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는 옛 사지인 선림원지에 소재한 네 기의 보물 중 보물 제445호인 석등은 사지 안에 자리한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탑비와 함께 신라 정강왕 원년인 886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선림원은 발굴 당시  출토된 신라 범종에 의해 당시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에  의해 창건된 절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석등은 불을 켜두는 곳인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는 기단과 상,중, 하대석을 놓는다. 위로는 덮개석인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올리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보물 제445호인  이 석등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양식이 팔각형식을 따르면서도. 받침돌의 구성만은 매우 독특하여 눈길을 끈다.


받침돌과 머릿돌에 귀꽃을 장식해

선림원지 석등은 아래받침돌과 머릿돌에 같은 형태의 귀꽃을 장식하고 있다. 받침돌인 지대석은 4매의 네모난 돌을 받쳐놓고 그 위에 팔각의 하대를 올려놓았다. 하대의 각 면에는 안싱을 음각하였으며,그 위의 복련에는 팔각에 앙증맞은 귀꽃이 돌출되어 아름답다. 그 위로는 가운데 받침돌을 기둥처럼 세웠는데, 마치 서 있는 장고와 같이 허리가 잘록해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기둥의 양끝에는 구름무늬띠를 두르고 홀쭉한 가운데에는 꽃송이를 조각한 마디를 둔 후, 이 마디 위아래로 대칭되는 연꽃조각의 띠를 둘렀다. 간석의 아름다움 만으로도 이 석등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석등의 간석과 화사석은 색깔이 달라 보는이로 하여금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후에 파손된 부분을 보수 한 것은 아닌지.


받침돌의 뛰어난 조각과 음각한 안상(아래)

귀꽃이 조형미의 극치

전국에 있는 많은 석등을 보아왔지만 이렇게 팔각으로 조형을 한 석등에 받침돌과 머릿돌에 함께 귀꽃을 장식한 예는 흔하지가 않은 듯하다. 화사석은 사면에 장방형의 화창을 뚫었고, 각 면의 아래에는 작은 공간에 장방형의 액을 마련하고 그 안에 한 구씩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이러한 형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움을 지닌다.


장고통처럼 조성한 간석

화사석을 덮은 몸돌은 팔각의 모서리선이 뚜렷하며, 추녀에는 아래받침돌에서 보았던 같은 모양의 귀꽃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일부가 깨어져 나간 지붕돌의 귀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그나마 남아있다는 인도감 때문인가 보다. 처마의 선은 부드럽게 굴곡을 이루고 있으며, 귀꽃조각과의 만남이 자연스러워 이 석등의 조각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석등의 맨 위에 올린 상륜부는 연꽃이 새겨진 머리장식의 작은 받침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만일 이 파손이 된 귀꽃과 상륜부만 온전하다면, 아마도 국보로 지정이 될만한 걸작이다. 장고통처럼 조형한 간석 상, 하의 권운문이나 상대석에 조각한 겹잎앙련 또한 이 석등이 갖는 아름다움이다.


귀꽃을 장식한 머릿돌과 화시석

신라 시대의 석조미술 품 중에서도 뒤쳐지지 않는 훌륭한 아름다움을 지닌 선림원지 석등. 이러한 소중한 문화유산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우리나라의 뛰어난 예술세계를 느낄 수가 있다.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일부의 문화사대주의자들이 우리 문화를 폄하하는 일만 없다면.

당간이란 절에서 커다란 행사를 할 때 내거는 깃발을 말한다. 대개는 절 앞에 당간을 내 걸게 되며, 이 당간을 거는 지주 대를 ‘당간지주’라고 한다. 당간을 세우는데 필요한 버팀기둥인 당간지주는 돌을 양편에 세우고, 위아래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받쳐주는 빗장을 끼워 당간을 고정시킨다.

전국의 절을 찾아가면 이 당간을 볼 수가 있다. 당간은 대개 나무로 만들어 세우는데, 어느 곳에는 철로 만든 당간이 있는 곳도 있다.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은 당간지주를 세우고, 깃대를 세우는 당간을 철로 만들었다.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에 자리한 용두사지는 고려 광종 13년인 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 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된 절이다.


당간지주 하나에도 불심이 깃들어

남원 만복사지 한편에 동서로 마주하고 있는 이 당간지주는 지주 사이에 세웠던 깃대는 남아있지 않고, 이를 고정시켰던 구멍이 세 군데에 뚫려 있다. 현재 아랫부분과 기단이 땅속에 파묻혀 있어 그 이하의 구조는 알 수 없다. 땅속에 묻힌 것을 감안한다면 이 당간지주의 전체 높이는 5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당간은 커다란 장대석을 거칠게 다듬었으며 별 다른 장식이 없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당간지주의 조성 시기는 고려 전기로 보인다. 당간지주를 살펴보면 거칠게 맞은 돌을 깨낸 흔적이 보인다. 지금처럼 돌을 다루는 공구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망치와 정 만으로 이 당간지주를 다듬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 커다란 석물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단순한 이 당간지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가늠이 간다.



정유재란이 앗아버린 만복사

남원시 왕정동에 자리하고 있는 만복사지. 만복사지는 기린산 아래에 자리한 절로 일설에는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문종 때 세운 것으로 보인다. 더욱 보물 제32호로 지정이 된 이 당간지주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을 보아도 만복사가 고려 문종 때 창건이 되었음을 뒷받침 하고 있다.

당시 이 만복사의 사세는 대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뜰, 썩은 밥배미, 중상골 등의 지명이 있어 당시의 사찰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백뜰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는데, 승려들이 빨래를 널어 이곳이 온통 하얗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고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물 찌꺼기를 처리하는 장소로 승려의 수가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복사지에서 세월을 탓하다.

이렇듯 장엄한 사세를 자랑하던 만복사는 정유재란 시 남원성 싸움 때 소실이 되어버렸다.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를 남겨, 한문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도 당시 만복사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잘 정리가 되어있는 만복사지. 여기저기 전각이 서 있던 터가 도드라지게 자리하고 있고, 주춧돌은 아직도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숙종 4년인 1679년에 남원부사 정동설이 복원을 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방치되었던 만복사. 그 한편에 서 잇는 당간지주를 보면, 아마 이 곳 앞으로 절의 일주문이 있었을 것이다.

옛날 남원8경 중에 <만복사 귀승>이 있다. 시주를 마치고 저녁나절에 만복사로 돌아오는 승려들의 행렬이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아름다운 경치로 꼽았다고 한다. 교룡낙조, 축천모설, 금암어화, 만복사 귀승, 선원모종, 광한추월, 원천폭포, 순강귀범을 팔경 중에 네 번째로 만복사 귀승을 꼽을 정도였다.


세월은 그리도 무심한 것인지. 저녁 무렵 찾아간 만복사지 한편에 자리한 당간지주. 옛날 커다란 돌을 쪼아 이 당간지주를 만든 석공은 어떤 마음으로 이 당간지주를 만들었을까? 눈을 감고 당간의 투박한 표면에 손을 대본다. 행여 당시 석공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으려니 하지만, 무심한 초가을 바람만 손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소중한 문화재 중에서 가장 그 가치가 뛰어나서 지정을 하는 국보, 이 국보와 국보가 만나면 그 아름다움이 과연 배가가 될까? 아마 이렇게 국보와 국보가 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국보의 숫자도 적으려니와, 야외에서 한 자리에 두 점의 국보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구례 화엄사.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인 544년에 인도 스님이신 연기조사가, 대웅상적광전과 해회당을 짓고 화엄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는 3천여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하니,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화엄사 경내에 세워진 국보 각황전과 국보 석등

자장율사로 인해 신라 때 절로 알려져

신라 선덕여왕 14년인 645에 자장율사가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신, 사사자 삼층 사리석탑과 공양탑을 각황전 뒤편에 세웠다.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쳐,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 문무왕 17년인 677년에 의상조사는 2층 4면 7칸의 사상벽에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장육전(지금의 각황전)과 석등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자장율사를 거쳐 원효, 의상 등의 스님들이 화엄사에 중창을 하였으므로, 화엄사가 신라시대 절이라고 하는가보다.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국보 제67호 각황전 터에는 3층의 장륙전이 있었고, 사방의 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숙종 28년인 1702년에, 이층으로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전각의 명칭을 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국보 각황전, 밖에서 보면 2층의 전각이지만, 안으로는 퉁층으로 꾸며져 있다.

각황전 앞에 감히 서질 못하다.

각황전 앞에 서면 사람이 압도당한다.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의 기단석 위에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은 2층 전각이다.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각황전은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이로 매우 화려한 느낌을 준다. 건물 안쪽은 위 아래층이 트인 통층으로 되어있으며, 세분의 여래불과 네 분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일까? 쉬지 않고 예를 올리는 여인에게.

밖에서 보면 이층인 전각으로 꾸며졌으나, 안을 보면 단층이다. 워낙 전각의 규모가 크다보니 중간에 기둥을 세워 받쳐놓았다. 그 안의 공포의 장식 등이 화려하다. 각황전 안을 들여다보면서 그 거대함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각황전 동편 출입구 앞에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다. 누군가 간절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예불을 올린다. 걷기도 더운 날에 저리 온 마음을 다한다면, 여래불과 보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듯하다.

최대의 석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였다.

국보 제12호인 각황전 앞에 세워진 석등은, 전체 높이 6.4m로 한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이다.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이라고도 부른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를 하였다. 통일신라 때인 헌안왕 4년인 860년에서, 경문왕 13년인 873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등. 팔각의 지대석 위 아래받침돌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큼직하게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배가 불룩한 장고 모양의 기둥을 세웠다. 이런 배가 부른 기둥은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한 형태이다.



국보 석등은 아름답다. 기단석과 중간의 장고형 기둥

배가 부른 기둥 위로는 돋을새김을 한 연꽃무늬를 조각한, 위 받침돌을 두어 화사석을 받치도록 하였으며, 팔각으로 이루어진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큼직한 창을 뚫어 놓았다. 팔각의 지붕돌은 귀꽃이 화려하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위로는 머리 장식이 온전하게 남아있어 전체적인 완성미를 더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석등과 국보 각황전. 이 두 점의 국보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말로 형용하기가 힘들다. 어디서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있으려나. 해가 짧아진 오후에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쉽게 떠날 수 없는 것은, 그 모습에 취했음이다. 저녁나절 국보와 국보가 만나며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앞으로도 쉽게 만나지 못할 멋진 모습이다.


화사석에는 네 곳의 창을 내고, 머리 위에는 귀꽃이 아름다운 머릿돌을 올렸다.

절을 찾아가면 대웅전이나 석불, 혹은 부도 탑 앞 등에서 있는 석등을 볼 수가 있다. 이 등은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들을,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깨달음을 주어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석등은 실제로 불을 켜는 경우가 있어 실용적인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후대에 이르러서는 불전이나 탑 등의 앞에 세우는 장식적인 축조물로 변하고 말았다. 석등은 대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하대석과 중간인 석주, 그리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 맨 위에는 지붕돌을 얻는 형태가 석등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논산시 관촉동 254번지 관촉사 경내에 자리한 석등은 보물 제232호로, 고려시대에 조성이 된 석등이다.


거대한 석등 은진미륵과 어우러져

관촉사 미륵보살입상 앞에 서 있는 석등은 그 높이가 5,45m나 되는 거대한 석등이다. 이 석등은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에 있는 석등 다음으로 거대 석등으로 본다. 이 석등은 석조미륵입상이 세워진 해인, 고려 광종 19년인 968년에 조성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이 석등은 4각의 석등으로 화사석이 중심이 되어, 아래에는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이 관촉사 석등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우선 화사석이 2층으로 되어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창이 넓고 기둥이 가늘어 조금은 불안한 감을 주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석등의 평면이 정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고려시대 양식으로, 아래 받침돌과 위 받침돌에 새겨진 굵직한 연꽃무늬가 두터움을 드러내고 있다.





중앙에 둥근 기둥으로 조형을 한 기둥은 굵고 조금은 투박하게 제작이 되었으며, 위아래 양끝에는 두 줄기의 띠를 두르고 중간에는 세 줄기의 띠를 둘렀다. 특히 중간의 세 줄기 중에서 가장 굵게 두른 가운데 띠에는 여덟 송이의 꽃을 조각하여 뛰어난 조각미를 자랑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꽃이 조각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석등으로 제작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귀꽃이 아름다운 지붕돌

화사석이 2층으로 이루어진 관촉사 석등은 화사석 1층에 4개의 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은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는데, 지붕돌의 이랫부분은 다듬지를 않은 듯하다. 각 층의 지붕돌은 처마 끝을 가볍게 올린 듯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큼직하게 귀꽃을 조각하여 생명이 없는 찬 돌에 부드러움을 주었다. 화사석 위에 올린 머릿돌 꼭대기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큼직한 꽃봉오리 모양의 장식을 두었다.




이렇게 거대한 석등을 조각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에 많은 공을 들인 관촉사 석등. 고려 시대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이 석등은 벌써 천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겨 오랜 시간을 풍상을 겪었으면서도, 저리도 장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마 또 앞으로 얼마의 시간을 저리 서 있을지, 오늘 그 석등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옥천리 479번지 작은 사랑이라는 집골목에는, 당간지주 하나가 서있다. 원래 당간지주는 두 개가 한 쌍이지만, 이곳 당간지주는 한 개만이 외롭게 서 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나머지 한 개는 일제강점기에, 당시 일인 경찰서장이 당간지주 중 한 짝을 양평읍 양근리 소재 갈산으로 옮겨, 자기네의 황국신민서사를 새겨 세웠다고 한다. 마을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갈산 일대를 찾아보았으나, 아직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일본으로 가면서 가져갔다고도 이야기들을 한다.

 

아직도 길에 눈이 많이 쌓여있어 미끄럽다. 앙평군의 사나사를 찾아보고, 옥천면에 들려 문화재의 위치를 확인하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두 개의 당간지주가 서 있어야 하는데, 영 찾을 길이 없다. 마침 지나는 마을 분에게 물으니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신다. 원래는 옥천리 논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당간을 보는 순간 화가 치밀어

 

그런데 당간을 보는 순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당간은 현재 양평군 향토유적 재8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런데 안내판 앞에 개를 매어 놓아 안내판이 가려졌다. 안내판 전체를 읽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하나 남은 당간에는 눈이 밑 부분의 원공까지 덮어버렸다. 길을 치우면서 당간에 눈을 쌓아놓은 것이다. 눈을 치우고 나서 원공을 찍으려는데, 묶어놓은 개가 허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이래서야 어디 문화재 답사를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현재 하나뿐인 당간지주도 원래의 간대와 기단은 소멸이 되었단다. 최근에는 시멘트와 석축으로 보수를 해 놓았다고 하는데, 눈이 쌓여 확인할 수가 없다. 옥천리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305cm, 폭 50cm, 두께 36cm 정도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이곳 옥천리와 인근 용천리에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대원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대로라면 이 당간지주는 신라말 고려초에 세운 가치 있는 문화재라는 것이다.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 안내판 개집을 당간과 문화재 안내판 사이에 놓아 안내판을 읽을 수가 없다. 어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소홀한 문화재관리 마음 아파

 

문화재 안내판과 당간지주 사이에 놓인 개집, 그리고 치운 눈을 가득 쌓아올린 당간.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한 개의 당간을 잃어버린 것도 마음이 아픈데, 꼭 이렇게 문화재 옆에다가 개까지 묶어놓아야만 했을까? 새삼 우리 문화재의 현실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문화재이거나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그런 소중한 문화재를 이렇게 홀대하고 있다니. 세상 어느 나라가 이렇게 자신들의 문화재를 함부로 방치하고 있는지, 아마 아무데도 이렇게 방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 원공 당간지주의 가운데 뜷려있는 원공. 당간을 고정시키는데 쓰인다.

▲ 개와 당간 당간의 안내판에는 게집을 놓고, 눈은 당간지주에 쌓아 놓았다.

 

치운 눈을 쌓아놓아, 당간의 지주부분은 확인조차 할 수가 없다. 문화재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딴 곳과는 달리 이곳의 눈부터 치워야함에도 불구하고, 눈을 갖다가 쌓아올린 모습. 마음이 아프다. 우리는 어쩌다가 이렇게 소중한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뒤떨어진 것일까? 추운 날 서둘러 나선 답사 길에서 마음만 아파 돌아온다. (출처 : 오마이뉴스 / 2010,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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