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은 과연 보존이 잘 되고 있을까? 천연기념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천연기념물은 「자연 가운데 학술적, 자연사적, 지리학적으로 중요하거나 그것이 가진 희귀성, 고유성, 심미성 때문에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여 법률로 규정한 개체. 창조물이나 특이 현상 또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일정 구역(다음 백과사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식물종류는 과연 잘 자라고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만난 천연기념물들. 물론 대개의 천연기념물은 관리도 잘되고 생육상태도 좋았다.

 


 

하지만 그 중에는 관리소홀로 인해 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천연기념물 중에서 울안에 있거나 마을의 신목(神木) 등으로 위하는 나무, 그리고 거목 등은 비교적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인가가 없는 곳에 외따로 서 있거나, 작은 나무 종류들은 손쉽게 해를 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의 관리, 보존에 문제점이 있지나 않은 것인지 의아스럽다. 
 

독극물에 의해 고사위기에 처했던 곰솔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에 소재하는 천연기념물 제355호 곰솔. 이 곰솔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독극물 투여 등으로 고사위기에 처했었다. 2001년 여름 누군가가 나무 밑 부분에 독극물을 투입해, 전체 가지 16개 중 12개가 말라 죽었다. 관계당국에서는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2005년 6월, 말라죽은 가지들을 모두 잘라내고 회생 가능성이 있는 4개만 남겨두는 대대적인 수술을 감행했다.

 

2008년 5월 21일 곰솔을 찾았다. 보기에도 안타까운 모습이다. 전주 삼천동의 곰솔은 수령이 약 250년 정도로 추정한다. 높이 14m, 가슴높이의 둘레 3.92m의 크기이다. 이 곰솔은 인동 장씨의 묘역을 표시하기 위해 심어졌다고 전해진다. 답사 당시 주변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 곰솔이 자라는 땅이 개인 토지라서,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되자 재산 행사를 할 수 없어 이렇게 한 것 같다고 한다. 지금은 주변 땅을 매입해 관리를 하고 있다.

 

외과 수술로 잘라진 부분이 흉물스럽다. 천연기념물의 관리소홀이 빚은 산물이다.

 

잘라진 가지들이 애처롭게 보이는 삼천동 곰솔. 처음부터 땅을 매입한 후 지정을 했다면 아마 이런 아픔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 없이 고사했다는 강릉 삼산리의 소나무, 석연치 않아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50호 삼산리 소나무. 공식적으로 고사판정을 내린 후, 2008년 11월 29일에 유일하게 나무를 위한 천도제를 거행해 유명세를 탄 나무다. 수령 450여년으로 추정되는 삼산리 소나무는 키 21m에 가슴높이 둘레가 3.59m로 1988년 천연기념물 제350호로 지정이 되었다. 이 소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인 서낭목으로 섬기며 나무 주변에 돌담을 쌓아 정성껏 모셔왔다. 그러나 2006년부터 나뭇잎이 누렇게 마르는 등 고사 위기를 맞아 백방으로 보호를 하기 위해 노력을 하였으나, 끝내 고사를 하고 말았다.

 

  
수령 450년이던 이 소나무는 고사가 되었다

삼산리 소나무에 걸린 저 줄은 무엇일까? 그냥 오르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걸려있었다. 몇 가닥으로 늘어진 줄은 무슨 용도였을까?

 

 

2008년 9월 4일 삼산리 소나무는 이미 고사가 되어있었다. 강릉시 관계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수명이 다한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나무의 수령은 일반적으로 600년 정도이다. 삼산리 소나무의 수령은 450년 정도다. 그렇다면 수명이 다해 고사를 한 것은 아니란 생각이다. 나무를 조사하다가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나뭇가지에 걸린 줄이다. 꽤 높은 가지에 줄이 걸려있는데, 그 줄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그 줄이 마음에 걸린다. 수명이 다해 고사한 것이 아닌, 또 다른 해는 없었던 것일까?

 

작은 나무들은 불법 채취해가기도

 

2008년 7월 4일,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87호 가침박달나무 군락지와, 제388호 산개나리 군락지를 찾아 나섰다. 아무리 설명을 따라 여기저기 찾아보았지만, 식견이 모자라 찾을 길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할 수 없이 임실군에 전화를 해서 담당자가 나와 알려주었다. 그 자리에 하다못해 사진이라도 붙여놓았으면 찾기가 수월했을 것이란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면 불법 채취가 심해 일부러 사진을 안내판에 넣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라북도 임실군 관촌면 덕천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387호 가침박달나무

1914년 처음으로 발견이 되었으며 변종이 없다고 한다.

 

천연기념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이곳은 아래쪽으로는 사선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들르는 곳이란다. 그런데 천연기념물로 지정이 된 나무들이 작다 보니, 불법으로 채취를 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에 관리자를 배치하기도 어렵고, 보호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딱히 없다는 이야기다.

 

천연기념물 제388호 산개나리. 불법 채취가 있다고 한다.

 

세 곳을 돌아보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의 천연기념물은 과연 온전히 보존이 되고 있을까 의아스럽다. 오늘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검색하다가 보니, 국민광장 국민의 소리 게시판에 제주도에 사시는 분이 자신의 땅 등 주변을 천연기념물로 고지한 것에 대해 땅 주인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고지를 했다고 항의성 글을 올렸다. 나중에 보니 관리자에 의해 삭제가 됐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좀 심한 말을 쓰기는 했지만 천연기념물 지정 고지에 문제는 없는 것인지. 그런 문제 하나하나가 보존에 문제가 된다면, 민원인의 글을 지울 것이 아니라 성실한 답변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소중한 우리의 자산인 천연기념물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도록, 관계당국에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기도 기념물 제19호로 1973710일에 지정이 된 파장동 노송지대. 정조의 효심이 가득한 이곳이 요즈음 더럽혀진 주변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파장동에서 길게 지지대비로 향하는 약 5km 정도의 이 길은, 예전 정조대왕이 능침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만나러 다니는 길목이었다.

 

이 길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느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수령 200여년을 넘는 소나무들이 줄을 지어 있는 노송 길. 전국 파워소셜러 팸투어 둘째 날에 지난 317일에 찾아간 노송지대에는, 2차선 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 당시에 심었다고 하니, 아마 수령이 200여년은 족히 지났을 것이다.

 

 

500주의 소나무를 심은 정조

 

경수간 국도를 따라 5km 정도에 조성되어 있는 노송지대. 기록으로는 이곳에 500주 이상의 소나무들이 살고 있어야 한다. 정조대왕이 부친인 장헌세자의 원침인 현륭원의 식목관에게, 내탕금 1,000량을 하사하여 이곳에 소나무 500주와 능수버들 40주를 심게 하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나무들은 자라면서 솔씨를 퍼트려 새로운 종자를 키워내기 때문에, 200년이 지난 세월이라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현재는 대부분 고사하고 38(효행기념관 부근 9, 삼풍가든 부근 21, 송정초등학교 부근 8) 정도의 노송만이 보존되어 있다. 낙락장송이 울창한 이 자연경관은,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사도세자의 슬픔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어 길손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이다.

 

 

노송지대 주변 정비 아쉬워

 

이번 파워소셜러 팸투어에 찾아간 노송지대 주변은 어지러웠다. 여기저기 주변이 어수선 해 이곳이 문화재 지역인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문화재는 주변이 정리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소나무 길 사이로 차들이 지나다니고 있어 소나무의 생육에도 지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나무는 매연에는 약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지나다니는 차량. 그리고 정리가 안 된 주변 환경. 정조대왕의 효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은 낯이 뜨겁다. 500주나 심었다는 소나무는, 당시에 심은 것들은 이제 겨우 40주 정도이다. 남은 소나무는 다 어떻게 된 것일까?

 

 

지금도 몇 그루의 나무는 생육이 좋은 편이 아니다. 파워소셜러들은 이구동성을 이야기들을 한다. 이곳의 차도를 변경하고 아스팔트를 걷어낸 후, 흙길로 조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니는 길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또한 소나무 주변에 모든 잡목을 옮겨, 소나무들을 온전히 괸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 가을 막걸리라도 부어 주어야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68-7에 소재한 운문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 제180호인 운문사 처진소나무가 있다. 이 소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훨씬 지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처진소나무는 매년 봄, 가을에 운문사의 스님들이 막걸리를 물에 타서 뿌리 주변에 뿌려준다. 그래서인가 항상 푸른빛을 띠고 있다.

 

정조대왕의 효심이 깃든 파장동 노송지대에 소재한 소나무들. 이 소나무들은 정조대왕의 효심을 알려줄 수 있는 귀한 나무들이다. 이 소나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수원도 봄, 가을로 소나무에게 막걸리를 주는 날을 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변의 나무들로 인해 영양분을 빼앗겨버려, 제대로 생육하지 못하고 있는 노송지대의 소나무들.

 

 

더 이상 이 나무들이 주변의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강구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5월과 10월 날을 정해, 믹걸리를 주는 날을 정해주어야 한다. 그런 행사 하나로도 노송지대의 소나무들이 더 잘 자라날 수 있으며, 이 행사 자체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노송지대를 알릴 수도 있어, 모두에게 나무를 더 귀하게 여기는 계기도 될 것이다.

화성은 아름답다. 그저 자연과 순응을 하면서 자연인양 쌓았기 때문이다. 그런 화성이 가장 아름다울 때가 언제냐고 누가 질문을 한다. 난 당당하게 요즈음이 가장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한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그냥 느슨한 마음으로 뒷짐 지고 걷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물론 꽃이 흐드러지게 피거나, 단풍이 물들었을 때도 좋다.

 

그러나 정작 아름다움은 화성이 돋보일 때가 아닐까? 3월 중순 경부터 4월 중순 까지 화성을 걷다가 보면, 눈에 보이는 것마다 다 흡사 성 돌을 위해 있는 듯하다. 그저 차가운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온기 가득한 따듯함이 배어있다. 푸른 소나무 가지들이 성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 그러하고, 성 돌에 비친 햇살도 그러하다.

 

 

화성의 압권은 역시 용도

 

물론, 화성 어디를 걷고 있던지 그 바람이 그 바람이다. 그리고 햇살 역시 동서남북 다르지가 않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역시 용도일원이다. 용도 끝에 서 있는 화양루 밖에서 길을 잡아 서삼치를 향해 걷는다. 숲에서 이상하리만치 은은한 향내가 난다. 그리고 서삼치를 돌아 흙길을 그저 터벅거리면서 안으로 걷다가 보면 서남암문이 반긴다.

 

아마도 예전에는 이곳에서 밖의 정황을 살피고, 이렇게 나른해지는 계절이 돌아오면 포사장 몰래 슬며시 고개를 떨구고 무거워지는 눈을 감았을 것이다. 그리고 용도 저편에서 자박거리고 걷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입가에 흘린 침 얼른 닦아내고 겨우겨우 눈을 치켜뜨지는 않았을까?

 

 

용도를 걷다가 보면 또 한 번 이 계절에 자지러지게 된다. 훌쩍 커버린 소나무들이 성 안을 기웃거리며, 봄날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을 힐끔거리기 때문이다. 약간은 냉한 기운을 가진 바람도 덩달아 이른 상춘객을 쓰다듬고 지나간다. 그래서 이 길은 늘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자랑을 하나보다.

 

화양루에 오르면 봄이 보인다.

 

용도 끄트머리, 팔달산 등성이 남쪽에 높지 않게 처마를 내민 화양루가 있다. 서남각루라고 하는 이 정자는, 그곳에 그리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뿐이다. 마루 위에 올라서면 저 밑 수원천에서 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곳 또한 마음을 한 자락 펼쳐놓을 수 있는 곳이다.

 

 

잠시 여장으로 다가가 고개를 삐죽 내밀면 소나무들이 반긴다. 화양루 성 밖에 서있는 소나무들은 늘 그렇게 사람을 반기고는 한다. 굳이 외롭지도 않은데도,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는가 보다. 아마도 옛날 그곳에서 쐐기 박고 돌을 떼어내던 인부들이 그리워서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은 늘 먼저 봄을 탄다.

 

이 길 언제 걸어보려고 그리 아껴?

 

이 용도를 제대로 걸어보려면 우선 서장대를 먼저 오르는 것이 좋다. 아니면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에서, 팔달산으로 치받듯 오르는 성의 여장을 따라 걷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렇게 어디로 오르거나 땀을 흘리면 더욱 좋은 곳이다. 그런 다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뒷짐 턱지고 걸으면 그야말로 부러울 것이 없다.

 

 

과거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 계절이 오면 용도를 따라 걸으면서 장용외영의 무사들도 봄에 홀리고는 했을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길을 왜 그리 아껴두는 것인지. 그저 평일이면 어떻고 주말이면 어때. 화성으로 달려와 천천히 서남암문을 지나 용도를 걸어보고, 화양루에 올라 봄을 느끼면 되는 것을.

 

늘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언제 걸어보려고? 왜 아직도 아끼기만 하는데? 용도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그 안에 봄은 늘 있지 않다. 꼭 이 철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화성 용도의 봄기운. 그 봄기운이 사라지고 있지 않으려나. 내일은 다시 올라야겠다.

풍아의 깁흔 뜻을 뎐하나니 긔 뉘신고(風雅深意 傳者其誰)

고됴를 됴하하나 아나니 전혀 업내(古調雖自 愛知者少)

졍셩이 하 미망하니 다시 블너 보리라(正聲何微 茫欲更吟)

 

내 말이 긔 어니 몰고 또 모라라(我馬維騏 載馳載驅)

질고를 믈을지니 원습을 갈힐소냐(詢其疾苦 奚憚原濕)

셩은이 지듕하시니 못갑흘가 하노라(聖恩至重 惟恐不能酬)

 

위의도 거룩하고 녜모도 너를시니(威儀盛大 禮貌寬兮)

희학을 됴하하나 학하미 되올쇼냐(善戱謔兮 不爲虐兮)

아마도 성덕지션을 못니즐가 하노라(盛德至善 終不可諼兮)(하략 김광섭 역)

 

 

권익륭이란 고성군수가 지은 연작시이다. 권익륭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시조작가이며, 본관은 안동 자는 대숙이다. 호는 하처산인으로 숙종 34년인 1708년에 양성(안성시) 현감을 지낸 후, 1710년 간성군수로 부임을 했다. 이 시는 <풍아별곡>이라고 하는 권익륭이 1710년 간성군수로 있을 때 지은 모두 6수의 연작시이다.

 

교주가곡집에 실린 권익륭의 풍아별곡

 

이 내용은 고성군 현내면을 답사하고 난 뒤, 고성향토사연구회 연구위원인 김광섭 선생의 논문과 자료에서 취합한 글이다. 김광섭 선생은 고성지역의 향토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지역의 향토사를 정리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김광섭 선생이 보내 준 자료에는 1710년 간성군수를 지낸 권익륭에 대한 자료와 <고성화진포의 팔경과 시문학 고찰> 이란 선생의 논문이었다.

 

풍아별곡은 이 작품은 작가가 교방(敎坊)에서 손님을 맞이하여 즐길 때, 기존의 노래만 갖고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부르도록 하기 위해 지은 노래라고 한다. 풍아별곡의 첫 수에서는 고조(古調)와 정성(正聲)이 전하지 않음을 한탄하면서 이를 재현하여 보려는 의지를 표방하였다. 그 다음부터 다섯째 수까지는 사람이 주연(酒宴)에서 갖추어야 마음 자세와 도리를 밝힌 다음, 마지막 수에서 인생은 무상하므로 생전에 후회 없이 놀고 즐기자는 뜻을 말하였다고 한다.

 

논두렁에 서 있는 소나무와 불망비

 

이렇게 권익륭에 대해 김광섭 선생을 통해 자세한 자료를 얻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고성군 현내면 산학리를 답사하고 있는데, 마을 앞 논가에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무가 하도 아름다워 쫒아갔더니, 옆에 영세불망비가 한 기 서 있다. 하지만 불망비라는 각자는 보이는데, 그 위의 글씨가 지워져 알아볼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던 차에 김광섭 선생을 소개를 받기에 이르렀고, 선생은 자신이 연구를 한 자료를 선뜻 보내주었다. 논가에 자리하고 있는 소나무 주변은 펜스를 쳐놓았고, 안내판에는 이 소나무가 수령이 150년 이상이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나무의 모습을 보니 3~400년 가까이 된 나무처럼 보인다.

 

그 옆에 세워놓은 영세불망비. 군수였던 권익륭이 선정을 베푼 것에 대해 잊지 않겠다고 주민들이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세운 비이다. 1711년에 이 불망비를 소나무 곁에 세웠다고 치면, 이 소나무의 수령은 이미 3백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결국 불망비 때문에 이 소나무의 수령이 우리가 짐작한대로 맞아 떨어진 셈이다.

 

 

 

왜 이곳에 불망비를 세워놓았던 것일까? 이곳 현내면 산학리는 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불망비 앞을 지나쳐 금강산으로 오갈 때, 이 불망비를 보고 이곳에 선정을 베푼 권익륭 군수가 있었음을 알아달라는 뜻이었다는 것. 이 불망비와 동일한 불망비가 안성시 양성면사무소 뒤편에도 한 기가 서 있다고 한다. 결국 권익륭은 지역의 방백으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300년이 지난 소나무 가지 밑에 서 있는 권익륭 군수의 영세불망비. 각자는 다 흐려져 알 수가 없지만, 당시 주민들의 정성이 그 곳에 깃들어 있다. 이곳 산학리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300년 세월 그렇게 의지를 하면서 자리를 지켜 온 소나무 한 그루와 영세불망비 한 기. 그 모습에서 아주 오래 전의 역사 한 자락을 만난다.

 

눈 온 뒤에 걷는 화성은 아름답다

 

어제 수원에는 첫눈인데도 불구하고, 10cm가 넘는 눈이 쌓였다. 거기다가 밤에 갑자기 기온이 하락하여 뒷골목 등의 도로는 그야말로 빙판을 방불케 한다. 12월 6일 아침, 아직 몸이 채 추슬러지지도 않았지만 화성을 향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다. 그저 눈 온 뒤의 아름다움 광경을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화성은 어느 계절이나 다 아름답다. 자연과 자연을 닮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자연처럼 화성을 그렇게 은색의 세계로 변해있었다. 지동 골목길을 벗어나 화성 겉으로 천천히 갇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동문(창룡문)을 들어서 동북공심돈과 연무대를 들러 본 후, 다시 남수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2시간 만에 돌아 본 화성 설경

 

제일교회 종탑에 올라가 주변 설경을 먼저 본 후, 돌아본 화성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르고 지냈던, 또 하나의 가슴 뜨듯한 사연을 만났다. 그래서 늘 주장하는 것이, 화성은 보면 볼수록 좋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부터 화성의 전체 구간 중 25%에 해당하는 화성의 설경을 함께 돌아보자.

 

 

화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명소가 한 곳 생겨났다. 바로 제동 제일교회 종탑이다. 이곳에 올라가면 눈 앞으로 펼쳐지는 화성의 설경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지동 골목길을 벗어나 화성의 성곽 밖으로 봉돈으로 향했다. 하얗게 변한 화성과 가끔 보이는 발자국들이 조화를 이룬다, 오래 묵은 빛갈과 어우러지는 하얀 색이 멋진 조화를 이룬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전설 하나쯤 들려줄 것만 같다. 그리고 포루지붕에 쌓인 하얀 눈이 우리에게 지난 역사의 이야기 한 토막을 알려주려는 듯하다.

 


적송과 눈, 그리고 화성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래서 화성은 눈이 와 미끄럽고 바람까지 불어 조금은 추운 듯도 하지만, 발밑에서 감촉있게 밟히는 눈이 좋기도하다. 동문 앞에는 이 추운 날씨에도 관람을 하러 오는가 보다.      

 

 

 

여장 위에도 눈이 수북히 쌓였다. 어제 내린 눈이 10cm가 넘는다고 한다. 성 벽에는 연신 카메라로 설경을  찍느라 분주하다. 공심돈도 예외는 아니다.

 

 

치성 안을 누군가 한바퀴 돌아서 갔다, 아마도 그 누가보다도 먼저 눈이 쌓인 화성의 벽화길을 걷고 싶어쓴가 보다.그렇게 돌아보는 시간에 화성과 정조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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