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안내판이 지동 벽화골목길과 무슨 상관이 있어

지동에 벽화골목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걸 여기다가 왜 세웠을까?”

어디서 세웠는지는 몰라도 돈이 엄청 남아도나 보네

이건 관광안내소 앞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여기가 아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지동 제일교회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면서 하는 소리들이다. 이 안내판이 언제 이곳에 섰는지도 몰라도, 지동 벽화마을이라는 팻말을 위에 달고 있다. 누구나 이런 팻말을 보게 되면 이 안내판이 지동 벽화골목을 자세하게 안내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안내판을 들여다보면 정말로 어이가 없다.

 

 

유명무실한 안내판 자리 옮겨야

 

이 안내판은 한 마디로 지동 벽화골목과는 전혀 무관하다. 다만 지동 벽화골목의 중심축이 되는 노을빛 갤러리와 노을빛 전망대를 오를 수 있는 제일교회 앞에 서 있다는 것 하나를 배고는. 지동에서 오래도록 벽화작업을 해 온 한 사람은

 

이런 안내판을 세워 놓은 것이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 정도 안내판이라면 적어도 몇 백만 원은 들어갔을 텐데, 이런 안내판을 세우기 전에 우리와 상의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 안내판은 지동의 벽화골목을 안내하는 것이 아니고, 수원 전체의 문화거리를 안내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일침을 가하기도.

 

 

지동의 주민들도 이 안내판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이 안내판은 지동 벽화마을을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아내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곳이 벽화마을이라는 것만을 알려주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이 안내판의 역할은 수원시의 마을투어를 할 수 있는 안내판이기 때문에 지동에 서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동벽화길 안내판 설치해야

 

아직은 지동의 벽화가 마무리 된 것은 아니다. 지동벽화는 5개년 계획으로 이제 3년차를 마쳤고, 앞으로도 2년을 더 그려나갈 계획이다. 지동 벽화는 5개년 계획을 다 마치고 그 길이는 3km를 넘어가는 우리나라 벽화길 중 가장 긴 벽화길을 갖게 된다. 현재까지의 벽화도 1.7km로 우리나라의 최장 벽화길이다.

 

 

지동 사람들의 벽화길에 대한 자부심은 상당하다. 이들은 직접 벽화그리기에 참여를 했고, 벽화를 훼손하지 못하도록 지켜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동은 이 벽화로 인해 사람들이 닫혔던 마음을 열게 됐고 공동체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벽화안내판 하나가 제일교회 앞에 서 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한다.

 

요즈음은 벽화길마다 안내판을 설치한다. 벽화길이 시작하는 곳의 전신주는 물론 마을 입구에는 벽화안내도를 설치해 관광객들을 돕는다. 지동은 무수히 많은 골목으로 인해 이러한 안내판이 더욱 절실한 곳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값비싼 안내판보다,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안내판 하나가 더욱 필요하다.


절 있는 산을 돌아온 곳(퇴촌)인데

바람에 연기는 상방으로 접하는 구나

옛날에 놀던 곳은 뒤섞이어 찾아볼 수 없으며

세상 사람들은 본래 많이 바쁘다

 

고요한 방에 중과 이야기하기 아주 알맞으며

가을 등불 밝은데 빗소리에 밤은 깊어지는 구나

이어 생각하여도 보진자만 생각하니

밝은 시대였는데 역시 깊이 숨어 살았구나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세심정에 남긴 글이다. 이식은 본관 덕수이며, 자는 여고, 호가 택당이고 시호는 문정이다. 광해군 2년인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후일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벼슬은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정구, 신흠, 장유와 더불어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맡아 하였으며, 저서로는 <택당집(澤堂集)>과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세심정은 양평군 지평에서 341번 도로를 따라 용계계곡 방향으로 가다가, 덕촌리에서 좌측으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펜션들이 들어서 있으며, 다리를 건너 우측 언덕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현재 양평군 항토유적 제23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양평군 용문면 덕촌리 산137번지에 해당한다.

 

눈이 내리는 날 찾은 세심정

 

육각형으로 지어진 세심정, 2평 남짓한 세심정은 490여 년 전에 지어진 정자이다.

세심정에 걸린 현판. 용문선생은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아침부터 날이 잔뜩 흐리더니, 오후가 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눈길에서 몇 번이나 혼이 난 적이 있는지라, 답사를 포기할까도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미 세심정이 가까운 곳까지 찾아왔는데, 그냥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다. 여기저기 길을 물어보지만, 세심정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없다. 몇 번을 물은 끝에 겨우 세심정으로 향했다.

 

급기야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저만큼 정자가 하나 보인다. 세심정이다.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서 있고, 앞으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다리를 건너 세심정을 올려다본다, 눈발이 점점 세차진다. 마음이 바빠 낙엽 쌓인 돌계단을 오른다. 벌써 낙엽 위로 쌓인 눈이 미끄럽다. 세심정 위로 올라 정자를 본다. 이렇게 작은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난세에 찌든 마음을 씻어냈을 정자 주인의 마음을 읽어본다.

 

490년 전에 지어진 작은 정자 세심정

 

처마를 길게 빼낸 세심정은, 육각형의 기둥으로 처마를 받쳤다


세심정은 명종 16년인 1521년 조선조 중종과 명종 때의 학자이며 정암 조광조의 수제자로 명성을 얻은 조욱(1498 ~ 1557)이, 기묘사화로 정암과 그 문하들이 화를 당할 때 화를 면하고 낙항하여 지은 정자라고 한다. 조욱은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용문산중에 복거하여 그 마을 이름을 퇴촌(退村)이라 하고, 이 정자를 지어 세심정이라 이름하고, 당호를 스스로 '세심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정자는 6각형으로 지어졌으며, 선생의 마음을 닮은 것인지 고졸하다. 이곳에 은거한 후로 사람들은 조욱을 '용문선생'이라 칭했다고 한다. 야산 기슭에 이 세심정을 지어놓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했다는 조욱. 세심정 안에는 현판이 몇 개 걸려있다. 아마 선생의 평소 학문을 그리던 나그네들이 지어놓은 글일 것 같다.

 

정자 안에는 <세심정 기>를 비롯한 몇기의 게판이 걸려있다.


연당과 아우러진 세심정의 조화

 

세심정은 육각형의 정자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일곱 개의 주추 위에 육각의 기둥을 세우고, 정자의 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난간 밖으로 다시 툇마루를 깔았다는 점이다. 따로 입구를 내지 않고, 여섯 면 모두 난간을 둘렀다는 점도 특이하다. 정자는 야산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변에는 노송과 고목들이 정자를 쌓고 있다. 그리고 앞쪽 계단 밑으로는 연당이라 부르는 연못이 있다.

 

연당은 석축으로 주위를 쌓았다. 정방형으로 조성한 연당은 정면이 16m에 측면은 11,5m 정도의 연못이다. 가운데는 섬을 만들고 그 위에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지금은 주변이 온통 펜션들로 들어찼지만, 처음 이 세심정이 지어졌을 때는 앞면이 트여있어 경관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세심정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눈이 점점 함박눈으로 변했다. 마음이 급해 더 이상은 지체를 하지 못하고, 정자를 내려와 돌아가려다가 안내판을 본다. 안내판에 이상한 점이 있다.   

 

우물마루를 깔고 난간을 두른 후, 다시 툇마루를 내었다

세심정의 앞에 자리한 연당. 중앙에는 섬을 만들고 노송을 심어 멋을 더했다.

 

 

조욱은 1498년 8월 21일에 태어나, 1557년 12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자는 경양, 호는 우암이며 본관은 평양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를 하고도 벼슬에 나아기지 않고, 용문산으로 들어가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조욱의 높은 학식과 인격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그를 '용문선생'이라 불렀다. 후일 명종 때 현사로 뽑혀 벼슬을 하면서, 이황, 서경덕과도 가깝게 지냈다. 시와 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용문집>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내판에 적힌 연대가 맞질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이런 일이 허다하다. 글자가 틀린 안내판, 연대가 맞질 않는 안내판. 찢기고 더럽혀진 안내판, 외국어로 번역을 해 놓았는데 내용이 안맞는 안내판, 딴 때 같으면 한 마디 하겠지만 세심정에 올라 마음을 씼었는데 그것이 무슨 대수랴, 그저 허~ 웃고 떠날 수 밖에. 

장수군 산서면 면소재지에서 721번 지방도를 이용해 남원시 보절면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이룡삼거리를 지나 하월리가 나타난다. 하월리에는 우측으로 사계봉을 두고, 좌측 조금 안쪽으로 폐교가 된 구 계월초등학교가 보인다. 이 계월초등학교는 195541일 개교를 하여, 1995228일 폐교가 되었다. 그동안 계월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수는 1,608명이라고 한다.

 

이 계월초등학교 터에는 지금당(知今堂)’이라고 부르는 서당 터에 다섯 칸의 작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옆에는 수령 460년의 보호수로 지정 된 은행나무가 서 있어, 이곳의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아마도 지금당이 문을 열 때 심은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시기적으로 연륜이 같기 때문이다. 지금당은 장수군의 향토유적으로 지정이 되어있다.

 

 

과거급제의 산실인 지금당

 

지금당은 조선 선조 35년인 1602년에 정유헌 선생을 비롯하여, 활계 이대유, 만헌 정염 등이 서당을 설립하여 유생들을 지도한 곳이다. 이 서당에는 인근의 학동들은 물론, 전국 각처에서 많은 학동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연마하였단다. 이 서당에서 학습을 연마한 학동들은 대과에 15, 소과에는 40여명이나 과거에 급제를 시켰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지금당은 1955년 계월초등학교가 개교를 하면서, 지금당이 처음에는 교실로 사용이 되었다. 그 뒤 도서관과 문화관으로 활용을 하였으며, 계월초등학교가 폐교가 된 후에, 장수군의 향토자료로 지정이 되었다. 지금도 과거급제를 한 유생들의 후예들인 창원 정씨, 삭녕 최씨, 제주 양씨, 김해 김씨, 경주 이씨들이 지금당계를 이어오면서 많은 장학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다섯 칸의 협소한 건물에서 많은 인재가

 

토요일. 주말이라 점심시간이 지난 후에 장수군으로 출발을 하였다. 지난 번 금강의 발원지인 뜬봉샘을 답사하고 난 후, 몇 군데 보아둔 곳이 있어서이다. 수많은 지자체의 문화재를 답사를 하고 다녔지만, 장수군처럼 문화재 안내판을 잘 설치를 한 곳은 그리 많지가 않다. 나와 같이 문화재 답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로 고마울 정도로 안내판이 잘 되어있다.

 

산서면에 있는 창원정씨 종가를 둘러본 후, 종가를 안내해주신 마을 어르신이 지금당을 둘러보라고 권하신다. 인근에 있으니 망설일 필요가 없다. 지금당은 계월초등학교 건물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지붕은 요즈음 유행하는 기와와 같은 플라스틱 구조물로 올려놓아, 조금은 옛 모습을 잃기는 했지만 그 속내야 어디로 갈까?

 

 

정면 다섯 칸에 측면 한 칸 반 정도로 지어진 지금당이다. 주변은 쇠줄로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입구는 반 칸을 툇마루로 놓고, 그 뒤편에는 선생의 휴식공간인 듯하다. 유리가 몇 장 깨어져 조금은 보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다.

 

마루를 놓은 소탈한 교실

 

네 칸으로 된 교실은 마루를 놓았다. 좌우로 창을 내어 밖이 훤히 내다보인다. 아마도 이 창을 통해 주변의 경치를 보면서 꿈을 키웠을 것이다. 벽에는 세 점의 편액이 걸려있다. 벽에 걸린 편액 중 남전유약(藍田遺約)’이라는 말은 아마도 후세에게 학업성취의 뜻을 지켜 전하라는 것인 듯하다.

 

 

4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곳에서 학업에 열중한 많은 사람들. 그 중에는 얼마나 많은 큰 인물들이 있었던 것일까? 장수군의 곳곳을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화재들이, 그런 숱한 역사를 알려주고 있다.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지금당. 그러나 이곳은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 낸 명당이다. 이러한 깊은 뜻이 있는 곳에서, 길을 재촉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체 옛 서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기억하려 애를 쓴다.

경기도 화성시 기안동 산2-2 등 40필지에 조성이 된, 경기도 기념물 제93호 ‘수원고읍성 (水原古邑城)’은 최초로 조성한 시기가 고려시대로 알려져 있다.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흙을 다져 쌓은 이 고읍성은 토성으로 조성을 하였다.

 

고려 때 수원에 읍성으로 쌓았으며, 조선 정조 13년인 1789년에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읍성을 쌓을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도 이곳이 수원부의 행정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토성으로 쌓은 수원고읍성

 

수원 고읍성은 본래 낮은 산의 능선을 이용하여 계곡 아래의 평지까지 에워 싼 형태였으나, 성터의 대부분이 무너지고 남아 있는 부분은 길이가 540m 안팎이다. 아래는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다져 쌓은 것으로 보이는 성벽은, 윗부분의 넓이는 2∼2.5m이고 높이는 4∼5m, 경사면은 7~8m 정도이다. 이 토성에는 동문터와 서문터로 추정되는 부분도 있다.

 

수원고읍성의 옛 기록에 의하면 성의 둘레가 1,320m쯤 되며, 성안에는 2곳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 복원하여 보면, 융릉의 뒤편까지 토성이 뻗어있기 때문에 4km쯤 되어 큰 차이가 난다. 결국 이 성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조선시대까지 읍성의 기능을 갖고 있다가, 수원 화성으로 읍치를 옮길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화성이 축성될 때까지 읍성의 기능을 가져

 

이 수원고읍성은 아래에 활석을 깔고 그 위에 판축을 하거나 적갈색 통양을 두텁게 쌓아서 조성하였다. 현재 토성의 성벽은 도로로 인하여 잘려있으며, 이곳을 마을사람들은 ‘고서문(古西門)’ 또는 ‘고자문(古字門)’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이 서문 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의 동북쪽 꼭대기에도 동문 터가 남아있다.

 

11월 10일(토) 오후에 찾아간 수원고읍성. 주변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읍성인지 아니면 그저 토축이 쌓인 것인지조차 구별이 되질 않는다. 읍성 내에는 관아와 객사, 군영, 운금루 등의 건물지만 일부 발굴이 되었으며, 다른 건물들은 이미 심하게 훼손이 되어 자리조차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주변 정리부터 해야

 

성내에는 고려시재와 조선조의 기와와 자기류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부터 수 백년 동안 수원의 읍성으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많은 전각과 군사들이 기거를 하였던 것 때문인 듯하다.

 

경사면을 밟고 올라가는데 쌓인 낙엽으로 인해 길이 미끄럽다. 그저 길가에 서 있는 안내판 하나로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 외에 이곳이 수원고읍성이라는 것을 선뜻 알아보기가 힘들다. 다만 석축 위로 길처럼 조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옛 읍성의 성벽의 위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무슨 큰 역할을 하였겠느냐고 한다. 하지만 토성은 그 나름대로 지키는 방법이 있었다. 고려 때 쌓은 성이라면 당시의 전쟁을 할 때의 주 무기는 칼과 창, 활 등이다. 만일 적이 이 경사진 면을 기어오른다고 하면, 겨울에는 물을 뿌려 경사면을 얼리고, 여름에는 물을 부어 미끄럽고 발이 빠지도록 한다.

 

낮은 토성이긴 하지만, 이 토성은 읍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감당을 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길지 않은 구간을 돌아보았지만, 주변이 엉망이다. 기념물이라고 해도 역시 문화재이다. 문화재 주변이 온통 정신이 사납다. 문화재 안내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는 수원고읍성. 담당부서에서는 주변부터 정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창성사지, 수원 광교산에 있는 옛날 창성사라는 절터 이름이다. 이곳을 찾으러 9월 10일 산행을 시작했다. 창성사지를 찾기 위해 벌써 3번 째 산을 오르는 길이다. 광교산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고 길을 들었다가, 엉뚱한 곳을 헤매기를 두 번. 이번에는 제대로 설명을 듣고 찾아가기 시작했다.

 

입구 어느 곳 한 군데 하다못해 나무 판에 화살표라도 하나 해놓았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숲속에 들어가 모기와 전쟁을 하면서 찾아들어간 창성사지. 천천히 걸어 30~40분 정도면 찾을 수 있는 곳을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다. 안내판 없는 문화재 하나를 찾으려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한다. 문화재 안내판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잡초더미에 쌓여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여기가 창성사지, 해도 너무한다.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안내판이 보인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진각국사의 탑비는 현재는 수원 화성 안 방화수류정 길 위편으로 옮겨져 있다.

 

그런데 이 창성사지를 보고 그 자리에 털벅 주저앉고 말았다. 세 번씩이나 찾아서 겨우 올라 온 곳인데, 사지라고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잡초더미에 묻혀있다. 아무리 찾아오는 사람이 없고, 향토유적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일까?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이런 꼴을 보면, 정말 부아가 치밀기 이전에 먼저 눈물이 난다.

 

창성사지의 아래편 석축. 60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서 있었다 

석축 및 움막, 누가 무엇때문에 지은 것일까? 흉물로 되어버렸다.

 

도대체 이 창성사라는 곳의 가치는 알고 있는 것일까? 축대와 우물, 그리고 기단석과 주춧돌. 그 안에는 과거 창성사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잡초더미에 쌓여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풀숲을 헤집고 창성사지를 돌아보다.

 

창성사지 안으로 풀숲을 헤치고 들어섰다. 옛 축대가 보인다. 높이 4 ~ 5m 정도의 축대로 보아, 이곳을 기점으로 아래 위에 전각이 들어서 있었을 것이다. 잡초 속에서 꽃 한 송이가 아름답게 피어있다. 그런 모습이 더욱 눈물겹게 만든다. 축대 밑으로는 누군가 이곳에서 기도라도 한 것일까? 다 찢어져 가는 움막이 있다.

 

 

이렇게 방치된 몰골로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아예 한 번도 정비를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더럽혀진 옷가지며 그릇들이 널브러져 있는 움막, 무엇을 하던 곳일까? 조금만 걸으려고 해도 풀이 발에 감겨 걷기조차 힘들다. 풀이 워낙 우거지다 보니,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늠하기가 어렵다.

 

현재 석축은 약 50m 정도가 남아있다. 석축으로 쌓은 기단은 2단으로 되어있는데, 아래층 기단의 위로 또 2m 정도의 석축의 흔적이 보인다. 이 위층 석축은 다 무너져 내린 형태이다. 그런 것 하나를 알아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온통 풀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창성사지 안에 풀숲에 가려진 기단석과 주추돌

 

석축으로 쌓은 우물, 맑은 물이 고여 있어

 

맨 위로 올라갔다. 200년은 됨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뻗고 서 있다. 사지 안으로 들어가니 돌로 쌓은 우물터가 보인다. 밑에는 흙이 쌓여 앙금이 졌지만, 지금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아마도 이 터에 남아있었던 진각국사의 사리탑과 비 등으로 유추할 때, 창성사는 고려 초에 창건된 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진각국사의 비에는 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 있다. 입적한 다음 해인 우왕 12년인 1386년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이 비가 세워졌다. 이 비의 내력만으로도 창성사는 625년이 지난 절이었으니, 아마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보면 그 역사가 상당한 절이었을 것이다.

 

석축으로 쌓은 우물터. 아직도 물이 고여있다 

 

약 500평 정도의 규모를 가졌을 창성사지. 그 안 서북쪽의 대웅전지에는 장대석으로 조성한 기단석과 여기저기 주초로 사용했던 돌들이 보인다. 이곳에는 탑재편과 기단의 갑석 등도 보이는데, 어느 것 하나 잡초더미 때문에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다. 위편 석축 끝으로 가서 산 아래를 바라다본다. 이곳에 절을 지은 이유를 알만하다. 저 멀리 아름다운 산의 능선이며 수원 시가지가 눈앞에 펼쳐진다.

 

길을 안내하는 표시판 하나 없이, 잡초에 묻혀있는 고려 때의 절터인 창성사지. 이렇게 내버려둘 것 같으면 왜 향토유적 지정은 한 것일까? 돌아서는 내내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가슴이 미어지는 문화재 답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창성사지에서 바라다 본 능선. 저 멀리 수원이 희미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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