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 길을 가다가 용을 만난다면, 그 기분은 어떠할까? 아마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들은 혹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니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답사 중에 도로에서 용을 만났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용을. 백주 대낮에 용이라니. 도로 옆으로는 보성강이 흐르고 있으니 강물 속에서 솟아나와, 승천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전남 곡성군 죽곡면에 있는 태안사 답사를 마치고, 18번 도로를 따라 오산면 가곡리 오층석탑을 찾아가는 길이다. 18번 도로는 좌측으로 보성강을 끼고 도로가 이어진다. 그런데 저만큼 이상한 바위가 서 있다. 흡사 용과 같은 모습이다. 왜 이곳에 이렇게 돌을 쌓아 용처럼 만든 것일까?


돌을 쌓아 만든 ‘석룡(石龍)’

곡성군 죽곡면 남양리. 마을입구로 들어가기 전 좌측으로 운동장이 있고, 그 운동장 입구에 돌을 쌓아 용의 형상을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새머리 형상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돌을 쌓아 놓은 것도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뿔이 나 있고 입에는 여의주도 물고 있다. 왜 이곳에 이런 용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흡사 강물에서 나온 용이 승천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고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길가로 머리를 들고 있는 돌로 만든 용의 형상을 찍으려다가, 그 뒤를 보고는 소리를 내어 웃고 말았다. 용의 꼬리가 뒤편 보성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돌담으로 용꼬리를 만들어 길게 늘어놓았다. 그것도 뒤로 갈수록 담이 좁아지면서, 완연한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뒤편으로 돌아가서 앞으로 보니, 머리를 들고 승천이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다.



돌을 쌓아만든 석룡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위) 뒤편으로 꼬리가 보인다(가운데, 아래)

와룡체육공원의 상징, 용의 형상

와룡체육공원은 곡성군 죽곡면 남양리 마을길 조금 전에 있다. 남양리는 양동과 박용동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마을이 남쪽을 향하고 있다 하여 남향동이라 하였단다. 이것이 변하여 남양리라 칭하게 되었으며, 박용동은 6.25당시 남양리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왜 와룡체육공원이 들어섰는가는 자세히 알아보지를 못했다.

하지만 용머리는 남양리를 향하고 있고 용의 꼬리는 뒤편 보성강 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으니, 그야말로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질 것이란 생각이다. 아마도 남양리에 걸출한 인물이 난다면, 후세 사람들은 이 돌을 쌓아 만든 ‘석룡(石龍)’의 기운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까? 설화라도 한마디 나올법한 광경이다.


석룡은 와룡체육공원을 상징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돌담이 꼬리가 된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 이런 재미있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저 지나치면 그만이다. 아무 생각 없이 다닌다면 그저 돌이 쌓였는가보다 하고 지나칠 것이다. 사물을 보고 훌쩍 그 앞을 지나칠 수 없음은, 답사에서 꼼꼼히 따지는 습관이 들어서인지. 2월 26일 토요일 오후, 답사 길이 괜히 즐거워진다. 다음에 이 길을 지날 때는, 돌로 용을 만든 사연이라도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석굴법당, 그리고 산의 정상부에 늘어선 자연암석에 조각한 수많은 불상과 군상들.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에 소재한 벽송사를 오르다가, 맨 위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가면 서암정사가 나온다. 이 서암정사는 지리산의 한 줄기 정상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삼대명산이라는 지리산. 삼신산의 한 산인 지리산은 산세가 험해, 6.25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원혼이 떠도는 곳으로 많은 아픔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원응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수많은 원혼의 울부짖음을 듣고 난 뒤, 이곳에 극락정토를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자연석벽에 지장보살과 아미타불 등, 무수한 불보살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벽송사를 들려 나오는 길에 찾아간 서암정사. 말 그대로 서쪽에 있는 암벽에 조성한 절이라는 뜻인가 보다.



자연암벽에 새겨진 사천왕상과 서암정사로 들어가는 석문

자연암벽에 새긴 사천왕상에 압도당하다.

서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가파르다. 다행히 벽송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들려, 그렇게 많은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차가 서암정사의 입구까지 들어갈 수가 있지만, 답사는 역시 조금은 걸어야 제 맛이 난다. 천천히 길을 잡아 서암정사 쪽으로 걷다가 보니, 불사를 하는 중인지 주변에 많은 목재가 쌓여있다.

조금 안쪽으로 걸어가니 양편에 커다란 석주가 서 있다. 그 안으로 정사를 들어가는 석굴 입구가 보인다. 그런데 벽에 무엇인가 새겨진 모습이 보인다. 세상에, 자연 암벽을 이용해 그대로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그 조각 솜씨가 일품이다. 도대체 몇 년이나 걸려 이 많은 작품들을 완성한 것일까?



바위마다 새겨진 불상과 서암정사로 들어가는 대방광문, 그리고 문의 안편

암벽의 크기 때문인가, 사천왕상은 조금씩 높낮이를 다르게 조상하였다. 힘찬 동작이 금방이라도 바위를 박차고 호령을 하며 뛰쳐나올 듯하다. 석굴로 들어가니 안으로 넓은 공지가 나온다. 종각이며 극락전 등, 전각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편에서는 석굴법당 공사를 하느라 부산하다.

모든 것이 자연암석을 이용해서 조성하다

경내에는 모든 조각들이 모두 자연암석을 이용해 조성을 하였다. 관계자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리를 옮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있는 자리에 그대로 적당한 조형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작은 암반에 용을 조각하였는데, 머리는 거북이다. 그 입에서 물줄기가 쏟아져 나온다. 어떻게 저 속을 파내었을까? 모든 것이 궁금하기만 하다.


경내에 마련한 연못과 용을 새긴 수각

종각도 마찬가지이다. 암석 위에 그대로 기둥을 세웠다. 이런 형태는 전국의 정자를 답사하면서 많이 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산꼭대기에 이렇게 많은 석조물을 조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한 것일까? 서암정사 여기저기를 돌아보니, 탄성이 절로 나온다.

억울하게 쓰러져 간 영혼들을 위해 이렇게 많은 조형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그대로를 이용한 것이라는 데는 할 말을 잃었다. 극락전 앞으로 다가가 머리를 숙이고 나도 이런 불사에 작은 마음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저쪽 한편 바위벼랑 끝에 작은 집 한 채가 보인다. 아마 수행이라도 하는 분의 숙소인 듯. 길을 따라 눈길을 돌려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바위를 파서 법당을 만든극락전과 벼랑 위에 걸친 토굴

언제 이 거대한 불사가 다 마무리가 되려는지. 아마 또 오랜 시간 또 이렇게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직 조형물이 들어차지 않은 바위를 보며, 내 마음속으로 추측을 해본다. 저곳에는 무엇을 조각할 것인가를.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에 소재한 사적 제104호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1573년에 다시 만든 비가 있는데도, 대첩비지라고 한 것은 두 가자의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이곳에 비만 있던 것이 아니라, 보호각과 외삼문, 그리고 비를 보호하던 별장청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을 할 수 있다. 처음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싸움인 황산전투의 승리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조선조 선조 10년인 1577년에 대첩비를 세웠다. 그 후 현종 8년인 1677년에 보호각을 세우고,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보호각을 고쳐지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첩비가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이 파괴된 비를 ‘파비각’을 지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원래의 비가 사라져 대첩비지라고 볼 수도 있다.



조선 개국의 태동이 된 황산전투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새겨 자시 세울 때, 원래의 좌대인 귀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1973년에는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과 홍살문, 삼문과 담장 등을 새로 조성을 하였으며, 파비각 등을 조성하여 일제에 의해 파손이 된 원래의 대첩비를 보관하고 있다.

운봉읍 화수리를 찾아갔다가 들려 본 대첩비지. 이곳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성계는 전주 이목대에서 전주 이씨 문중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은연중에 비친다. 결국 이 황산의 전투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한 곳이니 역대의 왕들이 이곳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선조의 명에 의해서 대첩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 받침인 귀부, 정말로 기이하네.

대첩비를 돌아보는데, 그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귀부를 제작한 것일까?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형태는 많이 달라진다. 신라 때까지만 해도 거북의 형태를 본 딴 귀부가 성행을 하였으나, 고려에 들어오면서 머리는 용에 몸이 거북이인 형태로 변화가 되었다.

그런데 이 귀부는 도대체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 나라를 태동하게 한 전투지에 세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조금 부족한 듯한 이유이다. 이 귀부를 보면 고려시대의 귀부와는 또 다른 힘이 느껴진다. 머리 부분은 용의 머리인 듯 뿔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그 뿔 속이 비어있었던 것처럼 구멍이 나 있다.




용의 발을 가진 귀부와 콧구멍의 비밀

거북이 등의 문양은 같으나 그 다리부분을 보고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귀부의 머리 부분이 용이라고 해도, 다리는 거북이의 다리를 조각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지만 이 거북이의 몸은 다리가 용의 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뒤로 돌아보니 정말로 혀를 찰만큼 대단한 조각이다.

앞뒷발은 모두 용의 비늘로 덥혀있다. 그런데 뒷발을 보니 안쪽 발가락 하나가 위로 솟아있다. 왜 이렇게 발가락 하나만을 위로 추켜세웠을까? 반대편으로 돌아가 보니 그곳은 나란히 있다. 이렇게 추켜세운 발가락 하나가 이 조각이 어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게 해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입모양도 특이하다.




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콧구멍이 있던 곳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안이 움푹한 것을 보면, 콧구멍 안이 비어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돌 안을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파낼 수가 있었을까?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대첩비의 귀부. 1시간여를 들여다보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세계에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을 하면서.

비란 어느 인물의 행적을 적어 후대에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에 비문이 없다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뛰어난 조각기법을 보이는 비의 머릿돌을 갖고 있고, 비 머리에는 제목을 적어 넣는 네모난 부분을 마련했으면서도 정작 비에는  단 한 자의 비문이 없는 비. 이러한 비를 '백비'라 부르는데, 이 비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5 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이 비는 뛰어난 조각기법이나 그 솜씨로 보아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비를 받치고 있는 받침돌은 거북이의 몸으로 되어있으나, 귀두가 깨어져 나간 것인지 말머리 형상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조로 넘어오면서 비를 받치는 귀부는, 대개 몸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를 형상화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연곡리의 귀부는 말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연곡리 석비를 보호하고 있는 전각과 비의 받침인 귀부

말머리에 백비, 누구의 비인가?

보물 제404호로 지정이 된 연곡리 석비는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와 몸돌인 비, 그리고 아홉마리의 용을 조각한 머릿돌로 구성이 되어있다. 이 받침돌인 귀부는 등의 무늬는 거북 등의 무늬와 같이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 있어, 상당히 조각기법이 뛰어나다. 거북이의 앞발은 파손이 되었으며, 머리의 형태는 마치 말머리와 같은 모습이다. 이 귀두가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것은 아닌 듯하다. 앞부분이 절단된 듯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귀두를 보면 머리의 옆에 지느러미와 같은 형태의 조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보이는 귀두인 용머리인 것으로 처음에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귀두는 앞부분이 어떻게 이런 형태로 남아있는 것일까? 그 외에 귀두부분은 용머리 형상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해서 이런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받침돌의 거북은 그 문양들을 볼때 상당히 기능이 뛰어난 장인에 의해서 섬세하게 조각이 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형태의 귀두라면, 당연히 중간에 누구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겠다.

비문이 없는 백비, 누구의 비일까?


비에는 전, 후면을 비롯해 측면에도 글자 한 자가 없다. 

찬찬히 돌아보면 여기저기 금이 가기는 했어도, 전체적인 비의 모습은 뛰어나다. 등 무늬인 귀갑문은 정교하며,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비몸을 받치고 있는 받침부분은 연꽃을 조각하였는데, 잎은 작고 양감이 있어 더욱 아름다운 느낌을 준다. 귀부로 꾸며진 받침돌과 옆으로 긴 네모꼴의 비머리 형채 등은 고려 초기의 비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비의 위에 얹은 머릿돌에는 모두 9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그 용들은 서로 몸을 꼬아 뒤틀고 있는데, 정교한 그 조각은 가히 뛰어난 작품이다. 아홉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물기 위해 다투는 사실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이렇듯 뛰어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연곡리 석비. 도대체 그 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단 한 자의 기록도 없는 비만을 갖고는 그 주인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깝다.

말머리에 비문이 없는 백비. 그리고 전체적인 조각기법이 뛰어난 이 비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일부러 비문을 적지 않았는지, 혹은 누군가에 의헤 훼손이 되어 비문이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혹 이 비에 어느 인물의 일대기를 적으려고 마련을 했다가, 갑자기 폐사가 되는 바람에 적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백비로 남아있는 뛰어난 연곡리의 석비는 그렇게 사람의 애간장을 태운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419 교룡산성 동문 안으로 들어가 산길을 10여분 정도 오르면 선국사를 만나게 된다. 선국사는 통일신라 당시에 지어진 절로 알려져 있으며, 경내에는 전북 유형문화재 제114호인 대웅전이 서 있다. 이 대웅전은 교룡산성 안에 자리한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 5년인 685년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당시에 선국사가 개창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3년인 1803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선국사의 대웅전은 산성의 안에 비탈진 곳에 절을 마련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돌로 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앉혔으며, 지금은 한창 전각을 짓느라 부산한 모습이다.



퇴락한 단청에 숨은 화려함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이 대웅전은 돌로 낮은 기단을 쌓고, 주추는 넓적한 자연석을 이용하였다. 기둥은 위아래의 변화가 없는 기둥을 사용했으며, 지붕이 밖으로 많이 돌출이 되어 사면에 바깥기둥을 대었다. 대웅전의 단청은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색은 오래되고 퇴락했지만, 그 화려함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선국사의 대웅전을 돌아보니 이상한 것이 하나가 있다. 작은 법당치고는 유난히 여기저기 용의 조각이 많다. 대웅전 앞이나 측면의 공포와 부연 등에서 용의 조각이 보이고 있다. 법당 안에 있는 닫집에도 끝에 용두가 조각되어 있으며, 대들보 끝에도 용이 있다. 대웅전에서 만날 수 있는 용만해도 10여 마리는 됨직하다.




대웅전 외부에서 보이는 용조각

임진왜란 때 승병이 주둔하던 곳

왜 이렇게 크지 않은 대웅전에 용의 형상이 많은 것일까? 대웅전 안에는 한편에 커다란 북이 매달려 있다. 이 북은 전북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또한 승병대장이 사용했다는 인장도 있다고 한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주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이 북은 둘레가 269cm, 지름이 79cm, 길이는 102cm로 절에서 사용하는 법당용 북으로는 상당히 큰 편이다. 소나무 몸통에 쇠가죽을 씌워 만든 이 대북은, 그 제작시기가 조선조 말엽으로 추정한다. 이 대북은 언제 사용을 했던 것일까? 교룡산성 안에 있는 선국사가 승병의 주둔지라고 한다면, 아마 이 북도 그와 관련이 잇을 것으로 보인다.


대웅전 안에 걸린 민속자료 대북

선국사의 옛 이름은 용천사였다.

북과 인장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이 선각사 대웅전에는 왜 특별히 용의 조각이 많이 나타나고 있을까? 선국사는 나라의 안녕을 비는 절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어떤 이름을 썼을까? 바로 ‘용천사’였으며, 승려가 300여명이나 기거하던 대규모 절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국사에 용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곳의 산성명칭도 교룡산성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이곳이 특별히 용과 관련이 된 전설이라도 있는 것은 아닐까? 용이 유난히 많은 선국사의 대웅전. 그 용들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본다. 대웅전 현판 옆에 있는 용은 입에 물고기를 물고 있다. 가끔 물가에 서 있는 정자 등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대웅전 내부에서 볼 수 있는 용조각

사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을 ‘반야용선’으로 비유한다. 그래서 대웅전의 중앙에는 용머리를 항상 조각한다. 하지만 선국사처럼 중앙과 네 귀퉁이에 용을 조각하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그리고 법당 안에도 용의 조각이 있다. 이는 교룡산성, 용천사 등과 이곳의 지세가 남다른 점으로 보아, 이곳에서 더 큰 대국의 꿈을 키웠는지도 모른다. 다음번 이곳을 답사할 때는 그 이유를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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