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부처님의 조형물을 잘 살펴보면 두 손의 형태가 다르게 표현이 되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렇게 손을 어떻게 취하고 있느냐에 따라 각각 그 의미가 달라지는데, 이를 ‘수인’이라고 한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178에 소재한 용화사 경내에는, 거대 석불입상 1기가 서 있다. 이 석불은 4m에 이르는 거대석불로 통일신라시대의 조각기법을 잇고 있는 고려 초기의 석불로 보인다.

이 석불은 손을 가슴께로 끌어올려 오른손은 손바닥이 밖을 위로 향하고, 왼손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이를 ‘시무외여원인’이라고 하며, 모든 중생의 두려움과 고난을 없애주고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이다. 이 수인은 불교전래 초기에는 석가모니의 모습이었지만, 이후 아미타불, 미륵불 등 보편적인 수인이 되었다. 하기에 ‘통인’이라고도 한다.


나라의 염원을 담은 고려초기의 거대석불

고려 초기의 불상을 보면 대개가 거대석불로 조형이 되었다. 이는 고려의 숭불정책과 아울러, 거대왕국으로 지향적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조각 수법이 매우 수려한 대형의 거불이다. 일반적으로 거대석불의 경우 그 조각기법이 다소 떨어지는데 비해, 이 석조여래입상은 나름대로 특징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용화사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 육계는 둥글고 나발은 선명하고 높게 얹혀 있다. 이마에는 백호가 양각되어 있고 두 귀는 크고 길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게 보이고, 전체적인 형태는 중후하지만 약간은 비만형이다. 불상의 얼굴은 갸름하고 복스러운 얼굴에, 눈은 지그시 감고 있다. 콧날은 오뚝한 편이며, 입은 작고 단정하다.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법의는 통견으로 표현을 하였으며, 가슴께가 깊이 파여져 있다. 일반적으로 가슴에 보이는 매듭 등은 보이지 않는다. 법의는 양 어깨에서 U자 형으로 흘러내리다가 무릎에서는 민무늬로 표현을 하였다. 거대석불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균형이 잘 잡혀있으며, 옷주름이나 U자형의 법의 등이 형식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발부분에는 앞으로 석조입상과 분리된 발이 있는데, 이는 후에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 석조여래입상이 발견되었을 때, 일대에서는 많은 기와 편과 팔각연화대석편, 석탑부재 등이 흩어져 있고, 불상 주위로 원형 주좌가 새겨진 방형초석이 7점이나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석조여래입상이 전각 안에 모셔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과 측면은 섬세하게 조각을 한데 비해, 후면은 쪼아낸 그대로의 형태가 남아있다.




전국을 다니면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석조불상들. 그 나름대로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은 지역의 장인들에 의해서 조각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석불들은 당시 조각을 한 장인들의 깊은 불심을 엿볼 수 있어 소중함을 느낀다. 이렇게 거대석불을 조형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을까?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그 안에 내재된 숨은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어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논산 관촉사에는 보물 제218호인 거대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어 유명한 절이다.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을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부르는데, 이 미륵보살입상이 있는 곳에서 20m 정도 앞에는 배례석이 놓여있다. 현재 충남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배례석은, 우리나라의 석조물 중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은 문화재다.

배례석은 절을 찾은 불자들이 부처님께 합장하고, 예를 갖추는 장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마 이 배례석에서 예를 올린 것은 아니고, 이 배례석 앞에 자리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렸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뒤편에 석탑이 1기가 서 있고, 그 앞으로는 미륵전이 있다.


논산 관촉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인 배례석(위)와 석문(아래)

뛰어난 조각술이 엿보이는 관촉사 배례석

관촉사 미륵전 뒤편에 놓인 배려석은 장방형의 대석이다. 바닥에서 2단으로 직각고임을 해서 올려놓고, 그 위의 면석에는 사방에 안상을 새겨 넣었다. 안상은 고려 때의 석조물에서 흔히 보이는 문양으로, 전면에는 3개를 새겨 넣고 단면에는 2개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는 버섯구름 모양의 문양을 돋을새김하고, 여울진 모양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배례석의 윗면에는 중앙에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약간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새김 하였다. 가운데 연꽃이 양쪽의 것보다 약 3㎝ 정도가 크며, 연꽃잎은 모두 8잎으로 연꽃 한 잎의 중앙부가 갈라져 두개의 잎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표현되었다. 이렇게 섬세하게 조각을 해 놓은 배례석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원형이 잘 보존이 되어있다.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한 석문(石門)

미륵전을 조금 비켜선 계단위에는 돌로 만든 석문이 보인다. 예전에는 이 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갔을 것이다. 이 석조물은 일주문과 천왕문을 거쳐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했던 문이다. 석문의 한쪽 기둥에는 ‘해탈문’이라고 새겨 놓았다. 문 입구에는 넓이가 48cm 정도의 돌기둥을 양편에 세우고, 윗면 천정에는 길게 장대석으로 잘 다듬은 돌을 다섯 장 올려놓았다.

전체적인 석문의 모습은 4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터널과 같은 형태로 꾸며졌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있지만 문의 양편에는, 성문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할 수 있도록 석벽으로 둘러놓았다. 이러한 형태의 석문은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 예이다. 이 석문은 석조미륵입상과 같은 연대에 제작된 것은 아니고, 그 후에 필요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기둥 좌측에는 해탈문이라 적었다(맨위) 석문 안으로 은진미륵이 보인다. 그리고 문에 연결한 석벽괌(위에서 세 번째) 바위와 어우러진 석문(아래)

은진미륵이 자리하고 있는 논산 관촉사. 2기의 희귀한 석조물이 있어 남다른 곳이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절에는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지만, 관촉사는 또 다른 형태의 문화재로 찾아드는 이들을 들뜨게 만든다.

함양군처럼 장자와 누각이 많은 곳은 우리나라 전역을 돌아보아도 한 두 곳에 불과하다. 그만큼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는 것들이 바로 누각이다.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그보다 바람직한 마을은 없다.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돌아볼 수 있으니까.

이번 답사 길에서는 두 곳의 누각을 돌아보았다. 함양읍 운림리 함양군청 앞에 서 있는 경남 유형문화재 제90호인 학사루와, 안의면 금천리 금호강변에 소재한 제92호인 광풍루이다. 두 곳의 누각은 모두 정면 5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모두가 관아에 속해 있던 건조물로 보인다. 이 중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신라 때부터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광풍루는 조선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최치원이 올라 시를 읊었다는 학사루

학사루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 지방 태수로 재직시, 학사루에 올라 시를 읊은 곳이므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한다. 그런 연유로 학사루의 건축 년대를 신라 때로 본다. 학사루의 서쪽에 객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이 이곳 동헌의 부속건물이지 않았을까 추론도 해본다. 학사루는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한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 연산군 때 영남파의 종조였던 김종직이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어 연산군 4년인 1498에 무오사화를 불러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학사루는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함께 소실되었으며, 조선조 숙종 18년인 1692년에 정무가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면, 현재의 학사루는 320년 정도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 학사루는 2층 누각기둥에 주련을 달아 고풍스러움을 더하고 있다.



학사루. 비가 오는데도 답사를 강행하였다.

정여창이 명칭을 지은 광풍루

광풍루는 안의면 소재지 진입로 입구 금호강변에 서 있다. 광풍루의 원 이름은 선화루였다. 선화루, 선화당이란 명칭은 동헌의 누각이나 전각에 많이 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 누각은 동헌의 건물이었다고 본다. 광풍루는 조선조 태종 12년인 1412에 당시 이안(현재의 안의면)의 현감 전우가 창건하여 한다.

그 후 조선 세종7년인 1425년에 김홍의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 하였고, 조선조 성종 25년인 1494년에 안의 현감 일두 정여창 선생이 중건하고 광풍루로 개칭 하였다. 그 뒤에도 소실과 복원 등을 거친 광풍루의 현 건물은, 숙종 9년인 1683년 현감 장세남이 중건한 건물로 340년 정도의 세월을 지낸 누각이다.



광풍루. 금호강가에 서 있는 운치있는 누각이다.

꽁꽁 닫아라, 머리카락 보일라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답답한 것은 바로 꽁꽁 닫힌 문이다. 전국의 서원이나 향교 등을 말할 것도 없지만, 그 많은 문화재들이 문을 잠그고 있다. 특히 이런 문을 닫아놓는 현상은 전각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그렇게 문을 잠그는 것은 바로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학사루 계단 위 닫힌 문에는 낙서가 가득하다. 어딜가나 낙서로 몸살을 잃는다. 그래서 문을 잠갔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학사루 이층으로 올라가는 문에는 잠을통이 걸려있다.

하지만 문을 닫아 걸어놓는다고 훼손이 되지 않을까? 요즈음 들어 각 지자체들마다 정자나 누각 등을 개방을 한다. 마루를 깨끗이 손질하고 사람들이 신을 벗고 들어가 쉴 공간으로 활용을 하는 것이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쉬기도 하고, 독서를 하거나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누각이나 정자 등이 바람이 잘 통하게 구조가 되어있어, 시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누각인 촉석루 등도 모두 개방을 하고 있다.


광풍루에도 계단에 문을 달아 막아놓았다. 문 밖에서 본 이층

하지만 함양군의 두 곳 누각은 모두 잠가놓았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잠을 통을 잠가 놓아 위로 오를 수가 없다. 문화재 답사를 하는 나로서는 꼼꼼히 살펴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닫혀있는 것을 보면 정말 짜증스럽다. 그렇다고 문화재 보존이 잘 되는 것일까? 오히려 사람들에게 개방을 하였더니, 더 조심스럽고 보존이 잘 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광풍루 이층 누각은 잠겨 있는데 저 소주병은 신선이 내려와 마시고 갔을까?

가는 곳마다 잠겨있는 누각. 정말 바람직하지 않다. 이것은 관리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고 그 안에 못 들어갈까? 광풍루 이층 누각 마루에 소주병을 보면서, 이런 일이 얼마나 덧없는 관리인가를 묻고 싶다. 만일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을 했다면, 저렇게 소주병이 그곳에 있었을까?

우리나라 여기저기를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마을입구나 혹은 마을 안에 돌미륵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형태를 갖추지 않은 부정형의 돌일망정, 사람들은 미륵이라고 여겨 정성껏 치성을 드리고는 한다. 이렇듯 우리나라에는 웬만한 마을에는 미륵이라 불리는 돌부처가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민중들 속에 깊이 파고든 신앙의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이유는 석가모니 부처 다음 세상을 약속한 미륵불이 현신하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모두 그 고통에서 구해준다는 약속 때문이다.

경기도 안성에서 이천 장호원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보인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6호인 기솔리 석불입상이 있다는 안내판이다. 길을 따라 안성시 삼죽면 기솔리 산33-1에 소재한 2기의 석불입상을 만난다.


장대석에 조각한 미륵불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열반한 뒤, 56억 7천만년이 지난 후 인간세계에 나타난다고 했다. 용화수 아래에서 3번을 설법하고 성불하여, 석가모니가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후천세계의 부처이다. 그래서인가 미륵석불의 경우에는 대개는 거대석불입상으로 조각을 하는 것이 예이다. 아마 후천세계가 도래할 때까지의 신앙대상물이기 때문인가 보다.

안성은 미륵불이 많은 곳이다. 이곳은 과거 궁예가 묵으면서 칠장사라는 절에서 무술을 배웠다고 전한다. 그래서인가 안성은 미륵불이 어느 곳보다도 많이 남아있다. 안성 인근에서 보이는 미륵불은 거대석불이다. 기다란 돌을 조각해 놓은 거대석불은 그만큼 인간들보다 월등히 도력이 높은 미륵임을 상징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남녀 한 쌍으로 조형이 된 기솔리 미륵입상

기솔리의 미륵입상은 그 높이가 5m 정도나 된다. 그러나 일반 석불입상과 같이 조각을 한 것이 아니라, 기다란 장대석에 얼굴부분만 조각을 하고, 목 밑으로는 선각에 가깝게 꾸며 놓았다. 2기의 석불입상 모두가 사각형의 얼굴에 가는 눈과 삼각형의 짧은 코, 두터운 입과 목까지 내려 온 귀 등을 뚜렷하게 조각하였다.

이 두기의 미륵입상은 모두 민머리인 소발을 하고, 그 위에 지혜의 상징이라는 육계가 튀어나와 있다. 머리 위에는 얇고 둥근 보개석을 얹어 놓았는데, 그 중앙에 구멍을 뚫어 육계에 끼워 갓처럼 표현을 해놓았다. 입은 굳게 다물었으나 엷은 미소를 띤 것처럼 보인다.



이 미륵입상은 법의를 앞가슴에서 둥글게 파내려, 발끝까지 U자 형 주름으로 표현하였다. 일반적으로 거대석불의 경우 이런 법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 이 지역의 특징적인 형태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가슴까지 올려 진 왼손과, 배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은 약식화가 되어 있다. 장대석에 조각을 하다보니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기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몸의 굴곡도 같은 형태로 사실적이지는 못하다. 마을에서는 동쪽으로 향한 불상 중 북쪽에 체구가 굵고 약간 큰 불상을 남 미륵불, 남쪽에 위치한 날씬한 불상을 여 미륵불이라 부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통을 받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가보면 가진 자나 없는 자나 다 고통이 있기 마련이다. 하기에 그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게 되고, 그것이 미륵을 형상화 시킨 미륵입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이 일대의 미륵입상은 모두 거대석불로 조성이 되었는데, 그 또한 이 지방 미륵입상의 공통된 표현방법이다.



아마도 이렇게 거대석불입상을 세운 것은 미륵불이 하루 빨리 현신해, 중생의 고통을 잊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도 모른다. 기솔리의 석불입상을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중생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일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세상을 살면서 조금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아산시 읍내동 159번지에 소재한 온주아문 및 동헌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 건물이다. 동헌의 뒤로는 낮은 남향의 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문은 동헌의 문을 말하며, 현판에는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고 써 놓았다. 이렇게 명칭을 붙인 것은 신라 문무왕 3년인 663년에 이 군의 명칭을 온주라 붙인 데서 비롯한 것이다.

 

온주아문의 문루는 이층의 누각으로 되어 있다. 문은 모두 장대석으로 기단을 깔고, 그 위에 사각형의 기초석을 갖춘 높이 1.5m 정도의 주형 주초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고종 8년인 1871년에 중건한 아문은 모두 세 칸으로 마련을 하였으며, 우측으로는 누대 위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을 놓았다. 그러나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이 곳 누대로 오르는 계단 위도 자물통이 채워져 있다. 문화재의 보존을 위함이지만, 차라리 관리자를 두고 위로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 온주아문 온주아문에 걸린 현판. 이곳이 신라때 온주였기 때문에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듯하다.

 
▲ 잠긴 문 이층 누각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자물통으로 잠겨있다.

 

원형 복원을 마친 동헌

 

동헌은 아문을 들어서면 뒤편에 서 있다. 현재 이 문화재 지역 안에는 동헌건물과 아문 두 동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동헌의 건물은 조선조에는 온양군의 동헌으로 쓰이다가, 일제 때인 1928년부터는 일제의 주재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에는 파출소로, 1986년 시 승격 후에는 20년 간 온주동 동사무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이용을 하면서 그 원형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정면 6칸 측면 2칸의 동헌은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동헌을 바라보면 좌측 한 칸은 돌출된 방을 놓았고, 다음 두 칸의 방과 두 칸의 대청, 그리고 한 칸의 방을 두었다. 좌측의 한 칸의 방을 빼면 대청 앞으로 낸 툇마루로 모두가 연결이 되어 있다. 그동안 동헌은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으며, 1993년 4월 예산을 들여 1995년 5월에 원형대로 복원을 하였다고 한다. 

 

『여지도서』 온양군 공해조에 보면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등 건물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어, 온주 동헌의 옛 모습이 상당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 동헌 원래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아문과 동헌 두 동만이 남아있다

 
▲ 경고문 동헌의 방문 등에 하얀쪽지가 경고문구다. 여기저기 많이도 보인다.

 
▲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지 마십시오'란 문구를 글자를 지워놓아 '들어가십시오'가 되었다.

 

문화재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면, 관리 소홀은?

 

동헌을 한 바퀴 돌아보니, 여기저기 보수를 해야 할 곳들이 보인다. 겨우내 손을 보지 않았는지 동헌 뒤편 배수로의 축대 돌들은 무너져 내리고, 문을 바른 창호지는 누군가 일부러 찢었는지 모두 너덜거린다. 마루에 '들어가지 마십시오'리고 쓴 푯말은 '지'와 '마'를 지워놓아 '들어가 십시오'란 푯말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훼손이 된 창호의 밑에 무엇인가가 안팎으로 붙어 있다. 글씨를 보니 건조물 파괴, 창살문, 창호지 훼손 등 문화재를 파손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징역 2년 이상에 처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관리소홀인 담당자는 어떻게 처벌을 해야 할까? 물론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양식 없이 하는 행동이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렇게 경고성 문구를 여기저기 수도 없이 붙여놓은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훼손이 징역 2년 이상이라는 문구를 적었다면, 관리 소홀도 그와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하지 않을까?

 

▲ 무너진 배수로 배수로의 축대가 무너져 내렸다. 겨우내 한 번도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 창호 심하게 찢어져 걸레가 된 창호

▲ 경고 관람객들에게만 경고를 할 것이 아니라, 관리소홀을 한 사람들이 먼저 경고를 받아야 할 판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를 온전히 관리보존을 하기 위해서는, 경고성 문구나 무조건적인 잠그기보다는, 온전히 관리를 할 수 있도록 인원배치가 우선이다. 매번 들어가는 보수비용만 갖고도, 그런 지킴이 한 명 정도의 인원을 쓸 수 있는 예산은 충분하단 생각이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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