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집에 귀가를 한 시간이 밤 10시가 다 되어서이다. 그래도 어제는 나름대로 일찍 귀가를 하였다고 생각한다. 매일 밤 12시를 넘겨서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피곤이 겹쳐 대충 씻는 둥 마는 둥 자리를 펴고 누워서 잠시 TV 마감뉴스를 보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휴대폰 벨이 울린다.

 

이름도 뜨지 않는 낯선 전화번호이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좀처럼 전화를 받지 않지만, 요즘 들어 갑자기 밤에도 기사 제보를 하는 분들이 간혹 있어 전화를 집어 들었다. 이 시간에는 그 지겨운 광고 전화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몇 통화씩 걸려오는 광고 전화는, 은근히 사람을 스트레스를 받게 만들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참 다정하게 가정을 꾸려 가는 분들이 더 많다

 

나더러 이제 깼냐고?

 

“예, ○○○입니다”

“자기야, 이제 자다가 일어 난거야?”

“누구신데요?”

“아직 잠이 안 깼나보다. 나 오늘 집에 늦게 들어간다. 알았지”

“전화 잘 못 거셨습니다.“

“내가 집에 없어서 화났어? 오늘 모임 있다고 했잖아.”

“전화 잘 못 거셨다니까요”

 

갑자기 전화가 끊긴다. 상대방 확인도 안하고 무작정 ‘자기야’를 찾아가면서 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거신 이 분. 참 황당하다. 전화를 잘못 건 것도 화가 나지만, 잠이 깨고 나면 다시 잠을 청하기가 어려운데. 오늘 밤도 꽤나 뒤척이게 생겼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댁 같으면 이런 아내 좋아할까?

 

전화를 끊고 나니 슬슬 화가 난다. 도대체 이 시간에 왜 밖에서 전화를 한 것일까? 물론 나하고는 전혀 생면부지의 관계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전화 내용을 들어보니, 남편이 귀가를 하기 전에 집을 나왔다는 소리다. 그런데 밤 1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늦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이 분 아예 날밤을 밖에서 새우겠다는 소리로 들린다. 다시 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전화 잘못 거셨데니까요.”

“그게 아니고요. 아저씨 목소리 짱이네요”

“전화 끊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육두문자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 직업을 갖고 있으니 말도 조심할 수밖에. 그런 것이 오히려 더 성질이 난다.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을 참느라고 거실로 나가 냉수를 한 컵 들이킨다.

 

이런 분들은 그저 이렇게 볼기라도(사진은 특정한 내용과는 무관함)

 

가만히 생각해보니 알 지도 못하 는 사람이지만, 그 남편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여자를 아내로 두고 산다는 것이. 밖에서 부인이 이러고 다니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하기야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니, 내가 생각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내 달아난 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 이런 여자를 아내라고 데리고 살아야 할까? 이런 몇 몇 사람들 때문에, 정말 집안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정성껏 보살피며 가정을 잘 꾸려가는 분들까지 욕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세상 참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 감히 늦은 시간에 외간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농지꺼리를 할 수 있다니.

수원시 팔달구 지동에서 벌어진 엽기 토막 살인사건이 발생한지 보름이 지났다. 아직도 사람들은 그 때의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동 일대에는 순찰을 도는 경찰들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이번에는 보름여 만에 시흥에서 이를 모방한 듯한, 60대 여성 토막 살인사건이 발생해 또 한 번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이번 시흥의 토막살인 사건은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듯, CCTV가 설치된 아파트 단지 내 쓰레기 수거장에 토막 난 사체를 유기하는 등 대담성까지 보였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태연한 모습으로 텃밭에서 상추를 가꾸는 등, 대담성까지 보였다는 점에서 주민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불안한 감조차 없는 인면수심의 살인마

 

17일 시흥경찰서와 인근 주민들에 따르면, 시흥시 목감동 자택에서 부인 L씨(69·여)를 살해한 C씨는 시신을 훼손, 유기한 후, 주거지 인근의 낚시터에서 낚시를 즐기는가 하면, 텃밭에서 상추를 가꾸는 등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안 주민들은 할 말을 잃고 있다.

 

이번 부인을 살해 유기한 C씨는, 지난 1일 수원에서 20대 한국여성을 납치 후 살해하고 시신을 엽기적으로 훼손한 오원춘을 보는 듯하다. 오원춘 역시 여성을 살해한 후 아무렇지도 않게 인근 슈퍼마켓 등을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살해된 여성 L씨의 토막 난 시신은 16일 오전 8시 2분께 시흥시 은행동의 한 아파트 단지 내 쓰레기 분리수거장 생활 쓰레기 함에서, 흰색 20ℓ 생활쓰레기 종량제 봉투 3개와 50ℓ 생활쓰레기 봉투 1개에 나뉘어 토막 변사체가 담겨 있는 것을 청소업체 직원 S씨(44)가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사건 현장으로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시신 일부를 확보하고 손목 등 나머지 부위가 담겨진 50ℓ 생활쓰레기 봉투 2개는 오전 11시 30분께 시흥시 매화동에 위치한 쓰레기적치장에서 찾아냈다. 경찰은 인근 K병원에서 시신에 대한 정밀감식을 실시, 비교적 훼손이 덜된 피해자의 십지지문을 통해 인적사항을 찾아냈다.

 

이어 경찰은 사체를 발견한 지 8시간만인 오후 4시께 남편 C씨(64)를 살인 및 사체유기혐의로 긴급체포해 수사를 벌인 결과, 아내를 죽이고 사체를 버렸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경찰 조사결과 피해자는 C씨의 아내 L씨(69·여)로 시신이 발견된 아파트에서 직선거리 9㎞ 가량 떨어진 시흥시 목감동의 한 빌라주택에 거주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무엇이 문제일까? 잠재적 기억이 주는 악한생각

 

사람들이 어째서 이렇게 패악해진 것일까? 왜냐고 정답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사회의 모든 것들이, 사람들에게 그런 범죄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어려서부터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각종 소식들이, 점차 사람들을 패악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에게는 ‘잠재적 기억’이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거나 화면을 보거나, 어떤 일을 자신도 모르고 그것을 접하면서 기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잠재적인 기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야 표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 부부싸움을 자주하다가 보면, 그런 모습들이 아이들의 잠재적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표출이 되어 부모와 같이 싸움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생활습관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도, 이렇게 아이들이 마신도 모르게 어떤 습관이나 생각이 잠재적 기억 안에 된다는 것.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어릴 적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먼저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어야만 한다는 것. 이래저래 엽기적인 토막살인을 접하면서, 사람들의 불안감만 가중이 될 듯하다.

참 사람들이 사는 방법도 가지가지이다. 그 중에는 한 평생 한 사람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생 몇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사람도 있다. 물론 혼자 몸이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여러 명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 무엇이라고 할 것이 못된다. 그것도 그 사람의 팔자려니 하고 이해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이다. 어엿하게 배우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딴 사람과 놀아나는 사람들 말이다. 과연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될까? 아마 모르기는 해도 상당한 숫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남편이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사람들과 사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한 남자면 정말 사랑하는 것이겠지 하고 넘길 수가 있지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한 사람만 사귀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이런 사람도 두 종류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명의 사람을 동시다발적으로 사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긴 내가 알고 있는, 많지 않은 사람들 중에 두 명이나 된다는 것은,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상당히 많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두 사람을 보면 이성을 사귀면서 정 반대로 살아간다.

한 사람은 상대에게 물량공세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어디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몇 사람을 사귀고 있는데, 그 사람들 대부분이 이 여성에게 많은 물질적 혜택을 입었다고 한다.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남자를 사귀는 것일까? 도대체 납득이 되지 않는다. 

또 한 사람은 적당히 남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어딜 가는데 돈이 필요하다. 또는 무엇을 해야하는 데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 등등의 이유를 붙여 남자들에게서 돈을 타낸다. 그렇다고 이 집이 살기에 그리 힘든 것도 아니다. 그저 적당히 즐기면서 남자들에게 물질적 도움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그 남편들은 모르고 있을까? 

아마도 두 사람의 남편들도 자기의 아내가 그러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남편만 모른다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런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무슨 이유일까? 이런 것은 충분히 이혼의 사유가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도 그저 모르는 체 하고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방종한 사람과 같이 살고 있을까? 모르긴 해도 한 사람은 부부가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그저 넘어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면 부인이 없는 곳에서 본인도 그런 짓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저녁마다 남편을 한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데, 그런 짓을 버젓이 하고 다니면서 어떻게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정말로 아무런 죄의식을 못 느끼고 사는 것일까?


드라마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참 묘하다. 하긴 요즘 막장 드라마들이 이런 생활을 오히려 온통 칠을 한 후 그럴듯 하게 포장을 해, 사람들이 알게모르게 그런 짓을 따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베우자가 다니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데도, 모르는 체 넘어가는 사람들. 비단 여자뿐이랴 아마도 남자들을 예로 들면 더 많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여자인지 알면서도 만나는 남자들이다. 아마도 그저 사랑이라는 것이 아닌, 단지 인간의 생리적인 욕구를 풀기 위해 만나는 것은 아닌지. 세상 참 이제 갈때까지 간 듯하다. 이성 간의 사랑은 나눌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렇게 동시에 여러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 과연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는 할까? 사랑은 그렇게 허접한 것이 아닐진 데 말이다.

사람들을 만나면 참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된다. 때로는 세상을 조금 살았다고 하는 나도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이야기들도 듣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의 속은 다 다른 법이라, 그것을 갖고 ‘맞다, 틀리다’라는 평가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본인 스스로가 결정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우연히 들은 이야기지만 도저히 나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참으로 황당했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내가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이러쿵저러쿵 할 처지가 아니라, 생각만으로 접어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한 마디로 ‘어떻게 그런 여자를 다시 데리고 살까?’ 하는 생각이다.

김계용님의 솟대 '사랑이야기'이다. 남녀사이, 특히 부부사이란 신뢰가 쌓여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딴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여자

어느 아이까지 달린 주부가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단다. 그것도 대충 바람을 피운 것이 아니라, 아예 나가서 살림까지 차렸다는 것이다. 그러기 이전에도 2~3일씩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고 한다. 남편 되는 사람은 아이들이 있어서, 그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집을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린 아이들을 두고. 6개월이나 집을 나가 딴 남자와 살림을 차린 이 여자. 그런데 6개월이 지나자 살림을 차렸던 남자가 홀연히 떠나버렸다는 것.

문제는 이 여자가 다시 제 발로 집으로 들어왔는데, 남편은 그 여자를 다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라고 하면서.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그래서 그 남편은 그 여자를 다시 데리고 산다고?”
‘예전보다 더 잘 해준데요.“
“그 남자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런 여자를 어떻게 데리고 산다고.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아예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딴 남자와 살림까지 차렸던 여자를”
“그래도 그 남자 이혼도 하지 않고 기다렸데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부분이다. 모르겠다. 그 남자의 속을 도대체가.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납득이 가질 않으니 말이다.

“그럼 선생님은 어떻게 할 것 같아요?”
“나?”
“예”
“나 같으면 받아들이지 않겠지. 어떻게 그런 여자를 받아들이겠어.”
“그런데 그 남자 분은 예전보다 더 잘해주고 있어요.”

이해가 가는 이야기인가? 그 남자란 분 얼굴이 보고 싶다. 도대체 공자도 하지 못할 그럴 일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정작 내가 더 걱정을 하는 것은, 한 번 그랬던 여자가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그 이전에도 며칠씩 집을 비웠던 여자. 그리고 딴 남자와 소문까지 내면서 살림을 차렸던 여자. 과연 그런 여자가 이제 온전히 남편과 아이들을 지키면서, 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 도대체 그 남편이라는 사람의 속을 모르겠다. 아마도 그 속은 이미 숯덩이가 된 것은 아닐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참 사람 속은 정말 모를 일이다.

사실 걱정이 되는 것은 이렇게 버릇처럼 집을 나갔던 여자가, 다음에 다시 나가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남자 분의 속은 어떨까를 생각하게 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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