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195-1 쌍봉사에 소재한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 탑비.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인 이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작품은, 몸돌인 비는 사라지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다. 바로 옆에는 국보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철감선사(798∼868)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이다. 헌덕왕 7년인 825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문성왕 9년인 847년에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신라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하기도 하였다. 전국을 다니다가 이곳의 절경에 반해 절을 짓고, 스스로의 호를 따 절 이름을 ‘쌍봉사’라고 지었다. 이곳에서 71세의 나이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철감’이라 내리었다.



몸돌은 어디로 가고...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귀부를 받치고 있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이 탑비에서 특이할 점은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바로 한걸음 앞으로 나갈 듯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귀부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을 볼 수가 없다. 오른쪽 앞발 하나를 위로 살짝 치켜 올려진 모습이, 나그네를 즐겁게 만든다. 입의 양편 입가에는 수염이 나 있고, 입에 문 여의주는 방금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하다.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이 눈에 띠는 작품이다,



몸은 거북이요, 머리는 용두로 조각을 한 귀부의 형태는,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특징적인 조각술이다. 그런 점으로 보아 철감선사 탑비가 이런 용두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용은 사라지고 구름만 채운 이수

철감선사 탑비의 머릿돌은 용조각을 생략한 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다. 아마도 구름무늬만으로 이렇게 조각을 한 이수도 나름대로 특이한 형태이다. 옛 이수들을 보면 용이 거의가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수는 측면에서 보면 앞면을 절단을 한 것처럼 반듯하게 보이고, 뒤로는 삐져나오게 조각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상당히 뛰어난 수작이다. 철감선사 탑비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 거북이의 등에 새겨진 귀갑문도 이중 형태의 6각형 테두리로 새겼다. 마치 기존의 탑비의 형태를 따라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방법으로 탑비를 꾸몄다는 점이다.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에 세워진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격렬한 거북받침돌인 귀부의 조각들은 매우 훌륭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렇게 귀부의 거북이가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 곳은 어디였을까? 부처의 세계였을까? 아니면 선사의 속가 고향인 황해도 봉산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탑비 주의를 돌아본다. 이수 위에 꽂힌 장식 하나가 사라진 것이 영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그래서 답사를 하면서 받는 마음의 상처는 하루도 가실 날이 없는가 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산195-1 번지에 소재한 쌍봉사. 쌍봉사에서 좌측으로 산길을 조금 오르면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이 철감선사탑은 철감선사의 부도탑이다. 부도란 옛 고승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을 말한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당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신라 문성왕 9년인 847년에는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다. 경문왕대 때에 이 곳 화순의 아름다운 경치에 끌려 절을 지었는데, 절 이름을 그의 호인 ‘쌍봉’을 따서 ‘쌍봉사’라고 이름 하였다. 경문왕 8년인 868년에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경문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국보 제57호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조각예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뛰어난 조각술이 돋보이는 철감선사탑

8월 21일에 쌍봉사를 찾았으니,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화순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찾아간 쌍봉사. 쌍봉사는 고찰답게 많은 문화재들이 경내에 소재한다. 철감선사탑이 있다는 곳으로 오른다. 주변을 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탑 옆에는, 보물 제170호인 비문이 사라진 탑비도 함께 있다. 담이 터진 입구 쪽으로는 탑이 서 있고, 그 안쪽에 탑비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때의 일반적인 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탑은 전체적으로 모두 남아있으나, 아쉬운 것은 꼭대기의 상륜부인 머리장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철감선사탑은 기단이 상중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단부의 장식이 화려한데 그 중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화려하다.





하층기단인 밑돌은 2단으로 조성했는데 8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이 사자들은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탑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의 아래는 조금 넓게 조성을 해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마치 사자들이 구름위에 앉은 모습을 표현하였다.

조각한 장인의 염원이 담긴 탑

상층의 윗돌 역시 2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아래에는 커다란 앙화를 조각해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새겼다. 이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 비천상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몸돌에는 사천왕상과 함께 비천상까지 돋을새감으로 조각하였다(위) 천상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몸돌의 조각은 사천왕상을 조각하는 것에 비해, 철감선사탑은 비천상까지 함께 새겨져 더욱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뛰어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감선사탑을 조성한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쯤으로 추정된다. 상륜부가 사라져 아쉽기는 하지만, 조각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다듬은 장인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작품이다. 아마도 이 탑을 조성한 장인은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비천인이나 가릉빈가들이 살고 있다는 극락을 염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8마리의 사자들은 각각 자세를 달리해 앞을 주시하고 있다. 탑을 지키기 위한 것일까?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평가를 받고 있는 철감선사탑. 그곳을 떠나기 아쉬운 것은 언제 또 다시 이런 아름다운 탑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다

경남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1659번지에 소재한, 신라 때의 절터로 추정되는 사적으로 지정된 영암사지. 비가 내리는 지난 8월 20일 찾아간 영암사지는, 정말 사지 중의 최고였다는 기억이다. 우선 주변 경관이 뛰어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엄청난 넓이의 전각 터를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영암사지의 맨 위쪽이 자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법당터. 그곳에는 보물 제489호로 지정이 된, 합천 영암사지 귀부가 자리하고 있다. 동서로 나누어 자리하고 있는 이 귀부 2기는, 영암사 터 내의 법당터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한 기씩이 자리하고 있다. 영암사의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전성기 때의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어 그 즈음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와 머릿돌은 사라지고 받침인 귀부만 남아

원래 비는 받침돌인 귀부와 몸돌인 비석, 그리고 머릿돌인 이수가 위에 얹혀 있다. 그러나 현재 영암사지 법당 터에는 받침돌인 귀부만 양편에 남아있다. 양편에 남아있는 귀부는 기단의 형태가 달라, 동시대에 세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얼마간의 사이를 두고 세운 것으로 보인다.

법당 터 앞에는 석등인 듯한 석물이 있다. 받침과 간주석만 있는 이 석물은 간주석, 중간이 잘려져 있다. 숱한 세월을 지내오면서 많은 아픔을 당한 증거이다. 영암사가 언제 창건이 되었는지, 언제 소멸이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만 터에서 발굴되는 많은 석조물들이 신라 때의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때 창건이 된 절로만 추정하고 있다.



동서편의 귀부가 각각 특징을 지녀

석등인 듯한 석조물의 뒤편으로는 석축으로 쌓은 기단이 있고, 계단이 일부 남아있다. 동쪽의 귀부는 거북의 등 무늬가 6각형이며, 비의 몸돌인 비석을 괴는 네모난 비좌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통일신라부터 고려조로 넘어가면서 보이는 귀부의 특징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 비석은 통일신라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쪽에 놓인 귀부 역시, 6각형의 등 무늬인 귀갑문을 배열하였다.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4면에 안상을 새겨 넣고,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서쪽의 귀부는 동쪽의 귀부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졌다. 동쪽의 귀부는 조금 크며 귀갑문을 새긴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는 귀부를 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누구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두 개의 귀부만 남아있는 영암사지 귀부, 도대체 그 비에는 어떤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누구의 비였는지 궁금하다. 영암사지 귀부 2기는 각 부 양식이나 주위의 석조유물 등과 관련지어 볼 때, 9세기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조에 걸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이 된다. 동쪽의 귀부가 시기적으로 조금 이른 듯이 보이는 영암사지 귀부. 그 비문에 적힌 내용이 궁금하다. 말없는 귀부는 눈만 부라리고 있을 뿐이고.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에는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 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해인사 홈페이지)



해인사 경내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비

위와 같이 해인사의 창건내력을 적고 있다. 해인사에는 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하여 70여점의 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해인사 경내를 들어서기 전 좌측으로 보면 탑을 비롯하여 많은 비들이 서 있다. 그 끝에 보면 비각이 하나 보인다. 이 비각에는 <원경왕사비>라고 현판이 붙어있다.

보물 제128호인 원경왕사비는, 고려시대의 왕사인 원경왕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원래는 반야사의 옛터에 있었던 것을, 1961년에 해인사 경내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비는 신라시대의 비와는 달리 거북받침돌과 비몸, 지붕돌을 갖추고 있는데, 각 부분이 얇고 단출한 것이 특색이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경왕사는 대각국사를 따라 송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숙종 9년인 1104년에 승통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예종의 스승이기도 한 원경왕사는 귀법사에 머물다 입적하자, 왕은 ‘원경’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 인종 3년인 1125년에 조성한 이 비는, 비문은 김부일이 짓고 글씨는 이원부가 썼다.

고려시대의 비의 특징을 보이는 원경왕사비

이 비를 보면 조각기법이나 간단한 형태의 지붕돌 등에서, 고려 중기에 나타나는 비의 특징을 잘 보이고 있다. 비받침을 보면 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머리가 용을 형상화 한다. 화려한 용의 머리로 조각을 한 초기의 작품에 비해, 원경왕사비의 귀두는 지극히 단조로운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 받침인 귀부에는 귀갑문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으며, 비를 세운 연결부분 양편에는 卍자 두 개를 겹쳐 조각을 하였다. 거북이의 발 등도 힘차고 날카로운 초기의 거북이에 비해, 뭉툭하게 조각이 되었다. 귀갑문 역시 초기의 것들이 작고 섬세한 것에 비해, 크고 조금은 둔하게 보인다.



귀두의 조각 역시 단조롭다. 원경왕사비는 전체적으로 초기의 비 밭침에 비해, 많이 약소화 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비는 오석으로 얇게 조성이 되었으며, 가장자리 부분이 많이 훼손이 되었다.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 해인사.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여름에 만난 원경왕사비. 그 많은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에 소재한 봉암사 경내, 대웅보전 곁에는 전각이 하나 서 있다. 최근에 새로 지은 듯한 이 전각 안에는 국보 재315호 지증대사탑비와, 보물 제137호인 지증대사탑이 자리를 하고 있다. 지증대사(824∼882)는 이 절을 창건한 승려로, 17세에 승려가 되어 헌강왕 7년인 881년에 왕사로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봉암사로 돌아와 이듬해인 882년에 입적하였다.

은 ‘지증’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적조’라 하도록 하였다. 탑의 명칭을 ‘지증대사 적조탑’이라 부르는 이 탑은 사리를 넣어두는 탑신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에는 이를 받쳐주는 기단부를 두고,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온전한 지붕돌의 섬세한 꾸밈

8각으로 꾸며진 지붕돌은 아래에 서까래를 두 겹으로 표현한, 겹처마 지붕으로 아름답다. 서까래까지 세세하게 표현을 한 지붕돌의 처마는 살짝 들려 있다. 낙수면의 각 모서리 선은 굵직하고, 끝에는 귀꽃이 알맞게 돌출되어 있다. 지붕돌 꼭대기에는 연꽃받침 위로 머리장식이 차례로 얹혀 있다. 지붕돌의 일부분이 부서져 있으나, 각 부분의 꾸밈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품격이 남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다. 앞뒤의 양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아마도 이 탑이 지증대사의 사리를 보관한 탑이기 때문에 이런 장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킨다는 사천왕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조각들이 지증대사 탑의 전체에 고르게 표현이 되어있다. 전국에 수많은 사리탑을 둘러보았지만, 이처럼 화려하게 장식을 한 탑은 그리 흔치가 않다. 위서부터 아래 기단까지 고르게 조각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많은 조각이 어우러진 탑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으로 꾸며졌다. 밑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위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금방이라도 탑이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 윗단에는 각 모서리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사이에 천상의 새라는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무릎을 굽힌 천인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공양을 드리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 조각은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꾸며져 탑의 조형이 남다름을 알 수가 있다.

정녕 사람이 만든 탑일까?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고이기 위한 고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한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으로 비례가 잘 어울리는 지증대사 적조탑. 안정감이 있게 조형이 된 탑의 옆에 세워진 비문의 기록으로 보아, 통일신라 헌강왕 9년인 883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는 문경 봉암사. 선방에서 수행 중인 스님들께 자장을 해 드리기 위해 7월 6일에 찾아간 봉 옛 고찰. 그곳에서 만난 지증대사탑의 모습은 한참이나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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