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소재한 경기안택굿보존회. 이 집에 거주하는 경기안택굿 고성주 명인은 18세에 내림을 받은 후 이곳에서 45년을 거주하고 있다. 그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일 년에 봄·가을 두 차례씩 맞이굿을 올리고 있다. 힘들어도 봄 가을에 열리는 맞이굿은 거르지 않는다.

 

맞이굿이란 무격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무속신들과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양부리들의 안녕을 위해 행해지는 가장 큰 굿판이다. 흔히 맞이굿을 진적굿이라고도 한다. 맞이굿이라 부르는 것은 굿거리 제차 중에서 천궁맞이라고 하여 모든 신령들을 굿판으로 청배하기 때문에 맞이한다는 뜻이다.

 

이를 진적굿이라 하는 것은 맞이굿을 하는 날은 일반적인 굿보다 더 많은 제물을 진설하고 굿거리 제차 중에서 무격이 용사슬이라고 하여 물동이 위에 오르거나. 각종 제물을 이용해 사슬세우기를 하는데 이는 신령에게 온전히 받친다고 하여 진적굿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즉 모든 것을 신에게 받친다는 뜻이다.

 

 

110년을 가게로 전승된 경기안택굿

 

흔히 우리는 한양굿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에 많은 무격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고려 때는 도성 밖으로 50회나 무격들을 축줄했으며, 조선조 때도 무격들을 한양 성밖으로 내보냈다. 이들이 한양에서 쫓겨나면 만신들은 노량진인근 한강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에 노들만신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결국 한양굿이란 용어는 근대에 들어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하며, 이들이 도성에서 축줄당해 주로 자리를 잡은 곳이 경기도 수원을 비롯해, 화성, 오산, 안성, 시흥, 안산, 이천 등지였다. 이들은 이곳에서 나름대로 가계를 형성해 자신의 굿을 전승시켰기 때문에 경기도 일대의 굿은 나름 지역적 특색을 지니면서 오랜 시간 이어져 내려왔다.

 

이중 고성주 명인은 유일하게 강신무이면서도 가계(家系)로 굿이 전승된 특별한 경우이다. 고성주 명인은 할머니를 거쳐 고모, 그리고 고모의 신딸인 최영옥 만신- 고성주로 이어지는 110년의 세월을 집안으로 경기도 전통굿이 전승된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일 년에 두 차례씩 맞이굿을 열고 있는 것도 가계로 전해진 굿의 법제를 지켜가야 하기 때문이다.

 

 

질펀한 안택굿판, 모든 사람이 즐기는 축제

 

고성주 명인의 경기안택굿은 남다르다. 굿을 열린 축제라고 한다. 열린 축제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굿판이 바로 고성주 명인의 맞이굿판이다. 맞이굿을 열기 1주일 전부터 각종 기물을 정비하고 닦는다. 그리고 굿에 필요한 제물을 직접 집에서 준비한다. 맞이굿에 모이는 수백 명의 인원이 먹을 음식도 집에서 일일이 준비한다.

 

고성주 명인은 경기도에서 유일하게 <>을 지켜가고 있는 무격이다. 판이란 무격과 수양부리들이 부모·자식으로 연결되는 고리를 말한다. 즉 무격이 부모가 되고 수양부리들은 자식이 되는 정신적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기에 고성주 명인의 신도들은 나이가 고성주 명인보다 더 많아도 모두가 아버님이라고 고성주 명인을 호칭하고, 고성주 명인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수양부리들에게도 아들이나 며느리라고 부른다. 하기에 고성주 명인의 수양부리들은 대개 할머니 - 고모 - 신어머니 때부터 전해지는 대물린 신도들이다.

 

 

3일 오전부터 시작된 ‘2019 경기안택굿 가을맞이’. 열린축제답게 꼭 수양부리가 아니라고 해도 누구나 굿판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누가와도 먹을 것을 한상 차려준디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수양부리가 아니라고 해도 굿판에 참여하면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복과 굿에서 사용한 제물을 나누어준다.

 

그리고 굿판 내내 먹을 것을 차린다. 더 달라고 해서 노여워하지 않는다. “집에 오는 이는 무조건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고성주 명인의 철학이다. 하루 종일 굿이 열리고 중간에는 소리꾼과 춤꾼도 한 몫 거든다. 그야말로 종합적인 축제의 모습이다. 그리고 막판에는 모두가 전복을 입고 한바탕 뛰어논다. 이집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누구나 찾아와 먹고, 마시고 함께 즐기는 열린 축제의 장 경기안택굿. 하루빨리 경기도 무형문화재로 지정해 온전한 전승이 되길 바란다.

 

수원시 팔달구 지동 창룡문로 56번길. 집 대문 앞에는 경기안택굿보존회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안택굿은 집안의 안녕을 위해서 하는 축원굿으로, 이 집에는 4대째 대물림을 하면서 경기지역의 안택굿을 보존, 전승시키고 있는 고성주(, 60) 회장의 집이다. 23일 오후 집안에 북적인다.

 

한편에서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튀기고 있고, 집 안에서는 연신 덩이진 밀가루를 손으로 곱게 부수고 있다. 28일은 고성주 회장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령들과 수양부리(자신을 따르는 신도를 일컫는다)들을 위해 맞이굿을 하는 날이다. ‘진적굿이라고도 하는 맞이굿은 신령을 섬기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굿이기도 하다.

 

 

자신을 비롯해 10여 명의 사람들이 준비를 하고 있는 약과와 다식은 바로 맞이굿을 할 때 상에 진설할 음식 중 하나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편하게 모두 사다가 사용을 하지만, 이 집은 40년이 넘는 세월을 한 번도 사다가 진설한 적이 없다. 직접 모든 음식을 조리를 하기 때문에 짧게는 5, 길게는 1주일 전부터 준비를 한다.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음식 올릴 필요 없어

 

사람들은 참 이상합니다. 신령님들이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모르는 것 같아요. 적어도 나를 주관하고 내 수양부리들을 잘 살게 만들어주는 신게 제물을 드린다고 하면서 약과나 다식도 다 사다가 쓴다면 무슨 정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 되겠어요. 저희는 40년 동안 한 번도 사다가 올린 적이 없습니다.”

 

 

23일 오후 내내 정성을 들인 약과와 다식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 힘이 들겠지만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만들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약과와 다식 등은 맞이굿을 마치고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싸들고 간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먹을 음식이기 때문에 더 정성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방식 그대로 만드는 약과와 다식

 

약과는 조청, 계란노른자, 생강가루, 찹쌀, 들기름 등을 잘 반죽해 둥그렇게 누른 다음에 적당한 크기로 잘라 가운데 칼집을 내고 그 안으로 양편을 집어넣어 모양을 만든다. 그리고 기름에 튀겨내면 다시 조청에 담가 잘 젖게 만든다. 채로 걸러내면 달라붙지 않게 고물을 뿌려서 말린다.

 

 

다식은 콩가루와 쌀가루, 조청 등을 혼합해 가루를 잘게 부순다. 가루가 곱게 부수어질수록 다신이 깨끗하게 만들어진다는 것. 거기다가 식용색소를 포함하여 색을 낸 다음에 다식판에 반죽을 둥글게 만들어 놓은 다음 손으로 힘을 다해 누른다. 다식판에 참기름 칠을 한 다음에 찍어내면 아름다운 문양이 있는 다식이 된다.

 

저희는 다식을 다섯가지 색으로 만들어요.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을 뜻하는 것이죠. 많은 재료를 이용하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 재료를 싼 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음식을 만들어야 나중에 그것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에도 좋으니까요.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내는 약과와 디식은 사람들도 좋아하죠.”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요즈음은 기계로 쉽게 만들 수가 있지만, 음식을 정성이 들어가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매년 봄, 가을로 올리는 맞이굿에 진설하는 음식은 모두가 직접 만든다고 한다.

 

 

저희 고성주회장님은 아직 한 번도 음식을 사서 하는 것을 보지 못했어요. 아무리 힘이 들아도 정성을 올리는 음식을 사서 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맞이를 올릴 때는 보통 일주일 전부터 준비를 하죠. 맞이굿을 하는 날은 300명 정도의 음식 장만을 직접 하세요. 김치 담그고 나물 무치고, 전도 이틀 전부터 부치고요. 모든 음식은 집에서 직접 장만을 합니다. 그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예의라는 것이죠.”

 

아직 한 번도 사서 쓰는 음식을 신을 모시는 전안에 진설하거나 손님들의 상에 올려보지 않았다고 하는 고성주 회장. 전통방밥으로 만든 약과와 다식을 만들면서도 연신 잘 만들어야 한다고 독려를 한다. 정성을 들인 음식을 먹고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이 집의 축제준비는 늘 웃음이 넘친다.

 

고은시인과 고성주만신이 만나다

 

대단한 사람들이 만나는 것을 흔히 세기의 만남이라고 표현을 한다. 그런 만남이 이루어졌다. 20일 오후 수원시 팔달구 지동 고성주(, 60. 경기안택굿보존회장)씨의 집에 고은시인이 찾아왔다. 이 만남은 수원시인협회 김우영 회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첫 만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다.

 

고은선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이시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열 번이나 올랐다. 고성주 회장 역시 우리 무속을 지켜가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큰만신이다.

 

같은 고씨네요.”

그러네요.”

고씨들은 제주 고씨밖에 없어요. 다 친척이죠.”

 

 

끝없는 대화가 이어져

 

고은선생이 고씨의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제주 삼성혈부터 고주몽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곁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 처음부터 주머니에서 종이와 볼펜을 꺼낸 고은선생은 고성주 회장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일일이 메모를 하신다.

 

고은선생은 참 소탈하시다.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계신분이 말씀 한 마디도 허투루 듣지를 않는다. 일일이 메모를 하면서 궁금한 것은 재차 묻고는 한다.

저는 5~6세부터 신기가 있었나 봐요. 어릴 적에 화령전에 계시던 이동안 할아버지께 가서 소리도 배우고 춤도 배웠어요. 당대의 내로라하시는 선생님들이 제 별명을 초립동이라고 지어주셨죠.” 라고 고성주 회장이 이야기를 하자.

고은선생이 이런 이야기는 모두 녹음을 해서 책으로 엮어야 해요. 우리 역사인데라고 한다.

 

 

처음 내림을 받고나서 3년 동안은 신어머니 밑에서 정말 머슴보다 못한 생활을 했어요. 음식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심지어는 장 담구는 법까지 배우지 않은 것이 없어요. 장독을 깨끗이 닦았는데, 신어머니가 다시 닦으시는 거예요. 그러면 속으로 불평을 참 많이 늘어놓았죠. 그렇게 엄하게 배웠기 때문에 지금도 못하는 음식이 없어요. 저희집에는 40년이 지난 씨된장과 간장이 있어요.”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훌쩍 지났다. 더 많은 이야기가 오고갈 수 있었지만,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자리를 뜬다. 짧은 만남이 서운한 듯 몇 번이고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헤어짐을 섭섭해 한다.

 

시인도 만신도 다 신이 있어야

 

고은선생과 김우영 회장과 함께 지동 순대타운으로 자리를 옮겼다. 손에는 고성주 회장이 전통방식으로 제조한 고추장 한통을 들고.

시인도 신이 있어야 해요. 순간적으로 글을 쓸 때 느낌이 오는 것이 다 신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신이 없으면 좋은 글을 쓸 수가 없어요.”

막걸리 한 잔을 앞에 놓고 고은선생과 이야기가 자연 내림굿이며 지노귀굿 등을 말한다.

 

 

고성주씨는 참 착한 듯해요. 첫 느낌부터가 사람이 참 순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리지만 고성주 만신의 이야기는 모두 녹음을 해야 해요. 그래서 책으로 펴내야 해요. 우리 역사의 한 면도 놓치면 안 되니까요. 더구나 만신들의 살아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죠.”

 

다음에 고성주 회장이 굿을 할 때 꼭 함께 자리를 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한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고은선생과의 자리는 참으로 훈훈했다. 세계적인 분과의 만남의 자리가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안택굿은 경기도 지방 중 한수 이남에 전승이 되는 굿이다. 경기도의 경우 한수 이남은 전통적인 경기굿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한수 이북은 이북굿과 습합이 된 형태로 나타난다. 경기도의 굿은 크게 구분을 해 세습 화랭이들이 주관하는 도당굿, 강신무들의 굿인 안택굿이 있다.

 

안택굿은 말 그대로 가내의 안과태평을 기원하는 굿이다. 도당굿이 예술성에 치중했다고 하면, 안택굿은 신성과 예술성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소리도 도당굿이 판소리처럼 소리를 하는 판배개 창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 안택굿은 경기민요를 닮은 소리로 흥이 넘친다. 안택굿을 영위하는 강신무들은 기본적으로 춤과 소리를 익혀야만 제대로 된 굿을 할 수가 있다.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배워야 한다.’

 

흔히 굿판에서 옛 구 만신들이 하는 소리이다. 내림을 받고나면 점을 보거나 하는 일들은 신령이 하지만, 굿은 신령이 하는 것이 아니다. 무격(巫覡) 스스로가 신령을 상징하는 의대를 입고 소리를 하고 춤을 춘다. 등걸 잠방이에 쾌자 하나를 걸치고 하는 도당굿과는 달리, 안택굿은 거리마다 신을 상징하는 무복을 착용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경기지역의 무의식을 그린 무당성주기도도차서에 보면 경기지방에서 나타나는 굿의 제차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그 순서를 보면 지금의 경기안택굿과 다름이 없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현재 경기안택굿의 전승은 이미 조선조 때부터 꾸준히 이 지역에서 전승이 되어 온 굿거리 제차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안택굿의 절차를 제대로 다 배우고자 하면 아마도 10년은 족히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할머니 때부터 고모, 신어머니를 거쳐 4대 째 경기안택굿을 배우면서도 소리와 춤을 따로 학습을 하는 등 모든 것을 배웠습니다. 예전 큰 만신들을 따라 다니면서 굿거리를 배울 때는 정말 식모나 종과 다름이 없었죠.”

 

 

수원시 팔달구 지동 271-124에 거주하는 고성주(, 60)는 벌써 신내림을 받은 지가 43년이나 되었다. 그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봄, 가을로 단골들을 위하는 진적굿을 해왔으며, 경기안택굿의 보전, 전승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20년 넘게 전승에 땀을 흘려

 

고성주의 뿌리는 이천군 대월면 송라리이다. 그곳에서 조모가 당지기를 하면서 굿을 했다. 그리고 고모는 팔달산 화성 성곽 옆에 거주하면서 수원과 송라리를 다니면서 굿을 해주었다. 13일 오후에 송라리를 찾아보았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들 중 고성주의 가계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마을에서 고모를 직접 본 사람들도 있고, 그 내력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4(친족으로 3)를 이어오면서 경기안택굿의 전승에 땀을 흘리고 있다는 것. 13일 오후 지동 고성주의 집 지하연습실에서는 5명의 문하생들이 경기안택굿의 학습에 열중을 하고 있다. 무가연습, 거성(굿 의식 중 춤사위), 거기다가 실전을 익히는 도구 사용 법등을 고성주의 가르침으로 학습을 하고 있었다.

 

 

경기안택굿은 정말 흥겹습니다. 그만큼 소리와 춤에 기본기가 닦여져 있어야 배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배운다고 해도 기본기가 없으면 제대로 된 굿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지루한 학습을 배우려고 하질 않습니다. 남들은 돈을 싸들고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그냥 가르쳐준다고 해도 제대로 배우지를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죠.”

 

일주일에 2, 하루에 3시간씩을 공부를 한다고 해서 실력이 부쩍 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학습을 하고난 후 굿판에서 실연을 할 수 있도록 한단다. 그러면 몰라보게 나아진 것을 느낀다는 것. 화성 축성 때부터 수원 팔달문 인근 장시로 모여 든 많은 대만신들. 그들의 흥겨움이 넘치는 굿거리 한 판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단을 치고 피리를 분다. 사람들은 길게 늘인 흰 소창을 어깨에 메고, 성주지경다지기를 부른다. 지경다지기란 땅을 단단하게 다진다는 뜻이다. 집안의 액을 물리치고 안과태평과, 동티가 나는 것 등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4일 오후 오산시 세교동 모회사에서 벌어진 경기안택굿 보존회(회장 고성주)의 무격들이 주관을 한 재수굿 한마당.

 

오후 5시 경부터 상을 차리기 시작해, 이 회사의 재수를 빌어주는 경기안택굿이 시작을 한 것은 오후 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그리고 굿이 끝난 시간은 5일 오전 2시가 조금 안돼서이다. 그 재수굿 중 집안에 성주신(城主神)을 놀리는 성주굿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이날 굿 중 정말 잔치다운 굿거리였다.

 

 

성주신은 가신 중의 으뜸

 

성주굿(혹은 성주거리)은 안택굿 등의 제차에도 나타나지만, 집안의 가장의 나이가 27, 37, 47, 57, 67세 등과 같이 7의 수가 드는 해 10월에 택일하여 별도로 성주굿만 따로 제차를 행하기도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10월에 집집마다 무당을 데려다 성조신(成造神)을 맞이하여, 떡과 과일을 베풀어 놓고 빌어 집안의 편안함을 바란다.’고 적고 있다.

 

성주는 가신 중의 으뜸이다. 어떤 형태의 집이 되었던지 그 집에는 성주가 좌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신 중의 으뜸인 성주는 대개 대들보나 안방의 문설주에 자리를 잡는다. 하지만 이것은 성주를 받을 때의 경우이고, 일반적인 안택굿이나 재수굿 등에서는 성주를 별도로 모시지 않는다.

 

 

열린 축제의 진수 보여주는 성주굿

 

성주굿은 재담과 해학, 춤과 소리, 그리고 신성(神性)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열린 축제의 가장 흥겨운 제차이다. 먼저 성주올리기라고 하여 동쪽으로 뻗은 솔가지를 꺾어, 소지로 묶는다. 그리고 쌀을 담은 그릇에 솔가지 성주대를 꽂아 조무(굿을 도와주는 무당) 한 사람이 그 자리를 붙들고 앉는다. 주무는 징을 치면서 성주신은 청배한다.

 

성주가 내리면 성주대가 움직인다. 성주대는 성주가 뜬다고 하는 경우에는 밖으로 뛰쳐나간다. 집안에 좌정해야 할 성주가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그 성주를 모셔 집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애를 먹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날은 마침 성주가 바로 회사의 이층으로 올라가 대표 권아무개(, 46)의 집무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신탁인 공수를 주고 난 후, 다시 굿청에서 내려와 권대표와 함께 신바람 나게 춤을 춘다. 성주굿의 재미는 바로 이런 놀이판에 있다. 우리 굿은 그냥 축원을 하고 신탁인 공수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질펀한 춤과 소리, 그리고 놀이가 함께하기 때문에 열린 축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주굿의 백미 지경다지기

 

성주굿의 백미는 성주지경다지기이다. 집안의 대들보에 흰 소창을 길게 묶어 내리지만, 이날은 회사의 공장과 사무실을 겸한 곳에서 굿이 이루어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끝에 소창을 묶고 길게 늘여놓았다. 그리고 고성주회장과 무녀들이 그 끈을 어깨에 메고 지경다지기를 했다.

 

지경다지기는 성주축원을 한 다음에 경기 창으로 소리를 한다. 소리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흥겹다. 절로 춤이 나온다. 그렇게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땅을 밟는 것이다. 춤을 추면서 땅을 밟는 행위는 기본이 잘 다져져 회사가 잘 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한 시간 여를 그렇게 소리를 하고 난 뒤, 성주상에 실타래와 함께 묶어 놓았던 북어를 집안의 높은 곳에 모셔놓는다.

 

성주굿이 끝났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다. 그래도 누구하나 피곤한 기색이 없다. 또 이야기보따리가 열렸다. 굿판은 웃음과 해학이 넘친다. 그런 열린 축제 마당인 굿이 있어 경기안택굿은 전승이 되어야 한다. 그 마지막 제차를 혼자 지켜가고 있는 고성주회장의 존재가, 굿판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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