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자 전원이 프로의식이 넘치는 열정무대 만들아 즐거움 배가

 

출연자 전원이 말 그대로 프로였다. 프로란 전문가들을 일컫는다. 어떤 분야가 되었던지 프로는 아름다운 법이다. 27일 오후, 수원남문로데오거리에 소재한 남문로데오아트홀 무대에 올려진 20회 재인의 향연무대. 춤과 소리, 굿 등 총체예술무대로 마련된 이 공연의 출연자는 고작 14명이었다.

 

14명의 출연자가 10종목의 굿과 춤, 소리를 감당해 낸 것이다. 한 사람이 많게는 5프로 이상을 소화해내며 꾸민 무대였다. 27일 오전 10시부터 무대를 준비한 출연자들은 오후에 한 차례 무대연습, 또 한 차례의 리허설, 그리고 오후 7시 공연까지 세 번의 공연을 감당해 낸 셈이다. 제인청의 프로그램이 일반적은 무대공연예술에 비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출연자 일인당 두 시간 이상의 공연을 한 셈이다.

 

e수원뉴스 하주성 기자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공연은 며칠 동안 퍼붓다시피 한 장맛비로 인해 극장 안은 냄새가 나고 여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관람객들은 끝까지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함께 즐기는 모습이었다. 재인청 기본무로 시작한 이날 공연은 두 시간이 넘도록 진행되었으나 아쉽다라는 말로 이날의 공연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재인들의 무대는 진행부터 모든 것이 다르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분들은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는 공동체문화라는 점입니다. 일제가 1920년대 우리문화말살장책을 펼친 것도 우리문화가 바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뭉칠 수 있게 만드는 공동체 때문입니다. 오늘 여기 모이신분들은 재인의 향연 공연을 관람하시면서 바로 우리민족의 끈끈한 공동체를 배워 가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사회자는 재인의 향연무대는 공부하는 공연이라면서 팸플릿 안에 모든 설명을 다 되어있으니 집에 가져가서 공부하라고 했다. 진행을 보는 순간에도 사회자는 프로그램의 설명보다 공연자들의 특징과 자랑, 그리고 우리문화의 자랑스러운 점 등을 설명하는 것으로 무대를 진행했다.

 

또한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공연관람 시 지켜야할 예절과 어떻게 공연을 관람해아 바로 본 것인가? 등에 대해서 알려주는 시간을 가져 기존의 무대공연에서 보던 진행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진행했다. 그런 색다른 진행을 일일이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관람객들까지 보여 재인의 향연 무대는 말 그대로 공부하는 공연임을 알 수 있는 무대였다.

 

 

최선을 다한 공연자들, 신명나는 무대 만들어

 

이날 무대에 오른 공연은 굿과 춤, 소리 등으로 구분됐다. 굿은 경기 안택굿 명인 고성주의 제석굿과 경기도무형문화재 제58호 안산잿머리성황제 이수자인 김진섭의 신장·대감굿이 순서에 선보였으며 반주에는 피리에 곽승헌, 바라는 전형길이 담당했고, 굿을 진행하는데 도움은 이은애와 전승훈이 도맡았다. 굿을 하는데 있어 장단은 전문적인 굿을 하는 무격이 맡아하게 되므로 고성주 명인과 김진섭 이수자가 번갈아 맡아했다.

 

가장 많은 종목이 무대에 오른 재인청 춤은 재인청기본무, 교방무, 엇중모리신칼대신무, 노들강변, 살풀이춤, 한량무 등이 무대에 선보였다. 재인청 기본무는 어려서부터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 재인청 춤을 사사 받은 고성주 명인 외에 문하생인 김현희, 김미경, 박미애 등이 추었다. 이들 무대에 오른 공연자들은 모두 20년 내외의 춤을 춘 춤꾼들로 말 그대로 춤생춤사한다는 사람들이다. 이미 전국무용경연대회 등에서도 대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외에 살풀이춤과 한량무는 고성주 명인이, 교방무와 엇중모리신칼대신무, 노들강변은 김현희, 김미경, 박미애 등이 담당했다. 소리는 남도소리로 조진숙의 심청가 중 심봉사가 잔치에 가는 대목을 불렀으며, 중요무형문화재 5호 판소리 춘향가와 적벽가 이수자인 강승의와 문하생인 양용자, 조진숙, 이정은이 성주풀이 등 남도민요를 관객에게 들려주었다. 추임새를 넣어가며 신명나는 장단을 친 진민구 고수는 전국고법대화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기도 한 판소리 전공을 한 실력자이다.

 

최고의 프로들이 만들어 낸 가장 아름다운 무대인 20회 재인(才人)의 향연. 2시간 20분이라는 긴 시간을 관람석 맨 앞자리에 앉아 끝까지 지켜 본 한창석 수원시 주민자치협의회장은 공연이 빨리 끝나버려 아쉽다고 했다. 이날 공연에는 남문로데오상인회 천영숙 회장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며, 공연이 끝나고 출연자들이 모두 무대에 나와 인사를 할 때까지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는 멋진 공연이었다. 공연 마친 후 고성주 명인은 최선을 다했가 때문에 모든 것이 완벽한 무대였다고 했다.

 

“32살에 내림을 받았습니다. 그 전부터 이미 신통이 되었는데 계속 거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너무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도 제가 종가집에 종부인데 어떻게 이 길을 걷겠어요. 당시만 해도 무당이라고 하면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할 때인데요. 그리고 시집이 천주교를 믿기 때문에 아무도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이해해 주지 않았죠.”

 

사연이 없는 기자(祈子)란 없다. 누구나 내림을 받기 전에 고통을 먼저 받는다. 대개는 이를 무병(巫病) 또는 신병(神病)이라고 한다. 신병은 여러 가지로 찾아온다. 물질적으로 오는 경우는 이유 없이 많던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딱히 돈을 나갈 이유도 없었지만,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시집을 와서 찾아온 신병

 

또 한 가지는 정신적인 신병이다. 헛것이 보이는 환시(幻視) 현상에, 소리가 들리는 환청(幻聽) 현상까지 겹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는가 하면, 밤새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병원에 가도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함께 찾아오면 그 누구도 버티기가 힘들다.

 

결국엔 내림을 받게 되고 만다. 그리고 나서야 아프던 몸도 나아지고, 우환이 들끓던 집안도 잠잠해진다. 신병을 앓으면서도 계속 내림을 받기를 거부하면 급기야는 인다리현상이 나타난다. 주변에 가족들이 한 사람씩 죽어나가는 것이다. 인다리란 사람으로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신병이다.

 

남편도 믿어주지 않았어요. 제가 이런 신병이 있다는 것을요. 참 갑갑한 시간이었죠. 결국엔 대소변을 받아내고 몸이 가루가 되는 듯한 고통이 와서야 내림을 받았죠. 세류동에 거주하시던 정종화 선생님께 내림을 받았는데, 당시는 수원에서 가장 잘 불리는 분이셨어요.”

 

 

신혼 초부터 이상한 것들이 보여

 

23세에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혼 때 시집의 조상을 보았다고 한다. 종가집이다 보니 집안에 식솔들이 많아 새벽 4시면 일어나 밥을 해야 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마당에 있더라는 것. 세를 들어 사는 집 손자가 말썽을 피우고 도벽이 있어 할머니가 걱정이 되어서 마당을 서성이는 줄 알았다고 한다.

 

저는 선을 보고 두 달 만에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시집을 와서부터 시집의 조상님들을 보기 시작했죠. 그 할머니한테 아이가 속을 썩이느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거예요. 뒤돌아보니 할머니가 보이지 않고요. 대개 시어머님이 시장을 저녁에 가는데 그날따라 일찍 장을 보러 가자고 하시데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시할머니 제사다라고 하시잖아요. 제가 본 할머니가 바로 시할머니였던 것이죠.”

 

그런데 시할머니 제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울컥하더라는 것이다. 살아서 잘해주지 죽은 다음에 잘해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더니 억울하고 분하다라는 말이 튀어 나왔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너무 몸이 아파서 내림을 받았지만, 남편은 사람취급도 해주지 않았다. 눈물로 점철 된 시간이 흘렀다.

 

 

재주는 신령이 주지 않아요.”

 

남들은 신을 받고나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고 했는데, 신을 받고나서도 고통은 가시지를 않았다. 벌써 2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세 번이나 변한 것이다. 그동안 남편도 사업에서 손을 땠다. 그리고 지금은 임영복 소장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한다.

 

시집을 왔을 때 큰 농장을 운영했어요. 연무동에서 갈비집도 크게 했고요. 그런데 어느 날 꿈을 꾸는데 비가 오고 물이 넘치면서 쪽박 하나가 그 물에 둥둥 떠다니더라고요. 한 마디로 쪽박을 찬다는 뜻이죠.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되고 말았어요.”

 

12거리 전수소 임영복(, 59)소장. 굿판에서 만난 그녀는 굿이 남다르다. 요즈음 들어 선거리 굿을 한다고 하면 소리 지르고 껑충대고 뛰기가 일쑤이다. 하지만 임영복 소장의 굿채는 남다르다. 품격이 느껴진다. 곱게 걷고, 소리 잘한다. 그런 임영복 소장이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235-15 자신의 자택 지하에 연구소를 개설했다.

 

 

경기지방의 굿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무당성주기도도차서(巫堂城主祈禱圖次序)에 기인한다. 그런 굿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는 옛말처럼, 제대로 굿채를 익힌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의 제주를 모든 기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한다.

 

요즘 기자들의 굿을 보면 저것이 과연 굿인가 할 정도로 민망할 때가 있어요. 굿은 장단, 사설, , 소리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종합예술입니다. 거기다가 신탁인 공수까지 곁들여야죠. 그런데 그런 채가 보이질 않아요. 그래서 12거리 전수소를 열고 1:1로 재주를 알려주려는 것이죠.”

 

굿판에서 만난 임영복 소장의 굿은 아름답다. 장단 잘 치고 소리 잘한다. 풍부한 문서까지 익혔다. 그래서 늘 굿판에 불려 다닌다. 이런 만신들을 보고 청배만신이라고 한다. 벌써 10년 세월 그렇게 팔도를 다니면서 굿판에 섰다. 그 재주를 공유하겠다는 것이다. 언제 또 그 신명나는 굿을 볼 수 있을지.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저승을 간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 저승이란 곳이 어디일까? 상여소리의 사설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라는 대목이다. 저승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 대목이다. 우리 소리가 갖는 극단적인 여유요, 어찌 보면 표현의 잔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사람이 죽으면 천도 의식이라고 하는 지노귀(진오기)굿을 한다. 전문적인 무격(巫覡-무는 여자무당, 격은 남자무당을 말한다)에게 굿을 일임하여, 망자의 넋을 위로하고자 함이다. 사람이 죽어서 49제 안에 하는 굿을 진진오기라 하고, 49일이 지난 다음에 굿을 하면 묵은 진오기라고 한다.

 

 

일본에서까지 찾아 온 경기도 굿판

 

823().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에 소재한 고려암. 고려암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대문 앞에는 경기 안택굿 보존회라는 현판이 걸린 것으로 보아, 전문적인 무격이 전안(신령을 모셔 놓은 신당)을 모셔놓은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4대 째 경기도 전통 안택굿을 이어오고 있는, 남무 고성주의 집이다.

 

고성주(, 58)18세에 내림을 받은 강신무이다. 어려서부터 춤과 소리를 배운 탓에, 내로라하는 굿 잘하는 무격으로 소문이 나 있다. 이날 진오기굿을 의뢰한 사람들은 남양주시에 사는 여흥 민씨의 자손들이다. 돌아가신 조상님들의 천도굿을 뒤늦게 하는 묵은 진오기 굿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날 굿판에는 굿을 하는 무격과 악사, 그리고 집안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 외에, 멀리 일본에서 이 굿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 동경에서 찾아 온 Efubun-no-ichi-inc 의 디렉터인 Ayumu Yasuhara(安原 步)이다. 사전 답사를 나왔다고 하면서 굿을 하는 것을 유심히 보면서 질문을 하고, 일일이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이른 아침부터 준비한 상차림

 

고성주의 전안은 상당히 넓다. 아마 우리나라의 무격들의 전안 중에서는, 가장 넓고 깨끗하다고 악사들이 말을 한다. 악사들은 굿판을 전문적으로 다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많은 무격의 집을 방문하기 때문에 많은 무격들의 전안을 보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부터 전을 부치고 과일을 씻어서 쌓고, 각종 떡을 진설한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다 마친 것이 오전 930분경.

 

 

이날 굿판에는 주무 고성주를 비롯해, 여무(女巫)인 서정숙(67), 임영복(59), 홍형순(40)과 악사 김상건(, 61) 등이 굿을 진행했다. 굿은 고성주의 앉은부정으로 시작해 임영복의 산거리, 서정숙의 불사거리, 고성주의 대안주와 이어서 서정숙과 임영복의 조상, 군웅 등을 마친 후 진오기굿인 바리공주의 차례로 진행이 되었다.

 

굿판은 열린 축제이며, 지켜가야 할 문화유산

 

우리는 흔히 굿판을 일러 열린 축제라고 표현을 한다. 굿판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함께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안택굿을 여는 집이 있으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참여를 한다. 진오기굿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생전에 고인과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해서, 고인의 극락왕생을 함께 기원하는 것이다.

 

 

그런 우리의 축제인 굿이 언제부터인가,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었다. 종교적인 심한 박해와 주변의 반대로 인해서, 전문적인 굿을 하는 굿당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다행히 고성주는 자신의 단골들의 굿은 언제나 자신의 전안에서 행한다. 그만큼 자신의 단골들에게 당당히 행한다. 이날 굿도 마찬가지였다.

 

오전에 시작한 굿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준비를 한 시간부터 따지면 11시간 정도가 소요가 된 셈이다. 굿의 끝판에 천기를 벗긴다.’고 하여, 제가 집 부부를 앉혀놓고 그 위에 오색천을 덮고 악귀를 쫒는 의식으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이때쯤이면 모두가 지쳐간다. 더구나 날이 무더워 평소보다 더 많은 고생들을 했다.

 

 

 

미신(迷信)’ ‘혹세무민(惑世誣民) 이라는 일제와 유교적 배타와 함께, ’우상숭배(偶像崇拜)‘라는 이종교의 배척 등으로 제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우리의 열린 축제인 굿. 그나마 근근이 맥을 이어가고 있는 경기도의 전통적인 굿 한 마당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외국에서도 눈여겨보기 시작한 경기도의 굿이, 정작 지역에서는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는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경기도의 전통굿이 제대로 전승, 보전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기안택굿은 예술적인 면과, 신성적인 면이 잘 조화를 이루는 굿입니다. 우리 굿은 연희와 신성이 한편으로 치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경기안택굿의 경우에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는 곳이죠.”

 

5월 9일, 오전 9시 30분.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번지에 소재한 경기안택굿을 보존하기 위해 보존회를 운영하고 있는 고성주 회장의 전안(신령들을 모셔 놓은 곳)에는, 경기대 사학과 2, 3학년 학생 30여명이 윤한택 교수의 인솔로 찾아왔다.

 

문화재를 현장에 나가 직접 보고 배우는 학생들이다. 학생들은 우리 굿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들은 후에, 제석굿의 시범까지 보는 시간을 가졌다. 2시간 동안 진지하게 경기안택굿에 대해 공부를 마친 학생들. 일부는 강의시간에 맞추어 현장을 떠나고, 일부는 남아 점심대접까지 받았다.

 

‘우리 굿 처음 접했습니다. 절로 흥이 나네요.’

 

“오늘 여러분에게 제석굿을 보여드리는 것은, 제석이 자손들의 수명장수를 위하는 신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곳에 오신 여러분들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모든 일이 잘 되라고 수명장수와 부귀공명을 위해 축원을 하겠습니다.”

 

 

 

30여분 동안 제석굿을 하였다. 학생들은 박수로 화답을 했다. 자신들을 위해 보존회원들(장고 이정숙, 피리 박노갑)까지 모여 굿판을 열어준 보답이었다.

 

굿을 마치고 난 뒤 보존회 고성주 회장의 살아 온 이야기를 듣는 학생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점심을 먹기 전 잠시 밖으로 나온 사학과 3학년 이아무개군에게 물어보았다.

 

 

“그동안 굿을 본 적이 있으세요?”

“오늘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굿은 미신이라는 말을 들어와서인가, 그런 것을 접한다는 것이 왠지 내키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보시고 나서는 어떤 것 같으세요?”

“오늘 보니 정말 우리민족의 정서에 맞는 듯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냥 복을 달라는 것이 아니고, 복을 준다는 것이 색다른 것 같아요”

“오늘 처음으로 굿의 한 부분을 보시고 난 뒤 느낌은?”

“앞으로 우리 것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제석굿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잘못 된 교육이 불러온 우리것에 대한 무지

 

우리는 그동안 굿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무지한 교육을 시켜왔던 사실이다. 일제의 잔재로 ‘미신’이라고 치부를 하였는가 하면, ‘우상숭배’라는 말로 도외시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록을 볼 때 우리나라의 무속인(巫俗人)들은 고려 때는 각 고을에서 병의 치료를 담당했는가 하면, 조선조에서는 마을마다 병을 치료하는 의사와 함께 의녀(醫女)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오늘부터 우리 굿에 대해 그동안 안 좋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것을 다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 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난생 처음 굿을 보았다는 학생들. 예전에는 집집마다 안택을 하기 때문에, 마을 어디서나 굿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한 굿이 점점 ‘굿당’이라는 전문적인 장소가 소재한 산 속으로 숨어들면서, 점점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굿이 온전히 신성과 연희성을 함께 지켜가면서 전승이 되는 길은,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절대 미신이나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켜 주어야 할 것이다.

태평소 소리가 골목 안을 찢어놓게 울린다. 징과 바라가 그 소리에 더해진다. 빠른 박자로 두드려대는 소리에, 사람들이 골목 안으로 모여들었다. 대문 밖에서 까치발을 딛고 무슨 일인가하여 집안을 들여다본다. 4월 8일(일)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274-36호, 이정숙의 봄맞이 굿이 열리고 있다.

 

맞이굿이란 신을 모시는 기자(祈子 : 흔히 무속인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들이 자신이 모시는 신과 수양부리(자신의 신자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 혹은 삼 년에 한 번씩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봄에는 ‘꽃맞이 굿’. 가을에는 ‘단풍맞이 굿’이라고 부르는 이 맞이굿은 기자들에게는 가장 큰 굿이기도 하다.

 

 

굿은 마을의 축제였다.

 

부천 원미구 도당동에 소재한 재래시장인 강남시장 뒤편의 주택가 골목이다. 이층 옥상에서 아래로 내려 건 오색의 천이 바람이 흔들린다. 마당에는 상이 차려져 있다. ‘천궁맞이’가 시작되었다. 천궁맞이란 하늘에 굿을 하는 것을 알리고, 모든 신령들이 굿청으로 좌정을 하라는 ‘신맞이 의식’이다.

 

이 날의 당주 이정숙이 불사제석의 신복을 걸치고 부채와 방울을 들고 거성을 한다. 좁은 집안을 감안해 골목길에도 마을 주민들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 과거 우리네 풍습에 어느 집에서 굿이 있다고 하면, 그 날은 온 마을의 잔칫날이었다. 누구나 굿을 하는 집으로 가서 먹을 것을 나누고, 굿판에 함께 동참을 할 수가 있었다. 아이들도 어른도 모두가 참여하는 마을 전체의 축제였던 것이다.

 

 

인간의 서열보다 진한 신의 서열

 

굿판에서 사람들은 굿을 하는 무녀들의 신탁이라는 ‘공수’에 울고 웃고를 반복한다. 조상거리라도 할 냥이면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다 알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날 이정숙의 맞이굿에서는 특별한 것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다. 기자들은 내림굿을 해준 사람들을 ‘신의 부모’리고 하고, 내림을 받은 사람들을 ‘신의 자식’이라고 한다.

 

이 신의 부모나 신의 자식은 인간세상의 부모자식과는 또 다른, 신으로 인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다, 나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부모와 자식이 이루어진다. 이정숙은 수원 팔달구 지동 거주 고성주의 ‘신딸’이다. 이날 이정숙은 자신의 맞이굿을 하면서 고성주에게 ‘작두물림’이라는 의식을 함께 거행했다.

 

무당들은 작두를 탄다. 그러나 아무나 작두를 타는 것은 아니다. 작두별상 등 작두신령이 모셔져야 작두를 탄다. 이런 작두를 타는 형태는 내림을 주관한 신의 부모가 작두를 탈 경우 ‘작두물림’이라는 절차를 통해 ‘신의 자식’에게 대물림을 하는 것이다. 하기에 이 작두물림을 하는 의식은 상당히 성스러운 행위라고 표현을 할 수 있다.

 

 

 

 

대물림을 해야 하는 작두신명

 

“저는 신어머니인 최씨어머니에게서 작두물림을 받았습니다. 제 신어머니는 신딸 5명에 신아들 저 하나가 있었는데, 누나들은 아무도 작두물림을 받지 못했죠. 저 하나만 작두물림을 받았어요. 제가 내림을 받고 난 뒤 한 2년 정도 있다가 작두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받기가 두려웠다고 한다. 당시는 마을에서 작두를 타는 만신이 왔다고 하면, 인근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고는 했다. 그만큼 작두를 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그것도 작두물림을 한 작두만신이라야, 무당으로서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요즈음처럼 작두를 그냥 내림을 받았다고 타는 것이 아닙니다. 작두는 꼭 신의 부모에게서 작두내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올바른 신명이 신의 자식에게 전해지는 것이죠. 우리 신딸들도 작두를 모셔놓고 있고, 그동안 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작두물림을 하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한 신명 줄을 가진 신의 자식이 되는 것이죠.”

 

우리네들이야 이런 영적인 것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찬찬히 설명을 듣다가 보니, 그 말이 맞을 것 같다. 옛 말에는 ‘영험은 신령이 주나, 재주는 배워야 한다.’고 했다. 신내림을 받으면 영험은 신령이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굿을 하고 굿거리 재차를 익히고, 음식을 만들고 하는 등, 이런 모든 굿에 관한 것은 신의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이다.

 

“저는(이정숙) 아버님(고성주)에게서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혼이 나면서 배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님의 신의 자식이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작두물림을 받으므로 해서, 이제야 비로소 이버님의 신딸이 되었다는 것을요.”

 

수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제대로 배우고 익혔다고 한다. 잘못하면 눈물이 날 장도로 꾸지람을 하고, 그런가하면 포용을 하는 마음이 너무 커, 오히려 누가 될 것만 같았다고 한다.

 

“천년만년 억수같이 불려주마”

 

고성주의 신딸들은 작두물림을 받던 날 당의를 입었다. 그것은 고성주가 모시고 있는 작두별상이 남별상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신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다. 먼저 고성주가 작두를 갖고 논다. 그리고 작두를 신딸인 이정숙에게 넘겨주자, 작두를 갖고 마당에 마련한 작두를 탈 곳으로 나갔다.

 

작두를 잘 못 타다가 다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을 수가 있다. 부정이 타 발을 잘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작두 위에 오를 수 있어야, 영험한 만신으로 소문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작두공수’가 제일이라고 한다. 즉 신탁인 공수 중에는, 작두위에서 주는 공수가 제일 영험하다는 것이다.

 

작두 위에 오른 이정숙이 오방신장기를 받아들고 단골들에게 공수를 준다. 그리고 작두공수를 마친 후 작두위에서 내려섰다. 다음 날인 9일 화성시 매송면 송라리에 소재한 쌍룡사 굿당. 이곳에서는 역시 고성주의 신딸인 박현주에게 ‘작두물림’이 있었다. 올 봄 맞이굿에서 두 명의 신딸에게 고성주가 작두물림 의식을 행한 것이다.

 

“이제는 이 아이들이 제 신명을 따라 작두를 탈 때가 되었죠. 대개 작두물림은 맞이굿에서 전해지는 것이 정상적인 물림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두 명의 신딸들이 비로소 제 신명을 이어받은 것이죠. 이런 의식은 저희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의식입니다”

 

박현주가 작두 위에 올라섰다. 순간 일갈을 한다.

 

“천년만년 억수같이 불려주마”

 

그리고 오열을 한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아무도 모른다. 작두를 갖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신도들은 눈물을 흘린다. 작두는 왜 눈물을 흘리게 만들까? 누가 그 서슬이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서기를 좋아할까? 어찌 보면 신령의 사람들이라는 징표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듯도 하다. 그런 작두물림을 받았으니 어찌 슬픔이 밀려오지 않을까. 이제는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신령의 여인이 된 것이다.

“아버님의 손을 잡는 순간 무엇인가 뜨거운 기운이 저에게로 전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머리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아, 나는 이제 신령님에게 시집을 가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바람이 불지를 않았으면 작두 위에서 내려오고 싶지가 않았어요.”

 

부천 도당동에 거주하는 고성주의 큰 신딸인 이정숙의 말이다, 수원시 팔달구 교동에 거주하는 작은 신딸이라는 박현주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아침까지만 해도 ‘내가 작두를 어떻게 타지’ 하면서 걱정을 했는데, 아버지가 손을 잡고 작두를 넘겨준 후에는 그런 걱정이 싹 달아났어요. 얼른 작두 위로 올라가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이틀 동안 두 명의 신딸들에게 작두물림을 해준 고성주는 이렇게 말한다.

 

“작무물림을 핼 때는 제 속은 숯검뎅이가 다 됩니다. 작두 위에 제대로 오르기는 할까라는 걱정부터, 과연 잘 불리는 기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죠. 작두날을 밟고 서는 것만 보아도 잘 불릴 것인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 이틀 동안 두 명의 여인이 작두신령의 아내가 되었다. 그 작두신령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가 않다. 작두물림이라는 의식을 통해 같은 신명을 가진 무한한 힘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이렇게 신의 부모와 신의 자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맙다고 큰절을 하는 신딸들. 아마도 고성주의 마음은 시집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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