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그녀의 목소리가 길거리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면 길을 가던 사람들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에 젖어들었다. 눈을 감고 노래를 들으면 마치 어느 시골의 밀밭에 부쩍 자란 밀들이 바람에 날리는 그런 목가적인 풍경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1980년대 당시 20세의 어린 소녀 허인순은 뭇 사람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는 그런 노래를 하는 가수였다.

 

밀밭 길 울타리 사이로

조그만 오솔길 있네.

지금은 내 곁을 떠나간

너와의 사랑의 자리

 

그 길은 우리들의 이야기가

알알이 새겨진 길

그 길은 너와 나의 추억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길

 

 

안언자 작사 김현우 작곡의 밀밭 길 추억1980MBC 라디오 드라마 <김자옥의 사랑의 계절> 주제가였다. 허인순은 이 노래로 당시 대한민국 1세대 포크 가수 은희와 최안순으로 시작된 한국 여성 포크 사의 새로운 장을 펼쳐나갈 가수로 평가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음반 15만 장 판매라는 경이적인 기록과 함께, 최다 방송 출연과 신인가수 후보에 오르는 등 당시 한국 가요계의 혜성 같은 존재였다.

 

돌연 은퇴를 한 가수 허인순,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런 차세대 가수로 각광을 받던 그녀가 돌연 은퇴를 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그녀의 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35년 만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3일 오후 수원 팔달문 앞 영동시장 2층 한 카페에서 만난 가수 허인순. 마침 화성 동남각루 아래 가을을 알리는 억새가 바람에 날리던 날 그녀를 만났다.

 

 

당시 개인적인 어려움도 있었고, 결혼도 하고요. 하지만 노래를 그만 둔 것은 아니었어요. 광주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노래자랑 등에 심사를 하기도 했고요. 부산으로 가서 학원을 차리고 사람들에게 음치교정 등과 노래를 학습시키며 살았어요. 늘 가슴 한편에 열망하는 것이 있었지만, 무대에 선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 않았어요.”

 

광주와 부산 등 지방에서 생활을 하면서 주부 노래지도와 방송출연, 정신요양원 등 위문공연을 끊임없이 이어갔지만, 더는 음반 발표도 무대에 서지도 않았다고. 그녀는 무대에 서기보다는 불우한 이웃과 함께하는 봉사에서 노래하는 보람을 삼았다고 한다.

 

가수 허인순. 35년 만에 다시 무대로 돌아 온 그녀는 이미 55세의 중년이 되어있었다. 한 때 수원 지동에서 서울로 다니면서 노래공부를 했다고 하는 그녀는, 가을빛이 물든 화성의 성벽을 따라 걸으며 옛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노래교실의 시범 노래강사

 

3 때인 197610, 그녀는 YWCA와 지구 레코드 공사 공동주최 신인 가요제에서 잊으리를 불러 대상수상을 하고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1978년 지구레코드사에서 김수호 작사곡 1믿을래요를 출반하고, 연이어 1979 오아시스레코드사에 픽업 된 뒤 신대성 작사곡의 보고 싶을까2집을 발표했다. 비록 무대는 떠났지만 노래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지방에서 노래를 계속하던 그녀는 노래교실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부산에 있을 때 주민센터 등에 노래교실을 운영한다면서 저에게 6개월을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라고 했어요. 반응이 좋으면 전국으로 확산시키겠다고요. 그런데 2개월 만에 많은 사람들이 노래교실로 모여들게 되었고, 그 다음에 각 지자체마다 노래교실을 운영하게 되었죠.”

 

 

차도녀로 돌아온 가수 허인순

 

4차도녀(차가운 도시 여자)’라는 박철현 작사, 김현우 작곡의 노래로 우리 곁으로 35년 만에 돌아온 가수 허인순. 7080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은 만나고 싶어 하던 그 목소리를 다시 들려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진해군항제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몇 번을 청을 했지만 사양을 했는데, 너무 그러는 것도 예의라 아니란 생각이 들어 무대에 올랐어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끼가 발동을 한 것이죠. 어차피 무대에 올랐으니 이젠 무대에서 다시 노래를 부르자고 작정을 했어요.”

 

35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가수 허인순. 대담을 끝내고 돌아서면서 그녀가 건네준 음반속의 목소리는 35년 전과 다름없는 맑은 목소리였다. 다만 숱한 세월을 지나면서 더 농익은 소리로 변했을 뿐이다.

 

수원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모임인 모아(MOA)’라는 결혼이민자들의 모임이 있다. 이들 모임에는 중국을 비롯해. 일본, 필리핀, 우즈베키스탄, 몽골 등 각국에서 우리나라로 결혼이민을 한 사람들 4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이들은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이사장 김용국)의 회원이기도 하다.

 

22일 오후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 사무실에서 만난 박경희 회장은 3년 째 모아의 회장을 맡고 있다. 벌써 한국과 인연을 맺은 지 20년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중국 북경에서 태어난 박경희 회장은 할아버지 때 중국으로 건너간 조선족 3세이다. 북경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살고 있던 박경희 회장이 한국으로 나온 것은 1995.

 

당시에 중국에 들어와 있는 한국영사관에서 한국어 교육을 시키기 위해 학생들을 선정 해 한국으로 보냈어요. 저도 그 때 들어 와 서울시립대 학생으로 공부를 한 것이죠.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 상당히 어려움을 겪기도 했어요.”

 

 

2001년에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생활을 하던 박경희 회장은 2001년에 한국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남편을 따라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중국에서 컴퓨터 관련 회사를 차렸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마침 남편이 컴퓨터와 관련된 회사를 중국에 차려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어요. 7년 간 중국에서 머물다가 다시 한국으로 나왔죠. 그렇게 한국과 디시 인연을 맺게 된 것이죠.”

 

처음에 한국으로 다시 나온 박경희 회장이 결혼이민자들의 모임인 모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의 김용국 이사장 때문이란다. 한국으로 나온 박경희 회장은 서수원 희망샘도서관(고색동 905-19)에서 다문화 가족들과 함께 책도 읽고, 음식도 만드는 모임에서 활동을 했다고. 그러던 중 김용국 이사장이 도서관에 와서 강의를 했는데 그 때 인연을 맺었다는 것이다.

 

그 때 도서관에 와서 다문화 가족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던 김용국 이사장이 저에게 동남아전통문화연구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와서 함께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모아의 회장을 3년 째 맡고 있어요.”

 

 

다문화 가정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

 

처음 한국으로 나왔을 때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일부러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었다고 한다. 외국인(중국) 친구들과 새기면 아무래도 중국어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지금은 모아에 많은 회원들과 함께 활동을 하기 때문에 외국인 친구들이 많은 편예요. 우리 모아에는 동아시아 각국 사람들이 다 모여 있기 때문에, 여러 나라 사람들을 사귈 수 있죠.”

 

 

결혼이민자들은 대개 취업을 한단다. 하지만 박경희 회장은 취업보다는 다문화 가정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고. 그래서 일부러 취업을 하지 않고 다문화 가정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의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취업을 하기보다는 다문화 가족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이 다문화 가족들을 위한 많은 일을 하는데 동참을 하고 있죠. 한국에 결혼이민자로 나온 많은 동아시아 사람들을 무슨 일을 하려면 힘이 많이 들어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해요.”

 

3년 째 결혼이민자들의 모임인 모아의 회장을 맡고 있는 박경희 회장.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이 하는 모든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을 한단다. 앞으로도 다문화 가족을 위한 자리에는 어느 곳이나 박경희 회장의 환하게 웃는 얼굴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대담) 국제연극제 무대에 서는 극단 모아의 진입유씨

 

813일부터 시작하는 ‘2014 수원화성국제연극제가 서서히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개막공연이 열릴 화성행궁 광장에는 막바지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고, 12SK 아트리움에서 막을 올릴 대학생 연극 페스티벌은 오늘부터 시작을 한다. 이번 수원화성연극제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다문화 가정의 모임인 극단 모아, 노숙인들의 모임인 극단 노자일 것이다.

 

816일 오후 8시에 무대에 오를 극단 모아의 연극 결혼, 화성의 서북공심돈 앞에 마련될 성곽극장에서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극단 모아의 연극 결혼은 우리사회의 모습을 반영한 이주 여성들의 한국 정착기를 그려냈다.

 

한국 남자와 결혼을 한 베트남 여성은 부푼 꿈을 안고 한국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주 여성들에게 한국의 생활이 그리 녹녹치가 않다. 극단 모아의 공연시간 30분 정도의 연극 결혼은 아주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과 인내의 시간을, 가족 간의 이해와 사랑을 극복하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으로 실제로 모아의 회원이 겪은 이야기를 주제로 설정했다.

 

 

욕심 많은 당당한 연극인 진입유씨

 

수원시 영통구에 소재한 수원영통출입국관리소에서 진입유(, 34. 중국)씨를 만났다. 이곳에서 서류구비와 번역, 안내, 통역 등을 맡고 있는 진입유씨는 올해 한국으로 이주를 한지 13년째라고. 현재 남편과 두 명의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진입유씨는 결혼과 동시에 한국에 들어왔단다. 중국에서 남편과 함께 삼성에서 근무를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

 

저는 그냥 바로 결혼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녜요. 3년 정도 연애를 하다가 좀 더 알아보고 결혼을 하려고 했던 것인데, 시아버님께서 많이 아프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면 안 되겠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어차피 결혼을 할 것이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효도를 한다고 생각을 했죠.”

 

23세의 나이에 그렇게 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나왔다고 한다. 진입유씨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자면 절로 힘이 생기는 듯하다. 잘 웃고 잘 이야기 하고,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인 듯해서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아픔은 있는가보다.

 

사실은 시아버님께서 결혼을 하고 1년 정도 지나서 운명을 하셨어요. 늘 손자를 보고 돌아가시겠다고 말씀 하셨는데,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임신한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때 알려드리지 못한 것이 늘 마음이 아파요

 

 

지난 해 다문화연극제 최우수연기상 수상

 

사단법인 동남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원장 김용국) 소속 연극모임인 극단 MOA(Mon of Asian)는 수원에 거주하는 결혼이민자들로 구성된 극단이다. 20134월에 결성되었으며, 3회 경기도 다문화연극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지난 해 공연작은 ‘Welcom, 구잘이었다. 진입유씨는 독한 시누이 역을 맡아 최우수연기상을 받은바 있다.

 

지난해는 포천시 반월아트홀에서 경기도 8개 시 군이 참가를 해 수원이 대상을 받았어요. 지난 해 내용은 결혼을 해서 한국에 온 이주여성을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못살게 구는 내용인데, 결혼이주여성들이 겪는 많은 이야기 중 하나죠. 결혼을 한 여성이 친정을 다녀왔는데 임신이 된 거예요. 그래서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올케를 못살게 굴었죠. 어떻게 임신이 되었느냐며 오빠의 아이가 아니라고 다그쳤어요.”

 

자신이 직접 못된 시누이역을 맡아서 연기를 해서인지, 점점 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하는 진입유씨. 그런 열정이 있었기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고 생각한다. 함께 대담을 하는 사람조차 괜히 같이 열을 올려본다,

 

 

그런데 나중에 아이를 낳고 보니까 오빠 아이가 맞는다는 거죠.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각색한 내용예요. 결혼이민자들은 이런저런 오해를 많이 받아요. 그런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죠.”

 

올해 16일에 성곽무대에 오르는 작품 결혼에서는 혼자 12역을 감당해 내야 한단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다시 기다리고 있는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는 진입유씨. 16일 공연에는 꼭 공연장을 찾아 연기에 빠져보아야겠다.

그저 안타깝다. 사실 지난 12일 정재만교수의 죽음을 듣고 며칠 간 마음이 불안한 상태였다. 정교수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79년이었으니, 그 때만 해도 젊은 혈기가 넘칠 때였다. 당시 국립무용단이 제23회 정기공연으로 춘원 이광수 원작의 꿈을 김지일 극본, 송범 안무로 ··이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렸는데, 그때 정재만 교수를 처음 만났다.

 

당시는 무용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아 그 작품의 작곡을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정교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더블게스트로 주인공을 정했는데 남자 주인공은 국수호 교수와 정재만 교수였고, 여자주인공은 박순자씨와 단송 홍금산 선생이었다. 그 이후 정교수와는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양평에서 벽사 춤 아카데미 강습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당시는 신문을 맡아 운영했기 때문에 당연히 취재를 간 것이다. 벽사는 고 한성준 선생의 호이자, 선생의 춤을 물려받은 따님인 한영숙 선생의 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정재만 교수도 벽사라는 호를 사용했으니 3대 벽사가 되는 셈이다.

 

 

오롯이 스승의 춤을 온전히 후대에 전승을 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정재만 교수. 나이가 동년배인 바람에(66) 친구려니 하고 생각하지만, 늘 사는 곳이 달랐다. 정재만 교수는 오직 후대를 키우겠다고 학교와 연구소 등을 다니면서 생활을 했고, 나는 역마살이 끼어서 팔도를 내 집처럼 휘돌아 다녔으니 만날 일도 별로 없었던 것만 같다.

 

그래도 이야기가 나오면 늘 솔깃해서 듣고는 했던 것이 바로 그의 춤 세계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인 한영숙류 승무 보유자이기도 한 정재만 교수. 지난 12일 익산에서 제자 강습회를 마치고 부산으로 이동하던 중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고나서 한참이나 멍멍한 시간을 보냈다.

 

화성 정남면 출신 춤꾼 정재만

 

불귀의 객이 된 정재만 교수는 1948년 경기도 화성군 정남면에서 태어났다. 정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송범무용연구소에 들어가 한국 춤과 인연을 맺었다. 이곳에서 어린 정교수를 발견한 한영숙 선생은 그를 제자로 데려가 승무를 가르쳤다. 이후 그는 세종대와 숙명여대에서 30년이 넘게 후학을 양성하다, 지난해 정년퇴임했으며 명예교수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춤도 웰빙이 필요합니다.” 이미 10여 년 전에 정재만 교수는 우리 춤도 달라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2004년 양평군에 소재한 한화리조트 무궁화 홀에서 100여명의 전수생들에게 ()벽사춤 아카데미 2004 하계수련회를 열고 있는 정재만 교수를 만났을 때 한 말이다.

 

그리고는 또 10년이 지났다. 그리고 보니 정교수와는 한번 만나고 나면 10년 이상을 만날 일이 없었다. 가끔 통화정도만 하는 사이였으니 말이다. 이제 10년이 지나도 다시 볼 일이 없게 생겼다. 그것이 마음이 아프다. 가장 아픔인 것은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일을 혼자 감당해 내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고인이 된 춤꾼 정재만교수. 그곳에서라도 늘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이 세상에 오만가지 상념일랑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 편하게 떠나시기를 바란다.

-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대담) 수원시지체장애인협회 최종현 회장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인식개선과 사회참여확대, 권익 및 자립을 도모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모인 ()수원시제체장애인협회. 19일 오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55-8에 소재한 재활복지회관 3층에 자리하고 있는 지장협(지체장애인협회)를 찾아가, 11대 협회장으로 재임명된 최종현 회장을 만나보았다.

 

지체장애인협회는 다양한 사업과 행사를 통해 장애인들에게 정보제공은 물론, 지역사회 주민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한 환경을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회장 스스로가 장애인(지체장애 5)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위해 온전히 봉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장애인들이 차별이 없는 편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불편한 장애인

 

저는 지체장애 5급을 받았습니다. 장애인협회 협회장들은 같은 장애인이 아니면 맡아볼 수 없는 소임입니다. 저도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에 쇠를 대고 있는 장애인이기에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죠. 처음에는 후원자로 활동을 하다가 지제장애인 협회를 맡아 일을 하고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가 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위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대담을 할 때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인수 국장이 한 마디 거든다.

 

회장님이 3년간 저희 지체장애인협회를 맡으시면서 상당히 많은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그 전에는 장애인협회 회장자리는 늘 이권에 개입을 하기도 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고질적인 병폐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던 것이죠. 지금은 저희 수원시지체장애인협회는 정말 깨끗하고 투명하게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발전도 했고요.”

 

 

많은 일을 하고 있는 지체장애인협회

 

수원시지체장애인협회는 그 어느 곳 보다도 투명하게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장애인협회가 하는 일은 우리가 모르고 있던 부분이 상당히 많다. <수원시 편의시설 기술지원센터>에서는 각 건물의 편의시설 설치와 관련한 자문 및 기술지원을 하는 것은 물론, 설치관련 설계도 등을 확인해 장애인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지를 판단하고 있다.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시민촉진단>에서는 장애인 편이시설의 설치 필요성을 홍보, 계도해, 장애인의 이동권 및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을 한다. <장애인보장구수리센터>에서는 장애인들의 이동 편의 수단인 전동휠체어와 전동스쿠터 등을 수리하여,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 보다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장애인인권센터>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상담을 비롯한 장애인의 권리에 대한 인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장애인들은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가거나, 운전면허를 취득했을 당시 지자체로부터 일정액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정해진 자부담으로 해셜을 하고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죠. 그런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이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일 년이면 불과 몇 사람밖에 되지 않았죠. 지금은 저희 회원들을 상대로 그런 도움을 받도록 교육을 시키고, 저희 협회차원에서 그들을 돕고 있기도 합니다.”

 

 

행복한 세상을 스스로 만들어 가야

 

최종현 회장은 지난 3년 동안 장애인들의 고질적은 병폐를 척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으며, 앞으로 3년 동안은 장애인들이 스스로 참여를 할 수 있도록 유도를 할 것이라고 한다.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함께 즐길 수 있는 단체를 만들겠다는 것.

 

사실 우리가 말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장애인들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이제 우리들 스스로가 달라져, 그 사회 속으로 들어가 똑 같이 행복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3년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해오면서 숱한 어려움도 겪었다고 한다. 무료급식에 수원시 장애인 합동 고희연을 열었다. 복 때가 되면 삼계탕을 정성스럽게 끓여 더위를 잊게 하는 행사도 빠트리지 않고 했다. 이 자리에는 언제나 재능기부를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함께 축하를 해주고는 한다.

 

곰돌이 산악회는 일 년에 한 두 번씩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려 산행을 하면서, 체육활동을 통한 건전한 정신과 마음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입니다. 거기다가 지난해는 향토문화탐방으로 15명 정도의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35일 동안 필리핀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일 년에 봄, 가을로 두 차례씩 국내문화탐방도 계속하고 있고요.”

 

건전한 정신을 갖고 스스로를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스포츠문화교실을 열어 국궁과 배드민턴, 게이트볼, 등산 등을 주기적으로 하겠다는 최종현 회장. 이는 지역사회에 있는 시설을 이용하여, 장애인들의 교류를 확대하는 데는 최적이라고 한다.

 

 

장애인들이 마음으로 쓴 책도 내고 싶어

 

올해부터는 유명인사들을 초청해 우리 장애인들이 세상을 홀로 살아가기를 할 수 있도록 문화강좌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을 잘 쓰시는 작가들을 초청해 저희 협회 회원들에게 글쓰기 강좌를 열어, 회원들이 직접 쓴 글로 책을 엮어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책 한권이 많은 사람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바꾸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스스로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올 한해 많은 변화를 주도할 것이라고 한다.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이제 다시 3년 동안 중책을 맡은 지체장애인협회 최종현 회장. 장애인협회를 운영해 나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고.

 

저희들은 수원의 2만 명이 넘는 장애인 중 2,100명 정도가 정회원으로 가입이 되어있습니다. 그 회원들이 한 달에 1000원씩을 내는데, 그도 다 걷히지가 않는 편이죠. 후원자들이 한 달에 5000, 10000원을 내는 것으로도 상당히 부족합니다. 그래도 삼성전기의 직원들과 저희 수급장애인들 50명이 결연을 맺어, 한 달에 5만원씩 개별 통장으로 입금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도 많은 도움이 되죠.”

 

그저 장애인들이 조금만 더 편하고, 조금만 더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사정을 하고는 한단다. 이렇게 장애인들을 위해 어려운 자리를 맡은 것도, 알고 보면 지난 시간의 봉사가 있기 때문이다. 코니카 한국국제협력단의 일원으로 필리핀에 나가 5년이나 봉사를 했기 때문에, 남을 위해 사는 삶이 몸에 배어있다는 것.

 

그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몸이 불편한 분들이 마음까지 불편하면 안 되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할 뿐이죠. 어려워도 모두가 함께 산 정상을 향해 한발씩 전진을 하다가 보면, 언젠가는 정상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를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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