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군 안의면 금천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207호인 안의 금천리 윤씨 고가가 있다. 일명 ‘허삼둘 가옥’으로도 불리는 이 고가는, 영남지역 상류주택으로서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지난 번 10월에 함양을 돌아볼 때는 이 집을 빠트려, 이번 12월 11일의 답사에서는 먼저 찾아가 본 집이기도 하다.

허삼둘 고가는 기백산을 뒤로하고, 덕유산의 지맥을 따른 진수산에 형성된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쇠부리’라고 부른다. 마을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의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집이기도 하다. 허삼둘 고가는 약 70여 년 전 윤대흥이 진양 갑부인 허씨 문중에 장가를 들어,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이다.


멋들어진 사랑채의 구성

허삼둘 가옥은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곳간, 안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행랑채가 있고, 그 옆으로 ㄱ자로 구성된 사랑채가 자리한다. 사랑채 앞에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넓은 공지인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이곳에 정원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사랑채는 마주보면서 우측으로 한 칸을 빼내어 누정으로 삼았다. 난간을 두르고 기둥을 세워 정자와 같은 모양으로 꾸며 놓았다. 이단의 돌을 쌓은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사랑채 건물을 지었다. 중앙을 빼고 좌우로도 난간을 둘러 멋을 더했다.



함양 허삼둘 가옥의 전경(위) 솟을대문과 사랑채 누정(아래)

특이한 안채의 구성은 놀라워

안채로 들어가면 ㄱ 자로 꾸며졌는데, 7칸의 집에는 특이하게 중앙에 부엌을 두었다. 이 안채는 꺾인 부분에 좁은 판자문을 두어 마루로 나올 수 있도록 꾸몄다. 안채는 여느 집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건축방법을 택했다. 우선 중앙에 부엌으로 통하는 판자문도 특이하지만, 까치구멍을 넓게 ×자형으로 달아낸 것도 그렇다.

대청은 이중으로 꾸며, 문을 달아낸 뒤로도 다시 마루를 놓았다. 아마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중으로 대청을 구성함으로써 여름이면 해를 막은 뒤편에 그늘을 만들고, 겨울이면 따듯하게 보호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특이한 집의 구성으로 인해 중요민속자료 제207호로 지정이 되었다.




ㄱ 자형으로 꾸며진 안채. 꺾인 부분에 문을 낸 특이함. 그리고 X 형으로 구성된 까치구멍과 이중으로 된 대청
 
불탄 흔적 그대로 방치가 되

이렇게 잘 꾸며진 허삼둘 가옥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담장은 무너져 내리고, 사랑채와 안채는 불에 튼 흔적이 그대로 있다. 행랑채가 보수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안채와 사랑채의 불에 탄 흔적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것도 일부만 그렇게 탔다는 것이 더욱 의심이 간다.

안의면 담당자와 통화를 해보았다. 5년 전인가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났다는 것이다. 문화재는 아무리 국가에서 지정을 했다고 해도, 개인소유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손을 댈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즈음에 안의면에서는, 정자를 비롯한 몇 채의 한옥에 불이 났다는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의도적인 방화일 것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에 탄 흔적이 있는 사랑채와 무너진 담장

그 후 문화재청에서는 이 가옥을 사서 보수를 하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이 맞지가 않아 아직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어느 집보다도 특이한 형태로 꾸며진 집이, 이렇게 방치가 되어있다니. 이럴 때는 강제로라도 보수를 할 수 있는 법은 없는 것인지. 그저 집안을 돌아보면서 답답할 뿐이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보려고 길을 나서지만, 자꾸만 그 불탄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쉽게 발을 떼지 못한다.


천연기념물은 봄부터 가을까지 주로 찾아간다. 그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멋스러움을 겨울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모습을 소개한다는 것은, 그 오랜 풍상을 견디며 꿋꿋하게 버텨온 나무에게 누를 입히는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단 하나 소나무만은 예외이다. 사시사철 푸르게 그 멋진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12월 11일, 아침부터 날도 잔뜩 흐리고 바람도 분다. 8시에 숙소를 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바로 답사 길에 나섰다.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천연기념물 제358호인 목현리 ‘구송’이 있다는 것이다. 휴천면에 들어가 구송을 찾아야하는데, 정작 길에서는 알아볼 수가 없다. 휴천면소재지를 한참이나 지나 함양읍 쪽으로 나온 듯하다. 이럴 때는 그저 당황스럽다. 정확한 주소를 모르고, ‘리(里)’만 알고 들어갔다가 당하는 낭패이다.

천연기념물 제358호 목현리 구송

달랑 안내판 하나, 아쉽다 

고갯마루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다행히 정확하게 어디에 있다고 알려주신다. 다시 길을 되돌아 면소재지로 들어갔으나, 천연기념물이 있음을 알리는 안내판조차 없다.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냇가에 심상치 않아 보이는 소나무 한그루가 보인다. 일반적으로 반송은 가지가 어느 정도 위로 오르다가, 옆으로 퍼져나간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개울 길을 따라 들어 가보니 철책을 둘러놓았다. 목현리 구송이다. 그러나 이 천연기념물인 구송을 알리는 이정표 하나가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다. 문화재가 있는 곳은 큰 길에서부터 안내판을 걸어놓는다. 그리고 길이 갈라지는 곳에는 또 안내판을 놓아, 처음 찾아가는 사람들이 길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 한다. 그러나 함양군내의 많은 문화재는 바로 코앞에 가야 달랑 안내판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목현리 구송은 밑동에서 가지가 아홉갈래로 갈라져 붙인 명칭이다.

수령 300년의 목현리 구송

천연기념물 제358호로 지정된 함양 목현리 구송은, 면소재지 중심으로 난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냇가에 서있다.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 854번지에 소재한다. 반송으로 알려진 이 구송은 수령이 약 300년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본다. 반송은 밑동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갈래로 자라는 나무를 말한다. 대개의 반송은 나무가 자라면서 옆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목현리 반송은 여러 가지가 나왔지만, 옆으로 자라지 않고 위로 자랐다. 나무의 높이는 13.1m 정도에, 가슴 높이의 둘레는 4,5m 정도이다. 이 나무를 ‘구송(九松)’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가지가 9갈래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목현리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 온 진양 정씨 학산공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구송은, 현재는 두 가지는 죽고, 일곱 가지가 남아 있다.




죽 곧은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 같아

아래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죽 곧은 나무는 마치 몸매가 좋은 여인 같기만 하다. 자라는 모습이나 귀한 반송이라는 점을 감안해 천연기념물로 지정을 했겠지만, 멀리서 보고도 그 모습을 쉽게 알아볼 수가 있을 정도이다. 나뭇가지는 위로 올라가면서도 조금의 굽힘도 없다. 그런 모습이 굳은 절개를 지닌 듯하다.

소나무는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아 절개가 굳은 사람에 곧잘 비유를 한다. 목현리 반송이야말로 그런 느낌을 받기에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는다. 그저 나무라기보다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한 나무인 것만 같다. 나무를 돌아보다가 갑자기 안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팔을 벌려 나무의 둘레를 재는 듯 안아 본다. 가슴으로 밀려드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뿌듯함이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사람에게 주는 기쁨을 남들은 무엇이라고 표현을 할까? 돌아 나오는 길에 보니 마을 한편 길가에 목현리 구송의 안내판 하나가 달랑 보인다. 오히려 그 잘 보이지 않는 안내판이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적어도 이런 귀한 나무를 어렵게 찾았다는 기쁨을 맛 볼수가 있었으니.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에는 고담사라는 절이 있다. 이 절 뒤편에는 화강암 바위를 그대로 깎아 불상을 새긴 마애불이 자리하고 있다. 한 눈에 보아도 거대마애불이다. 이런 거대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 마애불 역시 고려 초기인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왜 이렇게 거대한 마애불을 조성했을까? 아마 그것은 국운의 융성함과 더불어, 고려라는 나라의 국권을 상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물 제375호로 지정된 함양 덕전리 마애여래입상은 바위 면을 다듬어 조각한, 전체 높이 6.4m에 불상 높이가 5.8m나 되는 거대한 마애여래불이다.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 고담사 뒤편 암벽에 새겨진 보물 제375호 마애여래입상

염주와 화염의 문양으로 돌린 두광

고담사 뒤편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은, 훼손이 되지 않은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오랜 풍광에도 아름답게 보존이 되고 있는 모습에서 고마움을 느낀다. 이 마애불의 특징은 바로 광배와 대좌까지 온전히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 모양의 광배는 두광과 신광까지 모두 볼록하게 조각을 하였다. 연주와 화염의 문양을 돌려 조각을 한 마애불은 보기에도 화려하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연꽃 봉우리처럼 조각을 한 상좌가 있고, 그 밑에는 탑의 기단부와 같은 모습으로 하대로 구분이 되어있다. 특히 하대에는 석탑에서 보이는 우주와 탱화가 표현되어 있으며, 고려시대 탑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세하게 표현을 하였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받침에는 상좌와 하대가 표현이 되어있다. 하대에는 석탑의 기단부와 같이 우주와 탱주, 안상 등이 나타난다. 두광와 신광은 연주와 화염의 문양을 조각해 화려하다.

조금은 균형이 안맞는 덜 세련된 조각수법

길고 큰 전신에 비해 나발과 육계는 작은 편이다. 하지만 가늘게 감은 듯한 눈과 두툼한 꼭 다문 입등은 강력한 인상을 풍긴다. 적당히 표현된 코와, 어깨까지 늘어진 귀 등은 위엄스러움을 담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넓은 어깨에는 대의를 걸쳤는데, 가슴에서 한 번 꼬여 양편으로 늘어진 것이 망토와 같은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인도에서 시작이 되어 중국을 거쳐, 통일신라시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체적인 형태의 조각기법에서 덕전리 마애여래입상이 통일신라의 마애불 조각기법을 따른,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보는 이유다. 발은 크고 두툼한데 비해 손은 작은 편이다. 그런데 손을 조각한 수법이 색다르다. 몸에 비해 도드라지게 조각이 되어 있다. 아마 손이 작게 조각이 된 것도 저렇게 위로 도드라지게 조각을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금은 비례가 맞지 않는 손과 발

덕전리 마애불 앞에서 세상을 위해 참배를 하다.

전국 이곳저곳을 답사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화재들. 이렇게 온전히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는 덕전리 마애여래입상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다. 세상을 구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도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들. 그리고 훼손되고 도난당한 문화재들. 이런 아픔을 위한 반성의 참배다.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은 이 산 중 깊은 곳에서 천년 세월을 꿋꿋하게 지켜졌다면, 무엇인가 신비스런 힘이 있지나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그 굳게 다문 눈이며 입이, 그리고 왼손을 들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자 하는 모습이 덕전리 마애여래입상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뒤돌아 산을 내려오면서도 몇 번이고 돌아보게 되는 마애불. 아픔을 당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이들을 위해 기원을 해본다. 이제는 제발 몇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덕전리에는 보물 제375호인 고려 초기에 조성된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11월 27일(토) 비가 내리는데 찾아간 마애불. 이 마애불의 앞에는 한창 절의 건물을 새로 짓고 있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마애불을 찾아 올라가는 길에 보니 이상한 탑이 하나 서 있다. 사람의 얼굴모양을 돌에 조각한 탑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한편에는 ‘바람처럼. 또 한편에는 ’물처럼‘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108개의 갖은 표정들을 돌에 새겨 붙여놓았다. 「세상사는 일 번뇌 맘 상이 많아 그 모습들 백팔장승으로 표현하였다」라는 글이 적혀있다.




백팔장승 탑 정성이 깃들어 있어

이렇게 다양한 표정들을 조각하는데 얼마나 오래시간이 걸렸을까? 아마 모르기는 해도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이 백팔장승 탑 하나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 백팔개의 얼굴 중에 혹 나는 없는 것일까? 그 표정을 하나하나 훑어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표정들은 다 제각각이다. 어떤 표정은 웃고 있고, 어떤 것은 잔뜩 찌푸리고 있다. 또 노한 표정도 있고, 일그러진 얼굴도 있다. 세상사 모든 얼굴이 그 안에 있는 듯하다. 저 가운데 내 얼굴은 몇 개나 있을까? 이 백팔장승 탑이 언젠가는 이곳을 명물로 만들어 줄 것만 같다.






경상남도 함양군 지곡면 덕암리 도로변에 커다란 노송 숲이 있다. 그 안에 자리를 하고 있는 낮은 담이 둘러쳐진 고풍스런 정자 하나. 고려 말기의 문신인 덕곡 조승숙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태조 7년인 1398년에 세운 교수정이다. 처음 이곳에 정자를 세운지가 벌써 600년이 지난 정자이다.

조승숙(1357~1427)은 고려 말 우왕 7년인 138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러나 역성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향인 함양으로 내려와 이곳에 교수정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두문동 72현의 한분인 조승숙 선생의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배어있는 정자 교수정. 그곳에는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소나무 숲속에 선 교수정

교수정은 주변이 소나무 숲이다. 지나는 길에도 눈이 띠는 것은, 고목으로 변한 소나무들 때문이다. 낮은 담장을 둘러친 교수정은 정면 삼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집이다. 정자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안에 정자를 지은 이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지금이야 도로변이지만, 아마 이 정자를 처음 지었을 때는 주변이 숲이었을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있다. 뒤편에 있는 작은 능선을 생각한다면, 이 정자의 처음 모습이 떠오른다.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있는 산 밑, 냇가 곁에 이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을의 아이들이 글을 배우러 오는 것을 먼발치에서 보고, 선생은 일어서 미소를 띠우며 어서 오라고 손짓을 했을 것이다.





성종이 내린 사제문

교수정을 바라보면 좌측 뒤편에 방을 드렸다. 정자에 방을 놓을 때는 중앙에 놓거나, 아니면 뒤편 중앙에 놓는다. 그러나 교수정의 방은 뒤편 한 편으로 몰아놓았다. 정면으로 두 칸, 측면에 한 칸 방을 놓고 이곳에서 기거라도 했던 것일까? 방 앞에서 마을을 바라다본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들녘이 시원하다.

여기저기 걸린 편액에서 이 정자의 모습을 본다. 밖으로 나와 냇가에 보니 비가 한 기 서 있다. 비에는 음각을 하고 붉게 칠을 한 글이 적혀있다. ‘수양명월율리청풍(首陽明月栗里淸風)’이란 글이 있다. 이 글은 그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성종이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그 중에서 뽑은 글귀라는 것이다.



비는 정자의 담 밖, 냇가 바위 위에 서 있다. 자연 암반 위에 세운 비를 보려고 내려가다가 발을 헛딛고 말았다. 그래도 겨우 비문을 찍고 돌아선다. 그런데 이 비 앞에서 보는 정자의 운치가 남다르다. 그래서 이곳에 비를 세운 것일까? 넘어지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또 다른 정자의 멋. 그래서 세상은 ‘새옹지마’리고 한 것일까?

정자를 한 바퀴 더 돌아본다. 참으로 작지만 풍취가 있다. 화려하진 않아도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있다. 노송과 어우러진 작은 정자 하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일까? 잘 정리가 된 주변이 돌아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일각문을 나서면서 뒤돌아보니, 선생의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자를 돌아보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감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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