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많은 전설을 간직한 이 미륵대원의 동쪽.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석탑 한기. 모든 석조물들이 아래편에 모여 있는데 비해, 이 삼층석탑만 떨어져 있다. 석탑을 찾아 오르다보면 좌측에 솟대와 장승이 서 있고, 하늘재를 오르는 길임을 표시하는 석비가 서 있다.

이 석탑을 찾았던 날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주변이 미끄럽다. 눈밭 위에 누군가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게 하는 발자국이 찍혀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미륵리 사지이다 보니, 이곳이라고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 탑 너머로 아름다운 월악산 줄기의 자태가 보인다. 탑과 월악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신라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의 비보석탑

월악산을 배경으로 하늘재를 오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삼층석탑.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석탑은, 일반형의 단순한 삼층석탑이다. 석탑에는 고려시대의 탑에서 보이는 안상이나, 석불 등을 조각하지 않았다. 밋밋한 삼층석탑은 기단이 견실하다. 그리고 그 위에 삼층의 몸돌과 노반을 얹었는데, 몸돌은 위로가면서 급격히 줄고 있다.

탑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안정적이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신라탑의 유형을 본다, 이 탑이 미륵리 사지의 한편에 올라앉아 있는 이유를, 지기를 충족시키는 비보사탑 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보사탑설이란 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논리로, 땅 기운이 약한 곳에 세워 기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김두규 교수는 『풍수지리의문화의 이해』에서 「비보진압풍수 행위란 부족하거나 지나친 것을 눌러주는 풍수 행위로서, 물이 부족한 지역에 연못을 파거나, 골바람이 부는 곳에 나무를 심거나, 잘못된 물길을 돌리거나, 군사적 취약점에 있는 곳에 비보사찰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미신행위가 아니라, 정교한 과학적 논리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변과 어우러진 단아한 모습

백제의 석탑은 7세기 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변화를 시키면서, 독창적인 조탑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경우에는 백제보다 늦은 7세기경에 석탑을 쌓기 시작해, 8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탑의 조성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초기의 석탑이라고 추정되는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면 지방 장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의 많은 석조물 등을 보아도 섬세하기보다는 단아하고 장중하다. 삼층의 기단은 먼저 지대석을 놓고, 지대석 위에 하대, 하대중대, 하대갑석의 순으로 하층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하층기단의 돌들은 서로 엇갈리게 놓아, 무게의 중심을 분산해 견실하게 하였다. 그 위에는 4매의 판석을 세워 상대중석을 만들고 상대갑석을 얹어 상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대중석에는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모각했다.

몸돌은 밋밋하게 조형하였으며,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하다. 옥개석의 받침은 5단으로 꾸몄으며, 위에는 4매의 노반을 얹었다. 이렇게 기단을 견실하게 만든 이유도 비보사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년세월을 월악산과 한몸이 된 석탑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월악산과 함께 했다. 뒤로 보이는 월악산이 마치 한 몸인 양 느껴진다. 눈이 쌓인 탑 주변과 군데군데 눈이 쌓인 탑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마 저 밑에 보이는 미륵대원지의 모든 것을, 이 석탑이 품어 안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남북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하기에 이 석탑 앞에서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리고는 했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삼층석탑. 지금은 여기저기 파손이 되고, 탑의 틈새는 벌어져 있지만, 그 단아함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우리 땅의 곳곳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천 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 남북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삼층석탑.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 하나를 간직할지 궁금하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대원지에 소재한 보물 제96호 미륵리 석불입상. 겨울에 이곳을 찾은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이상하게 깊은 겨울, 그것도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이곳을 찾게 된다. 아마 그것도 인연인가 보다. 이 미륵리 석불입상을 찾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왜 이렇게 거대한 석불입상을 누가 무슨 이유로 조성을 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거대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보개석까지 합하여 모두 여섯 개의 돌을 쌓아 올려, 하나의 거대한 불상을 구성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돌을 이용해 거대 석불입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석불입상은 북향을 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으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그와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이 석불입상을 조성한 후, 개골산으로 들어갔다고도 전한다. 마의태자는 덕주산에 있는 덕주공주가 새긴 마애불과 마주보게 하였다는 것이다. 단지 전설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석불입상은 석굴식 전각 안에 모셔놓았던 것으로 보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현재 이 미륵입상이 서 있는 좌우와 뒤편으로는, 거대한 돌들을 이용한 석굴이 조성되어 있다. 앞과 위로는 목조로 된 전각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타버렸다는 것이다. 이 석불입상의 조성 시기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미륵대원'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석불입상의 형태가 고려 초기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과 같은 형태이기 때문이다.

고려 거대석불의 특징을 보이는 미륵리 석불입상

미륵리 석불입상은 그 전체적인 조형은 투박하다. 신라의 석불처럼 섬세한 면은 떨어진다. 머리에 쓴 옥개석은 팔각형이며, 육계는 나발이 있다. 양귀는 큼직하고 이마에는 커다란 백호를 표현하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으로 하였으며, 눈은 가늘게 반개를 해 감은 듯하다. 코는 우뚝한데, 인중이 짧아 입과의 사이가 멀지 않다. 입술은 두툼하고, 목은 굵게 표현해 삼도가 뚜렷하다.

이러한 안면의 코와 입이 가깝게 표현한 것은, 멀지 않은 제천 사자빈신사지의 석탑에 보이는 비로자나불의 얼굴과 흡사하다. 법의는 통견으로 처리를 했는데, 옷 주름 등은 모두 약식으로 처리되었다. 얼굴을 중점적으로 공을 들여 조성을 한 것에 비해, 나머지 부분은 형식적인 모습이다.

어깨부터 이어지는 선은 발끝까지 통으로 되어, 굴곡이 없이 조각을 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 초기의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거대석불의 공통적인 점이다. 이런 점을 보아 미륵리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미륵리 석불의 팔의 모습도 형체만 겨우 살렸다. 오른손은 가슴위로 들어 손등을 보이게 했으며, 복부 위에 대고 손바닥을 위로하여 둥근 물체를 들고 있다. 둥근 물체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석불의 조성한 내력으로 보아 무엇인가 간구를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누가 조성한 것일까?

전체적으로 보면 균형이 잘 맞지 않는 미륵리 석불입상. 과연 이 석불을 조성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미륵리 석불입상은 전문적인 석공에 의해서 조성되지 않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모습으로 견줘 볼 때, 이 석불입상은 어깨 위 부분과 그 아랫부분이 차이가 많이 난다. 어깨 위의 돌은 흰색을 띄고 있는데 비해, 아랫부분의 돌은 검은색이 많이 나타난다. 6개의 돌을 쌓아 조성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이보다 더 큰 거대석불을 조성할 때도 일석, 혹은 이석 정도로 조성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이 석불입상을 처음으로 조성한 사람이 마의태자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뒤편에 만든 석굴의 형태도 그렇다. 이 지역에서는 이러한 석굴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마의태자가 이 석불입상을 조성했다고 하면, 석굴암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마의태자 조성설에 무게를 두어

정확한 문헌이 없이 구전으로 전해진 마의태자의 조성설(造成說). 마의태자는 신라의 부흥을 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신라 제56대 경순왕과 죽방왕후 박씨의 맏아들이다. 휘가 김일이며 개골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고 하여, 마의태자로 불린다. 이 마의태자가 신라의 부흥을 꾀하기 위해 개골산으로 길을 잡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을 것이다.

그들은 충주를 거쳐 원주를 지나 인제 설악산 기슭에 머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아마 지리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현재 인제군과 고성군의 경계인 미시령을 중심으로, 북쪽은 금강산이고 남쪽은 설악산이 된다. 이런 점으로 보면 마의태자가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베옷을 입고 살았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 마의태자가 충주에 도착하여 미륵대원을 조성했을 가능성이다. 이런 점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은 많은 일행이 따르고 있었으니, 그 중에 석공기능이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석굴암을 따른 석굴을 조성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또 하나 석굴암에 조성된 본존불은 백색의 화강암으로 조성이 되었다. 미륵리 석불입상의 얼굴이 백색인 이유는 그런 점을 배제할 수가 없다.

이 석불입상이 고려 초기의 이 지역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도, 마의태자가 이곳에 와서 불상을 건립한다고 했으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자연 중앙의 뛰어난 기능을 가진 석공들이 아닌 향리의 석공들에 의해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정확한 년대나 조성 경위 등을 알 수 없는 미륵리 석불입상. 그런 점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미륵입상과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석굴을 보면서 그저 감탄을 할 수밖에. 언젠가는 이 전설에 얽힌 이야기가 밝혀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다.

충남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에는 고려 때의 절이었던 안국사지가 있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를 않아 언제 이 절이 창건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발굴조사 시 발견된 유물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절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었던 것을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중창을 하였으나, 다시 폐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절들이 이렇게 중건과 소실, 혹은 폐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긴 시간을 전해진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석불과 석탑 등이 남아 그 역사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역사의 흔적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때야 추정이 가능하지만, 지금처럼 이리저리 그 소중한 문화재들을 옮겨다니면 그도 힘들어질까 걱정이 된다.


불안정한 모습, 그러나 고려의 석불

안국사지에는 석불입상이 있다. 좌우에 협시보살이 서 있고 중앙에 본존불이 서 있는 삼존불의 형태다. 2003년 발굴 조사 때 출토된 연호를 보아 고려 현종 12 ~ 21년 때인 1021~1030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서 있는 본존불은 원통형의 관 위에 보개를 씌었는데, 그 형태가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크게 만들어 보기에도 불안정하다.

양편에 선 협시보살도 하나의 돌에 조각을 한 수법을 택했다. 조각을 한 수법이 소박한 것으로, 이러한 조각수법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흔히 보이는 조각기술이다. 본존불의 두 손은 돋을새김을 하였는데, 몸에 비해 길고 빈약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가 않는다.



이러한 본존불의 형상은 이 지방에서 고려시대의 석불에 많이 나타나는 형태로 형식화 되고, 제작기술이 쇠퇴한 지방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현재 이 석불입상은 보물 제100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몸돌은 어딜 가고

석불입상 앞에는 보물 제101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석탑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석탑은 현재 1층에 1매의 몸돌만 남아 있고, 그 위에 4매의 지붕틀이 얹혀 있는 모습이다. 아마 몸돌이 사라져버린 듯하다. 많은 문화재들의 훼손이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점이다.

원형의 형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이다. 1층 몸돌의 형태는 매우 간단히 처리를 하였다. 3면에는 여래좌상을 돋을새김을 하였고, 한 면에는 문고리를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보기 드문 모습이다. 대개 4면 전체에 좌불을 새기거나 양편에는 문고리, 남은 방위에는 창살 등을 조각하는 데 비해, 기본형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고려탑의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는 석탑은 추녀가 심하게 올라간 편이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4단씩 조각되어 있다. 석불입상의 뒤에는 배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있다. 흔히 배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에는 암각문이 두 군데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글씨를 알아보기도 힘들지만 판독을 한 결과, 바위를 바라보고 왼편에는 목공전설이 오른편에는 매향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재 충남 기념물 제163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안녕을 구하기 위한 자연석인 매향비

배처럼 생긴 바위에 적은 암각문을 판독을 한 결과 이 매향비문은 경오년 2월이라고 적혀있어, 1330년이나 1390년에 음각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매향비문은 돌을 다듬어 적기도 하지만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안국사지의 매향비문은 배처럼 생긴 바위에 음각을 하였다.



 

한 곳의 사지를 둘러보는 데는 길게는 한 나절에서 짧게는 두세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찬찬히 들러보고 나와도, 후에 또 다른 것이 나타나면 늘 후회를 하는 것이 현지답사다.

언제나 하나하나 다시 둘러보는 것도 그러한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서다. 당진 안국사지. 그 형태가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남아 있는 유적에서 그 모습을 찾아본다. 머리속에 그려지는 절의 모습이 확연치가 않은 것은, 주변을 너무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역사는 많은 것들을 변하게 만들지만, 그 모습이나마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텐데 말이다.

석남사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고려 초에 해거국사가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태종 7년인 1407년에는 국가에 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이 되기도 했다. 절에는 대웅전 등 많은 전각들이 국보나 보물, 혹은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다. 민가와는 달리 절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각 등의 훼손이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오랜 시간 충실한 보수로 인해, 그 본모습을 지켜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석가모니의 팔상도를 모시는 영산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에 소재한 석남사의 영산전은, 보물 제82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영산전은 석가모니불과 그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를 함께 모신 전각의 명칭이다. 석남사의 영산전에는 16나한을 함께 모셔 놓았다.



석남사의 영산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꾸며진 크지 않은 전각이다. 석남사의 입구에 있는 금강루라는 누각 밑으로 난 입구를 지나면 계단 중간 우측에 자리한다. 그리 크지는 않은 전각이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건축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낮은 자연석 기단위에 위로 올라 갈수록 좁아지는 민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영산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명종 17년인 1562년이다. 이 영산전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을 면하였다. 조선 초기에서 중기 사이에 건축양식을 갖고 있어,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작아도 소중한 문화재

석남사 영산전은 딴 전각에 비해서 크지가 않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작은 전각으로 주위를 돌아보면, 나름대로 탄탄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산전은 돌 축대를 쌓고, 돌로 쌓은 돌담으로 앞을 둘렀다. 그리고 지붕 가구는 오량으로 구성하였다.

이 영산전은 지은 지도 오래되었지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전국의 많은 사찰의 전각들이 소실되고 폐허가 된 것에 비해, 이곳은 피해가 없었다는 것이다. 석남사는 영조 1년인 1725년에는 해원선사가 영산전과 대웅전의 기와를 갈았다는 기록이 있다. 대웅전은 원래 영산전 앞에 있던 것을, 영산전 뒤로 높여놓았다. 그러나 영산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영산전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형태가 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그대로 주추로 사용했다는 점이나, 그 위로 올린 민흘림기둥의 일부가 여기저기 파여 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큰 보수 없이 보존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영산전 앞의 석탑

계단을 오르면 영산전 게단 양편에 두 기의 석탑이 서 있다. 고려 말기의 탑으로 보이는 이 두 기의 탑은, 절 아래쪽에 서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이 탑 중에 영산전 방향으로 있는 석탑은 옥신석에 감실이 마련되어 있다. 누군가 그 안에 작은 부처를 갖다가 놓았는데. 이곳이 감실임을 나타내려고 그런 것 같다.

석남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현재 석남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 외에, 대웅전과 석탑, 그리고 마애불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산비탈에 늘어선 전각들이 자리한 석남사. 여름철 녹음이 짙어지면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 또 다른 느낌이 들 것이란 생각에.

매월당 김시습(1435(세종 17년)~1493(성종 24))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김시습의 한문 단편소설인 <만복사저포기>의 무대가 되었던 만복사는, 현 전북 남원시에 소재하는 사적 제349호이다. 한문 단편소설인 <금오신화>는 「만복사저포기」를 비롯하여 「이생규장전」「취유부벽정기」「남염부주지」「용궁부연록」 등 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책이다.

이 중에서 「만복사저포기」는 남원에 사는 가난한 노총각인 양생이 왜구의 침입 때 정절을 지키다가 죽은 처녀의 환신(幻身-환상 속에서만 가능한 사람)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처녀가 떠난 뒤에도 양생은 그 사랑을 잊지 못해 장가를 가지 않고,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조금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다


흔적만 남긴 만복사지. 도선국사가 창건한 남원 최대의 가람

남원 만복사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에 창건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오층과 이층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법당이 있었으며, 그 안에 길이 35(10m)척의 동으로 조성한 불상이 있다"라고 했다. 기린산을 북쪽에 두고 남쪽으로 넓은 평야를 둔 야산에 위치한 만복사 당시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륙전, 영산전, 보응전, 천불전, 나한전 등 많은 전각이 있었고 수백 명의 승려가 생활하는 큰 절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만복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함께 불타 버렸다고 한다. 만복사지 발굴조사 때 많은 건물의 흔적을 찾아내었다. 또한 청자와 백자, 많은 와편 등이 출토되어 고려시대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사지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만복사지에는 5층석탑(보물 제30호)·불상좌대(보물 제31호)·당간지주(보물 제32호)·석불입상(보물 제43호) 등이 절터내에 남아 있다. 만복사지는 고구려식의 절 배치를 따르고 있으며,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절중에 하나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만복사지에서 만난 문화재들

김시습은 왜 이 만복사를 단편소설의 무대로 삼았을까? 만복사지를 찾아간 것은 그 해답이 있지 않을까해서이다. 낮은 경계로 주변을 둘러 친 만복사지. 입구를 들어서면 우측 길 밑으로 보물 제32호 당간지주가 서 있다. 투박한 모습으로 조성이 된 이 당간지주는 고려 초기에 조성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너른 사지 복판에 보물 제31호 석좌가 보인다. 이 석좌는 불상을 올려놓았던 받침돌로, 만복사를 지으면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석좌의 아랫부분은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겼으며, 그 위에 연꽃을 조각하였다. 높이 1.4m 정도인 돌에 여러가지 문양을 조각했는데 육각형으로 만들어졌다.

석좌를 지나 전각 쪽에는 5층석탑 1기가 서 있다. 보물 제30호인 이 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세운 것으로, 높은 기단부 위에 5층의 몸체와 지붕을 얹었다. 현재 남아 있는 탑의 높이는 5.75m이다. 1968년 탑을 수리하던 중 1층 몸체에서 사리 보관함을 발견하였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으로 단순한 구조이지만, 2층부터 지붕과 몸체 사이에 넓은 돌판을 끼워 넣은 점은 특이하다. 전각 안에는 보물 제43호인 석불입상이 있다.

이 석불입상 역시 만복사를 처음 창건할 당시 함께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높이 2m의 석불입상은 민머리에, 정수리에는 상투모양의 육계가 솟아 있다. 살이 오른 타원형의 얼굴은 눈, 코, 입의 자연스러운 표현과 함께 풍만한 인상이다.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의 광배로 구분이 되어 있다. 이 석불입상의 뒤에는 선각을 한 부처상이 조각이 되어 있어 특이하다.

만복사지에 가면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수백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는 만복사. 지금은 그저 옛 영화를 알아볼 수 있는 몇 기의 보물들이 서 있을 뿐이다. 김시습은 도대체 만복사란 절을 왜 무대로 했을까? 김시습은 어려서는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는 불교 철학의 사유를 공유하려 했던 사람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만복사를 무대로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금오신화에 보이는 「남염부주지」는 미신과 불교를 배척하는 경주 박생(朴生)이 꿈속에 염라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염라대왕과에 토론을 하고 돌아온 후 염라국 왕이 되어 세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이생과 저승을 넘나들며 사랑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도교와 유교, 불교에 통달한 것으로 알려진 김시습. 어쩌면 이 만복사를 무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만의 고차원적인 사랑을 일깨우고자 했음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혹자는 그런 세상 사람들과 동떨어진 이야기 때문에 광인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복사지를 떠나면서 돌아본 옛 절터. 어디선가 양생과 처녀의 애절한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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