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이 한 분 계시다. 가끔 답답할 때 전화라도 드리면, 곧잘 우스갯소리를 해 사람의 기분을 풀어주시고는 한다. 나잇살깨나 먹어 세상을 살다가보니 사는 것이 점점 버거워진다. 아마 물질적인 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심적인 부담이 더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며칠 째 감기몸살로 인해 사람이 늘어져서인가? 괜한 우울증이 걸린 듯하다.

전화를 드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맑은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들린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것일까? 스님께서야 세상 놓는 공부를 하신 분이시니, 머 세상에 좋고 나쁘고도 없으실 것만 같다. 문안인사를 드리고 다짜고짜 질문을 퍼부었다,

“스님, 세상살이가 점점 힘들어지는데, 이유를 모르겠네요?”

스님 잠잠하시다. 딴 때 같으면 바로 한 마디 하시는 분이시다. 농담 삼아 한 마디씩 주고 받는 대화 속에 은연 중 세상살이 공부를 알려주시고는 하시는 분이라,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을 한다.

“하감독님(스님들은 예전 프로덕션에 있을 때 호칭을 지금도 쓰신다) 요즘 많이 힘든가보네요. 그러니까 곡차 좀 조금씩 하라니까요”
“곡차는 머 좋은 사람하고 만나면 한잔씩 하지만, 요즈음은 거의 안마시고 지냅니다.”
“그럼 곡차 부족인가? 하하... 아마 길 위로 나가면 곧 나아질 병인 것을. 요즘 바쁘다고 답사를 오래 안가서 그런 것 같네요.”
"그렇지가 않아요. 영 죽겠다니까요“
“그럼 죽어야지. 사람이 죽을 때를 잘 가려야 세상을 잘 살다가는 것이라는데”

늘 이런 식이다. 답답할 때 전화를 드려도 시원한 해법은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농 비슷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보면 어느새 속이 조금은 풀려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세상살이 한 번 이야기 해 볼까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전화를 주셨을까?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렇게 심각하게 말씀을 시작하면 열띤 법문을 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말을 피하고는 하는 나이다.

“세상살이를요?”
“예, 이 세상에는 딱 세 종류의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요”
“세 종류라뇨?”
“첫 번째는 부모님을 잘 만나 살아생전에 돈 걱정 안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우리가 흔히 재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죠. 그 사람들은 절대 굶지는 않을 테니, 자신들의 생은 살아갈 수가 있겠죠.”
“예,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두 번째는 무슨 사람들입니까?”
“두 번째는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잡스 같은 사람들이죠. 실력이 남보다 출중해 자기 스스로가 이룰 수 있는 사람들도 살아남을 수 있죠. 우리나라 같은데도 그런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고 하네요. 아이티산업 쪽에는 젊은 사람들이 스스로 개발을 해서 부를 축적하고 있다고”
“공감이 갑니다. 세 번째가 정말 궁금하네요. 세 번째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세 번째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도 없고, 특별한 공부를 했다거나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이 사람들이 사실은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고, 세상을 가장 잘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아야죠.”

이쯤 되면 이 세 번째 부류라는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을 스님은 세 번째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으로 구분을 지은 것일까? 대답을 듣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바빠지니 재촉을 할 수밖에.

“세 번째는 바로 쓰리기통에 거꾸로 처박아도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죠. 이 사람들은 실패를 해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가 있으니까요. 아마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만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보이네요. 특히 우리나라 같은 곳에서는 더 더욱 그렇죠.”

우리는 어느 부류에 속해있을까?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잠시 생각을 놓고 있는데, 말씀이 이어지신다.

“요즈음 젊은 부모님들 정말 큰일예요”
“왜요? 요즘 젊은 부모님들 아이들 잘 키우잖아요?”
“잘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바보로 만들고들 있어요. 그 부모님들 재산이 무척 많아요? 아님 아이들을 남보다 출중하게 가르칠 능력이 있다고 하나요? 그것이 아니라면 아이를 강하게 키워야 하는데, 받자만 하고 키우고 있으니, 그 아이들이 자랄 때 쯤엔 세상이 정말 험해질 텐데, 아이들이 어떻게 헤쳐 나갈 수가 있겠어요? 그 때까지 그 부모님들이 명을 버틸 수 있다고 해요? 그런데 무조건 받자를 하면, 아이들이 어려서 부터 부모님께 의지하는 마늠만 키우는 것이예요. 아주 어릴 적에는 사랑으로, 그리고 조금 지나면 스스로 일을 처리하도록 가르쳐야죠. 아이들 그렇게 키우면 부모님들이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긴 통화가 끝났다.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 혹 나도 아이를 바보로 만드는 부류는 아니었을까? 오늘은 정말 이 말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만 할 것 같다.

10월 15일(토) 오후 3시에 남원에 있는 선원문화관에 갑자기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학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은 금방 문화관 홀을 가득 메웠죠. 지난 번 10월 1일 행사 문예공모전에서 글과 그림을 응모해, 수상을 하는 학생들이 모여 든 것입니다. 수상자 전체 인원 80여 명 중에서 이 날 참석을 한 학생 수는 60명이 넘었습니다.

좁은 홀 안에 가득 메운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이렇게 시상식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며, 자리를 마련해 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선원문화관 이사장과 7733부대장, 수상을 하는 학생들과 학부형들이 개막 테이프 커팅을 마친 후, 일일이 호명을 하여 상장과 상품을 전달했습니다.




아이들 그림 속에 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

시상식을 마친 후 학부모와 아이들은 모두 전시관인 ‘갤러리 선’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80여장의 아이들이 국군의 날 그린 그림들을 돌아봅니다. 그 안에는 자신들이 그린 그림들도 걸려 있습니다. 그 그림 앞에서 수상을 한 인증샷을 찍기도 합니다. 그리고 딴 학생이 그린 그림도 꼼꼼히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림을 돌아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도대체 아이들의 생각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가를 두고 말입니다. 그냥 단순히 그림을 그렸다고 하기에는, 제 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 그림 몇 장을 돌아봅니다. 그 그림 안에 아이들의 생각이 들어있다면, 정말 요즘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 듯 그런 철부지가 아니란 생각입니다. 아이들에게도 무엇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는 듯도 하고요.

과연 그냥 그린 그림일까?

한 아이가 전도를 그려놓고 그 겉을 칠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쪽은 빨강색으로 북쪽은 파랑색을 칠을 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는 손을 서로 내밀고 있는데, 두 손을 마주잡지는 않았습니다. 잡을 수도 있을 텐데, 잡지 않은 손. 아마 손을 잡은 것이 그리기가 어려우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색을 바꿔 칠한 것도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칠을 하다 보니 그렇게 색을 칠한 것일 테죠.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 현실과 참 잘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제가 이상한 것 압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그림 한 장에서 우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또 한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출렁이는 바닷물에 뜬 천안함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천안함은 영원해요’라는 글이 적혀있습니다. 우리 가슴 속에 남은 천안함의 아픈 기억입니다. 멀쩡했던 천안함은 두 동강이가 났지만, 아이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천안함이 제대로입니다. 아이는 두 동강이가 난 천안함이 싫었을 테죠. 누구나 다 아팠을 겁니다.



아이들의 그림 속 세상. 그 안에는 예전의 우리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아이들이 벌써 나름대로의 사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그림이 더욱 소중하단 생각입니다. 내년에는 또 어떤 그림들을 만나게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제일 힘든 것이, 제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하는 것이다. 어던 날은 아예 하루 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할 때가 많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라도 더 촬영을 해야 한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다가 시간을 내어 인근에 있는 식당을 찾아들어가면, 음식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그저 허겁지겁 먹고 또 딴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기 대문이다. 

참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물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언제부터인가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되고, 그것을 찾아 하나하나 어디엔가 소개하는 것이 나의 일처럼 되어버렸다. 남들은 이런저런 일로 음식을 소개하고, 그것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고집스런 글을 올리다가 보니, 맛집을 발견해도 늘 식당문을 나서고 나서야 '소개를 할 껄 그랬나'라는 생각을 한다.

서로 상을 차리겠다고 하는 아이들.
 
원주시의 문화재를 답사하던 날,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 배도 고프다. '한 가지만 더 찍고...' 라는 생각으로 돌아치다가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다. 아침을 7시에 먹었으니 배도 고프고 허기도 진다. 길가에 있는 식당들이 많지만, 그 중 한집이 눈에 띤다. 안으로 들어가니 살림집을 식당을 사용하는터라, 여느 식당처럼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냥 내집처럼 편안함을 주는 그런 곳이다. 밥 한상에 7,000원이라는 가격표가 보인다. 주변에 마당한 식당도 없는터에 이것저것 따질 수는 없다. 그래도 늦게나마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고마움이 먼저 들기 때문이다. 식당 집의 아이들인 듯, 누나와 남동생이 서로 상을 차리겠다고 주장을 한다. 서로 미루겠다고 다둘 나이인 듯 한데, 서로 상을 차리겠다는 아이들을 보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주거니 받거니 차린 소박한 밥상

누나와 동생이 서로 반찬을 들고나와 상을 차린다. 누나가 반찬을 놓고가면 동생이 다시 바구어 놓는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반찬을 놓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놓아야 손님이 먹기 좋을까를 안다고 하는 식당집 아들녀석의 이야기에 조금은 의아하기도 하지만, 그도 역시 기분 좋은 이야기다. 손님이 오면 찬을 준비하느라 음식이 조금은 늦게 나오는 편이다.
시장을 참는 것도 힘든데,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지럽히니 허기가 더 지는 듯하다. 얼른 밥을 달라고 하니, 밥을 새로 하느라 늦는 것이란다. 둘이서 하나하나들어다가 놓고 간 밥상. 화려하지도 않다. 가지수가 상 다리가 휠 정도는 더욱 아니다. 그저 시골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상차림이다.



특별한 것이 없다. 반찬이라야 10여가지. 거기다가 고급스런 반찬은 없다. 가갹에 비해 비싼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든다. 하지만 허기진 배에서는 연신 들어오라고 난리다. 조금 있으니 된장 냄새가 구수하게 나는 찌개를 갖다 놓는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돌솥밥을 새로 하느라고 조금 늦었다고 정중히 이야기를 하는 남자녀석의 행동에 웃음이 난다. 하지만 반찬을 하나하나 먹어보니, 어디선가 많이 먹어 본 맛이다.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가 텃밭에서 구해다가 만들어준 반찬맛이랄까? 그런 맛이 난다. 거기다가 식당이 가정집 거실이니 더 더욱 그러하다.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은 조금은 텁텁하고 깔깔한 맛. 참으로 오랫만에 보는 맛이다.

 
찬의 종류도 그렇다. 전문적인 식당에서 내어놓는 반찬이 아니라, 집에서 늘 먹을 수 있는 그런 반찬이다. 집앞에 있는 밭에서 직접 농사를 지은 것들로 마련한 찬이라고 하니, 그 안에서 어머니의 손맛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지 모른다. 기분좋은 밥 한상. 아침부터 돌아치느라 피곤하고 허기진 배가, 따듯한 정성이 담긴 밥 한 상으로 인해 오랫만에 호강을 하는 것만 같다.

답사를 다니면서 온갖 맛이 있다는 집은 많이도 들려보았다. 집의 전면을 덮고있는 '무슨무슨 방송국 무슨무슨 프로 출연' 등의 문구가 적힌 곳도 수없이 들어가보았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조미료를 싫어해서인지, 그런 곳도 그렇게 맛있게 느끼지를 못한 것만 같다. 오히려 소박하면서도 어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집. 어느 가정의 점심상처럼 편안한 식단. 그래서 이 식사 한끼로 피로를 잊은 것만 같다.

        
밥 한끼를 먹으면서 감동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것도 식당 밥을 먹으면서는 더 더욱 그랬다. 그러나 이 밥 한 상으로 피로가 말끔히 가셔졌다고 하면, 조금은 과장일까? 하지만 이렇게 소박한 밥상과, 상을 차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어 너무 고맙다. 아마 정이 가득한 집이어서 더욱 반찬이 맛이 있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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