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선인들은 무엇인가를 남기고 가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나보다. 물론 민초들이야 먹고살기도 바빴으니,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민초들의 삶이라는 것이, 그저 양반네들에게 매일 뜯기고 찢기다가 일생을 마쳤을 테니까. 그러나 양반네들은 자신이 살아생전에 어떤 삶을 영위했는가에 대해, 그 흔적을 곧잘 남겼다는 생각이다.

그런 자신의 생애를 가장 잘 표현한 것들 중에는, 많은 정자가 있다. 정자란 쉽게 무너지지도 않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곳이다가 보니, 자연 정자에 자신의 살아 온 흔적을 남기기를 즐겼다는 생각이다. 우리나라의 정자는 영남지방에 상당히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조선조 전 시대를 영남지방의 반가들이 득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을 기억하다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는 생육신의 한분인, 어계 조려선생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조려 선생은 단종이 숙부에 의해 사약을 받고 영월 땅에서 죽임을 당하자, 영월까지 가 그 시신을 수습하고 낙향을 하였다. 그 위폐를 동학사에 모셔놓고 백이산 아래에 은거를 하였다고 전한다.

원북리 앞을 지나는 지방도 옆에는, 정자가 한 채 서 있다. ‘채미정(菜薇亭)’ 말 그대로이다. 백이산 아래에 은거한 조려선생은 풀과 고사리로 연명을 하면서 살았다고 전한다. ‘채미'란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무왕을 섬기는 것을 수치로 알고, 수양산으로 숨어들어 풀과 고사리만 먹다가 아사를 한데서 유래한다.



조려선생은 백이, 숙제와 같은 뜻을 품고 이곳에서 은거를 하면서, 좋은 의복과 좋은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충절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가 바로 채미정이다. 채미정은 정자로서의 아름다움보다, 그 안에 숨은 뜻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다.

무너져 내렸던 채미정

한 10여년이나 되었을까? 이곳으로 답사를 나갔다가 우연히 채미정을 들렸다. 인근에 있는 방어산 마애불을 답사하러 갔다가 들린 곳이다. 당시에는 잡풀이 우거지고, 정자는 쇠락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 지나는 길에 들린 채미정은, 말끔히 손질이 되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자 앞에 수백 년 묵은 은행나무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 쓸어져가는 대문은 없애버리고, 대신 한편에 일각문을 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10여대나 차가 설만한 주차공간도 만들었다. 정자도 말끔히 정리를 하고, 주변도 정리를 하였다. 채미정은 1735년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300년 가까이 되었다. 근처에는 생육신을 향사한 사액서원인 서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뜻이 더 아름다운 채미정

일각문을 들어서면 앞으로는 연못이 있다. 정자에 걸린 현판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순흥 안용호 선생이 지은 채미정 중건기문이다. 그 기문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함안읍성 서쪽 삼십리 지경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은 산이 백이산인데, 그 산 서편에 있는 동리가 원목이다. 동천복지답게 명려하고 맑은 물이 흐르고 기름진 옥야는 가히 밭 갈고 은거할만한 곳으로...(중략) 선생은 단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래학관에 계시다가 을해년 왕위찬탈의 화를 만나 재생들과 하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충의와 절개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분이시다.(하략)

이러한 선생의 충절을 되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 건립한 것이 바로 채미정이다. 역사 속에 남아있는 정자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채미정이 지니고 있는 조려선생의 충절이 아름다운 것이다.


채미정은 정면 네 칸, 측면 세 칸이다. 중앙에는 방을 드렸는데 판벽으로 처리를 하였다. 창호 위에는 작은 밀창을 사방으로 두었다. 정면으로는 원형의 기둥을 두고, 측면으로는 사각기둥을 배열하였다. 누마루를 방의 주변에 깔아, 사방으로 편안하게 밖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마도 이곳에서 있기가 답답하면, 위편에 있는 청풍대에 올라 바람을 쏘였을 것이다.

청풍대(淸風臺)와 문풍루(聞風樓)에는 소식조차 돈절한데

채미정 우측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있다. 그 위를 청풍대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뒤편에는 작은 정자 하나가 더 있다. 문풍루. 바람의 소리를 듣는 누각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그 바람결에 영월 땅에서 오는 좋은 소식을 기다린 것은 아니었을까? 충절을 지키느라 풀과 고사리로 연명을 한 조려선생이, 날마다 이곳에 올라 애타게 바람결에 오는 소식을 기다렸을 것이다.



채미정, 이름보다 뜻이 더 아름다운 정자.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조려선생은 이 채미정으로 인해 천만세에 그 이름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청풍대에 올라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심히 고개 한번 돌리지 않는 사람들. 그렇게 채미의 큰 뜻은 퇴색되어 가는 것인지.


옛 선인들은 정자에 자신의 아호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했는가 보다. 정자를 답사하다가 보면, 자신의 아호를 따서 ‘○○정’ 등의 이름을 붙인 곳이 상당하다. 경남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소재한, 경남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무진정’도 그러한 정자 중 한 곳이다.

무진은 원래 조삼 선생의 호이다. 무진정은 조삼선생이 후진양성과 남은여생을 보내시기 위하여, 함안면 괴산리 지금의 자리에 직접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를 자신의 호를 따라 ‘무진정(無盡亭)’이라 이름을 하였다. 무진정은 뒤로는 노송들이 자리를 하고 있고, 앞으로는 대밭이 자리하고 있어 한 겨울에도 푸른색을 잃지 않는 정자이기도 하다.


계절이 따로 없는 정자

무진 조삼선생은 조선조 성종 4년인 1473년에 태어나, 성종 20년인 1489년 진사시에 합격을 하였다. 그 후 중종 2년인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 등 경상도 일대에서 부사와 목사를 역임하고, 내직으로 사헌부 집의 겸 춘추관 편수관 등을 지냈다.

이러한 조삼선생이 노후에 후학들을 가르치고, 찾아오는 동료들과 강론을 하고자 지은 정자무진정. 무진정을 찾아갔을 때는 앞으로 조성한 연못의 바닥을 고르기 위해, 몇 대의 중장비들이 연못 안에 들어가 굉음을 내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연못 가운데는 적은 섬을 만들어 ‘영송루’라는 정자를 세우고, 그곳으로 교각을 세워 무진정으로 오를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연못에 걸린 다리를 지나, 잠시 ‘영송루(迎送樓)’를 돌아본다. 말 그대로라면 이곳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보냈다는 뜻이다. 또한 달밤에 휘영청 떠오르는 달을 맞이하고 보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한 영송루를 지나 커다란 고목을 끼고, 돌아 오르는 다리를 마저 건넌다.

‘정말 절경이다’ 감탄이 절로 나와

무진정을 오르는 계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버티고 있다. 예전에야 상당한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오르는 계단 주위로는, 푸른 대가 아직은 찬바람을 맞아 잎이 부딪쳐 바스락거린다. 작은 일각문 하나가 손을 맞이한다. ‘동정문(動靜門)’이라 편액이 걸려있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는 문이란다.




마치 선 문답을 하듯 한참이나 속으로 그 뜻을 되뇌어 본다. 무슨 뜻으로 이런 일각문을 달아놓았을까?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무진정은 건물로 팔작지붕이다. 앞에서 보니 정자 가운데에 방을 드렸는데, 온돌방이 아닌 마루방이다. 주변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고, 정면을 뺀 삼면에는 창호를 달아냈다.

무진정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창호들이다. 삼면의 창호를 모두 열어 위로 올려 달아놓게 되어있다. 어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고 비라도 뿌리는 날이면, 문을 모두 닫아 앞으로 보이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날이 좋으면 모든 창호를 위로 열어. 바람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선생의 심성을 그대로 닮은 정자

정자의 기둥 위에도 아무런 장식이나 조각물이 없다. 축대를 쌓은 돌도 장대석이 아닌 자연적인 돌을 이용하였다. 일반적인 정자들이 보이는 양반가의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조선 전기의 정자 형식을 갖추고 있다. 신발을 벗고 누마루로 올라본다. 조금은 찬바람이 볼을 간질인다.

그러고 보니 정자 가운데 있는 방의 문도 좌우 문을 위로 달아 놓게 되어있다. 참으로 대단한 운치를 지닌 정자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생전 선생의 마음이 모든 사람들을 편하게 하지를 않았을까? 그저 모든 일에 답답함이 없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 화두 하나를 들고 온다. ‘움직임과 고요함이 과연 무엇일꼬?’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위천 가에는 용암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다. 위천을 지나다가 만난 용암정을 찾아 들어가는 길은, 좁은 다리를 지나 농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야만 한다. 얼핏 보면 길이 없는 듯 보이지만, 빙 돌아 들어가는 길이 있다. 처음에는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해, 그냥 지나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자가 냇가에 서 있고, 분위기 역시 괜찮다. 저런 정자라면 십중팔구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정자이다. 지나던 길을 되돌려 안으로 들어가니, 용암정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253호라고 한다. 용암정은 순조 1년인 1801년에 용암 임석형이 위천 가에 처음으로 지었으니, 올해로 210년이 된 정자이다.



사방을 돌아보면 다른 정자가

1864년에 보수 공사를 했다는 용암정은 고색이 찬연한 정자이다. 정자 위에는 방을 한 칸 들이고, 아궁이를 두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정자에는 용암정, 반선헌, 청원문, 황학란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있다. 아마도 풍류를 아는 용암 선생이 사방을 둘러 걸 맞는 이름을 지은 듯하다.

이 정자는 지붕의 끝이 날렵하게 치켜 올려져, 마치 한 마리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듯하다. 누마루 아래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썼으며, 누마루 위에 세운 기둥은 원형으로 다듬어 놓고, 마루방의 기둥은 사각으로 조성하였다. 난간은 간단하게 나무를 듬성듬성 대어, 시원한 느낌이 들게 조성을 하였다.



위천을 보고 시심을 불러일으키다

정자의 뒤편으로는 기암과 어우러진 위천 맑은 물이 흐른다. 누마루 한편에 마련한 한 칸의 방을 중앙에 두고 문을 내었다. 정자 안에 또 하나의 정자가 자리를 잡은 듯한 느낌이다. 격자문으로 짠 문틀 안에 작은 문짝을 달아, 방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을 높인 것도 이 정자의 색다른 멋이다.

정자에는 몇 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정자의 이름을 적은 편액이다. 나무 판에 커다란 글씨로 양각을 한 용암정과, 반선헌 등의 글씨가 제각각 달라 글을 쓴 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 용암정에 오른 뭇 사람들이 이렇게 편액의 글씨를 적어 기념을 하였나 보다.




사방에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둥을 내어 처마 끝을 받치고 있는데, 이는 정자가 지어진 한참 뒤에 세운 듯하다. 이 용암정도 정자를 오르는 계단을 통나무로 찍어내어, 발을 디딜 수 있게 만들었다. 투박한 그 모습에 호화롭지 않은 정자의 모습이, 오히려 기품을 잊지 않은 선비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선생이 용암정에 오른 사연

용암 임석형 선생은 출사를 하지 않았다. 은진사람으로 자는 원경, 호는 용암이다. 함안에 살았으며, 영조 27년인 1751년에 태어나, 순조 16년인 1816년에 세상을 떠났다. 용암정을 짓고 나서 16년 만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16년이란 세월을 용암 선생은 이 용암정에 머물며, 이곳을 찾는 많은 시인묵객들과 교류를 한 것이다.



31책의 용암유집이 전하며, 그의 묘갈은 유만식이 찬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공의 초연한 취미와 락()은 만년의 용암정에서 볼 수 있다. 영호남 선비들이 여기를 지나면서 모두가 원학주인이라 그를 칭송하였다. 탁월한 기량과 의민한 재주를 갖고도 출사하지 못했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정자의 주인인 용암 임석형 선생. 위천 맑은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이곳에 시심을 띠워 보냈던 것일까? 1211일의 찬바람이 용암정으로 몰려온다. 위천 맑은 물이 잔 파문을 일으킨다. 선생이 계셨더라면 시 한 편을 지필묵을 갈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지 않았을까? 그 모습이 그리운 용암정이다.


경남 거칭군 거창읍 상림리 황강 가에 자리한 건계정. 중국 송에서 귀화한 거창 장씨의 시조인 충헌공 장종행의 후손들이 선조를 기리기 위해 1905년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 앞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온통 암반들이 즐비한 곳이다. 이런 절경에 정자를 지은 후손들은 왜 '건계정'이란 쉽지 않은 명칭을 붙인 것일까?


현재 경남 문화재자료 제457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건계정은 중국의 주돈이와 주자 두 선생의 염계와 자양을 본 딴 것이다. 시조인 장종행의 고향이 중국 건주였으므로, 후손이 선조의 고향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면우 곽종석이 붙인 이름이다. 정자 주변은 온통 암반이 자리를 하고 있다. 건계정은 그 암반을 주추로 삼아 자연스럽게 기둥을 세운 정자이다.




뒤편에만 판자벽을 둔 건계정

건계정은 앞으로 보이는 절경을 보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그래서 사방을 모두 개방을 하고, 뒤편 중앙에만 판자벽으로 낮게 막아놓았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된 건계정은 주심포계 겹처마 합각지붕이다. 정자의 밑 부분에 놓인 암반 위에 그대로 정자를 세웠는데, 암반 자체가 주추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누각을 받치고 있는 기둥들의 길이가 다 다르다.

기단과 초석이 없이 암반위에 세운 건계정. 기둥은 모두 원기둥으로 마련을 하였으며, 누각 위는 기둥에 의해 활동에 제한을 받지 않도록 중앙에 기둥을 생략하였다. 누각의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사면을 모두 널빤지 두 장 정도를 덧내어 마루를 외부로 넓혀놓았다. 정자 안에는 1906년 양산 조정희가 지은 '건계정기'를 비롯한 많은 판상시 등의 편액이 걸려있어, 정자의 운치를 더한다.




최고의 흥취를 자랑하는 정자 건계정

선일등정흥미란 계산여차거장안
위관점각풍류갑 재야영협예수관
제조천림당주석 유어취란상음란
면군노력전도진 구인전공일궤난

날을 골라 정자에 오르니 흥취가 안 끝나
산과 강이 이 같으니 이제 어디로 가나?
벼슬을 하려니 점점 풍류가 없어짐을 알겠고
들에 있다고 어찌 만나는 인사를 싫어하랴?
새소리 숲을 지나 술자리에 들리고
물결일자 고기는 물속 난간을 헤엄친다.
그대 힘써 노력하여 앞길로 나아가게
높은 산 온전한 공부는 쉽게 무너지기 어려우이.

군수 이응익이 지은 시이다. 건계정의 풍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정자의 벽면 가득 차있는 많은 편액들. 많은 사람들이 선조의 공을 칭송하고, 주변 경치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지은 글들이다. 이런 절경에 정자를 짓고 앞으로 흐르는 황강의 물소리를 들으며,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은 것일까?



초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오른 건계정에서 떠날 수가 없는 것은, 이런 풍취를 알아가고 있어서일까? 못내 바쁜 답사 일정이 마음에 걸리지만,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싶다. 어느 때 또 이곳을 찾아 저 맑은 물속에 노니는 고기들을 볼 수가 있을까? 아마 이응익 선생의 마음이 지금의 나 같았을까? 바람을 따라 건계정을 나서며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바람 한 점이 누마루를 따라 마른 낙엽을 굴린다.


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349-1에 소재한 상림숲 안에는 ‘함화루’라는 누각이 서있다. 경남유형문화재 제258호인 함화루는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다. 원래 누각의 이름은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는 뜻으로 망악루라 했으나, 1932년에 상림숲 안으로 자리로 옮기면서 함화루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함화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이다. 팔작지붕인 함화루는 이층 내부는 단청으로 칠했으며 난간을 둘렀고, 나무로 된 계단을 설치해 일층으로 통하게 만들었다. 일층에는 기둥에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읍성의 남문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 상림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함양 상림은, 함양읍의 서쪽에 있는 위천 강가에 있는 숲이다. 이 숲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으로 가장 오래 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 선생이 함양읍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는 ‘대관림’이라고 불렀으며 이 숲의 가운데 부분이 홍수로 무너짐에 따라 상림과 하림으로 구분이 되었다.




현재는 상림만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함양상림을 구성하고 있는 식물들로는 갈참나무, 졸참나무 등 참나무 종류와 개서어나무류가 주를 이룬다. 1993년 조사에서는 상림 숲 안에 116종의 식물이 조사되었으며, 현재 20,000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굳게 닫힌 함화루의 계단 위 문

본래 함양읍성에는 동쪽에 제운루, 서쪽에 청상루, 남쪽에 망악루 등 삼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중 남문이었던 이 건물만이 상림숲 안에 자리를 하고 있다. 일제는 이 망악루를 도시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총독부에서 강제로 철거하려고 하자, 1932년에 함양고적 보존회의 대표 노덕영이 사재를 털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상림 안에 자리한 함화루. 옛 정취를 느껴보려고 이층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올려다보니 문이 있다. 그리고 굳게 잠겨있다. 왜 이렇게 잠가놓았을까? 꼭 그래야만 보존이 된다고 생각을 한 것일까? 보물로 지정이 된 누각들도 사람들이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했는데, 가는 곳마다 잠긴 누각이 안타깝다. 영남의 대유학자인 김종직은 망악루를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작년 내 발자취가 멧부리 더럽혔거니
망악루 올라서 다시 보니 무안하구나.
산신령도 내가 다시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흰구름 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망악루 위에서 바라다보는 지리산의 풍광이 아름다웠나 보다. 지리산은 아니라고 해도 상림의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오르려 했던 함화루. 그러나 굳게 닫힌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종직은 구름이 문을 닫았다고 했지만. 나는 오늘 함양군의 관계자들이 굳게 닫아버린 문이, 정말로 마음을 아프게 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