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76에 소재한 중요민속자료 제147호인 청천리 고가는,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집이다. 현재는 곁에 충북양로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한 때는 이 집을 양로원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이 청천리 고가는 ㄷ자 모양의 안채와 사랑채를 일각문을 사이로 동서로 나란히 두고, 안채의 앞에는 중문을 달아 一자 모양의 광채를 배열했으며, 뒤쪽에는 4칸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선이 고운 사랑채의 멋은 단연 최고

 


 

 

청천리 고가의 대문채는 세 칸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대문의 외벽은 기와로 줄 문양을 넣은 것이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ㄷ 자 모양의 사랑채가 자리한다. 청천리 고가의 사랑채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집의 사랑채와는 다르다. 우선 사랑채의 지붕을 보면, 마치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날렵하게 솟아오른 처마선이 일품이다. 어떻게 저렇게 양편 날개채의 지붕을 아름다운 선으로 조성을 할 수가 있었을까? 보기만 하여도 덩달아 하늘 위로 날아오를 듯하다.

 

중앙은 부엌과 방, 대청, 건넌방 등으로 꾸몄는데, 대청은 동쪽으로 몰아 낸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동쪽의 날개채를 누마루로 올려 정자와 같은 기능을 갖게 했다. 방의 앞에는 툇마루를 둘러 대청까지 연결을 했으며, 대청 앞에는 들문을 달아 들어 올렸다. 이 집은 19세기에 송병일이 지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종가로 6대가 거주하였다는 청천리 고가는, 1944년부터는 사회복지법인 충북양로원에서 사용을 하기도 했다.

 

대문 외벽은 기와로 선을 넣어 아름답다. 우측에는 '충북양노원'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딴 사랑채보다 지붕의 선이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붕의 선이 있다니
 
사랑채의 동편끝에는 누마루를 두어 누정과 같이 꾸몄다.
 
두칸 대청은 동쪽으로 몰아 내었다. 이렇게 대청을 낸 것도 이집의 특이한 점이다.

 

안채 모서리에 쌀뒤주 방을 드리다

 

사랑채에서 일각문을 지나면 안채로 들어갈 수가 있다. 안채는 ㄷ 자 집으로 안마당에 기단을 쌓은 장독대와 돌로 둥그렇게 꾸민 우물이 자리한다. 마침 안채의 방과 대청을 연결하는 툇마루에는 메주를 말리느라 잔뜩 벌려놓았다. 그 모습이 한없이 정겹다. 양로원의 관계자 설명에 따르면 지금은 고가는 사용을 하지 않고 있으며, 양로원에 계시는 어르신들이 직접 메주를 만들어 장을 담가 먹는다고 한다.

 

안채의 뒤로 돌아가면 방의 뒤편에는 길게 툇마루를 놓았다. 그런데 안방의 뒤편쪽 모서리에 까치구멍을 낸 이상한 방이 한 칸이 보인다. 문을 널문으로 해 달았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이 모서리 방이 바로 쌀뒤주 방이다. 어떻게 안채의 뒤편에 이렇게 뒤주 방을 만들어 놓을 생각을 한 것일까? 고택의 무한한 변신에는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

 

이 안채 역시 대청을 동편으로 몰아 조성을 했다. 사랑채와 마찬가지로 창호는 모두 들문으로 만들었는데, 양편 날개채가 색다르다. 우측 윗방과 사이를 떼어 두 칸의 방을 마련하고, 동편 날개채 끝에 부엌을 드렸다. 양편 날개채의 지붕은 중앙의 지붕보다 낮게 두어, 전체적으로는 편안한 느낌을 준다.

 

ㄷ 자모양의 안채도 대청을 동편으로 몰았다. 양편의 날개체도 특이하다.
 
안마당에 기단을 쌓고 장독대를 꾸몄다. 이 또한 이 집의 여유로움이다.
 
뒤주방 안채의 모서리에 마련된 쌀 뒤주 방. 이런 형태는 볼 수가 없었다.

 

집안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중문채와 사당

 

우암 선생의 종가였다고 해서인가, 이 고가의 꾸밈이 남다르게 느껴진다. 이 집의 특징은 어디 한군데 모난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안채의 앞에는 - 자형의 중문채가 자리를 하고 있어, 안채와 중문채를 합하면 튼 ㅁ 자 형으로 꾸몄다. 중문채는 광채로 꾸몄는데, 중문을 서쪽 끝에 놓고, 일렬로 광과 헛간을 구성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사이 뒤편으로는 네 칸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모두 앞으로 툇마루를 내고 양편의 두 칸은 까치구멍을 낸 막힌 벽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 두 칸은 창호로 보아 마루방으로 꾸민 듯하다. 양편 두 칸은 아마 기물을 넣어두는 곳이고, 가운데 두 칸이 재실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뒤편에는 네 칸 사당을 두었다.

 

처마가 아름다운 집, 안채 모서리에 쌀되주 방을 드린 집, 안마당에 장독과 우물이 있는 집. 괴산 청천리 고가는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보니, 과거 이 집안에 살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세월이 지나면 이렇게 대단한 가문도 사라지는 것일까? 지역에서 나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청천리 고가를 보면서, 영원한 권력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에 소재한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로 지정된 홍범식 가옥. 이 가옥은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홍범식 가옥은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가옥으로,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 순국한 항일지사 일완(一阮) 홍범식 선생의 고택이다. 이 가옥은 괴산 3.1만세 시위를 준비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말끔하게 복원을 마친 홍범식 가옥. 일요일에 찾은 홍범식 가옥 앞에는 관광 안내소가 자리하고 있어 괴산군이 이 가옥을 남다르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부지방 양반가의 전형적인 집인데다가 역사적인 장소인 홍범식 가옥은, 괴산군의 문화를 알리는데 크게 일조를 할 것으로 보인다.

 

 

웬 문이 이렇게 많아?

 

말끔하게 단장된 홍범식 가옥을 돌아보면 절로 한마디를 하게 된다. 대문서부터 시작해, 집안으로 들어서면 수도 없이 많은 일각문 때문이다. 집안을 돌아보니 10여 개가 되는 문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흡사 미로 찾기라도 하는 집인 듯하다.

 

이렇게 집안에 문이 많다보니,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꽁꽁 감추어 놓은 집안의 내력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민초들의 담장은 그저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인데 비해. 아무래도 반가의 집들은 이렇게 조금은 가려 놓는 것이 당시의 풍습인 것 같다.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를 들어가는 일각문을 지나 좌측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다. 일각문은 작게 만드는 것이 통례인데, 홍범식 가옥의 사랑채를 들어서는 일각문은 두 칸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일각문 우측에는 작은 쪽문이 나 있는데, 일각문을 열지 않고 이 쪽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다. 이런 쪽문은 대개 솟을대문에 마련하는데 비해, 이렇게 사랑채를 출입하는 문에 쪽문을 놓은 것은 특별한 건축 구성이다.

 

사랑채는 자 형으로 동북쪽의 부엌 앞에 한 칸 방을 두고 옆으로 두 칸 방, 대청, 다시한 칸 방을 나란히 배열하였다. 부엌 앞의 돌출이 된 방을 빼고는 네 칸 모두 앞으로 툇마루를 놓았다. 전체적으로 다섯 칸으로 구성된 사랑채를 바라보면, 우측 끝에 작은 쪽문이 있다. 바로 사랑채에서 안채로 출입을 할 수 있는 비밀 문이다. 밖으로 나가 중문을 통하지 않고, 사랑채에서 이 문을 통해 안채로 출입을 할 수가 있다. 나름대로 넓은 집안의 동선을 최대한 짧게 하기 위한 방법인 듯하다.

 

 

반가라 다르네, 도대체 광이 몇 개여?

 

홍범식 선생은 풍산 홍씨의 명문가 출신이다. 홍범식 가옥을 둘러보면, 집안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7년 전북 태인, 1909년 충남 금산군의 군수가 되었다. 1910829일 순종이 한일합방의 조약체결을 발표하자, 그날 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는 바로 홍범식 선생의 아들이다.

 

홍범식 가옥을 돌아보면 집안에 많은 광이 있다는 것에 놀란다. 우선 대문채에 광이 있는 것은 그렇다 치고, 안채 뒤편에는 뒤주를 겸한 다섯 칸의 자형 광채가 있다. 그 맞은편에도 담장을 둘러 일각문을 들어서면 세 칸으로 마련한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도 광인 듯 하다. 담장을 둘러 별도로 마련한 것을 보아서는, 특별한 것을 보관하던 곳 같다.

 

안채 부엌의 뒤로는 뒤주가 있으며, 안채로 들어서는 중문채에도 세 칸의 광이 자리하고 있다. 집 전체를 돌아보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광들. 곡간으로 사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집안에는 이러한 광들이 많아, 당시 이 집이 얼마나 많은 농토와 식솔들을 거느렸는지 가늠이 간다.

 

 

넓은 안채에 재미난 작은 것

 

사랑채를 드나드는 일각문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중문이 있다. 이 집의 중문채는 사람이 기거하는 방이 없고, 세 칸의 광이 있다. 중문은 바람벽을 두어, 안채를 들여다보는 것을 막았다. 안채는 자 형으로 꾸며졌다. 중앙에는 세 칸의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세 칸씩의 방과 부엌을 두고 있다. 대청을 벗어나 꺾어진 양편의 날개채 끝에는 각각 부엌을 두었다. 너른 대청이 시원하게 보이는 안채는 오른쪽에는 세 칸의 툇마루를, 왼쪽에는 두 칸의 툇마루를 두었다.

 

안채를 돌다가 보면 재미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세 칸 대청 뒤로도 툇마루를 놓고, 안방과 윗방 뒤로도 툇마루를 놓았다. 그런데 이 툇마루 밑에 굴뚝과 아궁이가 숨어 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굴뚝과 아궁이는 윗방에 불을 때기 위한 것 같다. 이 큰 집에서 이렇게 툇마루 밑에 숨겨놓은 굴뚝과 아궁이라니. 고택을 돌아보는 또 다른 재미는 이렇게 새로운 것을 찾을 때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한 듯한.

 

 

번듯한 대문채와 행랑채

 

홍범식 가옥의 대문채는 모두 일곱 칸으로 꾸며졌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세 칸의 광이 있고, 우측으로는 두 칸의 방과 한 칸의 부엌이 있다. 그리고 좌측으로 담장을 두른 작은 일각문을 들어서면, 네 칸으로 꾸며진 행랑채가 자리한다. 행랑채에 안담을 두르고 마루방을 놓은 집은 보기가 힘들다.

 

행랑채는 바라보면서 좌측에 부엌을 두고, 두 칸 방을 드렸다. 그리고 맨 끝의 한 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이 세 칸의 방 앞에는 모두 툇마루를 놓았는데, 이 마루방은 행랑채에 기거를 하는 남정네들의 작업 공간으로 보인다. 행랑채의 부엌은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뒷문을 내었다. 이곳에서 음식이라도 해서 사랑채로 나르기 위함이었는가 보다. 넓은 집 안에서 집안 식솔들의 동선을 생각한 집이다.

 

충북 괴산군 불정면에 있는 마애불을 찾기 위해 삼방리를 찾았다. 삼층석탑과는 달리 같은 삼방리인데도 그 거리가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중간에 마땅한 안내판이 서 있지를 않으면, 문화재를 찾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든다. 삼방리 마애불을 찾을 때도 몇 번이고 이리저리 길을 찾아다녔다.

 

마을에서 안내를 받을 수도 없는 것이 시골이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도 없지만,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물어물어 찾아간 삼방리 마애불. 밑에다가 차를 대고 올라가라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길이 보이기에 그냥 따라갔던 것이 화근이다. 올라가니 길도 없고, 차를 돌릴 만한 곳도 없다. 산길이라 눈은 쌓였는데 후진으로 내려오려니, 가슴이 다 서늘하다. 자칫 조금만 실수만 있어도 계곡으로 처박을 판이니. 

 

바위에 새간 마애여래좌상   

  

엷은 부조로 조각한 마야여래좌상.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다.

측면에서 바라보면 엷은 부조로 조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의 선각수준이다.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높이 3.7m, 폭 4.1m, 두께 2.4m 정도의 바위의 한쪽 면에 새긴, 높이 3.5m의 마애여래불이다. 낮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이 마애불은, 앞에 선 안내판이 없다면 주의 깊게 보아야만 한다. 그냥 지나치면서 이 마애불을 보면 거의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이 깊은 산속에 이런 마애불을 새겼을까? 전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마애불마다 궁금증이 일어난다. 왜 옛 선인들은 아주 오랜 옛날 이렇게 산중에 있는 바위만 보면, 마애불을 새기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도 없이 많은 마애불을 조성한 것일까? 길도 없고,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는, 이런 깊은 산중 암벽에 새긴 마애불을 보면서 늘 갖는 의문이다.

 

고려시대에 조각을 한 수많은 마애불들을 보면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불교에 심취했던가를 가늠할 수 있다. 부처를 새길 만한 바위만 보이면 어김없이 새겨진 마애불들. 이렇게 수많은 마애불을 조성하면서 무엇을 기원했던 것일까? 아마 고구려의 후손들이기에 잃어버린 북녘 땅을 되찾으려는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삼방리마애불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을 하였다.

수인이나 법의는 희미하게 남아있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낮은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충북지역의 마애불을 보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들이 상당수가 있다. 이 마애불들은 모두가 거대마애불로 조성이 되어있으며, 비교적 간결한 선각으로 처리가 되어있다. 삼방리 마애여래좌상은 통견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왼손은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은 가슴 앞에 놓은 독특한 수인을 보이고 있다.

 

신체는 굴곡이 거의 없는 사각형이다. 수인이나 법의는 희미하게 남아있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가 힘이 들 정도다. 몇 가닥으로 간략하게 표현한 옷 주름의 선과, 도식적인 꽃잎의 형태에서는 조각기술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곳의 마애불들의 대체적인 모습들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은 이 지역의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단아한 체구와 소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는 어딘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어깨는 당당하게 표현을 하였다. 고려 초기 지방의 마애불치고는 수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얼굴부분은 대체로 양각이라기보다는 선각에 가깝다. 앞에서 보기에는 선각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조금 도드라지게 조각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슴에는 군의대의 매듭이 보인다.

 

전각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방치가 되어 비바람에 씻긴다면, 이런 형태도 보존하기가 어려울 것만 같다. 마애불을 뒤로하고 떠나면서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덕분에 얼음판에 미끄러지지는 않았으니 고맙습니다.'라고. 


경북에서 충북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조령 삼 관문에서 소조령을 향하여 흘러내리는 계류가, 20m의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수옥폭포. 단원 김홍도가 초대 현감으로 부임하기도 했다는 이곳은 '옥을 씻는다'고 할 만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이다. 명절 연휴에 꼭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오는 길목에 이 폭포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이다.

 

정자에서 바라본 한 겨울의 얼어붙은 수옥폭포
 

사극 다모와 여인천하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수옥폭포는, 지난 해 MBC 대하드라마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해서, 그 유명세를 타고 있다. 여름철에야 폭포의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하지만 폭포가 꼭 여름에만 아름다울까? 겨울철에 보는 폭포의 모습은 또 어떤 아름다움이 있을까? 그 모습을 보기위해 설 연휴에 찾아들었다. 여름철 주변 암반과 노송들이 어우러진 폭포는 절경이다. 하지만 설이 지난 명절에 찾는 수옥정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해 줄까? 

 

연풍현감 조유수가 지은 옛 수옥정

 

폭포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 여름이면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흥을 돋우고, 겨울이면 빙벽으로 변하는 폭포를 보면서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곳. 수옥정은 바로 그런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정자이다. 정자가 처음 지어진 것은 숙종 37년인 1711년이다. 당시 연풍현감 조유수가 청렴했던 삼촌인 동강 조상우를 기려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수옥정(漱玉亭)' 이라 했다. 이는 폭포의 암벽에 적힌 글이 증명을 한단다.

 

물이 언덕에 부딪쳐 흐르는 모습이 옥 같다는 뜻이니, 가히 이곳의 경치와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당시의 수옥정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의 수옥정은 예전 수옥정이 있던 자리에, 1960년에 팔각정으로 새롭게 꾸몄다. 한 겨울 노송의 가지에는 하얀 눈이 쌓여, 그 무게로 가지들이 적당히 밑으로 처져있다. 엊그제 내린 눈을 치우지 않아 눈을 밟고 걷는 기분이 좋다. 발 밑에서 들리는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이 눈길을 하염없이 밟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눈이 쌓인 노송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수옥정의 겨울정취


오늘의 수옥정은 암벽에 얼어붙은 빙벽과 그 틈새로 녹아 흐르는 물줄기 그리고 노송에 쌓인 눈꽃과 함께 서 있다. 이 수옥정을 조선조에 처음으로 연풍현감 조유수가 지었다고 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도 이 수옥폭포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 있다. 전하는 말로는 고려 말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공민왕은 이 수옥폭포가 바라보이는 곳에 작은 정자를 지어 소일했다고 하니. 나름 수옥정의 역사는 오래다. 공민왕이 이곳에 와서 행궁을 지었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자 하나 쯤은 지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바위 틈 사이에 얼어붙은 고드름

 
신비하고 아름다운 빙벽

 

얼어붙은 수옥폭포의 신비함

 

수옥폭포는 3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류의 두 곳은 깊은 소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위로 올라가 확인할 수가 없으니 안타깝다. 밑에서 바라보는 폭포 하나만 갖고도 이렇게 절경이다. 밑에 소는 얼음이 얼어있고, 중간에 바위의 틈새 사이에도 천정에 고드름이 달려있다. 암벽에 얼어붙은 빙벽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가 부족하다.

 

수옥폭포에는 얼음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두라마 여인천하와 다모, 그리고 최근에 선덕여왕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날이 풀리면서 조금씩 녹기 시작한 얼음이 물이 되어 소리를 내며 폭포 아래로 흐른다. 그 또한 여름 시원한 물줄기와 다른 정취이다. 폭포주변 나무에도 고드름이 달렸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신비한 겨울철의 장관을 연출한다. 겨울에 보는 폭포의 신비함. 매번 많은 폭포들을 찾을 때마다,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만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겨울에 만난 폭포는, 우리가 알지 못한 또 다른 풍광을 맛보게 한다. 아마 이 풍광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또 다른 수옥정의 모습과 함께.

충북 괴산군 괴신읍 검승리에 가면 ‘애한정(愛閑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정자는, 박지겸(1549~1623)이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지은 정자 겸 학동들을 가르치는 서당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유학자인 박지겸은 본관은 함양으로 자는 익경, 호는 애한정이다.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모시기도 했으나, 광해군 때 정치가 문란해지자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 애한정이라 하였다. 애한정은 그 뒤 원 정자 뒤에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몇 차례 중수를 한 애한정

 

애한정은 현종 15년인 1674년에 옮겨지었고, 숙종 38년인 1712년과 44년인 1716년에 중수를 하였다. 그 후 1979년에 크게 보수를 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애한정은 새롭게 축조한 현재의 애한정 앞에, 예전의 애한정이 그대로 남아있다.

 

애한정을 오르려는데 앞에 작은 전각 하나가 풀숲에 가려져 있다. 계단은 있으나 풀들이 자라 가리고 있다.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고종 28년인 1891년에 건립한 박상진의 효자문이다. 박상진은 애한정을 창건한 박지겸의 9대손이다. 낙향한 선비가 부유하게 살지는 못했을 테니, 그 9대손인 박상진 또한 생활이 궁핍했는가 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박상진은 품을 팔아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부친이 술을 즐겨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계속 술을 드실 수 있도록 하였단다.

 

 

피를 내어 부친을 간구한 효자 박상진

 

후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해 부친의 병 구환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부친을 연명케 하였다고 한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피눈물로써 3년 상을 마쳤으며, 그의 나이 85세에 이르렀어도 부모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효심을 충청도 선비들이 예조에 보고하자, 나라에서는 그의 효행을 후대에 알리기 위해, <동몽교관조봉대부>란 벼슬을 추증하고, 효자 정문을 세웠다. 애한정을 오르다 보면 계단 우측에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녹음을 자랑한다. 위로 오르면 담장에 둘러싸인 원래의 애한정이 있다. 보수를 하여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있다.

 

 

뒤편에는 현재 애한정의 현판을 단 정자가 있는데, 아마 이곳에 걸렸던 현판을 옮겨간 듯하다. 원 애한정과 옮겨지은 애한정을 잘 보존해 놓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애한정이 역사 속에서 변화한 형태를 알 수가 있다. 바람직한 문화재의 보존이란 생각이 든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했던가? 오늘 갑자기 애한정이 그리워지는 것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홀연히 마음을 비우고 낙향을 하여, 학동들을 가르치면서 「애한정기」와 「애한정팔경시」 등을 쓴 박지겸과, 부친의 병환을 고치려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낸 효자 박상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다.

 

없는 살림 가운데서도 이렇게 사람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 애한정의 주인들을 생각나게 만드는 것은, 요즈음 세태가 하도 어이없게 돌아가서인가 보다. 어린 생명을 다치게 하는가 하면, 나라 살림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돈 버는 일에 눈이 벌게,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자신의 배만 채우겠다는 생각들로 온통 나라가 검어지는 듯해서다.

 

대선이 2일 남았다. 대선 도전하는 사람들, 우선 이곳부터 가서 마음을 내려 놓고 오기를 바란다. 그 자신들이 과연 이 애한정에서 무엇을 느끼고 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이 가서도 깨닫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미 이 나라의 국민을 이끌고 갈 아무런 자질도 없다는 것일게다. 요즈음에는 윗물은 맑아도 아랫물이 똥물일 때가 비일비재한데, 윗물까지 맑지 않다면 그 아랫물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작은 시골 정자 하나가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을 알려주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 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오늘 이곳 애한정을 가슴속에 담는 것도, 나리들께서 꼭 이 시골의 작은 정자 애한정과 효자문을 찾아보고,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