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수원화성에는 공심돈 두 곳(동북공심돈, 서북공심돈)이 소재한다. 두 곳에 남아있는 공심돈은 모두 화성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팔달문을 보호하기 위한 남공심돈은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아직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1907'헤르만 산더'의 사진자료(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보면 남공심돈은 팔달문에서 동쪽으로 곧게 뻗어난 성곽이 북쪽을 향해 꺾일 때, 그곳에 자리하면서 남수문과 팔달문을 보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남공심돈과 남수문 사이에 남암문이 있었다고 한다. 남암문은 화성 안에서 형벌을 받고 형을 당한 죄인이나 성안 백성이 죽으면 이 남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그런 역할을 하던 남암문도 사라진 채 복원이 되지 않고 있다. 팔달문 앙 편 끊어진 곳에 자리했던 남공심돈, 남암문, 은구와 팔달문 양편에 적대는 찾을 수가 없다.

 

공심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여 적의 접근 여부를 살피고, 적의 공격 시 방어시설로 활용되던 곳이다. 공심돈은 내부를 빈 공간으로 만든 것으로, 수원화성 시설물 중에서 높게 조성해 먼 곳을 관찰할 수 있고 적의 동태를 살피기 쉬운 지형에 세워져 있다. 공심돈의 내부는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많은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고, 정면과 밑으로 뚫려 있는 총안과 현안 등을 통해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남수문 옆 지장물 철거가 주는 의미

 

현재 남수문에서 팔달문 방향으로 약간 휘어진 곳에서 성이 끊겨있다. 남수문은 1846년 대홍수 때 부서진 것을 2년 후 다시 지었다. 그러나 1922년 대홍수 때 남수문이 다시 떠내려가는 아픔을 겪었다. 1910년대에 사진을 보면 부서지긴 했어도 그나마 남수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남수문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북수문인 화홍문이 일곱 개의 무지개형 수문을 가진데 비해, 남수문은 아홉 개의 무지개형태인 아치형 수문을 냈다. 가히 그 모습만으로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구간수문(九間水門)’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3호인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44m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5,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등 총 48개소의 시설물이 있었다.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다가 남수문이 복원되어 현재는 42개소의 시설물이 현존하고 있다.

 

2012년 수원시는 90년 만에 남수문을 복원하였다. 동남각루 경사진 곳에서부터 새로 성을 축성하고 남수문을 복원한 것이다. 홍수에 떠내려간 것을 감안해 수문 안쪽으로 장마에 떠내려 온 나무토막들을 걸러낼 수 있는 보호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는 물이 급격히 불어나도 많은 물이 수문에 영향을 주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12년 남수문을 복원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공심돈과 남암문 등이 복원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몇 년이 흘러도 그 이상의 공사 진척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다시 화성의 끊긴 부분을 공사할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했다. 하지만 이미 화성의 자리에 들어서 있는 건물들을 정리하고 화성을 복원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남공심돈과 남암문', 언제 만날 수 있을까?

 

27, 남수문 안쪽에 현수막이 한 장 걸려있다. ‘남수문 옆 소공원 지장물 철거공사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남수문 안쪽 성벽이 끊어진 곳에 서 있는 건물에 공사용 가름막이 쳐져있다. 이제 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먼저 성터에 서 있는 건물들을 매입하고, 지장물을 철거한 후 성벽을 쌓기 시작해야 한다.

 

이번 화성사업소에서 하는 공사는 현재 그동안 남수문 옆에 자리하고 있던 상가건물들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로 234~2, 33~6, 35, 32~2번지 등으로 현재 수원남문고객센터 건물만 남겨놓고 그 인근 건물이 모두 철거대상이다. 이 건물들이 철거돼야 끊어진 성벽과 잇대어 공사를 할 수 있고, 남암문과 남공심돈을 복원할 수 있다.

 

202013일까지 지장물 철거공사를 마치고나면 남수문 옆에서 끊어진 채로 놓여있던 화성의 일부분이 다시 이어지게 된다. 물론 그 공사를 마친다고 해도 화성전체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많은 공사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일부구간이라도 이렇게 연결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수원화성이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지 않을까? 지장물 철거공사 안내판을 보면서 벌써 남공심돈과 남암문의 모습이 그려진다.

 

벌써 해미읍성을 다녀온 지 20여 일이 지났다. 답사를 하면 그때그때 바로 기사를 올려야하지만 현장 취재에 늘 뒷전으로 밀려버리고는 한다. 해미읍성은 벌써 수십 번은 더 다녀온 곳이다. 대전에 있을 때부터 이곳은 자주 찾았던 곳이라 어느 성보다도 눈에 익은 곳이다. 그런 해미읍성을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가보니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번지에 소재하는 사적 제116호이다. 해미읍성은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평산성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그 중 북문은 암문으로 조성하였다. 읍성의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는 했는데,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인 1417년부터 세종3년인 1421년 사이에 5년간의 세월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 곳으로 옮기려고 쌓은 성이다. 효종3년인 1652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다. 이 성은 적이 침입을 하지 못하도록 성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 시간 반 만에 성을 두 바퀴 돌아

 

해미읍성을 답사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다. 그 시간 안에 꼼꼼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뛰어다녀야 할 판이다. 1.8km의 성을 돌아보는 데야 길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의 이모저모를 일일이 촬영하고 기록하려면 그 정도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남문인 진남문으로 들어가 위 문루로 오른다. 북쪽으로 곧게 난 길 끝에 아문과 동헌, 내아, 객사 등이 보인다.

 

 

아문으로 행하던 중 만난 회화나무와 옥사 등을 둘러보고 난 뒤, 발걸음을 재촉해 동헌과 내아, 그리고 객사 등을 일일이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서문 밖으로 나와 순교지를 돌아본 후 바로 성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장은 복원되지 않았지만 잘 정리가 된 성곽을 따라 걸으며 여기저기 꼼꼼히 살핀다.

 

북암문 쪽으로 난 성벽은 낮은 구릉으로 오르는 길이다. 복원을 한 해자 위에 나무다리가 걸려있다. 북암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으로 성문 주위를 견고하게 쌓았다. 복원을 한 해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른들도 빠져 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해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성을 돌아 동문으로 향한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군관으로 있었다.

 

북암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져있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동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동문 역시 굳게 닫혀있다. 남문과 서문만 개방을 한 것이다. 성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안만 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성 밖을 돌아보는데 이렇게 문이 닫혀 있으면 이럴 때는 조금 난감하다.

 

답사를 하는 날은 기온이 꽤 높았다. 날씨가 쾌청해 성을 촬영하기에도 제격이다. 동문 문루 양편에 꽂아 놓은 깃발들이 가을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동문을 보고 난 뒤 다시 성을 거슬러 돌아본다. 혹시 지나친 곳이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서문을 지나니 두 곳의 치성이 있다. 왜 이곳에만 이렇게 치성을 쌓은 것일까?

 

 

선조 11년인 1578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 간 이 해미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현감이 이 성으로 옮겨와 겸영장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고 한다. 호서좌영인 해미읍성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243년 동안 내포지방 12개 군현을 군권을 지휘하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의 순교지로 더 알려진 해미읍성. 잘 복원된 성을 돌아보면서도 왠지 가슴 한편이 싸하다. 아마도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가 보다.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진남문 앞에 거리도 말끔하게 단장을 하였다.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 가을 풍광에 젖어보아야겠다.

 

문화재 하나를 복원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가 된다. 한 부분이 사라졌던 것을 제 모습으로 되돌리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고달사지. 사적 제382호인 고달사지에는 국보 고달사지 승탑을 비롯해 보물과 유형문화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23년인 764년에 창건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에는 봉황암이라는 불렸다는 고달사는 혜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 이 고달사지에 분포가 되어있는 발굴된 유적지를 돌아보아도 당시에 얼마나 큰 절이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신털이봉이라고 전해지는 곳에 쌓인 흙더미라는 작은 산을 보아도 이 곳에 얼마나 많은 사부대중이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는 고달사. 고려 고종 20년에는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을 했고, 원종 1년인 1260년에는 절을 크게 중창을 했다.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인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원종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신하를 보내어 그의 시호를 원종이라 하고 탑 이름을 혜진이라 내리었다.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갈 때의 귀부

 

대개 탑비 등에서 보이는 귀부의 머리는 시대에 따라 약간 차이가 난다. 보물 제6호로 지정 되어있는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의 귀부의 머리는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바로 거북이의 몸에 용의 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이다.

 

 

받침돌인 귀부에 조각된 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눈 꼬리가 길게 치켜 올라가 매우 험상궂은 모습이다. 눈은 부라리고 콧구멍에서는 금방이라도 불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앞다리는 마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듯 힘이 있어 보이며, 발톱은 사실적으로 표현을 해 땅을 누르고 있는 듯하다. 마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기세이다.

 

목은 길지 않아 머리가 등에 바짝 붙어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귀부모양을 정연하게 조각되었으며, 중앙부로 가면서 한 단 높게 소용돌이치는 구름을 첨가하여, 비를 끼워두는 비좌를 돌출시켜 놓았다. 이 원종대사탑비에 기록된 비문에 의해 97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비의 거북의 머리가 험상궂은 용의 머리에 가깝고, 목은 짧고 두 눈방울이 둥그렇게 부라리고 앞을 바라보고 있는 점. 그리고 귀두의 표현이 격동적이며 구름무늬의 번잡한 장식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넘어가는 전형적인 시대적 특징을 지닌 귀부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깨어져 사라졌던 몸돌을 복원시켜

 

원종대사 탑비의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과 출생, 행적과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 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중한 기록을 담아 놓은 비가 일찍이 무너져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있으며, 이곳 절터에는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귀부와 이수의 중간에 사라진 몸돌인 탑비가 이번에 복원이 된 것이다.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몸돌의 비문은 부러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상태가 양호하여 글자의 판독이 가능했다고 한다. 탑비에는 원종대사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비문은 김정언이 짓고, 장단열이 전액을 썼다. 또한 비문은 해서로 바둑판같은 선이 그어진 네모 칸 안에 썼으며, 글자는 이정순이 새겼다.

 

 

이렇게 원종대사 탑비의 몸돌이 복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러진 부분의 상태가 양호했다는 점이다. 다시 원형으로 복원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원종대사탑비. 비록 그 색깔이 달라 조금은 어색한 점도 있지만, 이렇게 복원이 되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출 수가 없다.

 

830일 찾아간 고달사지. 이렇게 복원이 된 원종대사탑비를 돌아보니 눈물이 흐른다. 얼마나 많은 우리의 문화제들이 훼파가 되었나? 사고가 틀리다고 종교성향이 틀리다고, 거기다가 나라가 부실한 탓에 수많은 문화제들이 제 자리를 떠났다. 앞으로 훼손이 되어있던 더 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제 모습을 찾아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문화재청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북한강로 등에 위치한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09호로 지정하였다고 12일 밝혔다. 수종사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하천경관을 바라볼 수 있고, 운길산 정상에서는 한강은 물론 서울 북동쪽지역의 산지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시의 금대봉 검룡소(명승 제73)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합쳐지는 장소로 사계절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아름답다. 이 일원은 계절에 따라 신록, 녹음, 단풍, 설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시간과 날씨에 따라 일출, 일몰, 운무 등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는 경관가치가 큰 곳이다.

 

 

조선초기의 대문호 서거정도 극찬한 곳

 

조선 초기 학자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하였으며, 인근에 생가가 있었던 정약용(17621836)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에 비교할 만큼 즐겨 찾던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큰 곳이다. 또 다선(茶仙)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정약용을 찾아와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차를 마신 장소로서 차 문화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남양주에 두물머리와 수종사가 있다면, 우리 수원에는 광교산과 창성사지가 있다. 수원시 상광교동 산41에 소재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 창성사는 고려 말의 국사인 화엄종사였던 진각국사(1305~1382)의 사리탑과 함께 조성이 된, 보물 제14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가 있던 곳이다. 현재 비는 화성의 방화수류정 가까이에 옮겨져 있다.

 

 

창성사지는 지금도 옛 절터의 석축이 남아있고, 사지 안에는 우물과 함께 여기저기 석물들이 보인다. 이 창성사지는 고려 때의 절터라고만 알려져 있다. 창성사지에 올라 앞을 내다보면 눈앞에 펼쳐지는 산의 능선이 아름답다. 아마도 저런 경치 때문에 이곳을 절터로 잡은 것은 아니었을까?

 

창성사 복원할 수 있을까?

 

지난 511시부터 수원시의회에서는 제302회 임시회 제2차 본회의가 열렸다. 이날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인 창성사지를 문화재 발굴조사를 한다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창성사지는 수원시와 한울문화재연구원의 정밀지표조사를 통해 2008년 대략적인 현황이 파악된 바 있다. 이번 동의안은 수원지역 관련 학술연구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책임성 있는 법인 또는 학술연구기관을 선정하여 문화재 조사를 실시한다는 것이다.

 

 

특히 창성사지의 발굴조사는 창성사지의 사역 및 건물지 확인,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의 원 위치 주변을 조사하여 창성사지의 가람배치 및 창건시기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 향후 연차적 발굴조사 계획 및 복원 정비를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한다는 방안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창성사지의 문화재 발굴조사가 끝나고 이곳에 옛 건물대로 창성사가 복원이 될 수 있다면, 많은 절터가 있는 광교산도 명승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지는 않을 것인지. 특히 창성사를 오르는 길이나 사지에서 바라다 보이는 정경은 이곳이 명승이 되고도 남을만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곳을 자주 찾아가고 이곳이 경치를 좋아하는 내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문화재청에서 수종사 일원을 명승으로 지정했다는 소식에, 광교산 창성사의 소실이 안타깝다. 보물인 비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옛 모습을 유추해 내기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듯해서이다. 오늘은 창성사지를 다시 한 번 찾아가보아야겠다.

 

한 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고색동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흔히 삭전(索戰)’이라고 해서 정월 대보름을 기해 마을과 마을이 서로 힘겨룸을 하는 대동의 놀이이다. <동국세시기>에는 충청도 풍속이 거전(炬戰)이라는 횃불싸움이 있다. 또 편을 갈라 줄을 서로 잡아당긴다. 그래서 끌려가지 않는 편이 이기는 것으로 풍년을 차지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줄다리기가 행해졌다. 지역마다 줄의 형태나 줄의 처리방법, 줄다리기가 갖고 있는 내적사고는 다르다고 해도, 하나의 공통적인 습속은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거나 줄은 액막이의 상징으로 줄을 다리고 난 뒤 그것을 잘라 대문 앞에 걸어놓거나, 줄을 마을 입구에 놓으면 액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등의 사고를 갖고 있다.

 

 

줄의 효능과 처리방법

 

우리 민족은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이라는 조형물에 대해 깊은 뜻을 내재하여 왔다.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은 왼새끼로 꼬아 대문에 걸어두면 금줄이 된다. 집안에 큰 일이 있거나 산모가 있을 때도 이 줄을 늘여 잡인의 접근을 막았다. 또한 장을 담가도 줄을 둘러 액을 막았다. 이렇게 우리민족과 짚으로 꼬아 만든 줄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정월 보름을 맞이하기 전에 사람들은 짚을 준비하고 줄을 꼬기 시작한다. 줄의 형태는 암줄과 수줄을 만드는데, 이것은 남녀를 상징한다. 줄다리기를 할 때는 암수줄이 한데 엉키게 되며 이를 비녀라고 하는 장목으로 고정시킨다. 줄의 용두를 만들 때는 암줄은 넓게 하고 수줄은 좁게 하여, 암줄의 용두에 수줄의 용두가 들어가게 만든다.

 

이러한 줄의 결합상태가 주는 내적사고는 바로 다산과 풍농이다. 남녀가 결합을 해서 다산을 기원하고, 짚으로 만든 줄을 결합시킴으로써 풍농을 구가하는 것이다. 줄을 당기는 이유는 마을마다 다르다. 그 마을이 처해있는 환경이나 지리적인 여건 등에 따라 내적 사고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자 쪽이 이기면 3년간 풍년이 들고 마을전체가 평안하게 살아간다.’(성남 판교)

승자는 공동으로 이용해 보를 막기 때문에 풍년이 든다’(안양)

강물이 풀려 액송기를 꽂은 줄이 떠내려가면 모든 재앙과 액운이 소멸된다’(여주 흔암리)

 

이렇게 지역마다 줄을 다리고 난 뒤에 마을에 전하는 속설이 차이가 난다. 그것은 그 마을이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 적당한 속설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큰말 일원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줄다리기를 해왔다.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그 유래가 아주 오래인 것으로 전해진다.

 

9일 오후 고색동 줄달리기 이루어져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행해졌으나, 요즈음은 보름 전후의 날을 잡아 일요일에 줄을 당긴다. 고색동 줄다리기는 1900년대만 해도 근동 30여 개 마을에서 풍장패를 끌고 나와 참여를 하는 큰 줄다리기였다. 일제의 문화말살정책 때는 줄을 다리지 못하자 마을에 흉사가 끼고 평안하지가 않아, 몰래 줄을 다리고는 했다고 한다.

 

 

1987년까지도 고색동의 줄다리기는 연이어져 왔다, 그 후 줄이 불에 타서 소실이 되고 마을이 급격히 도시화하면서 줄다리기가 중단이 되었다가, 고색동 청년회가 전통문화의 승계를 위해 1995년 줄을 새로 제작하고 복원하여 보름을 전후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고색동 줄다리기는 마을에 있는 당집에서 당고사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9일 아침 10시 수원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고색동 당집에서 풍물패들이 먼저 당고사를 올린다. 그리고 길놀이를 하면서 당주네 집으로 몰려간다. 당주네 집에 도착하면 마당놀이를 하는데, 이때는 근동의 풍물패(화성시)들도 함께 와 풍물을 주고받는다.

 

암줄이 이겨야 마을이 안과태평해

 

예전 같으면 당주집에서 마당놀이를 하고나면 바로 줄을 메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길놀이를 하겠지만, 지금은 중간에 문화행사 등 많은 행사가 이루어진다. 마을잔치로 하다 보니 더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오후 2시가 되어서 줄다리기가 시작이 되었는데, 여자와 아이들은 암줄을 남자들은 수줄을 잡고 다린다.

 

 

줄 위에는 각각 남장과 여장을 한 편장이 타게 되고, 편장의 지시에 의해 줄을 밀고 당긴다. 양편의 줄이 합해지면 수줄의 용두를 암줄에 밀어 넣고 빠지지 않게 장목으로 비녀를 끼운다. 징소리에 맞추어 세 번을 다리게 되는데, 암줄이 이겨야 마을에 풍년이 들고 마을이 평안하다고 한다.

 

풍물패의 빠른 가락에 이어 사람들의 함성소리. 그리고 줄을 당기는 사람들의 고함소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마을이 떠나갈 듯한 고색동 줄다리기 한 판. 줄다리기는 그 내재되어 있는 사고 외에도 겨우내 침체되었던 몸을 줄다리기를 하면서 기운을 써 몸을 푸는 효과도 가져오는 전승놀이이다. 그렇게 마음껏 소리치고 힘을 쓰면서 일 년의 안과태평을 빌었으니 마을이 편안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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