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성에서 정동으로 길을 잡으면 그 끝은 어디일까? 그 종착지는 바로 추암해수욕장이다. 추암해수욕장은 강원도 동해시 북평동에 있다. 그리고 이 추암해수욕장의 한편에는 해암정이라는 평범한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해암정은 뒤로 동해바다가 넘실거린다. 그러나 그 동해의 넘실거리는 파도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오히려 한가함을 느끼게 만든다.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는 해암정은, 공민왕 10년인 1361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니 벌써 역사가 650년에 이른다.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

 

해암정은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심동로는 이곳에서 시를 짓고 후학들을 키우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다. 그 후 몇 번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역사가 깊은 정자다.

 

해암정은 평범한 정자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크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한편은 방을 두었으며 또 다른 반은 마루를 깔았다. 마루 뒤편에는 동해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무문을 내었다.

 

 

 

아마도 해암정의 뒤편을 돌아보지 않았다면, 이 해암정이야말로 가장 평범한 곳에 자리한 평범한 정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뒤편을 돌아보면서 해암정과 뒤편 동해안의 모습에 깜짝놀란다. 한 마디로 반전의 극치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자 주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심동로는 이 해암정을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지었다. 해암정을 둘러보면 심동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뒤에 솟아 난 기암괴석을 넘지 않는 소탈한 정자다. 그 안에는 심동로의 겸손이 배어 있다. 옛 조상님들은 이렇게 자연을 넘지 않았다. 스스로 자연의 일부분임을 깨닫고, 후대들에게 알려주고자 했다.

 

 

 

해암정을 비켜서 우측으로 오르면 그 유명한 추암이 있다. 흔히 촛대바위라고 하는 추암은 그 모양새가 특이해 절경으로 꼽힌다. 촛대바위는 매년 수만 명이 찾아드는 명소다. 1월 1일에는 일출을 보기 위해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곳에는 산책로를 비롯해 전망대 등이 있다. 요즈음에는 이 추암이 분열이 되고 있다고 하여 보존대책이 시급한 실정이다.

 

추암해수욕장과 촛대바위 그리고 해암정. 이렇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곳은 흔치가 않다. 절경과 정자 그리고 해수욕장 이 세 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동해안의 절경 중에서도 손꼽을 수 있는 곳이다.

 

 

난 이 해암정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해암정을 처음 건립한 심동로의 마음이다. 자연을 넘어서지 않고 자연 안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일깨운다는 것은, 곧 겸손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겸손을 후학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해암정이다. 그래서 해암정은 화려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 그저 다소곳 자연 안에 순응되어 간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학교를 다니면서 한번쯤은 암기를 한 기억들도 있을 남구만의 시 ‘동창이 밝았느냐’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약천 남구만선생은 조선 후기(1629(인조 7)~1711(숙종 37))의 문신이다.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남구만의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운로, 호는 약천 또는 미재로 불렀다.


유배지에서 지은 ‘동창이...’

후일 영의정까지 지낸 남구만은 1684년 남인의 기사환국으로 강원도 강릉(현재 동해시 망상해수욕장 부근에 있는 심곡동으로 약천동이라고도 한다)에 서 1년 정도 유배생활을 하였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약천마을의 농촌 정경을 보고 지은 시조라고하나, 그 이면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짙은 시조라고도 한다.

남구만선생이 이 마을로 유배를 왔을 때 ‘약천(藥泉)’이라는 샘물이 있어 자신의 호를 약천이라 짓고, 마을에 심일서당을 개설하여 마을사람들에게 1년 정도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동창이 밝았느냐’는 바로 이 심일서당에서 지은 시조라고 한다. 심일서당은 200년 넘게 지속되어 오다가, 1900년대 들어 이 고장의 학자 김남용과 여운형 등이 운영을 하였으며, 1927년 명진소년회사건(明進少年會事件)으로 일제에 의하여 폐쇄 당하였다.



‘약천팔경’에 마음이 설레이다.

동해 망상해수욕장으로 가다가보면 망상역 못 미쳐 우측에 <약천문화마을>이란 입간판이 보인다. 길에서 조금 들어가긴 하지만 그 마을에 ‘약천정(藥泉亭)’이란 정자가 있다고 하니 들어갈 수밖에. 안으로 들어가니 마을어구에 마을 유래에 대한 설명을 해 놓았는데 바로 ‘동창이 밝았느냐’라는 시조가 이 마을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약천마을에는 팔경이 있다. 죽전의 맑은 바람, 약천 샘물가의 버드나무, 초구의 목동이 부는 피리소리, 마평 들에서 들리는 농악소리, 노봉에서 보이는 고깃배 불, 한나루에 들어오는 어선의 풍경, 향로봉에 뜨는 아침 해, 승지동의 저녁밥 짓는 연기 등 약천팔경이 있다고 하니 마음이 설렌다.

마을 안에는 이곳저곳 이정표와 안내문이 있어 여기저기 찾기가 쉽다. 정자에 오르기 전 먼저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다. 나름대로 약천팔경의 한부분이라도 느껴보고 싶어서다. 그러나 어디 팔경이라는 것이 잠시 돌아본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인가. 이곳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을 괜히 조바심을 낸 것 같아 오히려 송구스럽다. 마을 한복판에는 누각이 있다. 이정표를 따라 마을 진입로 우측에 자리한 송림 안에 위치한 약천정을 찾는다.



솔바람소리의 풍취가 좋은 약천정

‘약천정(藥泉亭)’.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노송 사이에 한낮의 햇볕이 따사로웠는지, 인적 없는 약천정은 그렇게 졸듯 고요함 속에 있다가 나그네를 반기는듯하다. 약천정 뒤로 몇 그루 오죽(烏竹)이 있어 바람에 흔들리고, 정자 안에는 떨어진 솔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이 오히려 정겹다.

돌길로 깨끗하게 잘 정돈이 된 오르는 계단만큼이나 약천정도 그렇게 다소곳이 마을 동산 노송 숲속에 자리를 하고 있다. 노송에서 이따금 떨어지는 솔잎과 ‘툭’하고 소리를 내는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이 모든 것이 약천 남구만선생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아니었을까? 아마 옛 선인들이 정자와 누각을 짓고 그 곳에 올라 시를 읊으며 한세상을 산 것도 이런 풍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약천정을 뒤로하고 마을길로 내려오면 마을안쪽에 그 유명한 약천(藥泉)이 있다. 샘이라고 하여서 조금씩 솟아나는 물을 생각하다가 정작 물소리를 내며 물줄기를 내뿜는 약천을 보니 조금은 의아스럽다. 대리석으로 잘 정돈이 된 약천은 옛날 남쪽의 어느 선비가 몸에 병을 얻어 각처에 돌아다니며 물 좋은 곳을 찾다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몸이 다 나았으며, 후일 조정에 나아가 큰 벼슬을 하였다하여 약천이라고 했단다.

약천사 앞에는 커다란 돌에 동창이 밝았느냐를 적은 시조비가 서 있다. 이 약천사는 남구만 선생이 귀향생활을 하는 동안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아 오다가, 조정의 부름을 받아 떠난 후 약천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


약천정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한쪽만 터놓고 돌담을 쌓은 곳이 있다. 앞에 금줄이 서려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에서 제를 지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약천정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에 마을 주민에게 물으니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제장이란다. 매년 음력 11월에 길일을 택해 당산제를 지낸다고 하니 그때 다시 한 번 이 마을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다.

약천마을은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한 문인 약천 남구만선생의 시조 한편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리고 송림 사이에서 단아한 자태를 지니고 말없이 나그네를 맞는 약천정도 오늘 그 모습 그대로 긴 세월 또 다른 발길을 맞이할 것이다.


며칠 간 속초를 다녀왔습니다. 피로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그저 아무 생각없이 소나무 숲길도 걷고, 바닷바람도 쏘여가면서. 그제(11월 14일) 오후 4시가 넘어 바닷길로 나갔습니다.

바람이 부는 날이라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을 보기 위해. 속초 외옹치와 영금정 일대를 돌아보면, 파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파도가 치면 영금정엔 폭포가 생긴다.

속초 영금정을 가 보신분들은 한 번 정도는 보았을 장면입니다. 바로 영금정 앞에 놓인 바위를 타고넘는 파도들이 마치 폭포처럼 바위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을. 난 늘 그것을 '영금정 폭포'라고 말을 합니다. 각양각색으로 폭포를 만들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내는 파도. 이런 다른 아름다움을 즐긴다는 것 역시 동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들입니다.






아무 때나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기에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면 달려가는 곳 영금정. 14일엔 파도가 그리 높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속초시 동명동에 소재한 보광사는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산사의 느낌을 받는 곳이다. 앞으로 20m 정도를 나가면 영랑호와 닿고, 주변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자리하고 있다. 시내 중심가까지도 걸어서 15분 정도면 나갈 수 있는 곳에 위치하면서도, 산사의 분위기를 맞볼 수 있기도 하다.

이 절은 예전 원효스님이 도를 닦던 자리라고도 전해지며, 골짜기 이름을 불당골이라도 한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오르면 커다란 바위에 '관음'이라고 각자를 해 놓았으며, 이 관음바위 위에서 '영랑스님'이 동해와 금강산을 바라보고 공부에 전념을 했다고도 한다.



소나무 숲길, 정말 명품이야

보광사 경내를 벗어나면 소나무 숲길이다. 천천히 뒷짐을 지고 숲길로 접어들면 온갖 산의 내음이 코를 간질인다. 길 밖으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는 소나무 뿌리들을 보아서도 이 숲이 어제오늘 조성된 숲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길도 그리 가파르지 않아 천천히 걸어오르면, 어린 아이들도 따라 걸을 수 있을 정도의 길이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 산책을 즐기고는 한다.

산이라고 해도 그저 작은 소나무 동산 정도이다. 그 위로 오르면 바위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 바위 옆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어르신들과 눈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한편으로 가면 커다란 바위가 자리한다. 이 바위가 바로 영랑스님이 날마다 공부에 정진하던 '관음바위'라는 것이다. 밑으로 내려가면 바위에 커다랗게 '관음'이라는 글자를 각자해 놓았다.




이렇게 좋은 바위에 마애불 하나 있었다면 정말 제격이었을 것이다. 동해에 뜨는 해를 바라다보는 마애불의 자비스런 모습. 상상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이 바위를 볼 때마다 나는 저 각자가 마애관음이란 생각을 한다. 아마도 마애불을 그리고 싶은 어느 사람이 그럴 수 없어 대신 글자를 새긴 것이나 아닌지.



콧소리가 절로 나오는 소나무 길

바위 한편에는 누군가 일부러 파 놓은 듯한 자국이 보인다. 저 밑에 혹 삼존불이라도 모셔 두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관음바위 위에 오르면 펼쳐지는 동해와 설악산, 그리고 금강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밑으로는 영랑호의 푸른 물이 소나무 사이로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다.

다시 관음바위를 떠나 봉우리 위의 바위 밑을 통과한다. 흡사 석문과 같은 바위돌이 서로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세상사 저리 의지를 하고 믿고 살면 참 좋으련만. 한 20년 전에는 이 바위 아래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시끄럽게 징을 두드려대고는 했다.




영랑호가 보이는 길로 접어든다. 몇 사람이 바삐 걸어 지나친다.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일까? 이 명품길이라는 소나무 숲길. 그리고 앞으로 펼쳐지는 자연경관. 이런 것을 어찌 그리 즐길 줄을 모르는 것인지. 그저 마음 바쁜 버릇은 어딜가나 볼 수가 있다. 괜히 나 혼자만 할일 없는 사람인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월을 붙잡을 수 없으면, 세월을 타고가면 될 것을, 무엇을 그리 앞서려고 하는지.



그 길 끝에는 소나무 줄기에 흰 표식을 해놓았다. 숫자를 보니 1부터 10까지가 있다. 짧은 거리를 도는 곳이니, 이렇게 표시를 해놓고 한 바퀴를 돌 때마다 하나씩 옮기는 것인가 보다. 괜히 몇 개를 한 편으로 밀어본다. 바쁠 것도 없고, 굳이 다시 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곳 나무 틈사이로 보이는 동해와 영랑호를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긴다. 까지 한 마리 소나무 가지에 앉아 시끄럽게 짖어댄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