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에는 현재 5일장이 서는 곳이 세 곳이 있다. 여주읍의 하리 5일장과 가남면의 태평리 5일장이다. 또 한 곳은 대신면의 5일장인데, 대신면의 경우에는 5일장이라고 해도, 그 규모가 작아 전국 5일장에는 끼지를 못한다. 현재 가남면 농협 앞쪽으로 서는 5일장을 '태평리장', 혹은 '선비장'이라고 부른다. 

 

이곳을 선비장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지명 때문이다. 여주군 가서곡면에 속했던 마을인 섬비를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명동, 방아다리, 섬배, 신대동, 구장터를 병합하여, 큰 들이라는 뜻으로 태평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태평1리는 마구실, 방아다리라 부르고, 태평2, 4리는 섬배 또는 선비, 태평3리는 새터라고 불렀다. 이 태평2, 4리에 서는 장이라고 하여 '선비장', 혹은 태평리에 선다고 하여 '태평리장'이라고 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통칭 '가남장'이라고 부른다.

 

1일과 6일에 서는 가남장

 

▲ 가남장 그래도 한번도 장을 쉴 수는 없다. 가남장의 장꾼들은 대목 밑이라고 해도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5일장을 연다고 한다.

 

가남장은 매달 1일과 6일에 선다. 한 달에 6번을 서는 5일장은 1일과 6일, 11일과 16일, 그리고 21일과 26일이 장날이다. 평소 같으면 50명이 넘는 장꾼들이 모여서 길게 장을 이룬다. 하지만 2월 16일 찾아간 가남장은 썰렁하다. 대목 밑에 선 5일장이라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를 않았다. 여기저기 10여개 남짓한 난장이 섰을 뿐이다.

 

가남장에 모이는 장꾼들은 주로 경기도 일대에서 물건을 싣고 와, 이곳에서 장사를 한다. 남양주, 양평, 이천, 성남 등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장을 이루고 있는데, 멀리 충북과 강원에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5일장이라는 특수성이 거주 지역에 관계없이 모여서 장을 이루기 때문에, 전국 어디서나 모여들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번 5일장은 장꾼들이 모이지를 않아, 몇 개의 난전이 자리를 펴고 있을 뿐이다.

 

'가남장을 찾는 사람들은 다 선비 같아요'

 

▲ 김광열 가남장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모임인 상우회 김광열회장은 부부가 함께 30년 넘게 가남장에서 화장품을 팔고 있다

 

가남장에선 지역의 특산품인 쌀이나 고구마, 땅콩 등보다 더 유명한 것이 바로 건어물전이다. 아무래도 멀리 가서 구해야하는 건어물이다 보니, 이렇게 찾아드는 5일장의 사람들이 고마울 수도 있겠다. 그래도 5일장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 갖추고 있다. 장을 이리저리 구경하다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장사를 하는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곳은 '상우회'라고 하여, 난전을 하는 상인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이다.

 

마침 대목 밑 장인데도 불구하고 상우회 김광열(남, 57세)회장이 화장품 난전을 펴고 있다. 남양주 금곡동에 거주하는 김광열 회장은 안성, 충주, 마석, 문산, 가남장을 돌면서 장사를 한단다. 이곳 가남장에서 장사를 한지가 벌써 30년이 넘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고 이야기를 하는 김광열 회장은 5일장을 돌면서 장사를 하기 때문에, 한 달 내내 쉬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분이 어떻게 화장품을 파느냐고 물으니, 곁에 서 있는 여자 분이 부인이라는 것이다. 부인 최명숙(52세)씨와 함께 5일장을 다니면서 장사를 한다는 것.

 

"힘들지는 않으세요?"

"힘들죠. 하지만 산다는 것이 어디 편할 것이 있나요. 그래도 이렇게 같이 장사를 하러다니니 저희들은 나은 편이죠"

"전에 비해 장사는 잘 되나요?"

"점점 힘들어요. 대형 할인점이 들어오면서 그쪽으로 손님들을 많이 빼앗기는 것 같아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부인 최명숙씨가 선비장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선비 같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냐고 물으니, 5일장을 다녀보아도 이곳처럼 점잖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곳 장을 찾는 분들은 물건 값을 깎으려고 하지를 않아요. 그러니 시비가 붙지를 않죠. 딴 곳에 가면 덤을 달라고 아우성인데, 이곳 분들은 주는 대로 받아가요. 그래서 장사를 하는 분들이 항상 더 올려주고는 하죠. 그래서 선비장인가 봐요."

 

찾는 사람도 없이 썰렁한 장을 하루 종일 지킨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시종 웃음을 잃지 않는 부부. 서로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그런 마음 때문에 5일장을 돌면서도 피곤을 이겨내는 것인지.   

        

봉사를 하는 5일장 사람들

 

▲ 기구 5일장에는 별별 것들이 다 있다. 그래서 5일장은 재미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가보니 이상한 점이 있다. 전국에서 모이는 갖가지 물건을 파는 난전상들이다. 어떻게 '상우회'라는 모임을 만들게 된 것일까?

 

"저희가 이곳에 와서 자리를 펴고 장사를 하는 것도, 다 물건을 사주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매번 장에 장사를 하러 오시는 분들과 의논을 해서, 무엇인가 보람된 일을 해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회원 50명이 넘는 상우회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단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든 모임이 아니고, 봉사를 하기 위한 모임이라고 한다.

 

"일 년에 두 번씩 봉사를 하죠. 6월 30일과 12월 30일, 두 차례 쌀을 여섯 가마쯤 어려운 분들에게 전해드리죠. 주로 가남면 지역에 사시는 어려운 분들에게요."

 

그래서인가 이 5일장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가 가족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물건 값을 흥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훈훈한 정이 있는 곳. 가남 5일장에는 마주만보아도 절로 웃음이 나는 부부가 있어 즐겁다. 5일장의 이야기가 즐거운 것도 이렇게 정이 넘치기 때문이다.(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2, 17)



4월 3일 토요일. 매주 신륵사 둔치에서 열리는 여강선원의 수경스님이 주관하는 '수륙제'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한국작가회의 저항의 글쓰기 실천위원회'(위원장 도종환) 회원 40여명과, 민예총 본부와 경기지회회원들 30여명이 3일의 수륙제에 참가했다. 지금은 수륙제라고 부르지 않고 '생명평화를 위한 여강 한마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여강 한마당에 참석하기 전 작가회의 회원들과 민예총 회원들은, 버스와 차 등을 이용해 이호대교 위에서 파헤쳐진 남한강을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다. 강천보 현장에 도착한 일행은 주변을 돌아보고 부라우 나루로 이동해, 이항진 여주환경련 집행위원장의 설명으로 남한강의 생태계와 4대강 사업이 저지르고 있는 일들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재앙으로 돌아올 것인가에 대해 설명을 듣기도 했다.

 

  
▲ 강천보 현장 이호대교 위에서 내려다 본 강천보 공사현장, 속살 드러낸 남한강이 흉물스럽다.
ⓒ 하주성
이호대교

 

침묵의 시간, 강은 흐르고

 

참가한 사람들은 바위에 올라앉아 흐르는 남한강을 내려다보며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바위 위에는 '시인이여 사라지기 전에 기억하라'는 펼침막을 펼쳐놓았다. 그저 묵묵히 내려다보는 강물이지만, 그 강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아픔을 느꼈을까? 조금 위 예전 육모정이 서 있던 곳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구중서 이사장의 남한강 현장을 둘러본 소감을 듣는 시간에 이어,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인 홍일선 시인의 시낭송과 글쓰기 퍼포먼스가 열렸다.

 

  
▲ 강가에 선 사람들 부라우 나루에 도착한 일행이 이항진 여주환경련 집행위원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 하주성
부라우나루

  
▲ 침묵의 시간 '시인이여, 사라지기 전에 기억하라'는 펼침막을 펴고 강을 바라보면 침묵을 하는 시인들
ⓒ 하주성
시인

 

'첫 시를 쓰던 첫 마음으로 돌아가야 하리'라는 제목의 시에서 홍일선 시인은

 

가문날

강마을 어진땅 지켜주시던

단양쑥부쟁이 일가

무참히 밀어내는 짐승의 시간

강 찾아오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메이는

검은댕기해오라기 형제들

국토 곳곳이 용산참사역이어서

고향을 빼앗긴 어머니강의 피붙이들

고라니들 청둥오리 백로들 무래무지 누치들

애달픈 별리의 노래

강기슭 갈대숲에서 들려왔으리(하략)

 

속마음 드러낸 시인들

 

  
▲ 시낭송 홍일선 시인의 시낭송과 함께 펼쳐진 퍼포먼스
ⓒ 하주성
시낭송

  
▲ 글쓰기를 하는 회원들 펼침막에 자신이 느낀 글을 적는 회원들
ⓒ 하주성
펼침막

 

퍼포먼스가 끝나고 나서 참가한 사람들은 펼침막에 강에 글을 남겼다. 저마다 마음속에 한 마디씩의 절규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핏빛으로 물든 강물을 보라 우리의 암울한 미래다.(김희정)

강은 제모습으로 흐르고 싶어한다. 내가 내 얼굴로 살아가듯(최옥자)

강이 사라지면 우리의 모습은 얼마나 남루해질까?(김남일)    

강은 제 깊은 속을 투명하게 드러낼수록 멀리 흐른다(김경주)

 

부라우나루를 떠난 일행은 오후 3시부터 남한강 은모래금모래 공사장이 마주보이는 둔치에서 열리는 여강 한마당에 참석을 했다. 앞에는 '先亡 4대강 파괴로 희생된 온 생명 제위'라는 위폐를 모셔놓고, 불교의식인 작법에 이어 시낭송과 판화가 이철수의 공사현장을 돌아본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 위폐 4대강 사업으로 인해 죽어간 수많은 생명을 위한 여강 한마당
ⓒ 하주성
위폐

  
▲ 여강 한마당 매주 토요일에 열리는 여강 한마당에 참석한 사람들. 건너편에는 아름다운 금모래은모래가 송두리채 파헤쳐지고 있는 현장이다.
ⓒ 하주성
여강 한마당

  
▲ 이철수 판화가 이철수씨가 현장을 돌아본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 하주성
이철수

 

파괴되고 찢긴 남한강 현장을 돌아보고 난 후, 여강 한마당에 참석한 사람들은 지금 행해지고 있는 이 4대강 정비라는 사업에 우리에게 얼마나 큰 화를 불러 올 것인가에 대해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아름다운 남한강이 파헤쳐지는 현장을 바라보고 이루어지는 여강 한마당. 그래서 한 주도 쉴 수가 없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싸움이지만.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농토를 잃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죽음과 같다고 한다. 농사 밖에는 할 줄 아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짧게는 몇 대에서 길게는 15대 이상을 한 자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온 사람들. 이제 그 농토를 빼앗기고, 삶의 터전을 잃게 되었다.

 

여주군 대신면 양촌리. 이 마을은 모두 25가구 정도의 주민들이 살아간다. 양촌리는 현재 하천부지와 개인들의 소유지로 된 땅을 합해 백만 평 정도의 농지가 있다. 이곳에 1300동 정도의 시설하우스가 들어서 대단위 특작과 화훼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일대가 모두 남한강 정비로 인해 수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넓은 농지 중 현재 마을이 있는 곳을 위시해 17만 평만이 남고, 나머지는 모두 수용계획이 섰다.

 

문제의 발단은 여기서 시작이 되었다.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농민들과, 아무 대책 없이 '상부지시'라는 말만 반복하는 관과의 마찰이다. 자신의 농지를 갖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그나마 적당한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겠지만, 하천부지에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아무런 이주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개인 소유의 땅 38만 평 중에서도 17만 평을 남기고는 모두 수용이 된다는 양촌리. 그 개인의 땅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80%가 외지인의 땅이기 때문에, 결국 주민들과 현재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받아야하는 보상은 미미한 수준이라는 것.

 

1월 13일, 날씨만큼이나 냉랭해진 양촌리를 찾았다. 마을회관에는 마침 경을수 양촌리 이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천혜의 농사조건을 갖춘 양촌리

 

  
▲ 시설하우스 현재 양촌리는 백만평 가까운 땅에 시설하우스 1,300여 동이 들어서 있다.
ⓒ 하주성
양촌리

  
▲ 양촌리 25가구의 원주민들과 외지에서 시설하우수 재배를 위해 들어 온 많은 사람들이 양촌리에서 삶을 이어간다. 연 5,000명이나 되는 일자리를 잃게되었다.
ⓒ 하주성
양촌리

 

양촌리에 이렇게 많은 농작물을 생산하는 시설하우스가 자리를 잡은 것은 이곳의 농토가 비옥하기 때문이다.

 

"양촌리는 섬 같은 곳입니다. 한 마디로 삼각주죠. 양편으로 모두 물이 흐르고 있고, 그 가운데 비옥한 토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변에는 산이 없이 넓게 펼쳐진 들로, 햇볕이 잘 들고 배수가 잘되 농사를 짓는 데는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천부지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도지세를 물면서도 정말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곳을 모두 수용한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주민 김민식씨는 현재 화훼단지를 하고 있는데,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 보상을 받아봤자 딴 곳에 나가 그만한 농토를 마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힘들게 이 땅을 지켜가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을 수용한다고 하면서 그 대책은 전혀 세워주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당장 이곳에서 딴 곳으로 옮겨가면, 어떻게 이만한 농토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돈을 준다고 해도 이 땅보다 좋을 수가 없는데, 거기다가 적절한 보상이 아니라면, 결국 농민들을 두 번 죽이는 결과입니다."

 

일자리 창출을 한다면서 많은 일자리를 없애다니

 

  
▲ 공고안내문 2010년 1월 1일부터 하천 일대의 경작음 금지한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 하주성
양촌리

 

양촌리에는 1300개 동의 시설하우스가 있다. 너른 벌판을 빈틈없이 들어찬 시설하우스에는 연신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게 이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현재 양촌리 시설하우스에서 작업을 하는 분들은 한 동에 4명씩만 친다고 해도, 년 중 5000명 정도의 일자리가 보장이 됩니다. 그리고 이분들이 여기서 임금을 받아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들도 아무런 대책 없이 이곳을 수용한다고 합니다. 4대강 정비를 하면서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연일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없애는 겁니다."

 

5대째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유호필씨는 걱정이 태산 같다고 한다. 당장 현재의 많은 주민들이 이주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농지가 모두 수용이 된다면 이곳에서 살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책 없이 수용한다는 행정부서를 이해 할 수 없다는 것.

 

"생각해 보세요. 이곳에 살고 있는 가구 중 두 가구만 이주를 해야 하고, 나머지는 보존지역인 17만평 안에 있어 이주를 할 걱정은 덜었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지을 땅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갑니까? 결국은 나가라는 소리가 아닙니까? 농사꾼한테 농토를 빼앗으면서 살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냐 이겁니다"

 

반복되는 슬픔이 서린 양촌리

 

  
▲ 현수막 양촌리로 들어가는 다리 입구 도로에 붙은 현수막, 양촌리와 보통리 등에 골려있다.
ⓒ 하주성
양촌리

 

"저희 양촌리는 500년 정도를 이어오는 유서 깊은 강변 마을입니다. 15대를 넘어서 사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그런 양촌리는 대를 이어가면서 농사를 짓고, 앞을 흐르는 남한강에서 물고기를 잡고는 했던 곳이죠. 양촌리는 그동안 많은 슬픔을 당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시설하우스로 살만하니까, 또 이런 일을 당하네요."

 

양촌리 경을수 이장이 양촌리는 왜 매번 이렇게 슬픔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고 한다. 양촌리는 원래 강가 마을이었다고 한다. 1970년대 초에 대홍수가 나 집을 현재의 보통리 새마을로 옮겼다가, 1995년에 다시 살던 양촌리 땅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0년도쯤에 현재의 방죽을 쌓았단다. 그런데 다시 또 4대강 정비라는 이유로 이곳에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으니, 또 떠나라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지금 이 마을에 4대강 정비를 관리하는 건물인가가 들어왔는데, 그 위쪽부터가 모두 저류지로 흡수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양편을 갑문을 막는다고 하는데, 정확히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정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고요.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매번 우리 양촌리에 일어나는 것인지. 그저 우리는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를 이어 온 사람들을 나가라고 하면, 이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서 살아야합니까? 그리고 농지가 사라지는데 이곳에서 살라고 하면 무엇으로 삽니까?"

 

수질정화를 한다고 하지만 이미 남한강은 1.5급수의 맑은 물이라고 한다. 그것을 2급수로 만든다는 것이 수질정화란다. 저류지를 만들고 양편을 갑문을 낸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양촌리 사람들은 불안하다. 도대체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 것인지, 여기저기 찾아가서 이야기를 해보지만 속 시원한 답변을 들어보지 못했단다.

 

'알아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까?'     

 

  
▲ 양촌리 입구 양촌리는 입구에는 강의 지류가 두르고 뒤로는 남한강이 흐르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농지이다. 이 곳에 저류지를 만들고 갑문을 설치한다고 한다.
ⓒ 하주성
양촌리

 

양촌리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일 줄 모른다. 그럴만한 사람이 마을에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 군데를 찾아가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지금까지 들은 소리는 '위에서 하는 일이라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래서 상부기관을 찾아갔지만, 그곳에서도 또 '위에서'라는 말만 되풀이 했단다.

 

"그동안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우리 입장을 이야기 헸지만, 매번 듣고 온 소리는 '위에서 하는 일이라 우리는 모른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위가 도대체 어디인지도 모르겠고요. 우리도 국민입니다, 당연히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고요. 여기서 살아가던 그대로 살게 놓아두었으면 합니다. 만일 여기서 나가야 한다면, 그만큼 살만한 여건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죠."

 

2010년 1월 1일부터 한강변의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공고가 붙었다. 내용은 4대강 살리기 일환으로 홍수예방, 수질개선, 수생태계조성 및 복합문화공간 조성 등을 위해서란다. 그러나 양촌리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상 대대로 이곳의 땅을 터전으로 삼아 살아오던 사람들이다.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당장 생계걱정을 하고 있는데, 일자리 창출이란 말에 어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곳을 파헤쳐 골재채취로 막대한 돈을 번다고 하는데, 정작 농토를 잃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상을 할지 궁금하네요. 만일 이 사안에 대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대책을 세워주지 않는다면, 양촌리와 보통리 주민들을 나라에서 다 죽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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