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하고 있는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남원의 지세를 실펴 보니, 객산인 교룡산이 주산인 백공산보다 강해, 지세가 약한 주산의 힘을 돋아주어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였다는 것.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의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선원사는 한 때는 가람의 크기가 만복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다. 그 후 조선 영조 30년인 1754년에 부사 김세평이 현재 양로당의 전신인 노계소 신도계와 협의하여 복구하였다고 한다.

도심 속에 자리한 선원사. 좌측이 약사전, 우측이 대웅전이다. 전각 앞게 각각 두 개씩의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보물이 있는 도심 속의 절 선원사


선원사는 도심 한 복판에 자리한다. 예전에는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라고 하여, 해질녘 울리는 선원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을 한 경치로 삼을 정도였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동종, 약사전 등의 유형문화재와, 문화재자료인 대웅전 등이 소재하고 있다.

도심 속에 있는 고찰답게 선원사에는 심심찮게 관광객들과 외국인들도 찾아든다. 도심 속에 이러한 고찰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색다르게 느껴지는가 보다. 그들은 선원사에 들려 무엇을 가장 먼저 살펴볼까? 그것은 바로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문화재의 안내판이다. 안내판이란 그 절에 어떠한 소중한 문화재가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문화재의 보존과 홍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약사전과 약사전 앞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보물 철조여래좌상과(가운데) 유형문화재 약사전의 안내판이다.

지워진 안내판,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낯 뜨거워

남원은 문화재가 많은 곳이다.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의 양으로 따지면, 볼거리가 다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원에서 문화재를 찾아보기란 정말로 힘들다. 어딜 가나 길거리에 서 있는 안내판에는 만인의총과 광한루원 밖에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론 이 두 곳의 사적과 명승은 남원을 대표할만한 문화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화재는 큰길서부터 유도를 하는 안내를 하는 것이 기본이다. 어느 곳을 가든지 큰 길에 서 있는 문화재 안내판을 보고 문화재를 찾아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문화재도 없고, 역사도 입증되지 않은 사찰은 버젓이 공식적인 안내판에 소개가 되어있고, 정작 역사가 입증되어 있는 사찰은 그 어디에도 안내를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과 유형문화재인 동종 안내판과 문화재자료 대웅전 안내판. 그러나 정작 유형문화재인 동종은 약사전 안에 있었다.

더구나 보물 등 문화재가 소재하고 있는 선원사 등은 어디에도 길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선원사 약사전과 대웅전 앞에 서 있는 네 개의 문화재 안내판은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이다. 글자가 다 지워져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안내판이 이 정도인데도 새로 제작 중이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각 지자체마다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하나라도 더 많이 알리고, 그것을 이용해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 요즈음은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등에 관심을 갖고 자녀들과 답사를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남원의 문화재는 모두 꽁꽁 숨어 있다. 제대로 된 유도를 하는 안내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지워져 알아볼 수조차 없는 안내판 때문이다.



문화예술도시라는 남원. 과연 이 모습을 보고도 그런 자랑을 할 수 있으려는지. 낯 뜨거운 이러한 안내판. 하루 빨리 시정이 되기를 바란다.

전북 남원시 도통동에 소재한 천년고찰 선원사.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세가 객산으로 힘이 센 교룡산을 누르고, 주산으로 힘이 약한 백공산을 복돋아야 남원이 번창할 수 있는 곳이라 판단하고, 백공산의 모체는 천황봉 밑 만행산 줄기이므로 만행산의 힘을 빌어 교룡산의 힘을 누르고자 백공산 날줄기 끝에 선원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천년고찰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선원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과, 약사전, 대웅전, 범종 등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으며, 남원팔경 중 '선원모종'이 들어있는 유명한 절이다. 이 고찰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작은 일주문 안으로 절집을 들여다본다. 한때는 30여채의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곳이다. 범종각 앞에도 가을은 깊어간다.




가을은 절집 어디에나 자리하고 있다. 절집 안에 피어있는 가을꽃들이 이제 절정에 달했다




선원사는 돼지감자차를 생산하는 곳이다. 절집 여기저기에도 꽃들이 가을을 알린다. 그리고 수확을 하고 난 밭에도 노란 은행잎들이 떨어져 가을이 깊었음을 이야기한다.



밭에서 수확을 한 형형색색의 호박들이 정겹다. 그리고 이 고찰에는 봉춤을 추는 봉순이가 산다. 

춘향골 남원. 얼마 전인가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망발을 했다고 남원이 분노했다. 도저히 한 지역의 방백이 할 소리가 아닌 말을 했다는 것에, 참으로 참담한 느낌이다. 이 춘향골 남원에는 예부터 팔경(八景)이 전해져 내려온다. '남원팔경(南原八景)'을 예전에 용성관이 있었다고 해서 '용성팔경(龍城八景)' 또는 ‘대방팔경(帶方八景)’이라고도 불렀다.


제1경 '교룡낙조'(蛟龍落照) - 교룡산에 비치는 석양풍경. 구름이라도 걸리면 그 낙조에 무든 구름이 가히 환상이다.
제2경 '축천모설'(丑川募雪) - 함박눈이 내리는 축천의 저녁 설경을 말한다.
제3경 '금암어화'(錦巖漁火) - 남원을 가로지르는 요천에서 밤에 횃불로 고기 잡는 풍경이다.
제4경 '비정낙안'(費亭落雁) - 비안정 뜰 앞 요천 백사장에 떼지어 나는 기러기들의 풍경을 말한다.



제5경 '선원모종'(禪院暮鐘) - 해질녘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종소리. 예전 남원성 동문 밖에 있는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 남원의 비보사찰인 선원사의 그윽한 종소리.
제6경 '광한추월'(廣寒秋月) - 광한루 하늘 위에 떠 있는 가을달이다.
제7경 ‘원천폭포'(源川瀑布) - 주천계곡을 흘러 내려 가르며 아홉 폭포를 이루는 계곡의 구룡폭포의 물소리.
제8경 '순강귀범'(순江歸帆) - 저녁의 해질 무렵 황혼과 함께 돌아오는 순자강의 고깃배 무리이다.




이런 남원팔경 중 제5경에 해당하는 천년고찰 남원 선원사. 그 경내에 작은 연못이 있다. 요즈음 그 연못에 심겨진 백련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순백의 아름다움. 그 꽃의 모습을 담아보았다.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1에 소재한 선원사. 만행산 자락에 지어진 절로.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선원사는 한창 사세가 번성할 때는 전각이 80동이나 있을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조 30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히 불타 전소가 되어버렸다.

영조 30년인 1754년에 김세평이 약사전과 명월당을 재건하였으며, 창건 당시의 철불을 약사전에 안치하였다. 선원사 약사전에 봉안된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철불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흔히 이 철불을 설명하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설명에는 창건 당시 조성한 철불이라고 한다. 선원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헌강왕 때인데, 창건당시 조성한 철불이 어떻게 고려 철불이 될 수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선원사 정경과 보물인 철조여래좌상이 있는 약사전

약사전 앞에 배를 묶는 석주는 무엇인고?

조계종 제17교구 금산사의 말사인 남원선원사는 전형적인 비보사찰이다. 풍수비보사찰인 선원사는 남원을 구하는 절이다. 도선국사는 남원을 가로질러 흐르는 요천을 보면서, 남원의 지세가 물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고 생각을 하였다. 도선국사는 선원사를 창건하면서 약사전 앞에 두 개의 석주를 세워놓았다.

이 석주는 바로 남원이라는 배가 떠내려 갈 것을 걱정해, 배를 묶어놓기 위한 것이다. 이 입석이 없다면 남원은 그대로 물에 정처 없이 떠도는 배에 지나지 않아,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아직도 선원사 약사전 앞에는 배를 묶어두는 입석이 서 있다. 이 작은 입석 하나가 남원이라는 커다란 배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다.


 

약사전 앞에 놓여있는 배를 묶는 석주

칠성각에 수궁가는 무엇인고?

선원사는 현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그런 선원사가 예전에는 꽤나 운치가 있었나보다. 아마도 남원팔경 중에 끼어있는 ‘선원모종’도 선원사가 남원의 상징이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해가 떨어질 때쯤 요천 냇가를 거닐면, 은은히 들려오는 선원사의 범종소리. 아마도 그 무엇보다 푸근하지 않았을까?

<아니리>

그때여 어사또 농부들이 모심는 구경을 허시고 게서 떠나 남원 구중을 들어갈제

<진양조>

박석티를 올라서서 좌우산천 둘러보니 산도 옛 보던 산이요 물도 보던 물이다 마는 물이야 흐르난 것이니 그물이야 있겄느냐 광한루야 잘 있드냐 오작교도 무사헌가 동림 숲을 바라보니 춘향과 나와 둘이 서로 꼭 붙들고 가느니 못 가느니 이별허든 곳이로 구나

선원사 저녁 종성 옛 듣던 소리로 구나 북문 안을 들어서니 서리역졸 문안커날 명일사 거행을 분부허시고 춘향집을 찾어갈 제 일락서산 황혼이 되야 집집마다 밥짓노라 저녁 연기 자욱하야 분별헐 길 전히 없다 차즘 차즘 찾어 갈 제 춘향 문전 당도 허여 동정을 살펴보니 그때여 춘향어미난 후언의 단을 뭇고 두손 합장 무릎 꿇어 하나님 전의 축수를 허는디

비나니다 비나니다 천지지신 일월성신 오방신장 후토신령 화위동심 하옵시오 임자생 성춘향은 낭군 위하여 수절을 허다가 석문삼청 옥중으서 명재경각이 되었으니 삼청동 이몽룡씨 어서 수이 급제허여 전라 감사나 전라 어사로나 양단간의 수이 허여 오늘이라도 남원을 내려와겨 내 딸 춘향 살려주오


수궁가에 등장하는 토끼와 거북이 선원사 삼성각에 있다

선원사의 저녁 종소리는 남원 사람들한테는 꽤나 마음 속 깊이 각인이 되어있었나 보다. 판소리 춘향가에도 선원사의 저녁 범종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면. 이 대목은 이도령이 과거에 급제를 한 후 박석티고개를 넘어서 춘향의 집으로 향하는 대목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선원사 삼성각에 보면 자라가 토끼 한 마리를 등에 태운 형상이 문설주 위에 조각이 되어있다. 도대체 왜 삼성각 문 위에 자라가 있는 것일까? 그 해답이 궁금했는데, 이제야 조금 빛이 보이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약사전 앞에 서있는 배를 묶는 석주 때문이다.


선원사는 물에서 남원을 지키는 사찰.

즉 선원사 앞에 도선국사가 절을 처음으로 이룩하면서, 배의 형태인 남원을 지켜내기 위해 세웠다는 배를 묶는 석주가 있다. 그곳에 남원이라는 배를 묶어, 남원이 좌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약사전 뒤에 자리한 칠성각 문 위에, 별주부인 자라와 토끼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물에 빠진 토끼 같은 약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을 상징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래저래 남원 선원사는 물과 연관이 지어진다. 즉 물이 차면 좌초될 수밖에 없는 남원을 꽁꽁 붙들어 매어놓고, 그래도 물난리가 난다면 자라가 토끼를 구하 듯, 모두 구해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남원이 물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지 않은 것도, 도선국사의 석주와 삼성각의 별주부 때문은 아닐까?

남원 선원사의 알 수 없던 두 가지 물건. 늘 지나칠 때마다 ‘무엇에 쓴 물건일꼬?’를 생각했는데, 그 의문이 풀린 듯하다. 그래서 선원사는 늘 남원 사람들에게는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인가 보다.

선원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절이다. 선원사는 신라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처음으로 창건을 했다고 전해진다. 도선국사는 남원의 지형이 주산인 백공산이 객산인 교룡산에 비해 지세한 허약한 것을 알고, 백공산의 지세를 높이고자 만복사와 대복사, 그리고 선원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선원사는 초창기에는 70~80명의 승려들이 상주하던 절로, 만복사에 버금가는 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만복사와 함께 소실이 되어버렸다. 현재 선원사는 남원 시내 한 복판에 자리한다. 선원사에는 보물 제422호인 철조여래좌상과 지방문화재 제119호인 약사전, 지방문화재자료 제45호인 대웅전, 그리고 동종이 전한다.


선원사 일주문과(위) 경내. 좌측 전각이 철불여래상이 모셔진 약사전이고, 우측에 대웅전이다.

남원팔경 중 제5경인 선원모종(禪院暮鐘)

해질녘에 은은히 들려오는 범종소리. 예전 남원성의 동문 밖에 자리한 선원사에서는 저녁예불을 알리는 범종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 소리에 대한 기록은 『신증판 남원지』에 전하는 남원팔경에 기록되어 있다. 저녁예불 시간에 울리는 범종소리, 전북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이 된 그 범종은 어떻게 소리를 내었기에, 팔경 안에 들었을까? 선원사를 찾아 범종을 둘러보았다.




사진 위로부터 약사전, 약사전 뒤편에 걸린 괘불함, 대웅전과 대웅전의 용조각

문화재 안내판에는 선원사 대웅전 안에 범종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나 안에 들어가 확인을 하니, 대웅전 안에 있는 범종은 최근에 제작이 된 것이다.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께 물으니, 범종은 약사전에 있다고 한다. 약사전 안으로 들어가니 한 편에 범종이 보이는데, 그리 크지가 않다. 높이 66cm, 입 지름 47cm의 조선시대의 범종이다.

그러나 종의 모습은 작다고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여느 종이 아니다. 종의 맨 위에 종을 매다는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용의 각 부분은 따로 제작을 해 붙여서 완성한 듯하다. 종의 몸체에는 4줄의 가로선을 긋고 맨 위에는 작은 원 11개를 나열하였다. 그 밑으로는 보살상을 4곳에 놓고, 보살상 사이에는 꽃과 덮게, 관을 나열하였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선원사 범종과 용뉴(아래)

종을 울려보고 싶은 마음

중앙에 배가 부른 부분은 4개의 사각형 모양의 유곽을 만들어 둘레를 파도무늬로 장식하였다. 아래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무늬를 새기고, 위와 아래에는 글자를 남겼다. 종으로서도 작고 거친 모양이지만, 문양이 다채롭고 특이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종을 주조한 사람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원 출생인 최연은 선조 36년인 1603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같은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최연은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예조좌랑이 되었으나, 이이첨 등의 모의에 반대하다가 대북파에 의하여 파직을 당했다. 고향으로 낙향한 최연은 12년 동안이나 은거를 하였는데, 그 때 지은 시 중에 이런 가사가 전한다.

(전략)
千年石色帶方城 천년 묵은 돌 색깔은 대방성이 틀림없다.
主人有酒客忘發 주인이 권한 술에 객은 일어설 줄 모르더니
醉伴沙驅眠蓼汀 말을 몰아가던 취한 벗, 요천가에 잠이 드네.

아마 이 시에서 ‘십리 먼 곳 신라시대 종소리’란 바로 선원사가 아니었을까? 남원팔경에 들어가 있는 선원모종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얼마나 그 종소리가 맑고 청아했으면, 선원모종이라 했을까? 불현 듯 종소리가 듣고 싶다. 그래서는 안되지만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범종을 울려본다. 폐부를 흔드는 듯한 은은한 종소리. 살짝 쳤는데도 그 소리의 여운이 상당하다.




그랬다. 이렇게 맑은 종소리가 저녁예불 시간에 울렸을 것이다. 남원성 동문 밖을 나서면서 이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감탄을 했을 것이고, 그 소리에 취했을 것이다. 작은 종소리 하나에도 혼을 담아낸 우리의 선조들. 그저 머리가 절로 숙여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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