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판이 들썩인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어깨가 절로 출썩인다. 그 중에는 잘한다’, ‘좋다라고 추임새를 넣는 사람들도 있다. 18일 오후 6시부터 수원시 장안구에 소재한 만석공원에 마련된 수원시 제2야외음악당에서는, 경기안택굿보존회(회장 고성주)가 주관하는 경기안택굿한마당이 열렸다.

 

오후 6시부터 3시간이 넘게 계속된 경기안택굿의 각 거리와,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서 전해진 제인청 춤이 무대에 올랐다. 경기도 안택굿에서는 굿을 하기 전에 먼저 대문 앞에서 풍물패들이 지신밟기를 한다. 풍물패들이 한바탕 무대 위에서 풍장을 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버나잽이의 접시돌리기로 한껏 달아올랐다.

 

 

쌀쌀한 날씨에도 구경꾼들 신바람 나

 

낮에는 조금 덥다고 느끼는 날씨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찬 기운이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계절이다. 하지만 객석에 앉은 관람객들은 긴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는다. 순서가 연이어 계속되면서 시간이 흐른다. 오후 830분 경. 날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안택굿의 굿거리 제차 중에 창부거리가 시작이 되었다.

 

창부는 무격들이 섬기는 예능의 신이다. 무격들에게 재주를 주고, 노래와 춤을 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격이다. 하기에 창부거리에서는 재미난 재담과 소리로 흥을 돋운다, 경기도 안택굿은 재미있다. 각 거리마다 딴 굿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 보인다. 이렇게 뛰어난 예능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안택굿이지만, 전통 경기도 안택굿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사람 되지 않는다.

 

 

요즈음은 그저 대충 굿이 유행한다. 지역적 특색도 별로 없고, 소리나 춤 등도 없다. 거의 공중으로 껑충껑충 뛰며 악이나 박박 쓰는 그런 굿이 대부분이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굿이 특징이 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해서 굿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도, 그렇게 지역적으로 특성이 있는 굿을 지키고자 함이다. 굿을 종교가 아닌 전통문화예술로 접근하자는 시도이다.

 

관중을 사로잡는 창부굿

 

잽이라는 악사들의 음악이 흐드러지게 울려댄다. 피리, 대금, 해금과 장고, 바라 등이 조화롭게 흥겨운 가락을 만든다. 먼저 무대에 창부의상을 입은 임영복(. 54) 무녀가 등장을 했다. 그리고 멋들어지게 흥겨운 노랫가락조로 소리를 뽑아댄다. 잠시 후 남무인 고성주(, 60)가 술상을 차려들고 무대로 나왔다.

 

 

경기도의 안택굿이 딴 굿과는 다르다는 것은 창부거리에서도 구별이 간다. 경기도 안택굿의 창부굿에서는 창부가 둘이다. 남창부와 여창부가 서로 재담을 풀어가면서 관중을 흥이 나게 만든다.

 

거기 창부는 어디로 오셨소?”

난 저 전라도에서 한양으로 재주를 배우러 가려고 천안삼거리를 거쳐 이곳까지 왔소.”

한양은 무엇 하러 가시오.”

거긴 춤 선생도 소리선생도 많다고 하기에 재주 배우러 가오.”

그 양반 참 몰라도 너무 모르네. 여기 수원이야 말로 효의 도시요. 예능의 도시요. 거기다가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이 있소. 산 좋고 물 맑은 이런 곳에 어찌 재주 많은 선생이 없단 말이요. 굳이 한양까지 갈 필요 없소

 

 

남녀가 풀어나가는 대화에 관중석에서는 맞소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두 무격은 꽹과리를 치면서 소리를 멋지게 풀어나간다. 경기도의 안택굿에서만 볼 수 있는 굿의 모습이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김헌선 교수의 사회로 세 시간이 넘게 진행된 경기안택굿한마당. 한 관람객은 연신 소리를 치면서 구경을 하는 바람에 목이 아프다고 한다.

 

경기안택굿이 이렇게 재미난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굿을 하는 사람들의 춤과 노래 등이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고요. 창부거리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으면서 하는 소리를 듣고 소름이 돋았어요. 우리 지역에 이렇게 대단한 굿이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네요. 이렇게 재담이 뛰어나고, 춤과 소리가 어우러진 안택굿은 하루 빨리 문화재로 지정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제는 이런 굿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작 2~3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얼른 지정을 해서 보존해야죠.”

 

경기도에는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경기도당굿 외에도 다양한 굿이 전해진다. 크고 작은 굿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양식으로 전승이 되어왔지만, 이제는 그런 특색이 있는 굿을 만날 기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교통의 발달과 무격(巫覡=는 여자 은 남자를 말한다)들의 학습 소홀이 가장 큰 원인이다.

 

이렇게 특색이 사라지고 있는 굿의 형태인 안택굿을 보존하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 있다. 18일 오후 6시부터 수원시 제2야외음악당(만석공원)에서 경기안택굿 보존회(회장 고성주)가 주관하는 경기안택굿 한마당이 열리기 때문이다. 10월 상달을 맞이해 벌이는 안택굿은,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는 경기 지역의 굿이다.

 

 

3시간에 걸쳐 한마당 공연

 

안택굿 보존회 고성주 회장은 4대째 내려오는 무가(巫家)의 계보를 잇고 있다. 조모서부터 고모, 그리고 고모의 신딸에 이어 고성주 회장까지 4100여년 넘게 경기도 굿을 이어오면서, 안택굿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무속인이다. 지금도 300여명에 이르는 단골들을 아우르고 있으면서, 봄과 가을에는 집중적으로 안택굿판을 벌이고 있다.

 

고성주 회장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소리 잘하고 춤 잘 추고, 거기다가 걸판진 굿까지 합해 종합예술의 극치를 이룬다. 어려서부터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기예능보유자였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서 재인청 춤을 제대로 익혔다. 이번 경기안택굿 한마당에는 그렇게 학습한 재인청 춤도 문하생들이 함께 무대에서 선보인다.

 

 

3시간여에 걸쳐 무대에 올릴 경기안택굿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을 볼 수 있다. TV 등에도 소개를 할 수 없었던 안택성주굿에서는, 굿판에 모인 사람들이 대청에 길게 늘어진 흰 소창을 손에 잡고 춤을 추면서 지신밟기를 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구경꾼들이 흥이 나면 함께 동참을 할 수도 있다.

 

뒷전까지 다양한 굿의 면목을 볼 수 있어

 

과거 경기안택굿에서는 굿을 하는 무격과 잽이(악사들을 말한다), 그리고 풍물까지 동원이 되었다. 굿을 하기 전에 대문 앞에서 풍물꾼들이 먼저 풍장을 울리면서 지신을 밟는다. 이번 안택굿 무대에서도 과거와 같이 먼저 지신밟기로 시작한다. 지신을 밟고 난 후 집 안으로 일행이 들어가면, 미리 보아 놓은 굿상 앞에서 앉은부정을 한다.

 

부정이란 굿판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정화시키는 제차이다. 이어서 무격의 본향(本鄕)의 내력을 설하는 본향산거리가 이어진다. 상산은 굿거리 제차에서 가장 위엄이 있다. 승전, 장군, 별상, 신장으로 이어지는 산거리가 끝나면, 자손창성과 복을 빌어주는 안당제석을 하게 된다.

 

 

제석에 이어 대감굿은 한마당 굿거리 제차 중에서도 가장 흥이 나는 대목이다. 과거에는 모든 굿거리 끝에 대감굿을 했으며, 대감굿에서는 소리를 하는 창기(娼妓)들이 함께 동참하기도 했다. 대감굿에 이어 성주거리, 창부거리, 서낭거리의 순으로 이어지고, 맨 끝에는 텃굿과 뒷전으로 이어진다.

 

재인청 춤도 함께 즐길 수 있어

 

안택굿보존회 고성주 회장은 어려서부터 고 운학 이동안 선생에게 많은 재인청 춤을 물려받은 춤꾼이기도 하다. 이번 무대에서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재인청 춤의 진면목을 볼 수가 있다. 문하생들이 추는 재인청 춤은 교방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살풀이, 바라춤, 무녀도 등이며 경기민요도 무대에 올린다.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김헌선 교수의 사회로 진행이 될 경기안택굿 한마당. 많은 사람들에게 복과 흥겨움을 안겨 줄 이번 무대에 기대가 크다. 그것은 점차 살아지고 있는 경기안택굿의 원 뿌리를 지켜가는 무격이, 이제는 2~3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쇠퇴일로에 있는 우리 지역의 걸판진 안택굿 한마당.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보아주기를 기대한다.

고성주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마지막 큰 만신이다. 스스로를 ‘만신’이라고 자처하는 고성주는, 4대 째 경기도 굿제를 이어오고 있다. 그 중 고성주를 비롯한 3대가 독자적인 가계로 이어진다. 중간에 고성주에게 내림굿을 주관한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를 빼고도, 조모 - 고모 - 고성주로 이어지는 순수한 무가(巫家)의 집안이다.

 

물론 그 윗대의 만신들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굿거리의 절차는 항상 대물림을 하면서 신의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가계의 전승은 무형의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가장 큰 자산으로 본다.

 

 

어려서부터 익힌 춤과 노래솜씨 뛰어나

 

“저는 만 18세가 되던 해 내림을 받았어요. 어려서부터 수원에서 살았는데, 몸이 아파 이천으로 다시 내려가 살았어요. 그러다가 다시 수원으로 올라오는 바람에 학교생활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죠. 일 년이면 한 두어 달만 괜찮고 나머지는 골골했죠. 그러다가 화성재인청 이동안 선생님께 가서 재인청 춤과 소리 등을 배우면서 몸이 좀 좋아졌어요. 당시는 저를 보고 초립동이라고 불렀죠.”

 

어려서부터 기구한 삶을 살았다. 몸이 마르고 며칠씩 물 한 모금 먹지 않다가도, 또 먹을 때는 엄청 먹어 치웠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해 주변에 눈총을 산 일도 허다했단다.

 

“내림을 받고나서 이천 대월면 송라리 뒷산을 대명산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가서 탱화하고 놋쇠그릇, 관음보살, 대감항아리, 책 두 권을 가져왔어요. 예전에는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았다고 해요. 지금은 아무도 안 계시지만, 제 뿌리가 그곳인가 봐요.”

 

 

고성주는 요즈음의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내림을 받고나서 문서를 익히고 재주를 익히는데 한 10년은 실히 걸린 것 같다고 한다. 경기도 안택굿은 적어도 그 정도의 학습기간을 잡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요즈음 사람들처럼 몇 달 뚱땅거리다가 나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10년 세월은 배워야 안택굿의 장단 가락, 징, 춤사위, 거성, 노래, 사설 등을 익힐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는 사람들에게 점을 신을 모시기 전부터 보아 주었어요. 괜히 지나는 사람을 붙들고 아는 소리를 하고요.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 어머니 집에 와서 있었는데, 어머니가 굿을 하러 가면 사람들을 보고 얼마를 가져오라고 했으니까요. 한 3년 신어머니 집에서 음식 하는 법 등을 배웠는데, 당시는 머슴살이를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손님들이 오면 점을 보아주고 굿을 떼고는 했죠. 그러다가 한 3년 뒤에 최씨 어머니가 전대자루 하나를 만들어 주면서 나가서 시주를 해오라고 하데요. 그래서 인계동서부터 매교동 일대까지 3개월을 다녀서, 돈 67원하고 쌀 두말 조금 넘게 걷었어요. 그래서 내림을 했죠. 굿을 처음 한 것은 내리면서 바로 굿을 했어요. 수원 큰 만신들이 굿판에 데리고 다니는 바람에 빨리 배웠죠.”

 

첫 굿판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

 

처음 굿판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이 난리를 쳤단다. 당시에는 밤을 새워 굿을 했는데, 사람들이 춤 잘 추고 소리 잘하는 애기만신이 나왔다고 자리를 뜨질 않았다는 것. 경기도 안택굿에 어떤 특징이 있느냐는 질문에 깊은 한 숨을 쉬기도 했다.

 

“경기안택굿은 굿 속에서 마음에 닿는 느낌이 있어요. 사람들을 울리고 웃고, 함께 춤을 추는 그런 굿이에요. 예술적이면서도 신성이 함유된 굿이고요. 특히 굿판에서 세상사는 방법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굿이죠. 한 마디로 살아있는 굿이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일부 사람들은 경기도 안택굿이 서울굿과 비슷하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예요. 고려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한양 성내에서 굿을 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서울에 안택굿이 있을 수가 있었겠어요. 수원을 비롯해 안산, 시흥, 화성, 용인 등지에서 큰 만신들이 많이 나왔던 것을 보아도 경기도 안택굿이 본류라고 보아야 하죠.”

 

선대의 신어머니에게서 학습을 할 때는 주로 어떤 것을 배우게 되었는냐고 묻자, 옷 개는 법, 굿의 순서대로 무복을 착용하는 법, 상 차리는 법, 상 차리는데 필요한 음식, 떡, 과일, 전, 사탕, 밤, 대추, 나물, 적 등을 어디에 차려야 하는지 까지를 다 배운단다. 그리고 나면 바라, 징, 장고 치는 법 등을 익히고. 그 후에는 덕담과 사설, 소리 등을 배워야 한다는 것.

 

 

경기도 굿은 독창적인 지역의 굿이다

 

“경기도 안택굿은 사설이 많아서 어떻게 소리를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등도 배웁니다. 거기다가 사람들을 만날 때 해야 하는 예의범절 등까지 배우게 되죠. 그래야 전통 안택굿의 맥을 이어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학습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다 허사입니다.”

 

제자들을 배출한 것은 자신이 학습을 하고 난 뒤 10년 정도가 지나서부터 가르쳤단다. 그 전까지는 자신의 학습도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고.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선대에게서 배운 학습을 복습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는 것. 요즈음 많은 무속인들이 남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애가 타기도 한단다. 내가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먼저 배워야하는데, 요즈음은 그저 자신도 잘 모르면서 남을 가르친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위험하단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동안 굿을 배운 제자들이 한 120명 장도는 될 거예요. 현재는 18명 정도가 배우고 있어요. 그런데 제자들이 배우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이 아파요. 어렵기는 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고 배우다가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만큼 경기전통 안택굿은 배우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배우겠다고 오는 사람은 가르쳐 주어야죠.”

 

굿판에 들어서긴 했지만, 그렇게 순탄하게 굿을 한 것은 아니다. 제가 집에 굿을 하러 가면 큰 만신들이 안당제석을 하라고 한 후, 굿을 마치고나면 느낌이 없다고 굿을 다시 하라고 한다는 것. 그럴 때면 창피하기도 하고 정말 그만두고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속으로는 울면서 굿을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그 때 선생님들은 신복 접는 법을 한번 알려주고, 그걸 따라하라고 해요. 못하면 바로 지청구를 받게 되죠. 정말 힘들게 굿을 배웠어요. 그리고 그렇게 배운 굿이기에 지금 남을 가르칠 수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들이 워낙 험하게 다루셨으니 까요. 자존심도 버리고 살아 온 세월이죠.”

 

 

 

8세에 내림굿을 받은 고성주의 신어머니인 경주 최씨는, 고성주의 친고모인 제주 고씨의 신딸이다. 또한 제주 고씨는 당대에 명성을 날린 남양 홍씨를 신어머니로 모셨다. 남양 홍씨는 고성주의 증조모이자, 제주 고씨의 친정어머니이다. 하기에 고성주의 신의 계보는 남양 홍씨 - 제주 고씨 - 경주 최씨 - 고성주로 이어진다. 이들 굿의 세계는 근 100년 이상을 경기도굿을 본바탕으로 이어오고 있는 무가(巫家)의 내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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