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침입을 신속히 제압하거나, 적을 교란시키기 위한 작전 중에 ‘패스트로트’가 있다. 헬기강하라고 하는 이 패스트로트는 헬기를 이용해 작전지역에 신속히 하강하여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10월 1일 남원 요천가. 헬기 두 대가 군민한마당큰잔치 개막을 하기 전 나타났다.

행사장 앞에 도착한 헬기로 먼지가 일자, 아이들이 환호를 하고 난리법석이다. 먼지가 나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관람객을 메운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 이 진기한 장면을 보려고 까치발을 딛는다.



줄 하나로 의지한 채 하강하는 특수부대

헬기에서 줄이 내려지자, 그 줄을 타고 특수부대원들이 신속하게 하강을 한다. 그리고 사주경계에 바로 들어간 후, 이동을 한다. 패스트로트는 바로 신속한 적과의 대응이나 진압을 위한 것이다.


작전지역에 도착한 헬기에서는 줄이 내려졌다.



줄을 이용해 강하한 특수부대원들은 바로 사주경계에 들어간다. 그리고 신속하게 작전지역으로 이동을 한다. 적의 진압이나 휴방교란 등을 할 때 패스트로트를 이용한다. 

특수부대원들을 작전지역에 내려 놓은 헬기는 바로 줄을 걷고 이동을 한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오늘 남원 요천가 사랑의 광장에서 열린 제63주년 군국의날 '남원 민군한마당큰잔치'에서는 이런 특수부대 및 특공무술 등이 선을 모여 시민들의 마음을 든든히 했다.

이제 행사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엄청 피곤하네요. 출연 인원만 300여명에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지는 행사였습니다. 다행히 날이 쾌청한 주말이라 많은 사람들이 행사장을 찾아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다양하게 펼쳐진 행사는 2,0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행사장을 찾아 즐겼으며, 아무 탈 없이 기분좋은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행사를 걱정해 주신 이웃님들 고맙습니다. 편한 시간되시고, 내일부터 이모저모를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화가는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그 그림 속에는 화가의 혼이 실려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림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하는 자체는, 남의 영혼을 좋다 나쁘다를 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누군가 이야기를 했다. 화가 연당 강현숙(여, 49세)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이야기를 한다.

10월 1일 제63주년 국군의 날과, 10월 2일 노인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잔치가 벌어지는 남원, 요천가에서 열리는 ‘남원 민군 한마당 큰잔치’의 일환으로 열리는, ‘갤러리 선’의 <연당 강현숙 특별초대전>을 미리 돌아본다. 전시작품을 여기저기 배치하고 있는 화가 강현숙의 이번 전시회 제목은 ‘내 마음의 풍경’이다.


100호 그림이 주는 웅장함이라니

100호나 되는 그림들이 걸려있다. 19점의 전시작 중에는 100호 그림이 7점이나 된다. 벽면 가득 채운 그림들이 그저 당장 그림 속으로 들어가 길을 걷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화가 강현숙은 일찍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 그림이 좋았다고 한다. 아마 그런 그림에 대한 열망이 오늘의 작가가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전주대학교 미술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강현숙은 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미국과 프랑스, 일본 등 해외에서는 전시회를 가질 만큼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동안 세종문화회관의 한국화 구상화전, 갤러리 타블로 기획전, 표현모색전(전북예술회관), 일상과 상징전(서울미술관) 등 많은 전시회에 참가를 하였으며, 현재는 표현모색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 강현숙과의 대담

-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아마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림을 그렸는데, 어린 나이에도 ‘묵향(墨香)’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냄새를 잊지 못해 그림을 그리게 되었죠.

- 그림을 계속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맞아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재미로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마 그림을 다 마친 후에 갖게 되는 성취감이나 희열을 느끼는 것 때문에 그리는 것 같아요.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고 나면 그런 기분을 느끼거든요.




- 해외 전시도 많이 하셨는데?
예, 그 동안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그룹전을 했는데, 프랑스 파리 피에르가르뎅 초청전 때는 한 보름 정도 프랑스에 가 있었어요. 피카소의 그림 등 많은 것을 보면서 그림을 더 열심히 그려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 한국화를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그림을 그리는 분마다 각기 개성이 있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주로 수묵담채를 그리는데 먼저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옅은 채색을 하는 것이죠. 그 먹을 사용할 때 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아마 저 뿐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 대다수가 그런 먹향 때문에 그림을 그리시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요. 저 같은 경우에는 주로 풍경을 많이 그리는 편인데 사실적인 표현을 주로 하죠.



- 풍경은 주로 스케치를 하시나요?
스케치를 하는 경우도 있고, 사진을 찍어 그것을 확대해서 보고 그릴 때도 있고요. 저는 사진을 찍어서 그릴 때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사진을 찍어서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다가 보면, 나름대로 나만의 세계를 표현하고는 하죠. 사진과 똑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 이번 전시를 성황리에 마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전시일시 : 2011년 10월 1일 ~ 10일
전시장소 : 남원 선원문화관 내 ‘갤러리 선’
개막일시 : 2011년 10월 1일 오후 1시

전시를 마친 곤충생태전의 자료를 반납하느라 남원 밤재라는 곳을 갔다. 문화충만이라고 하는 이 집은 저녁이면 리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바베큐를 팔기도 한다. 아직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뒤로는 '밤재솔바람길'이라는 이름이 아름다운 숲길이 있어, 점차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이 집에서 장수풍뎅이 등을 기르고 있기 때문에 전시된 것들을 제자릴로 돌려보내기 위해 다녀왔다. 그런데 이 문화충만에 가니 작은 고양이 하나가 울고 있다. 이녀석 사람을 보고 좀 놀아달라고 하는 듯하다. 길냥이 새끼인데 이제 태어난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어미가 버리고 간 길냥이

이 녀석이 이 집에 오게 된 것은 거의 20여일이 지났다고 한다. 숲속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 가보았더니,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울고 있더라는 것. 주변을 찾아보아도 어미도 없이 혼자 숲속에서 울고 있었다고, 혹 어미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녀석을 집으로 데리고 와 놓아두었는데도 어미가 며칠을 기다려도 나타나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어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닌지.
 
그대로 놓아두었다가는 차가 길 앞으로 다니기 때문에 위험해 우선 이곳에 정을 붙일 때까지 목줄을 해 놓았단느는 것이다. 실내에는 풍뎅이 등을 키우기 때문에 녀석이 해를 입힐 수도 있어, 고민 끝에 밖에 박스로 집을 만들어 주었다고.




개밥그릇에서 놀고 있는 길냥이새끼

그런데 이녀석을 보고 한참이나 웃었다. 녀석이 노는 곳이 바로 개밥그릇 안이기 때문이다. 딴 곳에 옮겨 놓아도 자꾸만 그리 들어간다는 것. 아마 녀석에게는 이 개밥그릇이 퍽이나 좋았나보다. 밥그릇 밖으로 나갔다가도 놀란 듯 밥그릇으로 돌아와 안에서 논다. 

곁으로 다가가니 녀석 같이 놀아달라고 조르는 듯하다. 아마도 혼자 하루 종일 노는 것이 무료했다는 듯. 앞에서 사진을 찍자 발을 내밀고 난리도 아니다. 그래도 밥그릇 안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며칠 지나 어디로 가지만 않는다면 목줄을 풀어주어야겠다는 사장님. 이 녀석 잘 좀키워주세요. 그래도 당당하게 생겼구만요.      






바쁜 가운데 잠시 '곤충생태전 - 장수풍뎅이의 일생'이 열리고 있는 선원문화관 전시실인 <갤러리 선>에 들렸습니다. 이번 행사의 팸플릿을 최종 교정을 보닉 위해서요. 오늘 각 학교에 공문을 보내놓고 장수풍뎅이 10여 마리를 더 전시실로 옮겨 놓았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전시실에 들어가 유리상자 안을 보니 나무 밑에 모여있는 녀석들이 영 심상치가 않았습니다.

두 마리라고 하면 '짝짓기'를 하느라 그렇다고 치지만, 두 마리가 넘는 듯합니다. 가만히 들여다 보았더니 이게 머시람. 남 둘이 사랑을 하는데 한 놈이 그 위에 올라가 방해를 놓고 있는 것입니다. 유리상자 안에는 숫놈 6마리와 암놈 8마리가 있는데, 굳이 딴 녀석과 사랑을 나누는 곳에가 방해를 놀아야 하는 것인지.

세 녀석이 엉켜있네요.

관음증도 아니고 이녀석은 도대체 무엇이람?

한 녀석 떼어 놓았더니 죽자사자 그리고 쫒아가 다시 엉겨붙습니다. 가만히 보니 숫놈이 자신보다 덩치가 좀 작은 듯 합니다. 남의 여자 빼앗으려는 이런 놈을 그냥 놓아두면 버릇이 될 것 같아, 이녀석 들어다가 사슴벌레 구덩이에 집어 넣었습니다. 혼 좀 내려구요.


밝게 찍었더니 녀석들이 짜증스러운지 난리를 피웁니다. 그러니까 남 사랑놀음 하는데 방해하면 안되지.

두 녀석은 원래 사랑하는 사이같고, 한 녀석은 머 관음증 환자나 아니면 남 잘 되는 꼴 보지 못하는 심술 사나운 녀석 같아보입니다. 요즈음 이 녀석들이 짝짓기 하느라고 난리입니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같은 강씨성을 가진 분들이다. 한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난 예인이요, 또 한 사람은 현재 대단한 인기를 눌고 있는 연예인이다. 한 분은 제자들이 주는 용채까지 꼼꼼히 기록한 분이시고, 한 사람은 탈세의 용의자가 된 사람이다. 왜 강호동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돌아가신 강도근 명창의 생각이 나는 것일까?

강도근 명창. 남원이 마지막 판소리 보루라고 인정을 받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시대에 수많은 기교를 부리는 많은 창자들이 있었다면, 강도근 명창은 그저 우직하게 판소리 본바탕을 그대로 이어 온 명창이다. 강도근은 농사꾼 아버지인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18년 지금의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국악의 성지 이층 전시실에는 강도근 명창의 관련자료들이 전시가 되어 있다.


강도근의 호적명은 강맹근이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가들이 많았는데, 대금산조의 무형문화재 강백천(1898∼1982)이 그의 사촌형이고, 판소리와 창극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산홍과 가야금의 명인 강정열은 당질이며, 가야금산조로 남원과 진주에서 활동했던 강순영 또한 그와 사촌간이다.

만들어지는 소리를 거부한 강도근 명창

강도근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 <흥보가>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지킨 판소리 소리꾼이라고 한다. 그는 항상 ‘자작은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전통기법을 그대로 지켜간다는 이야기이다. 소리꾼들은 조금 소리를 익히면 나름대로의 목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강도근 명창은 통성 위주의 목으로, 소리 끝을 짧게 끊어내는 대마디대장단을 충실하게 구사했다.



강도근 명창의 주변에는 늘 많은 전통예술인들이 있어, 명창의 학습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강도근 명창의 소리는 전형적인 동편제 판소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도근 명창의 목소리는 철성이다. 철성이란 쇳소리와 같이 조금은 탁한 듯한 소리로 웅장하고 남성적인 호탕함이 있다. 송만갑, 김정문으로 이어진 동편제 판소리의 특징적인 목이다.

현대 판소리 명창 중에서는 유일하게 강도근 명창만이 철성을 가졌다고 한다. 강도근 명창은 판소리가 쇠퇴기에 잡어 든 1970~80년대에 남원국악원의 창악 강사로, 후진들을 양성했다. 강도근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남원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최후 보루라는 평가를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강도근 명창이 살아생전 정리한 수강료 납부장. 제자들이 주고 간 용채까지 일일이 기록을 해두었다.
아래편 출석부는 날마다 수기로 출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고 있다.


꼼꼼하게 수기로 적은 출석부, 눈물이 나다

남원시 운봉을 가면 ‘가왕’이란 칭호로 한 세대를 풍미한 명창 송흥록의 생가가 있다. 그리고 그 조금 아래에는 여류명창 박초월의 생가도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커다란 건물이 바로 ‘남원 국악의 성지’이다. 이 건물 안에는 전시관과 함께 남원시립국악단의 연습실 등이 자리하고 있다.

1층에는 사무실과 민속국악실 1관과, 판소리 전수관이 있고, 2층에는 민속국악실 2관과 공연장 등이 자리한다. 이 2층 전시실 한편으로는 남원국악원에서 창악강사로 후배들을 가르치던 강도근 명창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강도근 명창이 직접 수기로 쓴, 수강료 납부 장부와 출석부가 전시되어 있다. 수강료 장부에는 제자들이 강도근 명창을 찾아 용채를 쓰시라고 주고 간 돈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생각해서 준 돈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출석부에는 그날그날 출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 놓았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강도근 명창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온전히 판소리를 제대로 부르다가 가신 명창 한 분. 이 분이야말로 세상에 흐트러짐이 없이 살다간 진정한 예인(藝人)이 아닐까? 정말 좋아하는 연예인이었다. 그리고 우직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 온 그를 화면을 통해서 만나는 것을 무엇보다 즐겨했다.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언제가는 진위가 밝혀지겠지만. 그런데 그런 소문이 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이프다. 그런데 왜 명창의 그 수강료 납부장이 생각이 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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