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내에서 중심이 되는 부처님을 모신 건물을 대웅전이라 부른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대웅전의 정확한 의미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법화경에 보면 석가모니를 호칭할 때 대영웅 석가모니라고 한 것을, 줄여서 대웅(大雄)’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대웅전이란 대영웅인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이다.

 

대웅전은 사찰의 중심이 된다. 하기에 어느 절의 대웅전이 되었거나, 그 절 안에서 가장 중심부에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은 일반 전각과는 달리 단을 높이 쌓고, 그 위에 전각을 짓는다. 이는 대영웅인 석가모니불을 높이 모시기 위한 뜻이다. 용주사의 대웅보전은 1790년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지어진 유서 깊은 건물이다. 보경당 사일스님이 팔도 도화주를 맡아 대웅보전을 비롯한 145칸의 전각을 용주사 경내에 함께 지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절 용주사(龍珠寺)’

 

용주사를 창건한 곳은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염거화상이 세운 갈양사라는 절터이다. 한창 번성하던 갈양사는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 뒤 정조가 부친 장헌세자의 능을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조성하면서 정조 14년인 1790년에 부친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이다.

 

정조는 용주사의 낙성식 전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용주사의 대웅보전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절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형식인 전각은, 지붕을 받치는 공포를 각 기둥과 평방 위에 설치한 다포계 양식이다.

 

 

 

대웅보전의 처마는 이중의 겹처마로, 그 끝이 위로 약간 치솟았다.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네 귀퉁이에는 활주를 세웠으며, 아래는 네모난 돌을 받치고 있고 문은 빗꽃살 무늬로 조성하였다. 처마에는 고리를 달아, 문을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에는 모든 문을 열어, 불전의 내부인 성역과, 외부의 세속적인 공간이 하나가 되게 하였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은 압권

 

대웅전 내부에 들어서면 구조물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닫집과, 1m 정도의 높이로 구민 불단에 모신 삼존불, 그리고 뒤편에 후불탱화가 있다. 닫집이란 대웅보전이라는 불전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불전이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하였는데, 천정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 속에 동자모습의 비천이 정면을 향하고 있다.

 

 

 

각 기둥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좌우에서 불단을 보호하고 있다. 용의 꼬리는 용두보다 앞 부분에 보이는데, 정작 단 위에 모신 삼존불의 눈으로 보면, 이 꼬리가 뒤편에 자리하는 셈이다. 대웅보전의 내부중앙 불단에는 부처님 세 분이 봉안되어 있다. 가운데가 항마촉지인을 취한 석가모니불, 동쪽이 약함을 들고 있는 동방약사여래, 서쪽이 설법인을 취한 서방아미타불이다.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진 후불탱화

 

삼존불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16호로 지정되었으며,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가로 3m, 세로 4m인 후불탱화는 서양화의 기법을 도입했다고 전해지는 그림이다. 중앙 단 위에 모셔진 삼존불은 용주사의 창건과 함께 조성을 하였으며, 상계, 설훈, 봉현, 계초 스님 등 20여명이 삼존불 조성에 참여를 하였다. 이는 닫집 속에서 발견된 발원문안에 기록이 되어있다.

 

 

 

1970816일에 삼존불 조성을 시작하여, 920일에 완성을 했다는 것이다.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이름을 지었다는 용주사. 그 중심전각인 대웅보전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이다. 지난 319일 찾아간 용주사의 대웅보전은 부처님의 출입구라고 하는 어간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보면 화성을 본떠 조형한 ‘수원화성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을 바라보고 우측 도로 쪽으로 보면, 비와 함께 탑의 형태로 조형한 구조물이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누군가 조각이라도 해 놓은 듯하지만, 사실 이 조형물은 정조의 태를 묻은 태실을 그대로 모사하여 만든 구조물이다.

 

원래 정조의 태실과 비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33에 소재한다. 강원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태실은 조선조 제22대 왕인 정조의 태를 모셨던 곳으로, 그 앞에는 태를 모신 것을 기념한 비가 놓여 있다.

 

 

 수원화성박물관에 있는 모형 태실과(위) 영월에 있는 강원 유형문화재 태실 및 비(아래) 

 

태실도 수난을 당한 정조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작은 돌방이다. 전국에는 태봉, 태재 등의 명칭이 붙은 수많은 태를 묻은 곳들이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충청도 진천현의 태령산에 김유신의 태를 묻고 사우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태실의 풍습은 매우 오래된 듯하나, 조선시대 이전의 태실은 찾아볼 수 없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맏아들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험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정조이산은 조부인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당론의 조화를 이루었고, 규장각을 통한 문화사업을 활발히 하여 실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정조의 태를 안치했던 태실은 정조가 탄생한 이듬해인, 영조 29년인 1753에 안태사 서명구에 의해 영월읍 정양리 계족산 태봉에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국왕이 된 뒤 석물을 추가하는 가봉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민폐를 우려하여 후일로 미루었다. 그 뒤 정조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순조 원년인 1800년에 가봉을 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현재 영월에 남아있는 정조의 태실은 1929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국의 태실을 창경궁 안으로 옮길 때, 태항아리를 꺼내 관리상의 이유로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태실과 태실비는 광산의 개발로 매몰되었던 것을 수습하여, 1967년 영월읍에 소재한 KBS 영월방송국 안으로 옮겼다가,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원당형 부도를 닮은 정조의 태실

 

정조의 태실은 모두 2기가 남아 있다. 하나는 조선시대의 사찰 등에서 스님들의 사리 등을 모셔 놓는 팔각 원당형 부도를 연상하게 하는 형태로 조성하였다. 비교적 꽃무늬나 도형을 장식이 많은 태실을 안치하고, 석조난간을 돌렸다. 다른 한 점은 원통형의 석함 위에 정상부분에 원형대를 각출한 반구형 개석이 놓여 있다.

 

태실비는 귀부와 이수를 갖추고 있는데, 귀부에는 귀갑문과 하엽문을 이수는 쌍룡을 양 측면에 배치하고 그사이에는 구름문양을 채웠다. 비의 몸돌은 이수와 일석으로 조성하였으며, 전면에는 ‘정종대왕태실(正宗大王胎室)’, 후면에는 ‘가경 육년시월이십칠일 건(嘉慶 六年十月二十七日 建)’이라 종서로 음각했다.

 

 

 

 

 

수원화성박물관 앞뜰에 놓인 정조대왕의 태실과 비. 수원이라는 곳은 정조대왕의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태실의 조형물에 대해 무관심한 듯하다. 곁으로 지나치면서도, 안내판 하나 꼼꼼하게 읽어보는 이들을 보기 어렵다. 왜 이런 것을 여기 세워야 했는지조차 모르는 듯한 모습에서, 우리 역사, 특히 수원과 정조대왕의 역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탑비(塔碑)’란 옛 고승들이 입적을 한 후 그들을 기념하는 탑을 세우고, 그 옆에 승적기를 새긴 비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보물 제106호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탑비’는 광종의 명에 의헤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워진 법인국사에 대한 기록을 적은 비이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 안에 소재한다.

 

보원사는 ‘고란사’라고도 하며, 이 절에 관한 역사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주변에 담아있는 유물들을 볼 때 옛 보원사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직도 보원사 터에는 보물 5점과 함께 많은 석재들이 있으며, 주변에는 국보인 용현리마애삼존상 등이 남아있어,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귀신과 관계하는 꿈을 꾸고 난 탄문

 

법인국사 탄문의 탄생일화는 신비하다. 국사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귀신과 관계를 맺는데, 한 중이 홀연히 나타나 금빛 가사를 주고 갔단다. 이 날 탄문의 어머니는 임신을 하였고,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법인국사의 자는 대오이며, 성은 고씨이다.

 

 

 

 

 

탄문은 15세에 출가할 뜻을 비쳐, 북한산 장의사 신엄에게서 화엄경을 배우고, 15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925년 태조의 왕후 유씨가 임신을 하자 안산을 기원하니, 태어난 이가 바로 광종이다. 949년 광종이 즉위하자 대궐에서 법회를 베푼 후에 새로 낙성을 한 귀법사의 주지와 왕사가 되었다.

 

광종 25년인 974년에 법인이 은퇴를 청하자 광종은 국사로 임명을 하였다. 그가 서산 보원사로 길을 떠나자, 광종은 친히 왕후와 태자, 백관 등을 대동하고 개경 교외까지 그를 배웅하였다고 한다. 보원사로 온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국사가 된 이듬해에 기부좌한 자세로 입적하였으며, 세수는 75세, 법랍은 61세였다.

 

 

형식에 치우친 듯한 귀부와 이수

 

법인국사의 탑비는 경종 3년인 978년에 세웠다. 대개 거북이의 몸과 용머리를 가진 비의 귀부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를 거치면서 상당히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의 탑비받침인 귀부 역시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용의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등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 머리인 이수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귀부의 등에 새겨 넣는 문양이 없이 밋밋하게 구성을 하였다.

 

또한 비 머리인 이수의 용 조각도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형태는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단순하다. 거북의 앞발도 일반적으로 땅을 박차고 나가는 힘이 있는 표현이 아니라 형식적인 표현을 하였다. 하지만 이 법인국사 탑비는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거의 훼손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산 보원사 터에 소재하고 있는 보물 제105호인 법인국사 보승탑과 법인국사 탑비. 아마도 이 탑비는 법인국사의 보승탑을 세우고 난 뒤, 그 옆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978년에 이 탑비를 세우고 ‘법인’이라는 시호와 ‘보승’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그 문화재에서 기운을 얻고는 한다. 언젠가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만난 노스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는 그렇게 천년이 지난 것들을 보고 다니니, 그것에서 나오는 기운을 많이 받을 것이네’라는 말씀이셨다. 아마도 그런 기운이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에는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5호인 흥법사 터가 있다. 이 흥법사 터에는 보물 제463호인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와 제464호인 흥법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진공대사 탑비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탑비의 몸돌은 깨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아, 이곳에는 비의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 있다.

 

 

뛰어난 조각기술이 돋보이는 받침돌인 귀부

 

진공대사는 장순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하여 왕사가 되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의 건국 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그의 설법에 감응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진공대사는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탑의 몸돌이 없어져 받침인 귀부 위에 머릿돌인 이수를 올려놓은 형태로 있는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한 고려 초기의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이 귀부는 용머리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귀의 옆에는 물고기의 아가미가 벌어진 것처럼 펼쳐져 있으며, 귀는 위로 솟아 있다. 용의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은 용 뿔을 조각해서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앞 뒤 네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는 형태로 조각이 된 발은, 동적인 힘을 느낄 수가 있다. 목은 짧은 편이며 거북의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으로, 만(卍)자 무늬와 연꽃을 새겨 넣었다.

 

머릿돌의 조각솜씨 보고 절로 탄성이

 

비의 몸돌이 없어져 귀부 위에 이수만 얹혀 있는 진공대사 탑비의 머릿돌. 앞면 중앙에는 <진공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머릿돌에는 모두 여섯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중앙으로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고, 양편에 밖을 주시하고 있는 각각 한 마리씩의 용이 있다. 뒤편으로도 양편에 한 마리씩의 용이 있어, 전체적으로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 형태이다.

 

 

 

이 이수의 형태는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돌로 만든 조각품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진공대사 탑비의 받침돌과 머릿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그 비문에는 진공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흥법사지 정비 아쉬워

 

원주 지정면에서 다리를 건너 양평군 양동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문막으로 빠지는 새로 난 길이 있다. 이 길로 접어들어 조금 가다가 우측으로 난 소로 길로 따라 들어가면 흥법사지가 있다. 현재 흥법사지에는 보물인 삼층석탑과 진공대사 탑비 귀두와 이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주춧돌이었을 석물들도 보인다.

 

 

 

 

탑 옆에는 누군가 밭을 일구었고, 막 쌓은 축대 주변에도 모두 밭을 개간했다. 조성된 석물로 보아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을 흥법사지. 그러나 이렇게 오랜 세월 방치가 되어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두 기의 뛰어난 보물이 서 있으면서도 아직 제대로 정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진입로나 주변이 속히 정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우리 문화재의 우수함을 느낄 수 있도록.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는 고려 말인 1352경에 해경대사와 월산대사가 창건하였다 하여,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해월암이라 부르는 암자가 있다. 그 암자를 오르는 길은 걷기에는 조금 가파른 산길이다. 그 산길을 오르다가 보면 우측으로 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가 있다.

 

신포정. 앞으로는 오수면을 가르는 내가 흐르고 있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져 많은 피서객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신포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에는 아직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아직은 이 내가 그래도 인간들로 인해 오염이 심하게 되지 않은 듯하다.

 

 

 

색다른 정자 신포정

 

개울가 벼랑위에 서 있는 신포정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정자와는 다르다. 정자의 출목에 돌출되어 있는 봉황의 조각이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일반 정자에서는 보기가 힘든 형태이다. 정자 안으로 들어가니 대들보 밑으로 청룡과 황룡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천정반자도 돌출되어 있어 특이하다. 그런데 황룡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청룡은 물고기를 물고 있다.

 

신포정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아, 정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아쉽다. 다만 정자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부재나 석물 등을 살펴볼 때 100여년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포정이라는 현판은 금산사의 현판을 쓴 사람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돌출된 천정반자를 보니 네 귀에 자라가 달려있다.

 

 

 

용과 자라가 주인인 신포정

 

물고기를 물고 있는 청룡, 그리고 반자에 달려있는 자라. 이것은 아마 이 앞을 흐르는 내가 예전에는 배가 드나들지는 않았을까? 누군가 이곳에 정자를 짓고, 포구를 드나드는 배들과, 섬진강 줄기를 따라 오르내리는 수많은 뱃사람들의 사연을 즐겨 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외롭게 서 있는 정자 신포정.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 피서를 한다는데, 나그네들은 이 신포정에 얽힌 이야기 한 토막 알고는 있을까? 정자의 형태나 여러 가지 조각기법, 그리고 앞으로 흐르는 내를 보아 이 신포정은 또 다른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조차 해 줄 수 있는 이웃을 만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주변에 물어보아도 신포정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없다. 그저 오래전부터 그곳에 서 있다는 것 외에는. 정자 밑을 흐르는 내를 보니, 예전에는 꽤 큰 물줄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외롭게 길가에 서 있는 신포정은 찾는 이들 조차 없이, 무심한 바람만이 골을 휘감아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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