부엌은 어떻게 출입을 할 수 있을까? 방 앞으로 난 툇마루 끝에 달린 문으로 출입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엌문의 안이 벽으로 막혀있다니. 말이 안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집을 고친지가 얼마되지 않은 듯한데, 이렇게 된 곳이 있다면 제대로 해 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어이가 없어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까? 온몸에 힘이 다 빠진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솟을대문 안에 새로 지은 집이 있다. 뒤편을 보니 굴뚝이 이상하다. 이건 또 무슨 굴뚝일까? 굴뚝이야 마음대로 형태를 할 수 있으니, ‘이렇게도 하나보다’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우진각지붕을 올린 세 칸짜리 집 한 채.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했을까?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도 사랑채가 있을 장소는 아닌 듯하다.


솟을대문 안 우측에 새로지은 우진각 지붕의 집. 사랑채인 듯하다. 뒤편의 굴뚝

문화재의 복원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고가가 이렇게 여기저기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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