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백장암.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에 소재한 백장암은, 남원에서 실상사로 가는 길 좌측으로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면 대나무 숲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백장암은 실상사의 암자로 예전에 경작지였다는 곳에, 국보 제10호 실상사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실상사 백장암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주변은 정리를 하고 사람 출입을 삼가게 하고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석등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 옆에 서 있는 국보인 삼층석탑을 만나면서, 석등은 빛을 잃게 된다. 그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이 지금까지 보아왔던 수많은 문화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기존의 통일신라시대의 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은, 가히 국보 중에 국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삼층탑의 정교한 조각 뛰어나

 

백장암의 삼층석탑은 전체가 놀라운 조각의 솜씨를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삼층석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교한 조각은 백장암 석탑을 다시 보게 만든다. 일층의 탑신에는 신장상과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금방이라도 호령을 하며 뛰어 나올 것만 같은 역동적인 신장상이나, 곱게 단장한 보살상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이층과 삼층의 탑신은 줄어들지 않고 같은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층의 탑신에는 사방으로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8명의 천인들이 연주하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삼층의 탑신에는 천인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천인들은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음악으로 치유를 해주는 것만 같다. 이렇게 다양한 천인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보기가 힘들다.

 

지붕돌의 삼존상. 삼층석탑의 색다른 멋

 

백장암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의 탑들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형식을 탈피했다. 탑을 조성한 장인의 솜씨는 최고였고,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이 이 탑의 특징이다. 낮은 기단 위에 올려 진 삼층의 석탑은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돌에 조각을 한 지붕돌을 올렸다는 것이 특이하다. 기단과 탑신의 고임돌에는 난간모양을 새겼다.

 

 

이 백장암 삼층석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삼층 지붕돌이다. 일반적인 지붕돌은 연꽃이나 구름 등을 새겨 넣는다. 그런데 이 탑의 삼층 지붕돌에는 각 면마다 삼존불상을 새겨 넣었다. 각 면마다 조각한 삼존불상이 있어 이 탑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탑의 어느 한 곳도 빠짐없이 조각을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해하게 보이지를 않는다. 그것이 바로 백장암 삼층석탑이 예술적으로 뛰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보이지 않는 석탑

 

'백장암 석탑을 보지 않았거든 석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지 말라'

 

문화재 답사를 하러 다니는 중에 전주의 한 사찰에서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다. 그만큼 백장암 삼층석탑의 조각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실제로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도저히 인간이 만들었다고는 믿기지가 않는다.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만들어 낸 정교한 예술품이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솜씨를 지녔다고 해도 어찌 이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통일신라시대 손으로만 빚어낸 걸작. 백장암의 삼층석탑을 만들기 위해 장인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했을까? 그 앞에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렇게 땀과 정성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문화재들. 백장암 삼층석탑을 보면 그 누구라도 우리 예술품의 높은 경지를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문화재를 보호하고 살펴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전히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최고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여주군 흥천면 계신리를 '불암동'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바로 이곳에 마애여래입상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있는 남한강변을 '부처울'이라고 부른다. 이 마애여래입상은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통일신라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마애불

 

이 마애여래입상은 남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자연암벽에 돋을새김을 하였다. 이 마애여래입상을 고려 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그 조각기법 등을 보면 그 이전 통일신라시대일 것으로 생각이 된다. 고려 초기의 보이는 인근 지역의 마애불보다 그 조각을 한 수법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조화라든지, 섬세한 수법 등이 통일신라시대의 마애불 등에서 보이는 것과 흡사하다. 또한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했다는 것도, 지방의 장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자연암벽에 조각을 한 마애여래입상의 얼굴 주위에는 3중의 원형 두광이 있는데, 그 테두리에는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 모습이 당당하고 특히 법의의 새김 등이 신라시대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부분적으로 약간 형식화 된 부분을 들어 고려 초기로 보고 있지만, 이 지역에 나타나는 고려 초기의 마애불과는 달리 그 형태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아직도 지역주민들이 찾는 부처울 마애불

 

이 마애여래입상이 서 있는 부처울은 강원도에서 뗏목을 타고 한양으로 향하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날 때 정성을 드리던 곳이라고 한다.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이포나루가 있는 곳에 당도하기 때문에, 아마 이곳을 지나면서 이 부처울의 마애여래입상에게 편안한 강 길의 여행을 하게 도와달라고 했을 것이다.

 

지역의 주민들도 아직도 이곳을 찾아와서 빌고는 한다. 신라 말에 조성이 되었다고 보면, 천년 넘는 세월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아마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로 부터 보호를 받아온 것도, 이 마애불이 서 있는 위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계신리 마애여래입상은 마을을 지나, 남한강가의 좁은 바위틈을 지나 내려가야 한다. 아마 예전에는 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와 이곳에 배를 대고 정성을 드렸을 것이다. 그 좁은 통로를 지나 내려가면, 깎아지른 자연 절벽에 마애여래입상을 돋을새김을 하였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강 길이 아니면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없다. 그런 위치가 이 마애불을 온전히 보존한 것으로 보인다.

 

당당하면서도 섬세한 모습에 감탄하다

 

부처울 마애여래입상은 수작이다. 인근의 마애불 중에서는 그 수법이 뛰어나다. 둥근 얼굴에 큰 귀가 어깨까지 닿을 듯 내려오고,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되어 불신 전체를 감싸며 U자 형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저렇게 바위에 섬세한 굴곡을 조성할 수 있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눈은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자세히 보면 날카롭지 않은 모습이다. 코와 입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랜 시간 강을 따라 뗏목을 띄워 내려오는 사람들의 애쓴 노고를, 이 웃음으로 고통을 잊게 했을 것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오른손을 위로 향하고 왼손을 밑으로 내렸다. 법의는 팔소매에 주름을 새겨 부드러움을 더했다. 가슴에는 내의를 매듭으로 마무리를 하였고, U자 형이 주름이 아직도 섬세하게 옷매무새를 마무리하고 있다. 뛰어난 기능을 보이고 있는 이 마애여래입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발목까지 길게 내리운 법의를 마무리를 한 것도 뛰어나다. 이렇게 뛰어난 솜씨로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부처울 마애여래입상. 지금 그 마애불은 남한강을 내려다보면서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

 

천년세월 내려다 본 아름다운 남한강

 

부처울 마여여래입상이 천년세월을 내려다 본 남한강. 그 남한강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침이 되면 자욱이 일어나는 물안개가 아름다웠을 것이다. 강가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아름답다. 겨울이 되면 수많은 철새들이 날아와 물을 박차고 까맣게 비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한강은 터전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남한강을 천년 세월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웠던 남한강이다. 부처울 마애불에 비손을 하기 위해, 작은 쪽배를 타고 노를 저어 다가온 사람들이 올려다보았다. 뗏목을 타고 멀리 강원도에서 찾아 온 사람들도, 올려다보고 두 손을 모았다. 아름다운 남한강의 풍취에 취해, 배를 띄우고 시선이라도 된 양 소리 한 자락을 하던 사람들도 이곳에 멈추었을 것이다.

 

그런 남한강이 변하고 있다.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물길공사라는 것으로 인해 마애불이 내려다보이는 그 앞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떼죽음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곳에 마애불을 새긴 까닭도 천년 뒤의 이런 생명의 죽음을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늘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 강물 위로 슬픈 뱃소리 한 가닥 여울져 흐르는 듯하다.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년)~1493(성종 24))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김시습의 한문 단편소설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었던 만복사는, 현 전북 남원시에 소재하는 사적 제349호이다. 한문 단편소설인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를 비롯하여 「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책이다.

이 중에서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인 양생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사람)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처녀가 떠난 뒤에도 양생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해 장가를 가지 않고,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조금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흔적만 남긴 만복사지. 도선국사가 창건한 남원 최대의 가람

남원 만복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층과 이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길이 35(10m)척의 동으로 조성한 불상이 있다"라고 했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 당시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륙전, 영산전, 보응전, 천불전, 나한전 등 많은 전각이 있었고 수백 명의 승려가 생활하는 큰 절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만복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만복사지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아내었다. 또한 청자와 백자, 많은 와편 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사지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만복사지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이 절터내에 남아 있다. 만복사지는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들

김시습은 왜 이 만복사를 단편소설의 무대로 삼았을까? 만복사지를 찾아간 것은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해서이다. 낮은 경계로 주변을 둘러 친 만복사지.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 길 밑으로 보물 제32호 당간지주가 서 있다. 투박한 모습으로 조성이 된 이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에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너른 사지 복판에 보물 제31호 석좌가 보인다. 이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좌의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높이 1.4m 정도인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조각했는데 육각형으로 만들어졌다.

석좌를 지나 전각 쪽에는 5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보물 제30호인 이 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세운 것으로, 높은 기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하다.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석불입상이 있다.

이 석불입상 역시 만복사를 처음 창건할 당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정수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 코, 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풍만한 인상이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의 광배로 구분이 되어 있다. 이 석불입상의 뒤에는 선각을 한 부처상이 조각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만복사지에 가면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수백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는 만복사. 지금은 그저 옛 영화를 알아볼 수 있는 몇 기의 보물들이 서 있을 뿐이다. 김시습은 도대체 만복사란 절을 왜 무대로 했을까? 김시습은 어려서는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불교 철학의 사유를 공유하려 했던 사람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복사를 무대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금오신화에 보이는 「남염부주지」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경주 박생(朴生)이 꿈속에 염라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염라대왕과에 토론을 하고 돌아온 후 염라국 왕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이생과 저승을 넘나들며 사랑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도교와 유교, 불교에 통달한 것으로 알려진 김시습. 어쩌면 이 만복사를 무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만의 고차원적인 사랑을 일깨우고자 했음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이야기 때문에 광인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복사지를 떠나면서 돌아본 옛 절터. 어디선가 양생과 처녀의 애절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한 마디로 충격이였습니다. 20여 년간 문화재답사를 하면서 나름 꽤 많이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주 고달사지에서 만난 보물 제7호인 원종대사탑을 보는 순간, 내 20년간의 답사가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마음을 적기 위해 오랫만에 집을 찾아들었습니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늘 시간에 쫒긴 것이 화근이라는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공부를 하고, 더 꼼꼼히 답사를 하려고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정말 마음을 놓고 문화재를 만나고, 글을 쓸 수 있게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원종대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입적한 고승이다.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413번지 혜목산 고달사지 안에 소재하고 있는 이 탑의 건립연대는, 원종대사탑비의 비문에 의하면 고려 경종 2년인 977년으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종대사탑은 넓은 고달사지 절터 안에 있는 석조 유물들 가운데, 탑비의 귀부, 이수와 함께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탑은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과 지붕돌을 올린 형태로, 몸돌은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기단부에서 특이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귀꽃을 이중으로 새긴 지붕돌

탑의 맨 위에 있는 상륜부인 지붕은 처마가 수평이나, 귀퉁이 부분에서 약간 위로 향하고 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끝에는 꽃장식인 귀꽃을 큼지막하게 새겨 넣어 아름답게 하였으며, 그 위에도 지붕돌을 축소한 듯한 머리장식인 복발 위에 작은 보개와 보주가 놓여있다.

팔각으로 조성한 탑신은 4면에는 문 모양을 새겨 넣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 하였다. 구름 위에 올려놓은 사천왕상은 힘이 있게 조각이 되어, 탑 안에 있는 복장물을 지키는 듯하다. 이 탑은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팔각원당형 부도 탑으로 높이는 2.5m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단부가 약간 비대한 듯하지만,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화려한 기단부의 조각이 뛰어나

기단부는 네모난 바닥돌에 연꽃잎을 돌려 새겼다. 4장의 돌로 이루어진 사각의 지대석 위에 3단으로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을 올려놓았다. 하대석에는 연꽃무늬인 앙화가 새겨져 있으며, 중대석에는 용과 구름이 어우러지는 화려한 조각이 눈길을 끈다. 중대석에는 윗부분에 8각의 평면이 보인다. 윗부분에 1줄로 8각의 띠를 두르고, 밑은 아래·위로 피어오르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용의 머리를 한 거북이가 몸을 앞으로 두고, 머리는 오른쪽을 향한 조각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4마리의 용들이. 그 사이에 가득 새겨 넣은 구름 속에서 날고 있는 형상이다. 위 받침돌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받침돌의 조각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이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조각수법이다.



기단부에 들어있는 귀부, 무지의 극치인 나

그동안 전국을 돌면서 숱한 문화재와 만났다. 그렇게 세월이 한 2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문화재를 보는 안목도 조금은 높아진 듯도 하다. 스스로도 문화재에 대해 ‘수박 겉핥기’는 조금 지났다고 생각을 했다. 남들은 이런 나를 두고 ‘우리 문화재에 미친 사내’라고 한다. 나 역시 그렇다는 것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종대사탑을 보면서 조금 이상한 것이 보인다. 한 면에 세 마리의 용머리가 보이는데, 중간에 용머리가 크고 한편으로 돌려져 있다. 벌써 몇 번인가 본 원종대사탑이다. 한 번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갈 만큼 부끄럽다. 그 가운데 목을 비튼 용두는 바로 귀부의 머리였던 것이다.



그 용머리 밑으로는 거북의 등이 조각이 되어있고, 양편으로는 앞발이 힘차게 표현이 되어있다. 한 마디로 놀라움이다. 왜 아직 이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일까? 바로 귀부의 앞부분이 조각이 되어있다. 탑의 뒤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곳에는 귀부의 뒷부분인 꼬리와 귀갑을 선명하게 표현을 해 놓은 것이다. 탑의 기단부에 귀부를 넣어 놓은 것이다.

정말 부끄럽다. 몇 번을 보았으면서도 이런 대단한 조각을 보지 못하고 돌아섰다니. 그동안 나름대로 문화재를 보면서 조금은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문화재의 구석구석을 다시 살펴야겠다. 20년간의 답사가 이렇게 부끄럽게 무지를 보이다니. 하지만 그도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더 늦지는 않았으니. 첫걸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다. 몇 년을 더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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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4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옛 한계사 터. 한계령 중턱의 장수대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사지에는 보물 제1275호인 한계사지 ‘남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 다. 앞으로는 한계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줄기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이 한계사는, 만해 한용운이 지은 책에 의하면 신라 진덕여왕 원년인 647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약 17세기 말까지는 절의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이는 정확한 것은 아니다. 현재 이 한계사지에는 건물의 주춧돌과 석수, 불좌대 등이 남아 있고, 삼층석탑 2기와 불상, 석등 등 많은 석조물이 있다.


떨어져 있는 남북 탑, 쌍탑으로도 추정해

한계사지에는 두 기의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두 기의 탑을 쌍탑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두 삼층석탑이 비슷한 시기에 삼층석탑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남 삼층석탑은 금당터 앞에 서있는데, 받침대 역할을 하는 이층의 기단을 두고 있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이 탑은 통일신라 당시의 전형적인 신라탑 형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처음으로 이 탑을 보는 사람들도 ‘참 반듯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아래층 기단에는 한 면에 3개씩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그저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형태의 탑으로, 그 가운데서도 기품을 느끼게 하는 탑이다.




지붕돌에는 풍경을 단 흔적이 있어

위층 기단은 네 모서리와 각 면의 중앙에 기둥을 본떠 새겼다.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돋을새김 한 것이다. 탑신의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수가 1, 2층은 5단으로, 3층은 4단으로 줄어져 있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끝부분에 이르러 살짝 들려 있어 밋밋함을 벗어나고 있다. 상륜부의 장식은 다 없어졌으니, 최근에 둥근 돌을 하나 복원하여 얹어놓았다.

이 남 삼층석탑은 9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계사지를 정리할 때 낡은 산장 옆에 옮겨져 있던 것을, 원래의 자리를 찾아 복원한 것이다. 탑은 파손되었던 부분을 복원하면서, 일부를 너무 모나게 다듬어서인가, 원래의 석재들과 잘 맞지 않는다. 서북쪽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북 삼층석탑과 비교하면, 기단에 새긴 조각의 모양이나 지붕돌받침수가 서로 달라 석탑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붕돌의 끝 모서리 부분에는 작은 구멍이 하나씩 보인다. 아마 풍경을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탑의 크기 등으로 보아 무게가 나가는 풍탁을 매단 것 같지는 않다. 오랜 세월 한계사지를 지켜 온 남 삼층석탑. 그 모습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옛 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답사를 하면서 늘 궁금하게 느끼는 것은, 이렇게 많은 석탑과 석불을 만든 장인들의 마음이다. 무슨 마음을 갖고 이렇게 힘든 작업을 한 것일까? 물론 지금도 석불이나 석탑을 조성한다. 하지만 그 당시와 지금의 작업방법은 전혀 다르다. 망치 하나와 정만을 갖고 조성했을 당시의 장인들. 아마 이렇게 석탑이나 석불, 그 외에 많은 문화재를 보고 감동을 받는 것은, 그러한 장인정신의 마음을 읽기 때문이나 아닐는지.



한계령을 오르다 만난 한계사지 남 삼층석탑에서 그 해답을 얻어 보고도 싶지만, 아직은 그럴만큼 농익지 않은 문화재 답사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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