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소재한 사적 제150호인 미륵사지. 뒤편으로는 미륵산이 자리하고, 그 남쪽 기슭에 자리한 백제시대의 절터이다. 『삼국유사』권2 무왕조에 따르면, 백제 무왕(600~641)이 왕비와 함께 사자사(현 익산시 금마면 신용리 소재 사자암)로 향하고 있을 때, 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무왕과 함께 거동을 하던 왕비가 이곳에 절을 세우기를 간청하자, 무왕은 못을 메우고 탑과 법상, 미륵삼회전, 낭무 등의 전각을 건립하고 ‘미륵사’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미륵사가 언제 사라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7세기경에 이미 폐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백제의 멸망이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이었다고 보면, 그 당시 전쟁 통에 이미 사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 개의 화려한 탑이 서 있던 미륵사

현재 미륵사지에는 반쯤 파손되어 있는 국보 제11호인 서탑을 해체 복원중이다. 1980년대에 문화재연구소에서 실시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의 결과로는, 동탑과 서탑 사이에 목탑을 세워서 일직선상에 탑 3개를 배열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2011년 1월 25일 찾아간 미륵사지에는 날이 추운 탓인지,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아직도 눈이 많이 쌓여 있는 미륵사지에는, 찬바람만이 스산하게 불어댄다.

해체를 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국보인 미륵사지 서탑은 아직도 해체된 그대로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건너편에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원 9층 석탑으로 발길을 돌린다. 장중한 모습으로 복원이 된 동탑은 몇 개의 돌만이 당시의 석재이다. 1974년 동원 탑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기단의 형태 및 발굴 유물 등으로 보아 이 동원 탑지에도 서탑과 같은 백제시대의 석탑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복원된 미륵사지 동원 9층 석탑은 백제 때의 기단석재 등을 사용하였다

복원된 동탑의 아름다움

동원 9층 석탑은 동탑지에 1991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1992년에 복원을 완성하였다. 이 9층 석탑의 복원에 따른 고증자료는 서탑과 동원 동탑의 기단부 및, 1980년 이후 동탑지 부근에서 발굴조사 때 발굴된 노반석 등을 비롯한 탑의 석재를 이용하였다. 현재 이 동원 9층 석탑의 기단부에는 발굴 당시 발견이 된 석재 일부가 사용이 되었다.

이중 기단위로는 높은 1층 탑신이 서 있다. 1층 탑신은 사방에 계단을 놓았으며, 계단 위에는 철문이 있다. 이 문을 통해 탑신 안으로 들어서면, 十 자 모양으로 통로가 사방으로 나 있다. 하지만 이층부터는 위가 막혀있다. 9층 석탑과 상륜부까지의 총 높이는 27.8m나 되는 거대한 탑이다.



일층 탑신 안에는 사방으로 통로가 나 있다

금이 가고 있는 복원된 탑, 방치하면 안 돼

이 동원 9층 석탑을 재현하는 데는 익산 황등에서 캐낸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총 2,000여개의 석재는, 그 무게만도 2,700여 톤이나 되는 양이다. 이 탑을 복원하는 데는 백제시대의 기단석과 탑신석 35개가 사용이 되었다. 탑의 지붕돌인 옥개석과 상륜부에 달린 풍탁은 동탑지에서 발견이 된, 백제시대의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이다.


금이 가고 있는 미륵사지 동원 9층 석탑

동원 9층 석탑을 한 바퀴 돌아본다. 탑 안까지 살피고 난 후 밖으로 나왔다. 건너편에는 서탑을 복원하느라 커다란 구조물을 세워놓았는데, 밖으로 나와 9층 석탑으로 바라보니 무엇인가 이상하다. 일층 탑신석 철문 위쪽에 금이 가 있다. 그러고 보니 그 위에도 금이 보인다. 문 위 석재에 금은 그 끝이 약간 어긋나 보일 정도이다.

1992년에 복원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복원된 지가 20년째다. 익산 황등 화강암은 단단하기로는 전국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그런 석재가 금이 가고 있다니. 괜한 걱정이 앞선다. 요즈음 광화문 현판을 비롯한 문화재 복원의 문제점이 야기되고 있는데. 이곳도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더 이상 금이 가는 것을 방치하면 안 될 것 같다. 아무리 복원이 된 탑이라고 하지만, 그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쓰기 싫은 글은 ‘문화재가 훼손이 되었다’ 혹은 ‘복원이 잘못 되었다’라는 글 등이다. 나는 그냥 우리 문화재가 소중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한 사람의 여행자일 뿐이다. 그런데 전국을 발품을 팔며 다니는 것도 힘이 버거운데, 문화재의 잘못된 모습이라도 보게 되면 자연 열이 뻗칠 수밖에 없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문화재가 많기로 유명하다. 거기다가 내가 좋아하는 고택과 정자가 많은 곳이니, 들려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는 한옥마을이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니, 그 역사 또한 만만찮다. 잘만 관리를 했다고 하면, 전국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을 그러한 마을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솟을대문의 안쪽

하동정씨 고가의 아름다움

지곡마을이라고 하는 개평리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옷 안에 감추고라도 답사를 다닐 수밖에. 이 마을에는 경남 문화재자료 제361호로 지정이 된 하동정씨 고가가 있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너른 정원이 눈길을 끈다. 보기에도 아름다운 집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넓게 펼쳐진 정원에 나무 몇 그루가 운치 있게 서 있다.

뒤편에 멀찍이 서 있는 - 자형의 고택이 바로 이 집의 안채이다. 1880년에 지은 이집은 사대부가의 저택답게 사랑채를 비롯한 여러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이 안채만 남아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한 이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 자형으로, 남도의 특징인 개방형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지만 한편에 부섭지붕을 달아 멋을 더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팔작지붕으로 오해를 살만도 하다.



- 자형의 6칸 안채와 벽에 달아낸 부섭지붕(가운데), 그리고 부섭지붕 아래 툇마루(아래) 


부섭지붕은 서까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을 말한다. 대개 부섭지붕은 측면에 놓고 그 밑을 좁은 마루를 놓는다. 하지만 이 부섭지붕을 달아 전체적인 집의 모양새를 아름답게 꾸민다. 지곡마을에는 이 부섭지붕을 단 집들이 보인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정갈하게 정리가 된 집이다. 툇돌 아래에는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에 땅이 패지 않도록, 기와로 마감을 한 것이 정겨워 보인다. 시원한 두 칸 대청은 뒷문이 열려 돌담이 보이는 것이 운치가 있다. 집은 좌측에 건넌방을 두고 두 칸 대청을 내었다. 그리고 두 칸 방과 한 칸 부엌이 있다. 간결하게 꾸며진 집이 선비의 단아함을 보는 듯하다.



대청 뒷벽에 시원하게 낸 문과 툇돌아래 낙수가 떨어지는 곳(가운데) 그리고 안방의 외벽(아래)

뒤로 돌아가 본다. 안방의 벽이 남다르다. 기둥을 여러 겹으로 가로 질러, 그것이 그대로 문양이 되었다. 어떻게 집을 지을 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동편 부섭지붕 밑으로는 마루를 놓아 시원하게 바람을 쏘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또한 남부지역의 특징 있는 가옥구조이다.

반대편 서편 벽에도 부섭지붕이 달려있다. 그런데 무엇인가 조금은 어색해 보이기까지 한다. 벽 위로 까치구멍이 있는데, 안을 모두 발라놓았다. 사람이 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까치구멍을 막아놓았을까?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을 보일러실로 개조를 하였다. 그리고 안에는 부엌의 벽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부섭지붕은 후에 달아낸 것일까?



세상에 이럴 수가. 부엌문 안을 벽으로 발라버렸다.
그리고 부엌 밖 부섭지붕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부엌문을 열어본다. 이게 무슨 일인가? 부엌문 안에 담이 있고, 위는 창으로 막혀있다. 그렇다면 이 부엌은 어떻게 출입을 할 수 있을까? 방 앞으로 난 툇마루 끝에 달린 문으로 출입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엌문의 안이 벽으로 막혀있다니. 말이 안 나온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집을 고친지가 얼마되지 않은 듯한데, 이렇게 된 곳이 있다면 제대로 해 놓아야 하지 않았을까?

어이가 없어 정말로 울고 싶은 심정이다. 어째 이런 일이 있을까? 온몸에 힘이 다 빠진다. 돌아서 나오려는데 솟을대문 안에 새로 지은 집이 있다. 뒤편을 보니 굴뚝이 이상하다. 이건 또 무슨 굴뚝일까? 굴뚝이야 마음대로 형태를 할 수 있으니, ‘이렇게도 하나보다’라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우진각지붕을 올린 세 칸짜리 집 한 채. 이 자리에 서 있어야 했을까? 집안의 전체적인 분위기로 보아도 사랑채가 있을 장소는 아닌 듯하다.


솟을대문 안 우측에 새로지은 우진각 지붕의 집. 사랑채인 듯하다. 뒤편의 굴뚝

문화재의 복원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제 모습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아름다운 고가가 이렇게 여기저기 제 모습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어떻게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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