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지장사는 신라 소지왕 7년인 485년에 극달화상이 세웠다고 전하는 절이다. 팔공산 자락의 절 중에서도 그 역사가 가장 깊다고 하는 북지장사의 임시 대웅전에는, 삼존불 곁에 석불좌상 한 기가 있다. 이 불상은 북지장사 대웅전 뒤쪽 땅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이 불상은 발견될 당시에 광배와 연화좌는 없었으며, 화강암으로 조성한 좌불상 한 기만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 좌불상은 현재 북지장사의 대웅전은 복원 공사로 인해, 임시 대웅전에 모셔두고 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좌상은, 지장보살 좌상으로 보인다.

온화한 얼굴의 통일신라 말기의 좌상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의 얼굴은 온화한 인상이다. 그저 옛 석불답지 않게 말끔하게 조각이 되어, 언뜻 보면 요즈음의 석조미술품으로 볼 수도 있는 형태이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알맞고 단정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왼손에는 보주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한 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통견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옷은 주름의 조각선이 가늘고 약하게 형식화되어 시대가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 등으로 미루어 보아 지옥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며, 단정한 자태와 온화한 인상 등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미소를 띤 듯 노한 듯, 마음가짐이려니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은 얼핏 보아서는 그리 오래된 석불 같지가 않다. 문화재에 깊이가 없는 사람들은 그저 요즈음에 조성한 것으로 착각할 듯. 그렇게 고풍스럽지 않고 너무 말끔하단 생각이다. 그러나 그 연대가 신라 말이라고 하면, 이미 천년을 훌쩍 지났다는 것에 놀라고 만다.

아마도 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을 만든 장인이, 얼마나 오랜 시간 그 표면을 닦고 또 갈아낸 것일까? 이런 정도로 곱게 만들었다고 하면, 그 세월 또한 만만치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안내판의 설명을 미리 보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도 그냥 지나쳤을 판이니 말이다.




곱게 표면을 갈아놓은 석불의 얼굴에는 미소를 띤 듯도 하고, 노여움을 가진 듯도 하다.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미소로도, 아니면 노한 듯도 보이는 대구 팔공산 자락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 그것 하나가 바로 옛 석불에서 만나는 신비로움이 아닐는지. 마음을 열고 석불을 바라다본다.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엷은 미소를 찾아낸다.



부처님 앞에 마음 한 자락 내려놓고

삼배를 하고 난 후, 고개를 든다. 한 낮의 햇볕을 받은 석조지장보살좌상. 지장보살은 이 사바세계에서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악몽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한다.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받아야 하는 모든 ‘사자(死者)’의 영혼을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전한다. 지장보살은 전생에 브라만 집안의 딸로 태어나 석가모니에게 헌신적으로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사악한 어머니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그 지장보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나 역시 이곳에서 서원을 세우기 위해서이다. 기운이 자라는 데 까지, 내 나라에 있는 문화재를 돌아보다가 명을 걷을 수 있기를. 그것이 10월 7일 팔공산 기슭 옛 고찰 북지장사에서 나의 서원이다. 엷은 미소를 입가에 띤 지장보살 앞에 내 마음 한 자락을 내려놓는다. 그 서원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195-1 쌍봉사에 소재한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 탑비.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인 이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작품은, 몸돌인 비는 사라지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다. 바로 옆에는 국보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철감선사(798∼868)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이다. 헌덕왕 7년인 825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문성왕 9년인 847년에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신라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하기도 하였다. 전국을 다니다가 이곳의 절경에 반해 절을 짓고, 스스로의 호를 따 절 이름을 ‘쌍봉사’라고 지었다. 이곳에서 71세의 나이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철감’이라 내리었다.



몸돌은 어디로 가고...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귀부를 받치고 있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이 탑비에서 특이할 점은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바로 한걸음 앞으로 나갈 듯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귀부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을 볼 수가 없다. 오른쪽 앞발 하나를 위로 살짝 치켜 올려진 모습이, 나그네를 즐겁게 만든다. 입의 양편 입가에는 수염이 나 있고, 입에 문 여의주는 방금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하다.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이 눈에 띠는 작품이다,



몸은 거북이요, 머리는 용두로 조각을 한 귀부의 형태는,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특징적인 조각술이다. 그런 점으로 보아 철감선사 탑비가 이런 용두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용은 사라지고 구름만 채운 이수

철감선사 탑비의 머릿돌은 용조각을 생략한 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다. 아마도 구름무늬만으로 이렇게 조각을 한 이수도 나름대로 특이한 형태이다. 옛 이수들을 보면 용이 거의가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수는 측면에서 보면 앞면을 절단을 한 것처럼 반듯하게 보이고, 뒤로는 삐져나오게 조각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상당히 뛰어난 수작이다. 철감선사 탑비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 거북이의 등에 새겨진 귀갑문도 이중 형태의 6각형 테두리로 새겼다. 마치 기존의 탑비의 형태를 따라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방법으로 탑비를 꾸몄다는 점이다.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에 세워진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격렬한 거북받침돌인 귀부의 조각들은 매우 훌륭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렇게 귀부의 거북이가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 곳은 어디였을까? 부처의 세계였을까? 아니면 선사의 속가 고향인 황해도 봉산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탑비 주의를 돌아본다. 이수 위에 꽂힌 장식 하나가 사라진 것이 영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그래서 답사를 하면서 받는 마음의 상처는 하루도 가실 날이 없는가 보다.

충남 금산군 복수면 지량리 345번지에 소재한 충남 전통사찰 제85호 미륵사. 미륵사 상량문에 의하면 미륵사는 통일신라 성덕대왕 2년인 703년 봄에 창건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재단법인 선학원의 분원이다.

미륵사는 1948년 불에 타 없어지기 전까지는, 대웅전과 칠성각, 산신각, 요사 등을 갖추고 있었다. 화재 후에는 인법당을 모셨으며, 현재는 대웅전을 새로 짓고, 산성각, 요사 등이 자리를 하고 있다. 미륵사에는 ‘미륵암(彌勒岩)’이 있다, 두상만 남은 석조불을 바위 위에 얹어 놓은 것이다.



미륵암 위에는 고려시대의 석불의 두상이 올려져 있다. 이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이라고 한다. 바위에 선각은 조성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옆에는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조각이 나 있다. 안면이나 두광 등이 잘 나타나 있고, 옆에는 몸만 나온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삼존불 중 협시불인 듯하다.


바위 위에 얹은 석불 두상

지난 8월 28일, 장수, 진안을 거쳐 금산으로 들어갔다. 보석사의 은행나무와 미륵암을 보기 위해서이다. 미륵암은 현 미륵사로 올라가기 전, 축대 밑에서 좌측으로 70m 정도 들어가면 만날 수가 있다.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측으로 커다란 바위가 하나 보이고, 그 위에 석불의 두상을 올려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두상으로만 보아도 이 석불은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밑으로는 평평한 바위 면이 있는데, 누군가 그곳에 두상을 염두에 두고 선각으로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것으로도 고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니, 쪼개진 바위조각에 조각을 한 흔적이다.


조각난 바위 뒤에는 전각의 주추를 놓았던 흔적이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이 마애불을 보존하는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쪼개진 바위조각들은 마애삼존불인 듯?

미륵사로 찾아들었다. 주지스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자료를 들고 나와 보여주신다. 이곳으로 부임을 해와 보니, 바위를 절단 한 듯 톱날 등이 바위에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바위가 널린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다. 어림잡아 크기는 3m가 넘을만한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저것을 맞추어보니, 삼존불을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렇게 조각이 나 버린 것일까? 그리고 저 바위에 선각을 한 것은 무엇일까? 마애불을 조각한 바위는 여기저기 널려있다. 어림잡아도 10여 조각은 되는 듯하다. 미륵사 주지스님의 이야기로는 숲 속에도 조각들이 있다는 것이다. 두상은 선각을 한 바위 면 앞에 떨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선각을 한 바위 옆으로는 커다란 조각이 하나 서 있는데, 그것을 추론하여 볼 때 마애불을 새긴 바위의 높이는 3m를 넘었을 것만 같다.



주변에 널려진 바위조각에는 마애불을 새긴 흔적이 보인다. 마애불은 통일신라 이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을 한 것의 기법 등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작이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낸 것일까?


무지가 빚은 참화, 눈물이 난다

그리고 바위는 넓적한 돌에 마애불을 새겼을 것만 같다. 그 마애불을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이다. 현재 조각난 마애불 주변에는 옛 기와조각이 발견이 되고, 바위 한편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을 새기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각까지 지었다는 것이다. 기와의 와편은 보기 힘든 꽃이 새개져 있다. 와편만 보아도 이 마애불을 보존하기 위한 전각이 상당히 공을 들여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마애불 역시 상당히 소중하게 여겼을 터, 그런 문화재급 마애불이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런 마애불을 도대체 누가 이렇게 조각을 내 놓은 것일까? 조각난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세상에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산산조각이 나다니. 무지가 불러온 문화재 훼손. 그것도 알만한 인물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더욱 참담하다. 언제나 우리 문화재들이 제 모습 그대로, 제 자리에 편안한 모습으로 있을 것인지. 이 나라에서는 기대를 할 수 없는 것일까? 돌아 나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번지에 소재한, 신라 때의 절터로 추정되는 사적으로 지정된 영암사지. 비가 내리는 지난 8월 20일 찾아간 영암사지는, 정말 사지 중의 최고였다는 기억이다. 우선 주변 경관이 뛰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엄청난 넓이의 전각 터를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영암사지의 맨 위쪽이 자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법당터. 그곳에는 보물 제489호로 지정이 된, 합천 영암사지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동서로 나누어 자리하고 있는 이 귀부 2기는, 영암사 터 내의 법당터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한 기씩이 자리하고 있다.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와 머릿돌은 사라지고 받침인 귀부만 남아

원래 비는 받침돌인 귀부와 몸돌인 비석, 그리고 머릿돌인 이수가 위에 얹혀 있다. 그러나 현재 영암사지 법당 터에는 받침돌인 귀부만 양편에 남아있다. 양편에 남아있는 귀부는 기단의 형태가 달라, 동시대에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세운 것으로 보인다.

법당 터 앞에는 석등인 듯한 석물이 있다. 받침과 간주석만 있는 이 석물은 간주석, 중간이 잘려져 있다. 숱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은 아픔을 당한 증거이다. 영암사가 언제 창건이 되었는지, 언제 소멸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터에서 발굴되는 많은 석조물들이 신라 때의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때 창건이 된 절로만 추정하고 있다.



동서편의 귀부가 각각 특징을 지녀

석등인 듯한 석조물의 뒤편으로는 석축으로 쌓은 기단이 있고, 계단이 일부 남아있다. 동쪽의 귀부는 거북의 등 무늬가 6각형이며, 비의 몸돌인 비석을 괴는 네모난 비좌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조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귀부의 특징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비석은 통일신라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쪽에 놓인 귀부 역시, 6각형의 등 무늬인 귀갑문을 배열하였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4면에 안상을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서쪽의 귀부는 동쪽의 귀부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졌다. 동쪽의 귀부는 조금 크며 귀갑문을 새긴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는 귀부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누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두 개의 귀부만 남아있는 영암사지 귀부, 도대체 그 비에는 어떤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누구의 비였는지 궁금하다. 영암사지 귀부 2기는 각 부 양식이나 주위의 석조유물 등과 관련지어 볼 때, 9세기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조에 걸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이 된다. 동쪽의 귀부가 시기적으로 조금 이른 듯이 보이는 영암사지 귀부. 그 비문에 적힌 내용이 궁금하다. 말없는 귀부는 눈만 부라리고 있을 뿐이고.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문화재오적(文化財五賊)’이 생각이 난다. 바로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훼손하고 강탈한, 문화재를 훼손한 족속들이다. 내가 ‘인간’이나 ‘사람’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고, ‘족속’이라고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만큼 많은 문화재들이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오적의 첫째는 바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간 일본과 많은 나라들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문화재를 강탈해 가고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일까? 당연히 오적 중 수괴이다. 둘째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많은 문화재를 훼손한 ‘종교광신자‘들이다. 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다. 어찌 보면 외적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세 번째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문화재를 지켜내지 못하는 관계자들이고, 네 번째는 심심풀이로 낙서를 하는 등 무개념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화재에 무관심한 모든 인간들이다.


일본인들이 들고 가려고 했던 영암사지 석등

8월 20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답사를 강행한 합천 영암사지. 몇 번이고 찾아가 보려고 했던 곳이었기에, 비가와도 이번만은 답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영암사지에 도착했을 때는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영암사지에 도착했을 때, 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물론 발굴 후 복원을 하느라 새로운 석재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장엄함에 그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암사지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인 보물 제353호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번지, 사적 제131호인 영암사지 안에 자리한다. 높은 석축 위에 자리한 쌍사자석등은 양편으로 석등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석조층계가 아름답게 자리를 하고 있다. 아마도 그 뒤가 절의 중심인 본존불을 모셨던 터인 듯하다.





이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1933년경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도대체 많은 문화재들을 이렇게 약탈당하면서도,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들. 참 가슴이 아픈 일이다. 이 석등은 1959년 절터에 암자를 세우고,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팔각으로 이루어진 석등

쌍사자석등은 그리 흔하지가 않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은, 국보 제5호인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에 견줄만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이를 받치기 위한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지붕돌 위에도 상륜부의 석재가 있었을 텐데, 현재는 지붕돌만 남아있다.



영암사지 석등은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연꽃모양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사자 두 마리가 가슴을 맞대고 서 있다. 두 마리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위받침돌을 받들었다. 그 두 마리 사자의 다리가 힘이 넘쳐난다. 마치 화사석의 무게를 느끼는 듯하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는 없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의 표현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는 네모난 창을 내고, 기둥을 삼은 4면에는 사천왕상을 힘차게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 조각인 귀꽃 등이 솟아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크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석조미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영암사지 쌍사자석등. 비가 오는데도 그 앞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다. 만일 이것을 일본인들에게 도난을 당했다면, 이 영암사지 한쪽이 얼마나 허전했을 것인가? 잘 정리가 된 넓은 영암사지 높은 석축위에 서서 다시 한 번 ‘문화재오적’을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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