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에게 ‘장(醬)’이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식품이다. 우리민족은 된장과, 간장, 고추장 등을 갖고 음식을 조리하기 때문이다. 하기에 옛 어르신들이 “ 그 집 장맛이 좋아야 그 집이 번창한다.”라고 까지 했다. 그렇듯 장은 우리에게는 남다른 식품이요, 소중하게 여기던 음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장이라고 하면, 간장과 된장, 고추장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 중에서 된장은 콩으로 빚은 메주를 띄워 오랫동안 숙성시킨 것을 말한다. 된장은 발효 숙성기간 동안 바실러스(Bacillus)균과, 공기 중에 존재하는 여러 균이 된장 특유의 맛과 향을 만들게 된다.

 

 

중국의 경전 주례에 나타난 장의 역사

 

여러 경로의 실험을 통해, 된장은 2년에서 3년 사이의 된장이 가장 맛이 있고 영양 가치도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 옛 문헌 속에 처음으로 ‘장(醬)’이라는 낱말이 등장한 것은, 기원 전 3~400년 전에 쓰였다고 알려진 중국의 경전 <주례(周禮)>에서이다. 주례에 보면 ‘고기를 햇빛에 말려 가루로 곱게 빻아 술에 담근 후, 여기에 조로 만든 누룩과 소금을 섞고 항아리에 넣는다. 잘 밀폐한 상태에서 백일 동안 어두운 곳에서 숙성하도록 띄워 익힌다.’라고 적고 있다. 썼다.

 

장이 언제 적부터 있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것은 모으나, 콩의 원산지를 만주로 보는 학계의 이론에 따르면 장 문화도 이곳에서 시작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장 역시 대부분의 발효식품처럼 콩 재배지에서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치면, 이미 기원전 1,500년 전인 청동기 시대부터 장의 원형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장의 기록

 

우리나라에 장의 기록은 언제부터였을까? <삼국지>에 보면 ‘고구려 사람들이 발효식품에 능하다’는 구절이 나오고,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의 이바지 음식에 술, 기름과 함께 메주가 등장한다.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를 세운 직후인 7세기 말에는 이미 메주가 발해의 명물로 널리 알려졌다.

 

실제로 중국의 <박물지(博物志)>나 <학재점필(學齋佔畢)> 등의 문헌을 보아도 메주를 소개하면서 ‘외국에서 건너온’이라고 표현을 했다. 이 장은 8세기경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나라마다 제각기 다른 기후와 식생활 속에서 독특한 장맛을 낸 것으로 보인다.

 

 

수원시청 옥상에 웬 장독대가?

 

수원시는 시청 옥상에 장독대를 설치하고, 3월 27일 10시부터 된장과 간장 등을 직접 전통 저염 장을 담가보는 잃어버린 우리 맛 되살리기 프로젝트 음식연구가 박종숙과 함께하는 ‘저염, 명품 된장 아카데미’ 장 담그기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 날 참가한 50여명의 사람들은 저마다 명품장을 담근다는 것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시민들은 박종숙 경기음식연구원장 등 강사들의 지도에 따라, 직접 장을 만져보고 담가보는 시간을 가졌다. 염태영 수원시장도 참여해 시민들과 함께 장을 담그며 시민들과 시루떡을 나눠먹기도 했다. 이 날 직접 만든 장은 숙성이 되는 11월경에 직접 가져갈 수 있다. 체험에 참여한 시민들은 염 시장의 “벌써부터 가을이 기다려지죠?”라는 말에 서로 흐뭇해하기도 했다.

 

 

이날 된장 담그기에 참가를 한, 한 시민은 “정말 이렇게 시청 옥상에 장을 담가 놓았으니, 장이 궁금해 시청을 자주 방문할 것 같다. 전국 어느 지자체에서 이런 이벤트를 하겠는가? 수원에 살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면서 얼른 가을이 기다려진다고.(사진 / 수원시 정책홍보담당관실 이용창)

“제가 어릴 때 너무 고생을 하고 살았습니다. 아버님은 저희 4남매를 놓아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죠. 저는 13살부터 쟁기질을 하면서, 어린 동생들을 키워야만 했습니다. 아마 그 때 제가 고생을 심하게 한 것이 늘 마음이 아파, 주변에 불우한 청소년들을 보면 모두 자식같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가봅니다”

 

수원시청 옆 견인차보관소 담장 밑에서 24년 째 구두를 닦고 있는 한금정(남, 58세)씨. (사)수원시 자립청년회 총회장 직을 맡고 있다. 남을 돕는 것이 즐거워 ‘내일을 여는 멋진여성 경기협회 수원시지회’ 후원회장을 겸임하면서. 한금정씨는 구두를 닦는다. 요 며칠 문이 닫혀있다 했더니 몸살, 감기로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천성이 남을 돕는 일을 좋아해

 

“저희 어릴 적에는 정말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그렇게 배가 고프면 개울물을 마시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고구마 한 개를 깎아먹고 하루를 보내고는 했죠. 어머니께서 장애인이셨는데도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해, 저도 어릴 때부터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배운 듯합니다.”

 

구두를 닦으면서도 즐거워하는 한금정씨는 천성이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만 같다. 옛말에 ‘광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것인 옛 말일 뿐이다. 요즈음은 자신이 많이 갖고 있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어려운데도 작은 것이나마 남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훈훈한 것은 아닐까?

 

“저희 협회 회원이 한 110명 정도 됩니다. 그 중에 봉사를 하는 회원들은 90명 정도가 되죠. 다들 어렵게 살지만 그래도 남을 돕는다고 하면 모두가 앞장을 섭니다. 아마도 자신이 어렵기 때문에, 남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많은 도움을

 

한금정 회장은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회원들이 정성을 모아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것이 비록 많은 돈은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도움을 받는 청소년들은 곧게 자라고 있다는 것.

 

“25명에게 한 달에 5만원씩 통장에 넣어줍니다. 그 돈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쌀밥에 고깃국은 먹지 못해도 굶주리지는 않죠. 아이들이 살기가 힘들면 탈선을 하고 나쁜 길로 들어 설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희가 도움을 주는 아이들은 모두 훌륭하게 자라고 있어, 그 아이들에게 정말로 고마움을 느낍니다.”

 

지난 해 가을에도 회원들이 봉사를 하고 모은 돈 200만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올 5월 중에도 회원들을 모아 봉사를 할 예정이라고. 회원들이 내는 회비에 여유가 좀 생기면 300만원 정도를 아이들을 위해서 장학금으로 쾌척을 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어렵지만 남을 돕는 일은 즐거워

 

“저도 아이가 넷입니다. 위로 아들이 셋이고, 밑으로 늦둥이인 딸이 있죠. 아이 넷을 키우기도 힘이 들지만 어린 노숙자 아이를 집에 데리고 와, 10년 정도를 아이들과 함께 키웠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27살이 되었는데, 따로 나가서 살고 있죠. 아직 식을 올려주지 못해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절 때가 되면 꼭 찾아오곤 합니다.”

 

아마 자신이 조금 더 생활의 여유가 있었다고 하면, 더 많은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키웠을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 회원들이 모아 준 성금을 갖고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20만원씩을 장학금으로 준 것이 벌써 3회째라고 하는 한금정씨.

 

“사람이 올려다만 보고 살 수는 없잖습니까?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습니다. 제가 세상을 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습니다. 베풀면 그만큼 채워진다는 것이죠. 아마 좋은 일을 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서인가는 모르지만, 베풀면 베푼 만큼 채워지는 것이 세상 순리인 듯합니다.”

 

앞으로도 끊임없이 봉사를 하겠다고 힘주어 말하는 한금정씨. 두 평 남짓한 영업장에서도 늘 미소를 잃지 않는다. 남을 위하는 즐거움을 알기 때문인 듯.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며 봉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었지만, 손님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두 사람이 앉으면 빠듯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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