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건조물을 지으면, 그곳에는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집안에 있는 가신만 해도 상당하다. 우선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수문장신이 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면 우물에는 용왕신이 있고, 마구간에는 우마대신이 자리한다. 부엌으로 들어가면 조왕신이 있고, 물독에는 용궁각시가 있다고 한다.

 

대청에는 성주신이 있으며, 안방으로 들어가면 삼신할미가 자리한다. 시렁위에는 조상신이 좌정하고, 안방의 벽에는 삼불제석이, 집 뒤편으로 돌아가면 굴뚝에는 굴대장군이 있으며, 장독대에는 터주신이 자리한다. 이렇게 집안에만도 수많은 가신(家神)이 존재한다. 이러한 것은 다 집안을 평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으며, 이 신들은 사로 상응하면서 집안사람들을 도와준다는 것이다.

 

 

 

화성에도 신이 있다.

 

가정에도 그 많은 신이 있는데, 화성이라는 거대한 조형물을 축성했는데 어찌 신이 없을 것인가? 화성에도 당연히 성을 지키는 신이 있다. 바로 서장대를 오르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성신사(城神祠)’에 모셔놓은 ‘화성의 신’이다. 성신사라는 명칭은 ‘성의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란 뜻이다.

 

화성을 지키는 신을 모신 사당인 성신사는, 화성의 축성이 완료될 때쯤에 정조의 특별지시에 의해서 축조가 되었다. 성신사는 정조 20년인 1796년에 정조는 7월 11일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약 한 달 만에 완공이 되었다. 정조는 성신사의 설치 후, ‘우리고장을 바다처럼 평안하고 강물처럼 맑게 하소서.’라는 축문을 내리기까지 헸다.

 

사당의 조성이 완공된 후 화성 성신의 위패를 만들고, 1796년 9월 19일에 길일을 잡아 위폐를 사당 안 정면에 봉안하였다. 성신사의 제사는 매년 봄, 가을이 시작되는 초하룻날인 행삭에 지내도록 하였다.

 

 

 

가을 빛 아름다운 성신사에 오르다

 

성신사는 일제 강점기에 훼파되었던 것을, 화성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008년 4월에 복원공사를 시작하였다. 이 성신사를 복원하기 위한 비용은 중소기업은행에서 수원시에 12억 원을 기탁하여, 2009년 10월에 중건을 마쳤다. 복원된 성신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으며, 사당 앞에는 솟을삼문을 짓고 문 좌우로는 5칸의 행각을 연결하였다.

 

10월 26일, 신풍루 앞에 서서 팔달산을 바라다본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양편의 보호수가 일몰시간이 가까워서인가, 오히려 더 분위기를 자아낸다. 화성 행궁 옆 주차장을 벗어나 천천히 팔달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물이 들어 떨어지기 시작한 단풍들이 발밑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정겹다.

 

일부러 차도를 버리고 비탈길을 오르는 것도, 깊어가는 가을을 발밑으로 느끼고 싶어서이다. 길을 벗어나면 좌측으로 성신사가 보인다. 아마도 일제는 화성의 아름다움을 어지간히 시기를 했는가보다. 많은 화성의 구조물들을 훼파한 것을 보면. 성신사의 솟을삼문을 들어서 정당 앞으로 가 고개를 숙인다.

 

 

 

성신사 주변을 돌아본다. 뒤편의 담벼락은 전돌을 사용한 심벽으로 조성을 하였다. 그 한편에는 제향에서 사용한 우물인 듯 육각형으로 조성한 우물이 있다. 그 우물 속에 단풍이 물들어가는 팔달산이 담겨있다.

 

오랫동안 이곳에서는 제향이 중단되어 있었는데, 내년에는 날이라도 잡아 화성의 성신을 위하는 ‘성신굿’이라도 한 번 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화성의 사라졌던 구조물이 하나하나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언젠가는 화성이 완전한 제 모습을 갖추게 될 텐데. 그때까지 화성을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봉돈에서 남수문까지의 거리는 440m에 불과하다. 화성 겉돌기의 아홉 번째 구간으로 정한 이 곳에는 동이포루와 동삼치, 그리고 성벽 안으로 떨어져 지은 동남각루와 급격한 경사면 밑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천의 남수문이 자리하고 있다. 남수문은 올해 6월 9일 90년 만에 복원이 되었다.

 

화성 축성 당시 축조를 하였던 남수문은 1842년과 1922년의 대홍수로 인해, 두 차례나 유실이 되었다. 일제 때에는 그나마 남은 것을 철거시켜 터만 남아있던 것인데,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면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거쳐, 어떠한 비에도 무너지지 않는 최신공법을 이용해 복원을 하였다.

 

 

 

밖으로 돌아보는 축성의 극치

 

이 화성 겉돌기의 아홉 번째 구간인 봉돈에서 남수문까지의 길은, 사실 화성의 외벽을 돌아보면서 만나는 가장 아름다운 곳이란 생각이다. 이곳까지 화성의 겉모습이 다양하게 변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벌써 이 구간을 답사한 날짜가 꽤 오래되었다. 그동안 화성이 변한 것이야 아니겠지만, 이렇게 뒤늦은 답사기를 쓴다는 것은 사실 답사의 감이 떨어진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비록 답사를 한 날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그 뒤로도 이 구간을 몇 번인가 지났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답사를 한 것은 화성문화제 기간인 10월 7일이었으니, 그 때의 시각으로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화성 외벽으로 답사하다가 보면, 꽤 많은 관광객들이 함께 성 밖 길을 걷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구간을 특히 많은 관광객들이 돌아보게 되는 것은, 남수문과 팔달문 인근에 재래시장이 몰려있어, 시장구경을 마치거나, 지동시장 순대타운에 들렸던 사람들이 성을 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곳은 지형의 격차가 크고, 더구나 화성에 두 개의 수문 중 한 곳인 남수문이 있어 사람들이 외부로 관람을 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동이포루와 동삼치를 지나다

 

포루는 초소나 군사대기소와 같은 시설로 군사들이 휴식을 취할 수도 있는 구조물이다. 동이포루는 봉돈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며, 치 위에 세웠다. 정조 20년인 1796년 7월 3일에 완성을 한 동이포루는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판문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 밖에서 보는 동이포루 위에는 사람들이 쉬고 있는 듯, 왁자하니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밑에서 올려다본 동이포루의 날렵한 지붕이, 지금이라도 당장 날아오를 듯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모습이다. 성벽 위에 지은 전각 하나하나가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곳, 그것이 바로 화성 외곽을 돌아보는 즐거움이다.

 

 

 

그동안 오랜 세월을 지난 듯, 돌보다 색이 다르게 변한 동삼치로 향하다가 보면, 그 성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깊다. 이 돌들은 200여 년 전 화성 축성당시, 팔달산, 여기산, 숙지산, 궐동 등에서 날라 온 것들일 것이다. 200년 세월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남다르다.

 

동남각루와 남수문의 조화

 

동삼치를 지나 조금 더 걷다가 보면 갑자기 성벽이 변한다. 그 위를 보면 지붕 끝만 삐죽이 얼굴을 내민 동남각루가 있다. 이곳은 평지를 이루고 있던 성벽이 갑자기 이래로 곤두박질을 한다. 성벽을 둥글게 감아 들이고 아래로 층층이 여장을 놓은 곳, 그 아래 남수문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각루는 중간 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동남각루는 높은 곳에 남공심돈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남수문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 중 한 곳이다. 각루는 비교적 높은 곳에 설치를 하였으며 주변을 잘 감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병사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한데, 예전 이 동남각루에 쉬고 있던 장용영의 병사들은, 그 밑으로 펼쳐지는 장시의 떠들썩한 소리와 함께 했을 것이다.

 

 

밑으로 고꾸라지듯 떨어져 내리는 성벽. 그리고 그 밑으로 서 있는 남수문. 아마도 지금은 사라진 남공심돈 등을 함께 조망을 할 수 있었다면, 그 어느 곳에 뒤지지 않는 화성의 아름다운 곳 중 한곳이 아니었을지.

 

아홉 번째 그간을 걸으면서 또 다시 느끼는 것은, 역시 화성은 겉돌기를 할 만한 성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어제 하루 비가 왔다고는 하지만, 8월 13일은 아직 여름이다. 한 낮의 수은주가 31도를 넘었다. 이런 날 점심을 먹고 나면 괜히 나른해진다. 그런 나른한 마음을 바로잡는 데는 땀을 한 번 흘리는 것이 제일이란 생각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만석공원으로 달려갔다. 땀 한번 쏟아보자고.

 

만석거는 일왕저수지, 교구정 방죽, 북지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가뭄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정조 19년인 1795년 이 만석거를 축조하였다. 이 만석거로 인해 황폐했던 땅에서 쌀 만석을 더 생산하였다고 하여, 그 명칭을 ‘만석거’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이 만석거 일대는 현재 ‘만석공원’으로 조성하여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위치한다.

 

 

만석거를 바라보는 정자 영화정

 

저수지 조성 후 쌀 만석을 더 생산했다고 해서 ‘만석거’라는 명칭을 붙인 이 저수지를 일제는 ‘일왕저수지’로 개명을 했다. 1920년대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한다는 이유로, 우리고유의 지명을 말살시키려는 음모였다. 그렇게 생겨난 명칭이 바로 일왕저수지이다. 그러나 이곳을 아직도 그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일제의 잔재가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 만석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가 있다. 지금은 ‘영화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이 영화정의 원래 이름은 ‘교귀정’이었다. 이 교귀정은 시구관의 부사와 유수들이 거북이 모양의 관인을 주고받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원래 교귀정은 사라지고 만석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교귀정 자리에서 200m 정도 동북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영화정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원래는 8칸 정도의 정자이며 북쪽으로 난 날개채 2칸은 온돌이고, 남쪽으로 난 세로로 두 칸은 포판인데, 3면과 온돌 뒤쪽은 모두 퇴를 반 칸씩 달아내 하엽난간을 두르고 있다고 하였다. 정자 서쪽에는 대문을 내고, 남쪽으로는 작은 문을 냈는데 둘레는 네모꼴 단장이라고 소개를 한다. 1796년 병진년 행차시에 영화정이란 편액을 달도록 했다는 것이다.

 

복원한 영화정, 만석거를 바라볼 수 있도록 담장을 낮춰

 

현재의 영화정은 1996년 10월에 신축, 복원한 건물이다. 영화정의 형태는 화성성역의궤에 기록이 되어있어 그 모습을 따랐을 것이다. 더운 날 찾아간 영화정. 한 옆으로는 하늘 높게 자란 소나무들이 서 있고, 앞 만석거에는 연잎들이 파란색을 띠고 있어 더위에 지친 마음들을 달래주고 있다.

 

 

 

전국의 정자를 답사하면서 느끼는 것은, 역시 그 정자의 누마루에 앉아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야 과거에 그 정자에 앉아있던 선인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정을 돌아보면서, 참으로 어이가 없다. 대문이고 작은문이고, 건물 안에 방문이고 모두가 다 꽁꽁 잠겨있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가, 누마루에 앉아 저수지쪽으로 낮게 조성을 한 담장너머로 보이는 만석거를 바라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가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가끔 이런 건물이나 정자들을 만나면 울화가 치민다. 관리를 하기 싫어서 이런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정자들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라가 경치를 즐기고는 한다. 가까운 곳에 있는 수원 화성의 아름다운 정자 ‘방화수류정’ 역시 보물이다. 화성의 많은 전각들도 사람들이 자유롭게 올라가 쉬기도 한다.

 

그런데도 아직 그런 곳에서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없다. 그저 잠가놓고 사방에 감시 센서를 세워놓으면 관리가 제대로 되는지 아는가 보다. 이런 사고는 참 모자람의 극치란 생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는 이런 처사, 하루 속히 그런 사고가 바뀌기를 고대한다.

 

 

 

문화재란 사람들이 직접 그곳을 느끼고 더 감사를 할 때 제대로 된 보존이 이루어진다. 문마다 잠가놓고 정작 울안에 수북이 자라고 있는 풀조차 정리가 되지 않은 영화정.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만석공원에 볼만한 전각 하나가, 잠가놓는 것이 능사라는 생각으로 서 있는 모습이 참으로 안쓰럽다는 생각이다.

99칸의 대갓집. 그러나 후손들이 관리를 하기가 어렵다고 신흥재벌에게 사랑채와 행랑채를 팔았다고 한다. 원래는 99칸의 커다란 대갓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은 집으로만 보아도 그 규모를 어림잡아 짐작할 수가 있다. 도대체 이 집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내촌리 222-14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2호 '김좌근 고택'을 찾아갔다.


이 김좌근 고택은 벌써 올들어 두번이나 찾아가보았다. 갈 때마다 복원 공사중이라 들어갈 수가 없었다. 7월 23일 그 무더운 더위를 피해 찾아간 백사면 내촌리. 아직 주변은 정리가 끝나지 않았지만, 반듯하게 복원이 끝나가는 집은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가 있다.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해 지은집


김좌근 고택은 이천 백사면 내촌리 소일마을 상단인 마을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뒤로는 얕은 산자락을 배산으로 남향으로 지어진 이 집은, 전통 한옥으로 지은 99칸의 집이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집의 치목이나 석재를 사용한 것을 보아도, 이 집의 과거 위세를 알 수가 있을 정도이다. 지금은 담장과 행랑채는 사라지고 안채와 별채인 사랑채만 남아있다.


이 집은 영의정 김좌근의 아들이며 고종 때 어영대장과 이조판서를 지낸 김병기가  부친의 묘지관리를 위한 별장으로 지었다고 한다.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솟을대문과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남아있었다는 김좌근 고택은 사랑채와 행랑채가 두 겹으로 안채를 싸안고 있는 규모있는 대갓집의 모습을 지켜왔다고 한다. 그런 집이 지금은 사랑채와 안채만이 남아있다.

 






관리가 힘들어 팔아버린 집


집이 워낙  크고 관리가 힘들어지자, 후손들이 신흥재벌하게 이 집을 팔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랑채 등을 옮겨가는 도중에 그 회사가 부도가 나서, 그나마 이건을 중단하는 바람에 지금의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전한다. 우리의 많은 고택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원래 김좌근 고택은 대문과 중문을 지나 안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구조가 되었다. 안채는 ㄷ자 형으로 중문과 연결된 사랑채가 있었으며, 바깥문은 대문과 연결된 행랑채가 ㄱ 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안채와 별채인 사랑채가 안채로 통하는 중문과 안채의 담으로 가로막혀 두 동의 건물이 서로 독립된 형태로 서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두 개의 건물 사이에도 가로막힌 건물이 있었으며, 뒤편으로는 널마루로 짠 회랑을 달아내어 서로 왕래를 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회라잉 없어졌으나, 과거에는 이 회랑을 이용해 발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이동을 할 수 있는 동선이 있었다는 것이다.


'닥터 진'의 김병기가 지은 집, 옛 풍취는 그대로 남아


복원 공사를 마친 집을 돌아본다. 사랑채의 한편을 잘 다듬은 장초석으로 주초를 삼고, 그 위에 누마루를 올려 누정을 삼았다. 집은 날아갈 듯한 팔작지붕으로 마련하고, 치목과 치석이 모두 제대로 된 장인의 솜씨를 마련한 듯하다.

 





꽃담을 아름답게 조성한 안채는 지금 난 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가 있다. 아직은 주변 정리가 끝나지 않아 잡초가 수북히 쌓여있기는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중문에 붙여 방을 드렸다. T 자 형으로 조성한 안채는 툇마루를 길게 놓았다. 이 안채가 특이한 것은 중문을 통해서 들어가는 곳이 앞쪽이지만, 그 뒤편의 형태도 똑 같이 조성을 했다는 것이다.


안채는 서쪽으로 부터 다락과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이다. 부엌은 세칸 규모로 문을 들어서면 토를 달아 내었다. 그 오른쪽에도 다락을 드렸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만 보아도 당시 이 집의 위세를 알만하다. 일부가 사라져버려 제대로 가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제대로 모습을 갖추었다면 그 어느 집보다 뒤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김좌근 고택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럽게 세상을 배운다. 요즈음 드라마 '닥터 진'에서 보이는 김씨들의 세도가 세월이 지나면서 달라졌음을. 하기에 영원한 세도는 없는 것인가 보다. 하긴 닥터진에서 대원군과 권력다툼을 하는 좌의정 김병기의 구성은 역사와는 많이 다르게 표현이 되었지만 말이다. 

하루 만에 3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진 수원지역은, 곳곳에 침수피해를 입기도 했다. 화성의 멸실된 구간을 복원한 남수문은 이런 비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7월 6일 오후 찾아간 복원된 남수문 구간은, 여기저기 비에 이겨내지 못하고 흉물로 변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수원천의 상류인 광교저수지의 물은 6일 0시를 기해 방류를 중단했지만, 정작 수원천에는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만큼 많은 비가 내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런 비에는 시간이 지나 굳어지지 않은 곳은 당연히 파이게 마련이다. 공사를 할 때는 그런 것도 염두에 두고 했어야 옳다는 생각이다.

 

 

남수문 근처 곳곳에 문제점 발견

 

남수문 성 안쪽에는 돌로 만든 징검다리가 있다. 징검다리 위를 걸어가는 행인이 뒤뚱뒤뚱 불안해 보인다. 낮은 징검다리 위로 물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철 장마 때를 대비해 조금 높게 징검다리를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물길 양편으로 조성한 흙더미는 이미 다 파헤쳐져 남수문 안쪽으로 수북이 쌓여있는 모습도 보인다.

 

물길은 전체를 흐르고 있는데, 단 한 곳뿐인 어도는 그야말로 말로만 어도일 뿐,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어 보인다. 이미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있어서, 어도를 통해 내려가는 물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구간 수문 중에 양편 두 곳은 사람들의 통행로를 만들었다고 해도 남은 칠간 수문에는 어도를 갖추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 한 곳만의 어도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식의 보여주기 위한 어도일 뿐이란 생각이다.

 

날림공사 흔적 역력히

 

공기를 마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집중 호우 등에 대한 대비를 아예 염두에 두질 않은 것인지, 남수문 복원 공사 구간에는 날림공사를 한 흔적이 그대로 들어나 보인다. 벽 밑에 심어 놓은 잔디는 이미 다 파헤쳐져 돌들이 다 들어나 보이는 흉물이 되어버렸고, 그 흙들은 여기저기 쌓여있다.

 

 

사람들의 통행로에도 어디서 밀려온 흙인지 시커먼 흙이 쌓여있다. 이런 것은 하수구에서 쏟아져 내린 듯하다. 아름다운 화성을 생각하면, 남수문 주변은 그야말로 볼썽사나운 꼴로 변해버렸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 그리고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복원한 남수문. 비가 오는데 걱정스럽게 남수문을 내려다보고 있던 시민 조아무개(남, 68세)는 답답하다고 한다.

 

 

“남수문은 두 번이나 홍수에 파손이 된 아픔이 있는 곳입니다. 이번 장마에 또 어떤 변고가 있을까 궁금해 보러왔는데,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홍수에 대비를 해 단단히 지어놓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변 조경공사는 한 마디로 실망스럽습니다. 어떻게 갑자기 내렸다고는 하지만 장마철이 이제 겨우 시작을 했는데 저렇게 망가질 수가 있나요? 국민들이 낸 세금을 이렇게 함부로 사용하는 공사 책임자에게 당연히 책임을 물어야죠.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나와 보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히 이런 현장을 살펴보아야죠.”

 

그러나 이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더 이상 훼손이 되는 것을 막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처음부터 제대로 공사를 했으면, 이런 수고로움은 덜 수 있었을 것을. 아름다운 화성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만 했다는 남수문. 그 복원된 남수문이 하루의 집중호우로 인해 주변이 온통 볼썽사납게 변해버린 모습이 마음이 아프다. 그저 아름다운 남수문으로 영원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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