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소재한 명성왕후 생가. 한 달이면 몇 번씩 이집 근처를 가면서도, 정작 생가를 찬찬히 들러보지를 못했다. 바람은 좀 불지만 날이 좋아 능현리로 향했다. 명성왕후 생가는 숙종 13년인 1687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의 건물은 안채만이 남아 있었는데, 주춧돌이 남아있어 문화재위원들의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했다. 다만 일부 건물은 주춧돌이 없어져 복원을 못했다는 조성문 여주문화원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황후가 태어날 만한 기가 응집된 곳

 

명성왕후 생가를 돌아보다가 보니 특이한 점이 있다. 생가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양편에 행랑채와 곳간, 측간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그리고 솟을대문 안으로는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는 중문에 연결되어 대청과 방으로 연결된다. 헛간을 두고 꺾여 중문채를 두었다. 중문과 사랑채, 중문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배치가 되었다. 안채는 ㄱ 자 형으로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넌방, 곳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안채와 중문채 사이에 일각문을 두어 별당채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명성황후 생가를 출입구는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을 들어가면 중문 곁에 붙은 사랑채의 마루가 된다. 일직선상에 놓인 대청은 솟을대문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집 주위를 두른 담장이 바람을 막는 것을 피해, 솟을대문과 마루를 일직선상에 놓아 바람이 맞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마루와 방으로 연결이 되며 마루에 안으로 문을 내어 바람이 안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중문은 사랑채의 마루에 붙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조금 비켜나 있다. 이 중문 안에 방과 헛간은 청지기가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안채의 부엌과 안방이 일렬로 배열이 되어있다. 안채는 중문을 들어가 방과 헛간, 부엌을 지난 후 ㄱ 자로 꺾여 있으며 대청과 건넌방, 곳간으로 마련되었다. 문제는 바로 이 건넌방이다.

 

 

대청을 지난 건넌방은 안채의 대청보다 높은 마루가 앞에 있다. 그리고 그 마루 밑에서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다. 이 건넌방은 솟을대문과 샤랑채의 마루, 그리고 건넌방이 일직선상에 놓이게 된다. 집 뒤가 낮은 구릉인 명성황후 생가는 기(氣)가 이곳에 집결되는 형상이다. 솟을대문을 통한 바람이 사랑채를 마루문을 지나 이곳에서 아궁이로 들어가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들어온 기가 모이는 곳이다.

 

이곳 마루 밑에 아궁이는 무엇일까? 이 아궁이는 솟을대문을 통해서 들어온 기는 불로 부풀리고, 액은 태워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가, 후일 황후라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도록 한 요인이 바로 이 기가 모이도록 지은 집안의 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좁은 대지를 최대한 활용한 기능성

 

명성황후 생가는 대지가 그리 넓지 않다. 원래는 숙종의 장인이며 인현황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막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어진 집이라고 한다. 안채만 남아있던 이 집을 1995년 주춧돌을 근거로 사랑채와 행랑채, 별당을 복원하였다. 묘막으로 지어진 집이라고는 해도 생가는 조선 중기의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갖출 것은 다 갖춘 집이지만 넓은 대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집의 구조는 조금은 답답한 면도 있으나, 그런 점이 오히려 푸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사랑채와 중문채를 이어서 구성한 점도 그렇지만, 일반적인 반가의 집과 같이 집을 띄엄띄엄 지은 것이 아니고, 오밀조밀하니 붙여지었다. 앞으로 펼쳐지는 평지와 작은 내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뒤편에 있는 구릉에 막히는 곳임을 감안한다면, 이런 형태의 집 구조가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여유를 보이는 별당채

 

안채와 사랑채의 담장이 이어지는 곳에 일각문을 통해 별당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별당채는 명성황후가 8세가 될 때까지 살던 곳이다. 별당채는 안채와 사랑채보다도 넓은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곳을 드나드는 문은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에 연결한 일각문과, 안채에서 드나들 수 있는 일각문이 있다.

 

그런데 행랑채와 사랑채의 담장에 연결된 일각문은 이해가 잘 안되는 부분이다. 별당채는 안채보다도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다. 그런데 행랑채의 끝에 있는 초가로 만들어진 측간 곁에 별당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을 내었다는 것은, 우리 전통가옥의 구조상 어긋난다는 생각이다.

 

 

 

별당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이 별당채도 1995년 복원이 되었다. 별당채는 매우 간결하게 꾸며져 있다. 별당채는 정면 세 칸으로 좌측의 한 칸은 방으로, 우측의 두 칸은 대청으로 꾸몄다. 방과 대청의 앞으로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대청의 문은 들어 올리게 되어있어 여름이면 시원하고, 추운 계절에는 문을 닫아 보온을 하였다. 대청의 뒤는 판자문으로 막았는데, 대청 끝 우측 벽을 창호를 내어 멋을 더했다. 어린 소녀가 이곳에서 자라, 한 나라를 뒤흔들만한 역사의 중심에 서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굴뚝이 없는 거북등 연도와 부엌의 비밀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이상한 점이 있다. 연도는 있는데 굴뚝이 없다. 집을 여기저기 둘러보아도 굴뚝이 없다. 대신 거북이가 웅크리고 앉은 듯 한 연도가 있다. 안채는 옛 모습 그대로 보존이 되었다고 하니, 아마 이 집은 굴뚝을 세우지 않고 연도를 뺀 듯하다. 그 모습이 재미있다.

 

우연히 이 집을 복원할 때 일을 맡아했다는 사람을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복원을 할 때 안채의 부엌바닥을 조금 고쳤다는 것이다. 어째 옛 모습 그대로였다면 조금은 더 깊어야 할 부엌바닥이다. 그리고 우리의 부엌바닥은 조개무덤이 생긴다. 바닥이 울퉁불퉁하게 조개를 엎어놓은 듯한 형태로 바뀐다. 이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이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복이라고 하셨다. 많은 집들이 보수를 하면서 이런 조개무덤이 사라졌다.

 

 

부엌이 깊어야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방에 불을 때고 음식을 조리하려면 부뚜막이 있어야 하고, 그 부뚜막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방을 데우게 만든다. 그러려면 부엌의 아궁이가 깊어야 불길이 위로 잘 솟아 방이 빨리 뜨듯해진다. 아마 바닥 정리를 하면서 조금 돋은 듯 하다. 고택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가옥의 이야기는 그래서 재미있다.

이천시 장호원읍 어석리를 찾아가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이 된 고려시대의 석불입상 한 기가 마을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을 찾아가는 길을 그리 어렵지가 않다. 큰길가서부터 석불입상까지 안내판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미륵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세상을 구하러 온다는 부처이다. 미륵불은 부처와 보살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석리의 석불입상은 부처로 표현을 하였다. 마을 안에 버티고 있는 이 석불입상은 지나가면서도 쉽게 발견을 할 수가 없다. 높이 4,32m의 석불입상은 커다란 두 덩어리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허리 아래까지가 한 개의 네모난 석재로 구성이 되었으며, 그 밑으로 발까지가 또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다.


사각석주와 같은  형태로 조성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처음으로 만났을 때의 느낌은 한 마디로 마음속에 가득한 분노가 봄눈 사라지듯 사라졌다고 표현을 하고 싶다. 그 정도로 안면에 온화한 미소가 흐른다. 석불입상의 수인은 인간의 고통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준다는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다. 가슴 앞으로 표현을 한 손 모양이, 조금은 어색하고 투박해 보인다.

이러한 투박한 모습의 석불들이 고려시대 경기, 충청지방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양발의 발가락이 뚜렷하게 보이게 조성한 아래로는, 꽃부리를 위로 향한 연꽃무늬가 새겨진 앙련을 조각한 연화대좌가 있다. 아랫부분은 땅 속에 묻혀있는 이 연화대좌는 석불입상을 받치고 있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이기도 한다.

찬 돌속에 편안한 온기가

석불입상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팔각의 보개석을 이고 있다. 이 석불을 보면서 저 보개석이 인간의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석불입상의 커다란 짐을 올려놓은 까닭은, 인간의 수많은 고통을 저리 부처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계신 것이나 아닌지. 그 고통을 이고도 저리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석불입상이,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억만겁 세월, 스스로를 달굼 질한 수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어석리 석불입상은 네모난 얼굴에 뺨과 턱이 둥글게 표현이 되고, 눈은 길게 꼬리가 뻗어있다. 오뚝한 코에 작은 입, 그리고 입 주위를 둥그렇게 원을 만들었다. 생명이 없는 찬 석재를 갖고도, 저리 온화한 미소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이 미륵입상을 조성한 석공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네모난 석주처럼 보이는 석불입상. 커다란 돌을 갖고 이렇게 깎아내고 다듬기까지, 석불을 다듬은 장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고, 땀은 또 얼마나 흘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보면 절로 마음속에 고통을 잊게 된다. 아마 이 불상을 조각한 석공이 바로 부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전각은 사라지고 주추만 남아

석불입상 주변을 보면 사방으로 네모 난 장초석이 서 있다. 밑이 넓고 위가 좁은 마름모꼴의 이 선돌들은 주추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석불입상은 전각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근처 어딘가에 절이 있지나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일대에는 고려시대의 미륵불이 유난히 많다.

그것은 통일신라 후기에 일어난 궁예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스로 미륵이라 자처한 궁예가 미륵정토를 염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쏟아내다가 보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런 마음속의 생각으로 인해 잠시 세상의 고통을 잊는다. 아마도 석불입상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의 행복이, 결국 스스로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법문 한 자락 내린 것이나 아닌지.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4번지에는 사지가 전한다. 강원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사지를 ‘한계사지’라고 한다. 11월 14일 오후에 찾아간 한계사지. 그러나 일반인들에게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곳이라, 안으로 들어가려면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 미리 공문을 보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한계사지를 둘러보았다.

한계사에 대한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이 절은, 조선시대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계사가 있던 자리라고 본다. 1984년의 발굴 결과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금당터와 부속 건물터 등을 확인하였다.


강원도 인제군 한계령을 오르는 고갯길에서 만나는 한계사지. 그러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한계사

이 사지의 발굴 당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인 석탑과 석등, 석불 등의 재료와, 고려와 조선시대의 명문기와가 많이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유추해 볼 때 한계사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 중건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한계사가 누구에 의해서 창건이 되었는지, 정확히 언제 적에 사찰이 사라진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인제에서 원통을 지나 미시령과 한계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한계령 방향으로 길을 잡아 올라간다. 좌측 길 아래 장수대라는 정자가 보이는 도로 우측에 설악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자리한다.



한계사가 서 있던 곳 뒤로는 기암괴석으로 된 봉우리들이 서 있어, 한계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절이었는지 가늠이 간다.(위)  한계사에서 발굴된 각종 석조물들과(가운데) 전각터(아래)  


어렵게 허락을 얻어 들어간 한계사지, 놀라워

관리사무소에서 한계사지 뒤편을 보면 기암괴석이 솟아있다. 앞으로도 마치 뾰족한 원뿔모양의 산봉우리들이 첩첩히 놓여있다. 한계사지로 오르는 길에는 굳게 철문이 막히고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덜려있다. 사전에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은지라, 철문을 열고 낙엽이 가득 쌓인 길을 걸어 오른다.

조금 올라가니 밑에서 보이던 기암괴석이 조금 더 자세하게 보인다. 오악(五嶽) 중 한 곳인 설악이 아니던가. 바라다만 보아도 그 장엄함에 눈을 땔 수가 없다. 폐가가 서 있는 뒤로 한계사지가 펼쳐진다. 한계사지 안에는 보물인 삼층석탑 두 기가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석탑의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눈앞에는 많은 석물들이 철책 안에 자리한다. 각종 주추들이며 문 자귀틀, 그리고 석조로 조형한 짐승(사자인 듯하다)과 여러 조각으로 난 석물들이 즐비하다. 그 한편에는 삼층석탑 한 기가 서 있고, 그 주변으로는 옛 전각 터들이 보인다.

석물로만 보아도 옛 한계사를 그려볼 수 있어

석물 중에는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보인다. 이것저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많은 석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아마도 이 석조물들로만 보아도 한계사라는 옛 절이 그리 조그마한 절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에는 안상을 새긴 네모난 돌이 보이는데, 아마도 배례석인 듯하다. 그러나 위에 문양을 돋을새김으로 새겨 넣은 것이 특이하다.

금당터 등은 석축이 남아있어 알 수 있지만, 여기저기 돌 축대 흔적으로 보아 많은 전각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석좌나 다양한 문양으로 새겨진 주춧돌만 보아도, 이 한계사가 여러 번에 걸쳐 중창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런 한계사가 언제 적에 누가 창건을 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사라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다만 석조물과 기와 등 명문으로 살펴볼 때,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조선조에 와서 폐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발길도 멈춘 인제 한계령 고갯길 한편에 남아있는 한계사지.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어, 더욱 찬찬히 살펴본다. 그러나 말없는 석조물들은 그런 나그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세월만 보내고 있다. 기암괴석 위에 걸린 늦가을의 푸른 하늘과 함께.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에는 수령 450년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자리하고 이 느티나무는 마을에서 심기는 신목(神木)이다. 이 나무를 보러 갔던 것은 아니다. 바로 그 느티나무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인, ‘침수정’을 만나기 위해 비가 오는 널인데도 길을 나선 것이다.

마을에 도착하니 어르신들이 어디 야유회라도 가시는 것인지, 버스에 탑승을 하고 계시다. 할머니 몇 분이 나무아래 계시기에 왜 안 가시느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저 웃기만 하신다. 느티나무를 지나 야산으로 조금 오르다가 보면 침수정이 자리한다. 침수정은 윤선도의 문인이던 홍경고가 17세기에 지었다고 전한다.


수수함이 더 아름다운 침수정

침수정을 다녀온 지는 날이 꽤 지났다. 지난 8월 20일에 화순군을 답사하면서 다녀 온 곳이다. 마침 그 전날 온 비로 인해, 침수정을 오르는 길이 많이 파였다. 물길을 피해 침수정으로 오르니, 정자는 전라도 지역의 전형적인 정자의 형태로 지어졌다. 중앙 가운에 한 칸 방을 드린 조촐한 정자이다.

정자 안벽에는 송사, 기우만 등 문인들의 글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글만 해도 37개나 된다. 아마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홍경고의 사람 사귐이 대단했나보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 팔작집으로 지어진 침수정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저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소탈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가운데에 방을 한 칸 드렸다. 그러나 실제로 방은 두 칸 방이 된다. 옆에서 보면 중앙서부터 뒤편까지 방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마루를 깐 주변에도 무엇 하나 시설물들이 없다. 아마도 정자의 주인이 앞서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인 듯, 그저 수수한 촌 아낙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으로 펼쳐지는 벌판을 바라보며 시심을 일깨웠을까?

침수정을 한 바퀴 돌아본다. 잎으로 펼쳐지는 벌판에서 시원한 비바람이 불어온다. 답사를 하면서 흘린 땀을 바람이 식혀준다. 그도 고맙기만 하다. 마루에 걸터앉는다. 앞에 배롱나무에는 꽃을 붉게 피웠다. 저 나무는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이곳에 서 있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허전한 정자를 벗 삼으라고 심어놓은 것일까?

별안간 벌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정자 안 기둥에 꽤 큰 말집이 하나 달렸다. 그리고는 벌들의 요란스레 나는 소리가 들린다. 낯선 나그네의 등장이 별로 달갑지 않다는 것인지. 자연석으로 그냥 철버덕 갖다가 놓은 덤벙주초가 눈길을 끈다. 저렇게 자연이 그 자리에 있어 좋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흐르는 지석강이 저만치 보인다. 그 강물이 굽이굽이 돌아 정자 앞으로 다가왔으면 좋으련만. 빗줄기가 세차진다. 갈 길은 멀고 돌아보아야 할 곳은 많다. 오늘 해 안에 몇 곳을 더 들리려면, 빗속에서라도 길을 나서야 할 판. 정자 주인의 고매한 성격 한 자락 들고 침수정을 뒤로한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소재한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 백제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던 미륵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보인다. 그 기록에 따르면 백제 제30대 무왕이 왕비와 함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병법사를 찾아 가던 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미륵사를 창건할 때, 신라의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어 도와주었다고 한다.

미륵사는 신라의 황룡사로 대표되는 화엄사상에 대비되는, 백제의 미륵사상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가람이다. 미륵사는 31가람의 형태로, 금당, , 회랑의 세 곳에 마련한 절이다. 못을 메워 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 등이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임이 밝혀졌다. 삼국유사의 기록이 실증적이라고 한다면, 당시의 미륵사는 건축, 공예 등 모든 백제의 문화가 집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백공이 도왔다는 기록으로 볼 때, 백제와 신라의 복합적인 예술세계가 이 미륵사에 담겨 있었다는 것이다.


미륵사지에 진열된 초석을 돌아보다,

미륵사지 경내를 돌아보면 수많은 석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 석물들은 모두 미륵사에 서 있는 건물의 초석이나, 탑에 쓰였던 우주와 탱주, 지대석 등 다양하다. 그렇게 많은 석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미륵사지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하는데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 많은 석물들 중에서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국보 9호인 서탑을 해체, 복원하는 임시건물 앞에 진열된 석조물 중에 진열이 된 초석이다. 초석이란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주춧돌을 말한다. 이렇게 많은 초석이 여기저기 있다는 것은, 미륵사지 안에는 많은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 초석의 종류만 해도 상당하다. 어지간한 건물 수십 채를 짓고도 남을만한 초석이 미륵사지 경내에 보인다. 금당 터를 비롯해 회랑 등의 초석은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초석들이 또 보인다면, 얼마나 거대하고 많은 전각들이 있었던 것인지. 그 초석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다.

다양한 초석의 형태

초석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우선 가장 많이 사용이 되는 것은 다듬지 않고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초석으로 사용하는 덤벙주초가 있다. 그리고 평초석에 해당하는 낮은 초석들이 있는데, 이는 방형초석이나, 원형초석, 네모난 초석 등이 있다. 초석은 땅을 지주를 삼아 기둥을 받치는 돌이다. 그렇기에 그 사용하는 곳에 따라, 형태가 달라진다.



기둥에 따른 초석의 종류에는 외진주초석과 내진주초석이 있다. 내진주초석에는 고추초석과 단주초석이 있다. 외진주초석에는 우주초석, 평주초석, 퇴주초석 등과 귀기둥초석 등 다양하다. 초석이 낮은 것은 평초석이라 하고, 높이가 높게 마련한 장초석을 활주초석이라고 부른다. 활주초석에는 사다리꼴 형태의 방형초석인 주좌가 있고, 연못이나 누각 등에 사용을 하는 활주초석이 있다. 이 외에도 일각문 등에 사용하는 신방석등도 초석의 한 종류이다.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허야 혀

초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한 장씩 촬영을 하고 있는데, 어르신 한 분이 그런 모습이 조금은 이상했는가 보다.




그건 머하려고 그리 찍는 건가?”
, 필요한 데가 있어서요

주추는 여기 주추가 참 좋지주추종류도 많은가보네요

그럼 많지. 집을 지을 때는 그저 주추가 건실허야 혀.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단단해야지

이 주추들은 좋은 석재인가요?”, 전국에서 가장 단단하지. 천년이 지났어도 그대로 모습을 지니고 있으니


그러고 보니 미륵사가 창건된 지가 1,400여 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초석들이 형태를 지키고 있다. 그런 점으로 보면 어르신의 말씀에 공감이 간다. 사람이나 집이나 주추가 건실해야 한다는. 그 건실함이 폐허가 된 미륵사지만, 역사 속에 흔적을 남겨놓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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