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90-2에 소재한 봉암사. 봉암사 경내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보물 제169호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봉암사 경내에서도 또 안쪽, 선원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지난 7월 6일에 봉암사를 찾았을 때 삼층석탑을 찾아보았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으로 명명이 되어 있는 이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와 탑의 중심이 되는 몸돌인 탑신부, 그리고 꼭대기의 머리장식인 상륜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머리장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봉암사 삼층석탑

봉암사 삼층석탑은 상륜부의 머리장식이 훼손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완전히 남아있는 상륜부는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된다. 더욱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볼 때, 천 여 년이 지난 그 시대의 석탑을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유례로 본다. 이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 탑에서 유래하였으며, 인도 탑의 머리장식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고 한다.

탑의 머리 부분인 상륜부에는 여러 형태의 구조물들이 차례로 놓이게 되는데, 우선 삼층석탑의 맨 위 덮개돌인 옥개석 위에 노반이 놓인다. 그리고 복발과 연꽃모양의 앙화가 놓이게 되며, 그 위에 보륜과 보개, 수연을 차례로 올리게 된다. 수연의 위에는 용차, 보주, 찰주가 놓이는데, 봉암사 삼층석탑은 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단의 기단을 둔 봉암사 석탑

일반적으로 석탑의 경우 기단이 2단으로 되어 있으나, 봉암사 삼층석탑은 1단만 보인다. 일층 기단의 주변으로는 넓게 석재로 둘러놓았는데, 이것을 아랫기단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기단의 형태에 비해 그 면적이 넓게 조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단에는 중앙에 탱주를 새기고, 양 끝에는 우주를 새겼다. 갑석은 두 장의 돌로 맞물려 조성을 했으며, 갑석 위에 몸돌의 고임인 옥신고임을 돌출시켜 새겼다.

몸돌은 양 우주를 새겨 넣었으며 지붕돌인 옥개석인 추녀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당당하다. 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이 화려하지는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의 단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례가 돋보이는 석탑

지붕돌인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이층과 삼층으로 올라가면서 몸돌이 적당한 비례로 줄어들었다. 어디 한 곳도 모자람이 없는 봉암사 삼층석탑.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이 봉암사 삼층석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구중궁궐 깊은 곳에 자리한 품위 있는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형태가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가 보다. 아마도 아무 때나 접할 수 없는 탑이기에, 더 오래도록 그 앞을 서성이는 것인지. 아니면 단아한 여인의 자태를 닮은 그 모습에 빠져서인지도 모르겠다.




뒤편에 암반으로 덮인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봉암사 삼층석탑. 아마도 이런 깊은 산중에서 많은 선방의 스님들에 방해라도 할까봐, 그 오랜 시간을 숨죽이며 서 있었을 것이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의 자태를 떠올린다. 세월이라는 흐름 속에서도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한.

문경 봉암사. 일 년에 단 하루 ‘부처님오신 날’을 제외하고는 산문이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곳.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유일한 절이기도 하다.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지증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의 지세를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이 날개를 쳐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흐르니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며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곳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고 절을 지었다.


절의 창건을 마친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여러번 소실과 중건을 반복 한 봉암사는 1982년 6월 조계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고, 희양산 봉암사 지역을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절집 안 땅을 밟기도 송구스럽다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문경으로 향했다. 문경 봉암사 입구에 도착한 시간이 오전 10시 30분경. 들어가는 입구부터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안거 중인 스님들께 ‘스님짜장’보시를 하러 왔으니 어찌하랴. 닫힌 산문이 열렸다. 버스로 구불거리는 길을 들어간다.

경내로 들어가니 절 입구에는 통행금지 푯말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100여명이 넘는 스님들이 안거 중인데도 소리하나 없이 조용하다. 마당을 둘러본다. 조그만 풀 한 포기 없이 말끔하다. 세속에 묻힌 때를 갖고 이곳 땅을 밟기조차 송구스럽다.



버스에서 짐을 내려 공양간으로 옮겨 놓고 절 경내를 돌아본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놓여진 널찍한 돌들. 그저 앉으면 자리가 된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맑다 못해 푸르다. 한 여름의 더위를 식혀주기 위한 물소리가 암반 위를 흐르면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길가에 놓인 이끼가 가득한 돌. 그대로 자연이다.

돌아다니기조차 죄스럽다. 정말 조심스럽게 절 경내를 돌아본다.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없다.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선원에 계신 스님들의 수행으로 인해서 인가보다. 봉암사 안에는 몇 점의 문화재가 있다.




봉암사 삼층석탑,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극락전이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도 죄스럽다. 오늘따라 셔텨 소리가 유난히 크게만 들린다. 금색전 쪽으로 지나다가 보니 입구 한편에 기와조각, 돌들이 모여져 있다. 돌 하나도 허투루 놓아두지 않는 곳이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다가 피식 웃고 만다. 이 빈틈없는 봉암사 경내에서 돌절구 하나가 마당에 쓰러져 있다. 그 모습이 정감이 간다. 아마도 마음에 한 점 여유를 느끼고 싶으셨을까? 나중에 안 일이지만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썩으니, 일부러 쓰러트려 놓았다는 것이다. 수행자와 속인의 느낌의 차이인지. 봉사도 정해진 시간 안에 산문을 나가야 된다는 봉암사. 3시간의 짧은 머무름 속에서 그래도 볼 것은 다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깊숙한 곳은 발도 들여 보지 못했는데.



이끼가 가득 낀 바위가 길가에 놓여있다. 바위 하나도 자연이 되기싶은 곳이다. 전각 입구에 놓여있는 돌들. 돌맹이 하나도 돌아다니지 않는 경내이다. 돌절구 하나가 쓰러져 있다. 봉암사에서 본 마음의 한자락 여유이다.  




봉암사의 전각들. 많은 전각들이 있지만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맨 아래 극락전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다.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봉암사 삼층석탑과 보물 지증대사 적조탑과 탑비를 모셔놓은 전각(문화재에 대한 글을 다시 쓰도록 하겠습니다. 하나 하나) 

경남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447-1번지 옛 절터에는, 고려시대의 석탑 한 기가 남아있다. 이 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기단은 여러 장의 판석을 이용해 상, 하로 구분되어 있다. 현재 보물 제379호로 지정이 되어있으며,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晉州 妙嚴寺址 三層石塔)’으로 불린다. 이 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이다.

지난 6월 11일에 찾아간 진주 수곡면 효자리. 마을을 돌다가 만난 묘엄사지 삼층석탑은, 화강암으로 조성된 높이 4.6m 의 삼층석탑이다. 이 탑이 세워져 있는 곳을 ‘탑골’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이 탑 외에도 또 다른 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 주위에는 주춧돌과 석주, 부도의 덮개돌 등으로 추정되는 석재들이 발견이 된 것으로 보아, 당시 묘엄사는 상당히 번성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에 서 있는 묘엄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379호이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묘엄사 ‘명’ 기와편이 발견돼

현재 삼층석탑이 서 있는 주변정비를 하던 2008년에, 이곳에서 묘엄사 ‘명’ 기와편이 발견이 되어 이곳의 절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이 탑 맞은편에도 불상과 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이탑 형식의 큰 절이었을 것이다. 이 묘엄사지 삼층석탑의 위층 기단은 각 면 모서리와 중앙에 폭이 넓은 양우주와 탱주의 기둥이 새겨져 있다. 그 위로 기단의 덮개돌을 얹었으며, 한가운데 2단의 고임을 깎아내 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상층기단 중석은 모두 4매의 판석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양우주와 가운데 탱주가 조각되어 있다. 삼층석탑의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층마다 각각 한 장의 돌로 조성을 하였는데, 1층의 몸돌은 지나치게 높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과 안정감을 잃었다. 몸돌인 탑신에는 기단에서와 같이 양편에 폭이 넓은 모서리기둥인 우주를 새겼다.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석탑

이 묘엄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석탑에는 1층의 서쪽 면에 창살이 있는 두 짝의 문 모양과 고리가 얇게 새겨져 있을 뿐 아무런 조각도 없다. 지붕돌인 옥개석은 넓이에 비하여 두꺼운 편이며, 밑면받침은 1층과 2층이 4단씩이고 3층은 3단으로 줄어든다.

지붕돌은 두껍고 낙수면의 경사가 급해 보이며, 처마의 선은 위아래가 모두 수평을 이루다가 네 귀퉁이 끝에서 위로 완만하게 솟아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상하의 균형을 잃어 거친 느낌이 들며, 각 부의 짜임새나 제작수법도 둔화되었다. 하지만 탑의 형태로 보아 제작시기 등을 알아 볼 수 있는 소중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정비를 마친 삼층석탑 주변에는 간주석과 덮개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쌓여있다


나뒹굴고 있는 보물 표지석

탑을 돌아보고 난 뒤 곁에 쌓여진 석물을 돌아본다. 석등의 받침석과 간주석, 덮개석과 같은 석재들이 놓여있다. 그 상태로 보아 화사석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삼층석탑 옆에 세워둘만한 훌륭한 석조물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뒤편에 대리석으로 조형이 된 석재 하나가 보인다. 이런 곳에 웬 대리석 석재인가 싶어 다가가보니 글이 새겨져 있다.

글씨는 ‘보물 제379호 진주 묘엄사지 삼층석탑’이라고 한문으로 적혀있다. 석탑 앞에 세웠던 안내표지석이다. 이곳을 정비했다고 적혀있는데, 정작 안내를 하는 표지석은 그대로 뽑아내 석물들과 함께 한 옆에 쌓아놓았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물론 안내판이 있으니 보물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안내표지석이 한 옆에 나뒹굴고 있다는 것이 볼썽사납다.


석재들을 쌓아놓은 안에 보물 표지석을 함께 쌓아놓아 볼썽사납다


묘엄사가 언제 세워진 절인가는 확실치가 않다. 하지만 마을 어르신의 말씀으로는 이 탑이 서 있는 인근에서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고, 돌이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보아 아마도 상당히 큰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삼층석탑 한 기와 몇 개의 석물만 그 자리에 남겨놓고 있는 묘엄사. 과연 언제 적 누구에 의해 창건이 되었으며, 언제 사라진 것인지 궁금하다. 이렇게 답답한 일을 당할 때마다 한숨만 터져 나온다.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문화재의 훼손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나라 전역에서 보이는 수많은 석탑. 그 많은 탑들의 형태는 다 제각각이다. 시대와 지역, 혹은 장인에 따라서도 그 모습이 달라진다. 이렇게 다양한 석탑을 답사한다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주기도 한다. 석탑 중에는 조각이 화려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밋밋하면서도 장엄한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 크기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어느 것은 작지만 정말로 화려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전북 정읍시 은선리에 가면 백제시대의 석탑 양식을 이은, 고려 탑이 한 기 서 있다. 도로에서도 보이는 이 탑은,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탑곡마을이라는 곳에 자리한다. 뒤편으로는 예전에 석산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쇄된 듯하다.


‘그 참 묘하게 생긴 탑일세.’

은선리 삼층석탑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참으로 그 형태가 묘하게 생겼다는 생각을 한다. 일반적인 석탑처럼 몸돌이나 지붕돌 들이 정형화가 되어있지 않다. 그저 얼핏 보면 여러 개의 돌을 짜 맞추듯 조성을 한 듯하다. 이 은선리 삼층석탑의 높이는 6m 정도가 된다. 단층의 기단 위에 삼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일층의 몸돌은 2m가 넘게 높이 서 있고, 이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이 삼층석탑은 이층 탑신(몸돌)의 남쪽 면에 두 개의 감실을 새겨 넣었다. 일반적으로 하나씩만 새기는 것이 보편적인데, 감실을 나타내는 문짝을 두 개씩이나 새겼다는 것도, 이 탑이 색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이 은선리 삼층석탑은 지붕돌을 평면으로 처리를 해서, 그것이 지붕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없다는 점도 특징이라고 하겠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

이 탑은 부여에 있는 정림사지 석탑과 흡사하다. 전체적으로는 모습이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당시 백제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보물 제16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은선리 삼층석탑.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탑의 형태로, 그 변화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탑이다.

지난 주 찾아간 은선리 삼층석탑. 주변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발길을 미끄럽게 만든다. 탑 주변에는 아무도 들린 사람들이 없는지,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발목까지 빠진다. 눈이 빠진다고 해서 답사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고 보면, 이런 날일수록 더 열심을 내야한다는 생각이다.



지대석은 눈 속에 묻혀 정확한 모습을 알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위에 선 기단부는 판석을 세워 양우주를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탑이 약간 변형이 되었는지, 한편은 양우주의 표현이 정확하지가 않다. 아마도 무게 때문에 약간 변형이 된 듯하다. 기단부 위에 놓인 지붕돌은 평평하다. 그냥 넓은 판석을 올려놓은 것만 같다.

두 장씩의 돌로 쌓아 올린 탑

일층 몸돌은 길게 세워져 있다. 중앙에는 두 개의 판석을 붙였음을 알 수 있게 가운데에 금이 선명하다. 그리고 그 위에 올린 지붕돌은 아래를 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평평하게 만들었다. 일반적인 석탑에서 보이는 처마 끝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층서 부터는 급격히 몸돌이 좁아진다.



지붕돌은 사면에 일자로 금이 가 있는 것으로 보아, 네 장의 판석을 시용한 듯하다. 보기에는 밋밋한 것이 단순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견고한 석탑의 장중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백제 지역의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당시 이 지역 석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수많은 석탑들. 그 다양한 형태를 접하면서, 시간이 갈수록 답사가 힘들어진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힘이 부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보면서 각각 그 나름의 특징들을 알아가는 것이 민만치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공부는 답사를 마치는 날까지, 다 배워지지 않을 듯하다.


전북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에 소재한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운산리 삼층석탑. 이 탑을 찾아들어갔다가 고생을 어지간히 했다.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이 없어,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잡는 바람에 산등성이까지 눈길을 걸어야만 했다. 문화재를 알리는 이정표는 길을 찾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로 소중한 안내자이다.

탑이 서 있는 마을 이름을 내후사동이라고 한다.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이, 운산리 삼층석탑은 옛 절터에 서 있는 탑이다. 그러나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탑의 모습을 보니 옮긴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것 같다. 탑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탑에는 앞면이라고 먹물로 쓴 글씨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왜 이 탑을 옮긴 것일까?

전북 유형문화재 제10호인 진안 운산리 삼층석탑

탑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울어 

원래 운산리 삼층석탑은 현재의 자리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탑이 서있는 땅의 소유주가 바뀌면서, 이 탑을 진안읍으로 옮겨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자 마을에서는 이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주민들은 밤마다 꿈을 꾸었는데 흰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나, 울면서 지금의 자리에 안치를 해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두 사람의 꿈도 아니고 마을사람들이 자주 이런 꿈을 꾸게 되자, 마을에서는 이 탑을 현재의 자리에 새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탑을 ‘신들린 탑’ 이라고 부른다. 정월 보름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촛불을 켜고 마을의 안녕을 빌었다고 한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탑으로 추정하는데,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과 같은 양식으로 조성이 되었다.





평범한 삼층석탑, 찾기가 이리 힘들어서야

천연기념물인 진안 천황사 전나무를 찾아가다가 보니 ‘운산리 삼층석탑’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전나무를 답사하고 난 뒤 돌아 나오는 길에, 운산리 삼층석탑을 찾아들어갔다.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다가 보니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어디로 가야할까? 안내판 하나가 없다. 이럴 때는 대개 직진을 하면 문화재를 만날 수가 있기 때문에, 직진을 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을 지나 길이 좁아진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을 물을 집 한 채도 없는 눈길을 아무리 가도 탑이 나오지를 않는다. 그렇게 계속 간 것이 결국엔 임도를 따라 산등성이까지 올라가고 말았다. 답사 시간은 자꾸만 지나간다. 겨울 해는 짧기만 한데, 마음이 조금해진다. 기던 길을 급히 돌아 나오다가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마을이 아니고, 들어오기 전 마을이라는 것이다.


처마는 약간 위로 올려졌다. 받침돌에는 기둥을 상징하는 우주와 탱주가 양각되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일까?

다시 길을 돌아 나와 내후사동으로 들어갔다. 마을입구에 서 있다는 삼층석탑은 마을을 몇 바퀴를 돌아도 보이지가 않는다. 도대체 안내를 하는 표시 하나만 길이 바뀌는 곳에 세워주었어도, 이런 고생은 면할 수 있을 텐데. 다시 마을주민에게 물어볼 수밖에. 바로 앞에 탑을 두고 찾아다닌 것이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더니 탑이 보인다. 그러나 길에서는 안쪽에 숨겨진 듯한 탑을 찾기란 수월하지가 않다.

운산리 삼층석탑은 이층의 가단 위에 삼층의 탑신을 올렸다. 위층 기단의 몸돌에는 탱주와 우주가 양각되어 있고, 일층 몸돌의 한 면에는 문이 새겨져 있다. 나머지는 모두 평면이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4단씩으로,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다. 탑의 머리부에는 꼭대기에 동그란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가 남아있다.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가 왜소해 보이고, 일층의 몸돌에 비해 이층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미는 떨어진다.


1층 몸돌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고, 받침돌 하단에는 안상이 음각되었다.

아래받침돌에는 안상을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 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변형된 모습이 고려 초기에 조성된 탑으로 보인다. 탑 하나를 찾기 위해서 두 시간이나 소비를 했다. 하지만 이 탑 하나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니 어찌하랴. 그나마 찾았으니 다행이랄 수밖에. 흙이 아직도 묻어있는 운산리 석탑이 주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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