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한 선원사. 만행산 자락에 지어진 절로.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원사는 한창 사세가 번성할 때는 전각이 80동이나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불타 전소가 되어버렸다.

영조 30년인 1754년에 김세평이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선원사 약사전에 봉안된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철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이 철불을 설명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설명에는 창건 당시 조성한 철불이라고 한다. 선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헌강왕 때인데, 창건당시 조성한 철불이 어떻게 고려 철불이 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선원사 정경과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이 있는 약사전

약사전 앞에 배를 묶는 석주는 무엇인고?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인 남원선원사는 전형적인 비보사찰이다. 풍수비보사찰인 선원사는 남원을 구하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을 보면서, 남원의 지세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도선국사는 선원사를 창건하면서 약사전 앞에 두 개의 석주를 세워놓았다.

이 석주는 바로 남원이라는 배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배를 묶어놓기 위한 것이다. 이 입석이 없다면 남원은 그대로 물에 정처 없이 떠도는 배에 지나지 않아,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아직도 선원사 약사전 앞에는 배를 묶어두는 입석이 서 있다. 이 작은 입석 하나가 남원이라는 커다란 배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다.


 

약사전 앞에 놓여있는 배를 묶는 석주

칠성각에 수궁가는 무엇인고?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런 선원사가 예전에는 꽤나 운치가 있었나보다. 아마도 남원팔경 중에 끼어있는 ‘선원모종’도 선원사가 남원의 상징이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해가 떨어질 때쯤 요천 냇가를 거닐면,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범종소리. 아마도 그 무엇보다 푸근하지 않았을까?

<아니리>

그때여 어사또 농부들이 모심는 구경을 허시고 게서 떠나 남원 구중을 들어갈제

<진양조>

박석티를 올라서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도 옛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다 마는 물이야 흐르난 것이니 그물이야 있겄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헌가 동림 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 가느니 이별허든 곳이로 구나

선원사 저녁 종성 옛 듣던 소리로 구나 북문 안을 들어서니 서리역졸 문안커날 명일사 거행을 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갈 제 일락서산 황혼이 되야 집집마다 밥짓노라 저녁 연기 자욱하야 분별헐 길 전히 없다 차즘 차즘 찾어 갈 제 춘향 문전 당도 허여 동정을 살펴보니 그때여 춘향어미난 후언의 단을 뭇고 두손 합장 무릎 꿇어 하나님 전의 축수를 허는디

비나니다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오방신장 후토신령 화위동심 하옵시오 임자생 성춘향은 낭군 위하여 수절을 허다가 석문삼청 옥중으서 명재경각이 되었으니 삼청동 이몽룡씨 어서 수이 급제허여 전라 감사나 전라 어사로나 양단간의 수이 허여 오늘이라도 남원을 내려와겨 내 딸 춘향 살려주오


수궁가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이 선원사 삼성각에 있다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는 남원 사람들한테는 꽤나 마음 속 깊이 각인이 되어있었나 보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선원사의 저녁 범종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대목은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를 한 후 박석티고개를 넘어서 춘향의 집으로 향하는 대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선원사 삼성각에 보면 자라가 토끼 한 마리를 등에 태운 형상이 문설주 위에 조각이 되어있다. 도대체 왜 삼성각 문 위에 자라가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조금 빛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약사전 앞에 서있는 배를 묶는 석주 때문이다.


선원사는 물에서 남원을 지키는 사찰.

즉 선원사 앞에 도선국사가 절을 처음으로 이룩하면서, 배의 형태인 남원을 지켜내기 위해 세웠다는 배를 묶는 석주가 있다. 그곳에 남원이라는 배를 묶어, 남원이 좌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약사전 뒤에 자리한 칠성각 문 위에, 별주부인 자라와 토끼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물에 빠진 토끼 같은 약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래저래 남원 선원사는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즉 물이 차면 좌초될 수밖에 없는 남원을 꽁꽁 붙들어 매어놓고, 그래도 물난리가 난다면 자라가 토끼를 구하 듯, 모두 구해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남원이 물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도, 도선국사의 석주와 삼성각의 별주부 때문은 아닐까?

남원 선원사의 알 수 없던 두 가지 물건. 늘 지나칠 때마다 ‘무엇에 쓴 물건일꼬?’를 생각했는데, 그 의문이 풀린 듯하다. 그래서 선원사는 늘 남원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인가 보다.


고려시대에는 지방마다 많은 장인들에 의해 석불이 조형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불교를 그 어느 때보다 앞장세운 고려이기 때문에, 그만큼 석불이나 석탑 등 불교의 조형물이 많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불교석조물은 지방에서도, 그 지역의 장인들에 의해서 많은 작품들이 조성되었다.

지방에 장인들에 의해 조성이 된 불교작품들은, 그 나름대로 독창적인 지방색을 띠우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들어 불상 등은 거대불로 변화를 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는데, 이 또한 당시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석불의 경우 섬세함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장중하고 간략화 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도, 고려석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도선스님이 창건한 고찰 선원사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만행산에 자리한 선원사는, 도선스님이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사적비에 의하면 도선이 남쪽의 산천을 유력하다가 남원에 이르러, 주변을 두루 살펴본 끝에 남원의 지세가 강해 진압 사찰로 이 절을 창간하고 약사여래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당우가 30동이 넘었다고 전한다. 그 뒤 수차례의 흥패를 거듭하다가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에 왜군에 의하여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임한 부사 김세평이 노계소ㆍ신도계 등과 협의하여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고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깨지고 갉아먹은 석불좌상

선원사에는 ‘선원문화관’을 개관하기 위해 분주하다. 선원문화관은 남원을 비롯한 인근 문화의 산실로 자리를 잡기 위해 ‘겔러리 선’과, 어린이와 어머니들이 함께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다. 그 이층으로 올라가면 사무실이 있고, 그 안에 높이 110cm, 무릎넓이 90cm 정도의 석불 한 기가 있다.

고려석불로 알려진 이 석불좌상은 전체적으로 보면 그 풍채가 당당하다. 양편의 귀는 목까지 흘러내렸고, 목은 두터우나 삼도는 지워졌는지 알아볼 수가 없다. 안면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깨어지고 갉아진 모습이다.



이 석불은 원래 경내 밖에 있던 것을 안으로 들여 놓았다고 한다. 아마 밖에 있을 당시 이렇게 심하게 훼손이 된 듯하다. 선원사에 오래도록 다녔다는 어르신 한 분은, 이 석불은 아이를 잘 낳게 하는 효험이 있어서 사람들이 코를 갉아간 것 한다고 하신다. 현재는 여기저기 시멘트로 발라놓아 처음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다.

두 손을 합장하고 있는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있다. 법의는 희미하게 그 선이 보이고 있으며, 양편의 어깨에서 타원을 그리며 가슴께로 흘러내린 듯하다. 양팔의 소매에는 넓은 소매 끝을 알아볼 수 있다. 그나마 이 소매 끝으로 인해 법의의 형태를 유추할 수가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로 볼 때 장중함이 배어있는 석불이다.




이 석불은 특이하게 양손을 가슴께에서 마주하고 있다. 이런 지권인은 ‘공양인’에서 나타난다.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나타낸 표시이다. 공양인은 두 손을 마주 잡아서 연꽃 봉오리처럼 만든다. 이러한 지권은 보살이나 제자들, 혹은 부처님을 예배하는 자와 협시불이 부처님을 찬탄하고 숭배할 때 나타내는 동작이다.

선원사 석불좌상, 천년 세월을 그렇게 비바람에 씻기고, 사람들에게 훼손이 되면서도 그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석불좌상의 수인이 ‘공양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수인의 표시인지 궁금하다. 천년세월을 그렇게 앉아 공양을 드리고 있다면, 아마도 선원사를 찾아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세상 모든 이들의 아픔을 가시게 해 달라는.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인 윤영채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5월 22일 찾아간 집은, 일반적인 고택에서 보이는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집의 구조가 일반 양반집이나 민초들의 형태가 아닌 특이한 형태로 꾸며져 있다. 집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많은 옛 고택을 나름대로 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생소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집은 원래 사람이 생활을 하는 고택은 아니었다. 현재 안채와 중문채, 문간채를 겸한 사랑채 등이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 형태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은 원래 남원을 ‘방(坊)’이라는 작은 행정구역으로 나누면서 48개의 방을 조성했는데, 그 중 ‘이언방(伊彦坊)’에 속하였던 곳이다. 이언방이란 아마도 선비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48방 중 최고의 명당에 자리해

이 이언방이 선비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옆에 서원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집은 중종 6년인 1511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돼, 5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집이다. 이 이언방은 48방 중 가장 명당에 속한다고 한다. 이 건물은 이언방이라는 마을에 있던 집으로 ‘동대(東臺)’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관청의 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이 건물이 남원 수령의 별장이었다고도 한다. 건물은 중앙에 안채인 듯한 세 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편에 부속건물을 붙여지었다. 현재는 개인 소유로 되어있는 이 집은, 그 형태가 남다르다. 우선은 집의 전체적인 구성은 일반적인 고택과 그리 큰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중간에 살림집으로 개조를 하면서 약간의 형태가 달라진 듯하다.



전체적인 구성으로 볼 때 현재의 문간채에 붙은 사랑채는 후에 다시 붙어 지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대청의 옆에 붙은 날개채 역시 근자에 들어서 사람이 살림을 할 수 있도록 고쳐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 높임마루가

윤영채 가옥의 사랑채는 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대문을 마주하고 좌측으로는 방으로 꾸몄다. 그리고 그 끝에는 판자문을 달아낸 툇마루를 두고 있다. 이 사랑채를 나중에 꾸몄다는 것은 집의 구조로 보아 알 수 있다. 낮게 막힌 담이 사랑채에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 안에 중문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이 중문은 안채의 뒷마당으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문으로만 사용이 가능하다.



중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방이 한 칸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사이를 두고 한 층이 높은 방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이 중문에서 대청까지는 모두 세 단으로 높아진다. 두 개의 방과 안채 건넌방 사이에는 높임마루가 있다. 일반적인 높임마루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뒤로는 벽을 막아 판문을 달고, 마루 밑으로는 아궁이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어느 집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아마도 이 집의 특성상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듯하다. 이곳이 명당이기 때문에 지형을 건들이지 않고, 그대로 지형에 맞게 축조를 한 것이란 생각이다.



활주조차 색다른 윤영채 가옥

넓은 대청은 아무런 장식이 없다. 관청의 동헌을 보는 듯하다. 뒤로는 세 칸 모두 판문을 시원하게 달아냈으며, 마주보고 우측으로 부엌과 안방, 윗방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이 살림을 하기 위해 꾸민 집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그런 집을 후에 살림을 할 수 있도록 여기저기 개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부엌의 바깥 지붕은 활주를 따로 주추를 놓지 않고, 기둥에 기대어 건물 주추위에 올려놓았다. 윗방의 뒤편에는 벽을 돌출시켜 다락의 용도로 사용했다. 전체적인 집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졌다고 하지만, 중문채와 안채의 사이에 특이한 형태의 높임마루와,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꾸밈새 등이 특이하다. 옛 고택은 아무리 돌아보아도 새로운 것은, 바로 이런 색다른 모습을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남원 선원사 절집에 식구가 늘었습니다.
바로 ‘달님이’와 ‘별님이’죠
아래 첫 번째 사진 중 좌측에 머리 위가 하얀 녀석이 별님이고
눈 주변에 검은 털이 많은 녀석이 달님이입니다.

두 녀석 모두 이제 세상에 태어난 지가 50일이 채 안되었습니다.
모두 암놈인데 건강합니다.
이 녀석들 교배종이라고 하는데
종이 무엇인지 명칭을 들어도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사진 좌측이 달님이 이고, 우측에 머리 위가 많이 하얀 녀석이 별님이입니다.

두 녀석 모두 건강합니다.
별님이 녀석은 낯을 가리지 않습니다.
온 방안을 신나게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실례를 해놓기도 하고요.

별님이랍니다

두 녀석 모두 건강합니다.
별님이 녀석은 낯을 가리지 않습니다.
온 방안을 신나게 돌아다닙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실례를 해놓기도 하고요.

달님이고요

그와는 반대로 달님이 녀석은 게으름뱅이입니다
엎드려 앉아 도대체 움직이려고 하질 않습니다.
사람이 다가가도 눈만 껌벅거리고 있죠.
이 녀석은 그렇게 하루 종일 버티고 있습니다.


이 녀석들 볼 일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직은 너무 어려 혼을 낼 수도 없습니다.
그냥 두 녀석 다 건강하기만을 바랍니다.


남원시 산동면 식련리 221번지에 있는 승련사는 원래 ‘금강사지’라는 폐사지였다. 이 금강사지는 문수보살의 성지로 전해진다. 이곳의 삼성각 뒤편에는 높이 2m 정도에 길이가 10m 정도 되는 바위들이 있다. 여러 개의 조각으로 된 바위들이 줄을 지어 있는데, 이 바위에 희한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를 마을 사람들은 ‘기차바위’라고 부른다. 길게 늘어선 것이 기차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이 바위의 넓적한 면에는 밀교의 문양인 유가심인 2점과, 그 옆에 내려 쓴 ‘옴마니반메훔’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런 밀교의 문양이 왜 이곳 옛 사지 인근 바위에 새겨진 것일까?


우주의 이치를 상징한 유가심인도

유가심인도는 우주의 이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높이가 70cm 정도로 음각한 유기심인은, 극락 만다라의 세계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는 깨달음의 최고 경지를 공으로 표시를 했으며, 그 위쪽은 부처님의 모습을 형상화 하였다는 것이다.

승련사 주지인 경헌스님은 이곳 폐사지에 들어와 처음으로 절을 중창하고, 이 유가심인도를 보고는 무당들이 이곳에 와서 부적을 파 놓은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 저 바위에 있는 그림을 보고는 무당들이 이곳에 부적을 파 놓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오대산 적멸보궁 뒤에도 같은 그림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알아보니 밀교의 문양이라는 것이죠. 고려시대에 이곳이 밀교의 수행도량으로 유명했나 봅니다.”



그러면서 이 유가심인도를 찾아보기 위해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한다. 지금은 이 유가심인도에 대해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런 밀교의 문양인 유가심인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옛 스님들이 이곳 폐사가 된 금강사에 거처를 정하시고, 저 그림을 부처님의 고행상으로 알고 정진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가심인은 얼핏 보면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것처럼 보인다. 마치 팔과 몸 다리를 어느 지방의 장인이 조각을 하다가 완성을 하지 못한 듯하다.

“저 유가심인은 머리가 없어요. 아마도 부처님을 상징할 때 저기까지만 조각을 하고, 그 위는 우주를 머리로 삼았다고 볼 수 있죠”

마치 머리가 없는 마애불을 조성한 듯한 유가심인도. 그 위에 머리는 우주가 된다고 하니, 그 깊은 깨달음을 알 수가 없다.



고려 때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유가심인

삼성각 뒤편으로 돌아가 바위를 유심히 살펴본다. 이곳은 고려 때 절이 있었다고 하는 곳이다. 금강사라는 절이 어느 시기에 무슨 이유로 사라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다만 고려 때의 절이라고만 전해질 뿐이다. 남원지역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수많은 절들이 화재로 인해 폐사가 되었다. 혹 금강사도 그 당시에 소실이 된 것이나 아닌지.

바위에는 유가심인도 2점과 옴마니반메훔이란 글씨 말고도,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조성한 흔적들이 보인다. 잘못 본 것인지는 몰라도 안상과 같은 형태로 파 들어간 듯도 하다. 아마도 이 절이 고려시대의 절임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밀교의 상징인 유가심인. ‘비밀불교’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는 밀교가, 고려시대에 이 지역에 들어와 수행을 한 흔적이다. 밀교는 중생에서 부처를 향해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이미 깨달음을 성취한 보리의 세계를 말한다. 아마도 승련사 뒤편 바위에 새겨진 유가심인도 그러한 깨달음의 성취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유가심인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그 결과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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