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소재한 무량사. 신라 문무왕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고찰이다. 이 무량사 뒤편 고즈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산신각. 이 산신각에는 명창가문에서 태어난 피를 토한 한 소리꾼의 이야기가 전한다. 3대 명창 가문은 바로 명창 김창룡의 가문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적고 있다.

김문은 바로 중고제의 명창이자 판소리 진양조를 창시한 김성옥으로부터, 무숙이 타령으로 유명한 그의 아들 김정근. 그리고 정근의 아들인 김창룡으로 이어지는 3대 명창집안을 말한다. 이 3대 명창 집안에서 이름을 떨치지 못하고 쓸쓸히 서천 판교(너더리)에서일생을 마친 비운의 명창이 있다. 김창진 명창이 바로 그이다.

한 명창이 10년간이나 득음을 위해 피를 토하는 독공을 한 산신각

명창의 수행고수 노릇을 하던 김창진

김창룡의 아버지인 김정근은 장항 빗금내로 두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곳에서 창룡에게는 소리를, 창진에게는 북을 가르쳤다고 한다. 예전에 명창들은 수행고수라 하여 자신의 소리를 전문으로 장단을 맞추는 고수와 동행을 했다. 그러나 그 대접은 판이했다. 명창은 대우를 받지만, 고수는 밥을 먹을 때조차 댓돌 아래서 먹었다는 것이다.

형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수행고수 노릇을 하던 김창진. 그는 고수의 한을 풀기 위해 부여 무량사로 들어갔다. 그곳 산신각에서 10년간이라는 긴 세월을 소리공부에 전념하였다. 형 창진의 수행고수였던 김창진은 자연스럽게 당시 5명창의 소리반주를 하는 일이 잦다보니 5명창의 특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장점만 찾아내 자신만의 독특한 소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당시 형인 김창룡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같은 서천 출신 명창 이동백과 쌍벽을 이루던 김창룡. 7세 때부터 아버지인 김정근에게서 소리공부를 시작해, 10살이 되던 해에는 이날치에게서 1년간 공부를 한다. 이날치는 진주 촉석루에 올라 새타령을 할 때, 새가 어깨에 날아와 앉을 만큼 뛰어난 명창이다. 근세 5명창 중 한사람인 김창룡은 수많은 일화를 남긴 명창이다. 당시 관서지방에서는 창룡의 이름이 없으면 극장 대관을 해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비운의 명창 김창진. 마지막 제자 박동진 명창에게 소리 전수를 하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인터넷 검색자료)

피를 토하는 독공 10년으로 일군 득음

부여 무량사 산신각에서 10년간 독공으로 득음을 이룬 김창진 명창. 10년을 사는 동안 입고 있는 옷이 다 떨어져, 거적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했다고 한다. 밑이 다 드러날 것만 같은 그런 꼴이 안타까워 무량사의 주지스님이 옷을 한 벌 주었는데, 그 옷을 입으니 사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당시에는 소리만 잘해도 어딜 가나 대우를 받던 때였으니. 그런 마음이 들자 옷을 벗어버리고 다시 거적을 쓰고 소리에만 전념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스스로 독공으로 득음을 한 김창진 명창은 서울로 올라와 소리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명창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소리꾼의 세계는 비정한 것인지. 형에게서 조차 시기를 당한 김창진은 쓸쓸히 서천 너더리로 낙향을 하였다. 일설에는 이동백의 여인을 빼앗아가 피신을 했다고도 한다.

10년 피를 토하는 독공으로 얻어낸 득음. 그러나 너더리로 내려 온 김창진 명창은 그 아픔을 아편으로 이겨보려 하였고, 당시 소리를 하고 싶어 찾아 온 박동진 명창을 소리제자로 만나게 된다. 심청가를 박동진 명창에게 전수를 한 김창진 명창은 그렇게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은 김창진 명창의 일생은 제자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세상에 전해졌다. 무량사 한편에 자리 잡은 산신각. 그런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리 없는 무심한 사람들의 발길만이 거쳐 간다.(이 이야기는 스승이신 고 박동진 명창으로부터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120에 소재한 이하복 가옥은 중요민속자료 제197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하복 가옥은 한산이씨 중시조인 목은 이색선생의 18대손인 이병식(중추원의관)이 조선조 말인 19세기말에 안채 3칸을 짓고, 그 후 대를 이어 20세기 초에 사랑채와 행랑채, 아래채 등을 새로 지었다.

이하복 가옥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ㄱ자형의 안채와 그 앞쪽으로 一자형의 사랑채, 안채의 앞 우측으로 광채가 있어 튼 ㅁ자형 배치를 하였다. 또한 안채를 드나드는 중문 밖으로는 사랑채와 대문으로 연결이 된 행랑채와 그 뒤편에 아래채가 자리하고 있다. 중부지방의 전통적인 농가로 안채의 앞쪽지붕이 뒤쪽보다 길게 처리가 되어있으며, 중문 밖으로 며느리의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 특이하다.



주인의 설명을 받아 돌아 본 옛집

이하복 가옥을 찾아갔을 때는 대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인기척에 사랑채에 거주하시던 어르신이 몸소 나오시어 대문을 열어준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사랑채와 연결이 된 행랑채가 - 자형으로 배치가 되어있고, 그 맞은편에는 아래채가 자리하고 있다. 특이한 집 구조이다.

“이 아래채는 나중에 지은 것인데, 집에서 며느리를 들이면 이곳에서 생활을 하게 했던 곳입니다”

어르신의 설명이다.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는 원래 부엌과 방 2개로 구성된 3칸 집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왼쪽의 부엌을 늘리고 오른쪽으로 대청과 방, 그리고·부엌 겸 헛간으로 사용하는 헛청을 덧달았다. 사랑채는 왼쪽에 대문을 내고, 부엌과 사랑방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의 우측 부엌에는 작은 쪽문을 내어 밖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진 위로부터 대문, 중문, 안채, 아래채

전체적인 구성은 길게 - 자 형의 두 줄로 나열된 집이지만, 공간 구성이 특이하고 살아가는데 있어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한 것이다. 아마 새로 시집을 온 며느리가 생활을 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마음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집안에 사용하던 가재도구가 그대로 박물관

대문 입구에는 ‘재단법인 청암문화재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 집안을 돌아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수많은 책들과 많은 농기구들. 그리고 광채에 놓여진 그릇들이며 각종 집기들. 도대체 이 많은 것들이 왜 이 고택에 있는 것일까?





위로부터 안 광채, 아래 광채 그리고 전시가 되어있는 각종 기물

“이것들은 모두 어디서 구해오셨어요”
“예전부터 집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물량이 너무 많다보니 이렇게 정리를 했어요.”
“이것만 해도 말할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을 듯합니다”
“사람들은 옛 것이라고 자꾸만 버리지만, 그것이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죠.”

할 말이 없다. 이렇게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진열을 해 놓으면 훌륭한 교육자료가 된다. 역사 속에서 우리네와 함께 생활을 해온, 손때가 묻은 것들이다. 몇 번이고 주변을 돌아보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이리 방대한 자료를 본 적이 없다. 고택기행을 하면서 이하복 가옥의 남다른 점이 바로 이렇게 많은 생활도구 때문이다.

“정말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날은 덥고 땀은 흐르지만, 이보다 더 값진 선물은 없을 듯하다.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길을 떠나면서 ‘고맙습니다’를 속으로 되뇐다.




중문으로 내다 본 아래채와 장독, 그리고 안채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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