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에 있는 설봉산. 설봉산에는 사적인 설봉산성을 비롯해, 향토유적인 영월암 등이 있다. 영월암 대웅전 뒤편 암벽에 새겨진 보물 제822호 마애여래입상을 보기 위해 산을 올랐다. 설봉산에 올랐다. 한 낮의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설봉산은 그리 높지는 않은 산이지만, 차도 오르기 힘든 가파른 길을 한 낮에 걷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어깨에는 무거운 카메라 가방까지 메고 있으니, 다리가 더 무겁다. 물도 준비하지 않은 채 산을 오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하게 목이 탈 때쯤 영월암 입구에 도착했다.


천년 세월 설봉산을 지킨 마애불

목이 타던 차에 영월암 입구에 있는 샘에서 물을 몇 대접이나 마셨는지. 한숨을 돌리고 난 후 대웅전을 비켜 뒤로 오르니, 커다란 자연 암벽에 마애불이 조각되어 있다.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 마애불은, 머리 부분과 손 부분은 얇게 돋을새김을 하였고 나머지는 선으로 음각하였다.

높이 9.6m의 거대한 이 마애불은 ‘마애여래불’로 명칭을 붙였지만, 민머리 등으로 보아 ‘마애조사상’으로 보인다. 둥근 얼굴에 눈, 코와 입을 큼지막하게 새겼다. 두툼한 입술에 넙적한 코, 지그시 감은 눈과 커다랗게 양편에 걸린 귀. 그저 투박하기만 한 이 마애불에서 친근한 이웃집 어른을 만난 듯하다.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모두 엄지와 약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왼손을 안으로 향했다.

고려 전기에 조성이 되었다고 하면 천년 세월을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전국을 돌면서 우리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보면, 만나는 문화재마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다.



고려시대 특유의 거대마애불인 영월암 마애불

높이 9.6m의 거대마애불. 고려시대의 마애불은 하나같이 커다랗게 조성이 되었다. 아마도 국가적으로 북진에 대한 염원을 그린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얼굴과 두 손만 부조로 조성을 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우편견단의 형식으로 조성한 법의는 몸 전체를 감싸며 유연한 사선으로 흘러내린다.

이러한 옷의 주름이나 팔꿈치가 직각으로 굽혀진 것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마애불은 그 형태로 보아 조사상이나 나한상으로 보기도 한다. 천 년 세월을 온갖 풍상에 저리도 의연하게 서 있는 마애불. 머리 부분은 암벽의 상단에 조각이 되어 올려다보면 몸에 비해 조금은 작은 듯도 하다. 전체적인 균형은 조금 비례가 맞지 않은 듯하지만, 저 단단한 암벽을 쪼개고 갈아 내어 저런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마애불을 돌아보다가 돌계단에 주저앉는다. 산으로 오르며 흘린 땀이 시원한 바람에 말라간다. 마애불을 떠나 내려오면서 드린 대웅전. 그 어간문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이리 훼손이 되지 않은 모습으로 천년을 지켜왔음을 감사를 드린다.

여름철 답사는 평탄치가 않다. 특히 산에 문화재가 있는 경우에는 곤욕을 치르기가 일쑤이다. 비가 오고 난 후 부쩍 키가 자라버린 각종 풀이며, 넝쿨들이 길을 가로막기가 일쑤이며, 땀 냄새를 맡은 날파리며 산 모기들이 극성스럽게 달라붙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바로 여름철의 문화재 답사이다.

담양군 고서면 분향리에는 전남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담양 분향리 석불입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길을 지나다가 이정표가 보여 무작정 찾아들어간 곳이다. 그러나 마을 분들에게 물아보아도 정확한 위치를 잘 모르시겠다는 대답이다. 마침 어르신 한 분이 지나시다가


“그 돌부처 저 산 위에 있어. 이리로 돌아 올라가“

라고 말씀을 하신다. 마침 알려주신 곳으로 가니 작은 토굴 하나가 있고, 그 앞에 안내판이 걸려있다.

가로막힌 풀을 헤치고 산을 올라

작은 암자처럼 생긴 산 밑 절로 들어갔다. 이곳에 석불입상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그런데 대답은 산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있다고 한다. 처음엔 그래도 길처럼 나 있더니, 조금 더 올라가니 대와 풀들로 인해 길이 사라졌다. 아침부터 길을 찾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 곳 역시 남다를 바 없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대밭으로 가로막혀 있다. 그나마 길의 흔적이 남아있어 다행이다. 날파리와 모기떼가 달라붙는 것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것이 여름철 문화재 답사의 가장 큰 고통이다.


대숲으로 들어가 대나무 잎을 헤쳐 가며 산길을 오르다보니 저만큼 석불입상의 윗부분이 보인다. 석불입상 주변은 모두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놓아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자연과 스스로 어우러진 모습을 기대했는데, 영 사각으로 발라놓은 시멘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랜 풍상에 훼손이 된 석불입상

이 석불입상은 연화좌대와 불상이 각각 한 개의 돌로 조성이 되어있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는 낮아 거의 민머리 형태이다. 얼굴은 둥글넓적한데 귀는 짧은 편인데 거의 알아보기가 힘들고, 코는 누가 떼어내 시멘으로 발라놓았다. 전체적인 표정은 둔화된 모습이다. 양 눈썹 사이와 코, 입 등은 형식화 되어있으며, 마모가 심해 자세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다.




이 석불은 2m가 넘는 비교적 큰 불상이다. 전남지방에서는 이렇게 큰 석불입상이 그리 흔하지가 않다.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선각되어 있는데 간격이 넓게 표현하였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에서 굵은 곡선으로 물결모양을 그리다가, 양쪽 다리 밑으로 내려오면서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다.

외곽으로는 한 줄 띠를 돌려 마무리를 하였으며, 양쪽 팔에 걸친 옷자락은 직선으로 길게 늘어뜨려 다리 하단으로 내리뻗어 있다. 팔에 걸린 법의의 소매 끝자락은 약간 밖으로 외반되어 옷 주름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발은 길게 늘어진 옷주름에 가린 채 발등만 보인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발밑에 놓인 연화대좌는 8각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16잎의 앙화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이 석불입상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수인이다. 양쪽 손바닥을 안으로 구부려 서로 대치하게 하여 허리춤에 대고 있다. 특히 왼손에는 약병을 쥐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약사여래석불입상으로 볼 수 있다. 뒷면은 머리 부분에서 두발이 보이며 그 외에서는 평평하게 처리하였다.

조성시기가 고려 전기로 추정되는 이 석불입상에서 보여주고 있는 옷주름 양식이나 수인 등은, 보기 힘든 특이한 기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석불입상이 조금은 편안하지 않은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석불입상의 형태가 뒤로 약간 젖혀져 있어 거만스런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저렇게 거만한 모습으로 서 계신 것일까?


아마도 손에 든 약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쳤기 때문은 아닌지. 달라붙는 모기들을 쫓아내며 괜히 헛웃음을 날린다.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산으로 들로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그런 황당한 생각이 힘든 답사 길을 조금은 가시게 하는 것을.

당간이란 절에서 커다란 행사를 할 때 내거는 깃발을 말한다. 대개는 절 앞에 당간을 내 걸게 되며, 이 당간을 거는 지주 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을 세우는데 필요한 버팀기둥인 당간지주는 돌을 양편에 세우고,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워 당간을 고정시킨다.

전국의 절을 찾아가면 이 당간을 볼 수가 있다. 당간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 세우는데, 어느 곳에는 철로 만든 당간이 있는 곳도 있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지주를 세우고, 깃대를 세우는 당간을 철로 만들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자리한 용두사지는 고려 광종 13년인 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 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절이다.


당간지주 하나에도 불심이 깃들어

남원 만복사지 한편에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이 당간지주는 지주 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랫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땅속에 묻힌 것을 감안한다면 이 당간지주의 전체 높이는 5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은 커다란 장대석을 거칠게 다듬었으며 별 다른 장식이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는 고려 전기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살펴보면 거칠게 맞은 돌을 깨낸 흔적이 보인다. 지금처럼 돌을 다루는 공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망치와 정 만으로 이 당간지주를 다듬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커다란 석물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단순한 이 당간지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가늠이 간다.



정유재란이 앗아버린 만복사

남원시 왕정동에 자리하고 있는 만복사지. 만복사지는 기린산 아래에 자리한 절로 일설에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더욱 보물 제32호로 지정이 된 이 당간지주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을 보아도 만복사가 고려 문종 때 창건이 되었음을 뒷받침 하고 있다.

당시 이 만복사의 사세는 대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뜰, 썩은 밥배미, 중상골 등의 지명이 있어 당시의 사찰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이 빨래를 널어 이곳이 온통 하얗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고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승려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복사지에서 세월을 탓하다.

이렇듯 장엄한 사세를 자랑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시 남원성 싸움 때 소실이 되어버렸다.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를 남겨, 한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도 당시 만복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잘 정리가 되어있는 만복사지. 여기저기 전각이 서 있던 터가 도드라지게 자리하고 있고, 주춧돌은 아직도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숙종 4년인 1679년에 남원부사 정동설이 복원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만복사. 그 한편에 서 잇는 당간지주를 보면, 아마 이 곳 앞으로 절의 일주문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 남원8경 중에 <만복사 귀승>이 있다. 시주를 마치고 저녁나절에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이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아름다운 경치로 꼽았다고 한다. 교룡낙조, 축천모설, 금암어화, 만복사 귀승, 선원모종, 광한추월, 원천폭포, 순강귀범을 팔경 중에 네 번째로 만복사 귀승을 꼽을 정도였다.


세월은 그리도 무심한 것인지. 저녁 무렵 찾아간 만복사지 한편에 자리한 당간지주. 옛날 커다란 돌을 쪼아 이 당간지주를 만든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이 당간지주를 만들었을까? 눈을 감고 당간의 투박한 표면에 손을 대본다. 행여 당시 석공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려니 하지만, 무심한 초가을 바람만 손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혼자 웃고는 한다. 특히 전국의 사찰에서 만날 수 있는 석불 등, 불상을 볼 때 그렇다. 어떻게 시간에 따라 그 표정의 느낌이 바뀔 수 있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누구는 그 때의 마음이라고도 한다. 즉 내 마음이 편하면 불상의 표정이 편하고, 내가 화기가 있으면 불상도 찡그린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공감이 가는 것은, 같은 불상을 보면서도 수시로 그 표정이 변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고, 어느 때는 준엄한 얼굴이기도 하다. 때로는 노여움을 탄 얼굴이기도 하고, 그런가하면 자비로운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불상의 표정을 보면서 스스로 내 마음을 추스르고는 한다,


진리의 상징, 비로나자불좌상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용곡리. 호저면 중에서도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이곳은 칠봉이라는 계곡을 끼고 있는 아름다운 봉우리를 지나 들어가는 막다른 마을이다. 마을 끝에는 탑과 불상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용운사지 석불 좌상과 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나자불 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고려 전기인 11세기경에 조성된 불상이다. 최근에는 불상 뒤편에 세우는 광배가 발견이 되어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을 보면 늘 기분이 좋아진다. 매끄럽지 못한 조각이지만, 그 얼굴은 늘 웃음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석불의 얼굴은 광대뼈가 두드러지게 표현을 하였다. 입은 약간 앞으로 튀어 나왔으며, 입 끝이 처져있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약간 앞으로 구부정한 모습이다. 코는 한쪽이 떨어져나갔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왔는데, 한쪽 끝은 파손이 되어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비례가 잘 맞지 않고 조각 기법은 세련되지 못하였지만, 고려 초기에 이 지역에서 보이는 석불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렇게 즐거운 일이 무엇인지

석불의 손은 가슴께로 모아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왼손의 둘째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수인을 지권인이라고 하며, 이는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상의 모습이다. 대좌는 밑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마련하였는데, 아래위로 연꽃을 큼지막하게 조각하고, 중간의 돌에는 안상을 하나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태는 고려시대 조각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투박하고 세련미는 없지만 우직한 모습으로 편안함을 주는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난 언제나 마음이 울적하거나 결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찾는다. 항상 안면에 미소를 띠우고 있는 이 석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가 치밀 일이 생겨도 이곳이 와 이 석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노여움이 눈 녹듯 사라지기 때문이다.

늘 이 용운사지 석불좌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한다. ‘부처님, 세상이 그리 즐거우세요?’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언제나 한가지이다. ‘그럼 즐겁지 않으면 무슨 뾰족한 방법이 있나?’ 그 대답을 들으면 모든 노여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갖가지 표정으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불상들.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다. 그런 문화재를 보고 어찌 생명이 없는 조형물이라고 할 것인가? 오늘도 답사를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당야한 표정을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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